165. 꿈을 그리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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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꿈을 그리다 (2)
2022.02.18.
계획은 간단했다.
우선 6월에 있을 현대문학연구학회 학술대회를 준비해야 한다. 이번에는 발표자가 아니라 토론자로 나선다. 서강일과의 재대결은 이미 작년 겨울에 결정된 일이다.
‘아마 강일이는 마감일보다 일찍 논문을 보낼 거야. 내가 작년에 그랬으니까.’
학문적 경쟁심이 출중한 친구였다. 반드시 자신이 그랬던 것 이상으로 논문을 일찍 보낼 것이다. 능력을 입증하려는 듯이.
‘1910년대 과학소설의 수용에 대한 연구였지. 그쪽 분야는 자료가 많지 않은데…… 미리 레퍼런스 좀 찾아봐야겠다.’
서강일은 예전부터 프랑스 작가인 쥘 베른 소설의 수용사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소설이 주로 번역된 1910년대에 관심을 두게 됐다. 쥘 베른의 명작 <해저 2만리>와 <인도 왕비의 유산>이 그 시기에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센트럴 북스 프로젝트. 학회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로 했으니까 시기가 딱 맞아. 마침 이경훈 교수님 프로젝트도 끝났고.’
미국에서의 마지막 날, 제임스는 약속대로 센트럴 북스의 직원 하나를 데리고 다시 숙소를 찾았다. 자신을 알렉산더 콕스라고 소개한 남자는 민우를 수행할 비서의 프로필과 업무 프로세스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두 시간 동안.
민우는 센트럴 북스라는 기업의 규모에 놀랐고, 합리적인 업무 프로세스에 다시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내가 신경 쓸 일은 번역뿐이야. 나머지는 레아 씨가 맡아서 처리해 주기로 했으니까. 굳이 지음사에 왔다 갔다 할 필요도 없겠지.’
마지막으로 석사학위 논문이 남았다. 참 많은 일이 있었던 석사과정이 다음 학기로 모두 끝나게 된다. 논문이 통과된다는 가정하에.
‘인문과학총서는 장기 프로젝트지만 학위논문은 지금 당장 중요한 일이지. 10월 말에 심사를 신청하려면 2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뼈대를 완성해 놔야겠어.’
논문 테마는 민우의 관심사에서 살짝 벗어난, 1930년대 농민소설로 잡혔다. 민영환 교수의 입김 때문이었다.
그래도 민우는 자신 있었다.
지금까지 KCI급 학술지에 논문을 두 편 실었다. 게다가 이번 IAHS 학회를 경험하며 견문을 넓혔다. 석사 논문 정도는 가볍게 쓸 자신이 있었다.
“좋은 계획이야. 상당히 알찬 느낌인데?”
민우의 설명을 들은 서지훈 교수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대로 일이 풀리면 내년에 바로 박사과정 들어오고, 상아대로 출강하면 되겠군.”
“내년에 바로요?”
“안 될 거 뭐 있어? 내가 잘 찔러줄 테니까 준비해 놔라. 대전까지 왔다 갔다 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그건 배부른 걱정이겠지.”
“알겠습니다.”
민우는 당당히 대답했다.
서지훈 교수는 커피를 한 모금 홀짝였다. 평소라면 긴장하거나 겸손을 부렸을 것이다. 하지만 민우는 달라졌다. 큰 계약이 그를 더욱 성장시킨 것이다.
그 생각에 미치자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런데 센트럴 북스 프로젝트 말이다. 비서는 누가 하기로 했어? 늘씬하고 이쁜 금발의 여비서를 붙여줘야 업무 능률이 오를 텐데 말이다.”
농담이었는데, 민우는 그것을 진담으로 받아들였다. 미국에 있을 때 제임스가 똑같은 농담을 던졌었다. 알렉산더에게 곧장 잔소리를 듣긴 했지만.
민우도 커피잔을 들었다.
“제임스 씨의 설명으로는 그렇다고 들었어요.”
“뭐?”
“금발의 미녀라던데요. 혼혈이라고. 한국어도 잘한대요. 조만간 만나기로 했는데 어떨지는 모르겠어요. 목소리는 예쁘더라고요.”
“이수빈 선생 긴장 좀 해야겠는데?”
사제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자연스레 민우는 미국에서 있었던 여러 일화를 서지훈 교수에게 들려주었다. 서지훈 교수는 호응도 하고 구박도 하면서 이야기를 들었다. 특히 예일대의 스톤 교수와 있었던 일을 듣고는 배를 잡고 웃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덧 두 사람의 잔이 바닥을 보였다. 민우가 시계를 바라보았다.
