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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꿈을 그리다 (1) (164/500)


164. 꿈을 그리다 (1)
2022.02.17.


「일단 제가 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게 중요할 거 같네요. 가능하다면 원고를 좀 볼 수 있을까요?」

마음 같아서는 바로 하겠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조건은 분명 좋을 것이다. 센트럴 북스는 세계적인 출판사였고, 인문과학총서는 그가 말했듯 대단히 특별한 프로젝트였으니까.

하지만 민우는 과욕을 경계했다. 그 전에 자신이 그 원고를 번역할 능력이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부터 판단하는 게 우선이었다.

「얼마든지요.」

제임스가 쿨하게 가방을 열었다.

그는 철저했다. 마치 민우의 요구를 예상했다는 듯 미리 1부 1권 원고를 인쇄해 왔다. 그것을 가방에서 꺼내 민우에게 건넸다.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충분히 보세요. 난 신경 쓰지 마시고.」

다리를 꼰 제임스는 IAHS에서 구해 온 책자를 펼치더니 독서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민우는 원고에 집중했다. 1권의 첫머리를 장식한 것은 인문학의 정수인 철학이었다.

‘이건…….’

조금, 아니 대단히 놀라운 경험이었다.

학술서인데도 불구하고 술술 읽혔다. 안경을 쓰지 않았는데도 의미가 명확했다. 삼 분의 일 정도를 읽고 나서야 민우는 그 이유를 깨달았다.

‘내 능력 때문이 아니야. 애초에 읽기 쉽게 쓰였어. 직관적으로. 정말 멋진 책이다! 어떻게 이렇게 어려운 개념을 쉽게 풀어 쓸 수 있는 거지?’

웬만한 내공으로는 불가능한 기술이었다. 민우는 감탄을 이어가며 책에 빠져들었다.

어느덧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했다. 가제본된 책을 덮은 민우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긍정적인 의미의 한숨인가요?」

제임스가 꼬았던 다리를 풀며 민우에게 물었다. 민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하네요. 철학적 개념을 이렇게 쉽게 풀어쓸 수 있을지 몰랐습니다. 물론 깊게 들어간다면 이야기는 좀 달라지겠지만…… 여튼 굉장히 쉽게 읽혔네요.」

「괜히 회사에서 ‘세기의 프로젝트’란 별명으로 불리는 게 아닙니다. 공을 많이 들였죠. 자문도 많이 받았고.」

민우는 가제본 된 책을 돌려주었다. 제임스가 듣고 싶어 하던 대답과 함께.

「이 정도라면 제가 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죠. 그럼 바로 계약하실까요?」

「벌써요?」

제임스는 바로 계약서를 꺼내 민우에게 건넸다. 꽤 두꺼웠다. 한눈에 봐도 일반적인 계약서는 아니었다.

처음 몇 페이지를 훑어본 민우는 몇몇 조항을 살펴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일단 계약금이 지나치게 많았고, 콘텐츠 이용에 대한 인센티브 항목도 눈에 띄었다.

「계약금이 5만 달러에 콘텐츠 이용에 대한 조항이 있네요. 좀…… 이상한데요?」

「이해합니다. 간단하게 설명해 드리면 이건 일반 번역 계약이 아니라 프로젝트 계약이라서 그렇습니다.」

계약서를 넘겨보던 민우의 손이 멈칫했다. 프로젝트 계약? 제임스가 여유롭게 웃으며 계속 설명했다.

「인문과학총서는 단순히 종이책으로만 출판되는 것으로 끝나진 않을 겁니다. 민우 씨도 잘 아는 사업에 기본 소스로 공급이 될 예정이죠. 즉, 번역된 텍스트가 콘텐츠로도 이용이 된다는 말입니다.」

「잠깐만요. 제가 잘 아는 사업이라니요?」

「아직 감이 안 오셨나요? 그럼 알려드리죠. 지음사의 오픈 라이브러리.」

「아!」

그제야 머릿속에서 잃어버린 퍼즐이 하나씩 맞춰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까 말씀하신 지음사와 이야기 중이라는 건 단순히 출판 때문이 아니라 오픈 라이브러리도 끼어 있었던 거군요?」

「정확히 보셨습니다. 승현은 믿을 수 있는 비즈니스 파트너니까.」

손가락을 딱 튕긴 제임스가 이어 말했다.

「한국에 들렀을 때 승현에게 들었습니다. 오픈 라이브러리 프로젝트를 기적적으로 회생시킨 주인공이 바로 민우 씨라고. 당신이 씨를 뿌렸다면 수확도 마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전…….」

민우는 말을 잇지 못했다.