“선생님. 저 이만 가봐야겠어요. 오늘 예린이 단행본 계약하는 날이라서요.”
“아, 그렇지. 잘하고 와라. 그런데 진짜 번역까지 해 줄 생각이냐? 녀석 완전 기대하고 있던데.”
“마침 줄을 하나 잡았으니 잘 이용해 봐야죠.”
“줄? 아아.”
민우가 말한 줄은 센트럴 북스였다. 판권 계약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는 어렵지만, 원고를 검토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다.
서지훈 교수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한영번역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거냐? 번역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안 하는군. 박민우 많이 컸네. 컸어. 아무튼, 이제 가 봐.”
“옙. 내일 뵙겠습니다.”
민우는 꾸벅 인사하고 연구실을 나섰다.
우선 307호에 들러 책을 사물함에 정리하고 인문관을 나섰다. 주예린이 입구에서 민우가 오기만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선배님 오셨습니까.”
주예린이 90도로 허리를 굽혔다. 민우는 한숨을 내쉬며 앞서 걸었다.
“오버하지 말고 빨리 가자.”
“예이.”
주예린이 잽싸게 민우의 옆에 따라붙었다.
그때 문자가 왔다. 이유리 편집자였다. 지금 명인대입구에 도착해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단다. 이어 약도가 하나 왔는데, 민우도 몇 번 가본 곳이라 대강 확인하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마침 버스가 와 차례로 올라탔다. 그리고 맨 뒤쪽에 있는 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소감은 어때?”
“아무렇지도 않을 줄 알았는데 좀 떨리네요.”
“단행본 계약은 처음이지? 전에 냈던 건 수상집이었으니까.”
“그렇……죠.”
수상집이라는 한마디에 미소가 사라졌다. 예린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잠시 잊고 있었던 과거의 상처가 떠오른 것이다.
버스가 명인대입구역에 가까워질수록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의 얼굴을 한 번 훑은 민우가 지나가듯 말했다.
“한수영 선생님은 신경 쓰지 마. 이미 끝난 일인데 계속 붙들고 있어서 뭐 해?”
“하지만 한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큰산대학문학상에서 입상을 하지 못했을 거예요. 글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을 거고.”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왜 남의 시선에 신경을 써? 자기 갈 길 막으려는 사람까지 배려해줄 정도로 현실이 그렇게 녹록지는 않아. 보란 듯이 성공해서 네가 옳았다는 걸 증명하면 되는 일이야. 간단하지.”
“그래도…….”
민우의 시선은 여전히 창밖을 향해 있었다. 주예린이 뭐라고 반론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꾹 다물었다. 대신 한숨 섞인 웃음이 나왔다.
“아재 같다. 정말.”
“하하하. 그러게. 나 아직 서른도 안 됐는데 인생 다 산 사람처럼 이야기했네.”
“대학원이 사람 하나 버렸군요.”
“사람으로 생각해 주고 있어서 다행인데?”
민우가 웃었다. 그녀도 따라 웃긴 했지만 마음의 짐을 완전히 내려놓지는 못했다. 비 오던 그날의 상처는 아마 평생 씻지 못할지도 모른다.
<세계수>를 출판한다면 어떻게 될까. 바로 한수영 교수에게 전화가 와서 비난을 듣겠지. 그런 걱정이 주예린을 소극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핸드폰을 꺼낸 민우가 농담조로 말했다.
“책 내기 껄끄러우면 얘기해. 계약 물리게. 전화 한 통이면 되거든?”
“당근 안 되죠!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그럼 뒤돌아보지 말고 쭉 가. 앞만 보고 달리기에도 부족하더라. 시간도, 노력도.”
민우는 굳이 자신이 명인대에 들어와서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말하진 않았다. 이미 그녀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 이번 정류장은 명인대입구역입니다. 다음 정류장은…….
안내방송이 나오자 민우는 벨을 눌렀다. 곧 버스가 멈추고 두 사람이 내렸다. 약속장소인 카페에 가기까지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민우가 카페에 도착해 문을 열려는 그때, 주예린이 뒤에서 옷자락을 잡았다. 민우가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돌아섰다.
“후회하면 어떡하죠?”
“후회를 기회로 만들어 봐. 네 실력으로. 너 글빨 쩔잖아.”
“그래도 실패하면?”
“사람이 하는 일인데 당연히 실패할 수도 있겠지.”
“무책임한 말이잖아요.”
밑도 끝도 없는 투정이었다.
하지만 민우는 흘려듣지 않았다. 그녀의 입장이었다면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을까. 짧은 순간이었지만 치열하게 생각했다. 후배를 위해서.
좋은 생각이 떠오른 민우가 핸드폰을 꺼냈다.
평소에 하던 폰 게임을 실행시켰다. 몇 번 건성으로 터치를 하니 캐릭터가 함정에 빠져 게임이 끝났다. 그때 민우가 말했다.
“너 게임 오버라는 말 아냐?”
“끝났다는 거잖아요. 게임이.”
“그렇지. 하지만 관점을 조금 옮기면 전혀 다른 의미가 되더라고.”
주예린이 궁금한 눈으로 민우를 바라보았다. 곧 민우가 핸드폰을 돌려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게임 오버라는 글자가 선명히 떠 있었다.
“게임 오버는 말이다. 그 게임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해. 이렇게.”
민우가 다시 시작하기 버튼을 눌렀다. 캐릭터가 처음부터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단순한 반복이었지만 주예린은 그 행동에 담긴 함의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그녀의 커다란 두 눈이 살짝 떨렸다.
“걱정하지 마. 얼마든지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 너 젊잖아. 뭐가 문제야?”
“선배.”
“일단 가보자. 그리고 뭐가 있는지 확인해 보자고. 두 눈으로. 오케이?”
문을 연 민우가 안으로 손짓했다. 잠시 머뭇거린 예린을 움직이게 한 것은 그의 자신만만한 미소였다.
딸랑―
“민우 씨!”
한옆에 앉아 있던 현기혁 팀장과 이유리가 일어나서 그들을 맞았다. 민우는 긴장한 예린에게 두 사람을 소개해 주었다.
그리고 그날, 주예린의 장편소설 <세계수>의 계약이 성사되었다.
‘이제 슬슬 다음 일을 진행해 봐야지?’
집으로 돌아온 민우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파일 하나를 실행시키고, 인쇄를 걸었다. 제목은 < World Tree >. <세계수>의 영어번역본이었다.
* * *
다음 날, 약속대로 민우의 자취방 앞에 흰색 승용차 한 대가 멈춰 섰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곧 운전석에서 레몬빛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어떤 여자가 내려섰다. 혼혈이었는데, 새하얀 피부와 눈매가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곧 그녀가 민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매니저님. 도착했습니다. 나오시면 됩니다.”
전화가 끊기자마자 민우가 문을 열고 나왔다. 민우는 깜짝 놀랐다.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미인이었다. 과연 제임스는 허풍만 떠는 사람은 아니었다.
“매니저님.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지요?”
레아가 사무적으로 물었다. 하지만 민우를 바라보는 두 눈엔 존경심이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반가워요. 레아 씨. 박민우입니다.”
“제임스 편집장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큰 프로젝트에 함께 할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 영광이네요.”
그녀가 공손히 인사했다. 한국말까지 완벽했다. 새삼스레 센트럴 북스의 위대함이 피부로 느껴졌다.
민우는 시간을 한번 확인했다.
“일단 출발하죠. 오후 수업에 늦지 않으려면 지금 가야 해서요.”
“목적지가 라온북스였죠? 일산에 있는.”
“맞습니다.”
“타시죠.”
민우는 뒷좌석에 가방을 내려놓고 조수석에 탔다. 레아가 이상하다는 듯 민우를 바라보았지만, 곧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
레아가 먼저 말했다.
“앞으로 매니저님의 모든 스케줄과 번역 프로세스, 그리고 지음사 쪽과의 협력업무를 담당하게 됐습니다. 부탁하실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제 일이니까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되고요.”
“예. 그런데 레아 씨는 어디 사무실에 있나요? 센트럴 북스의 한국지사가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거든요. 혹시 지음사에 출근하나요?”
“센트럴 북스의 모기업인 애틀레틱 유니버설 계열 사무실에 출근하고 있어요. 물론 집에서 업무를 볼 때도 많습니다.”
“아, 그렇군요. 모기업.”
민우는 이번에 계약을 체결하며 센트럴 북스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 세계적인 출판사지만, 모기업인 애틀레틱 유니버설만큼은 아니었다.
애틀레틱 유니버설에는 이름 있는 회사들이 모여 있다. 영화와 만화는 물론 게임 제작과 출판을 전문으로 하는 기업 등 다양했다.
세계 최고의 미디어 그룹으로 평가받는 것이 바로 애틀레틱 유니버설이다. <더 위자드>가 빠르게 영화로 제작될 수 있었던 것도 모기업의 영향이 컸다.
‘예린이 소설도 센트럴 북스와 계약을 할 수 있다면 잘 풀릴 텐데.’
민우는 현기혁 팀장의 톡 창을 열었다. 지금 출발했고, 50분쯤 뒤에 도착한다고 글을 남겼다. 어느새 차는 자유로를 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