겸손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문학 공모전을 통해 오픈 라이브러리를 회생시키고, 스스로의 선택과 노력으로 여기까지 올라왔다.

‘지금 필요한 건 자신감이야. 이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의지와 노력.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다!’

왠지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자신의 인생이 조금 더 바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씨익 웃은 제임스가 품에서 고급스러운 펜을 꺼냈다. 뚜껑을 열고 민우에게 건넸다.

「하나 덧붙이죠. 민우 씨는 번역가가 아니라 센트럴 북스의 프로젝트 매니저 자격으로 일을 하게 될 겁니다. 개인 차량과 비서가 제공될 거고…….」

「네? 차에 비서까지요?」

「하하하. 반응이 신선하군요. 센트럴 북스의 프로젝트 매니저들은 모두 개인 비서를 두고 있습니다.」

「아, 그건 몰랐습니다.」

제임스는 별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직접 지음사와 커뮤니케이션하는 것보다 비서를 통해 하는 게 더 편할 겁니다. 우리 회사에도 주기적으로 보고가 들어와야 하니까 여러모로 편할 수 있지요. 공부도 많이 하셔야 할 시기 아닙니까?」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중간에서 일을 정리해 줄 사람이 있다면 편하긴 할 것이다. 그것을 회사에서 처리해 준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제임스가 덧붙였다.

「업무와 관련된 요청 사항은 대부분 수용해 드릴 생각입니다. 필요하면 어시스턴트를 몇 명 둬도 괜찮습니다. 그것도 비서를 통해서 해 주시면 되겠군요.」

「그건 차차 생각해 보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서명을.」

그제야 민우는 펜을 받아들었다. 구름 위에 떠 있는 듯한 묘한 기분에 휩싸인 채 서명을 시작했다.

그 와중에 제임스의 설명은 계속되고 있었다.

「향후 오픈 라이브러리 시스템을 개량해서 서비스 영역을 전 세계로 확장시킬 계획입니다. 구굴 아시죠? 그쪽과도 이야기가 되고 있지요. 이번 프로젝트의 첫걸음을 한국에서 떼게 됐는데…… 이건 저에게도, 회사에게도, 그리고 민우 씨에게도 큰 의미가 있는 계약일 겁니다.」

그러는 사이에 서명이 끝났다.

민우는 한동안 계약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다만 이것이 꿈이 아니기만을 바라면서. 제임스는 계약서를 한 부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민우 씨. 우리와 함께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아뇨. 제가 더 감사하죠.」

깜짝 놀란 민우가 펜을 제임스에게 돌려주었다. 그는 한국식으로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밤중에 실례 많았습니다. 출국하기 전에 담당 직원과 다시 들르지요. 세부 스케줄 조율이 필요할 테니까. 출국이 토요일 오전이지요?」

「맞습니다. 연락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좋은 밤 보내시길.」

제임스를 문밖까지 배웅하고 침대로 돌아온 민우는 핸드폰을 꺼냈다. 이렇게 큰 계약을 해냈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민우는 곧장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핸드폰 너머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그래. 우리 아들! 밥은 잘 먹고 있어?」

왠지 코끝이 찡해져서 쉽게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민우는 웃었다. 계약금과 인센티브를 수령하게 되면 어머니를 서울로 모셔올 수 있다. 무엇보다도 꿈에 그리던 일이었다.

* * *

IAHS에서 준비한 행사가 모두 끝났다. 3일간 민우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진귀한 경험을 했다.

학회 둘째 날 셀린느가 학회장에 나타난 것은 조금 의외였다. 그녀는 여전히 무기력해 보였지만, 포스터 세션을 돌며 여러 사람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 장면을 본 미셸은 기적 같은 일이라고 평가했다. 민우는 그저 웃기만 했다. 베데스다 분수 앞에서 했던 이야기들이 그녀에게 도움이 된 것 같아서 기뻤다.

만약 또다시 만날 일이 있다면, 그때는 청설모와 놀 때처럼 상냥한 미소를 지어줄지도 모를 일이다.

「언제 또 뵙죠?」

돌아선 민우는 아쉬운 표정이었다. 랑느 박사와 미셸은 공항까지 배웅을 나왔다.

「기회가 있다면 또 보겠지.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게. 우리는 특별한 인연으로 이어져 있으니까.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겠지?」

「물론이죠!」

랑느 박사가 민우의 어깨를 다독였다. 제자가 아니라 손자를 보내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곁에 있던 미셸이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민우! 다음에 꼭 한국 갈 거니까 그때 한국어 가르쳐 줘요. 알았죠?」

「오기나 해요. 삼시 세끼 맛있는 거 먹여줄 테니까.」

「와우. 벌써부터 기대되는데요? 아 참. 셀린느가 이거 전해주라고 했는데.」

미셸이 주머니를 뒤적였다. 곧 곱게 접힌 쪽지 하나가 민우의 손에 쥐어졌다.

민우는 즉시 쪽지를 펴 보았다. 짧은 문장 두 개가 적혀 있었다. 프랑스어로.

― 민우 씨의 말이 맞았어요. 수도꼭지를 트는 건 내 몫이었어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에 나오는 대사를 살짝 비튼 말이었다. 이제는 안심해도 될 것 같다. 쪽지를 품에 넣은 민우가 말했다.

「돌아가면 셀린느에게 고맙다고 전해줘요.」

「어? 무슨 내용인데요? 설마…… 고백? 고작 일주일 사이에 눈 맞은 겁니까?」

「쪽지 안 펴 봤어요?」

「당연하죠. 프라이버시인데.」

「하하하. 미셸이 생각하는 그런 시시한 내용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요.」

그때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이제는 정말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민우는 두 사람과 다시 포옹하고 게이트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민우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게이트를 나섰다. 정말 긴 비행이었다. 시차고 뭐고 빨리 들어가서 쉬고 싶었다.

공항 밖은 컴컴했다. 한국은 지금 새벽 세 시였다.

‘시간이 애매하네. 두 시간 정도 버티다 리무진 버스 타고 가는 게 낫겠다.’

바로 그때였다.

“선배애애!”

민우는 흠칫 놀랐다. 들릴 리가 없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잘못 들었나 싶었는데, 주예린이 후다닥 달려왔다.

“힘드시죠? 선배님. 하나 주세요. 제가 들겠습니다!”

“야, 너 뭐야? 이 시간에.”

<세계수>의 출판이 확정돼서 잘 보이려는 건 이해를 하겠는데, 새벽 시간에 공항에 나타났다는 건 여전히 이해가 안 갔다.

“이게 꿈은 아닐 테고…….”

“오빠!”

이번엔 반가운 목소리였다.

고개를 드니 저 멀리 이수빈이 손을 흔들고 있다. 이제야 꿈이 아니라 한국에 도착했다는 실감이 났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민우는 캐리어 하나를 주예린에게 맡기고 그녀가 있는 곳으로 뛰었다.

“잘 다녀왔어요?”

“보다시피.”

민우는 수빈을 와락 껴안았다. 은은한 향기에 취해 이대로 잠들고 싶었다.

수빈이 물었다.

“학회는 어땠어?”

“최고였지. 한 단계 더 성장한 느낌이야.”

아직 센트럴 북스와 계약한 건 말하지 않았다. 민우의 어머니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아마 말하면 다들 깜짝 놀랄 것이다.

두 사람이 포옹을 풀었다. 옆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는 주예린을 보며 민우가 물었다.

“그런데 얘는 왜 따라 나왔어?”

“존경하는 선배님을 위해 차량을 섭외해 놨습니다. 자, 어서 가시죠!”

“아, 섭섭이도 와 있냐.”

도착 시간을 알려주긴 했는데, 이렇게 마중을 나올 줄은 몰랐다. 민우는 미안하면서도 고마웠다.

그렇게 세 사람은 공항에서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한진섭이 피곤에 찌든 표정으로 손을 슬쩍 들어 보였다. 민우는 일단 짐을 트렁크에 실었다.

“흐아암. 졸려 죽겠네.”

“너 괜찮겠어? 졸음운전 각이 날카로운데?”

“황천길도 함께 가면 외롭지 않겠지. 알잖아. 주님 성격.”

진섭이 주예린을 힐끔 바라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민우는 그의 고충을 이해했다. 잡혀 사는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내가 이따 잠 깨는 얘기 해 줄 테니까 조금만 참아라.”

“뭔 얘긴데? 금발 미녀와 뜨거운 하룻밤이라도?”

“오빠?”

수빈의 차가운 시선을 느낀 진섭이 투덜거리며 운전석에 앉았다. 네 사람은 차에 올랐다. 진섭이 내비게이션을 조작하며 물었다.

“바로 집으로 갈 거지?”

“당연한 걸 묻냐.”

곧 차가 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민우는 친구의 안전운전을 위해 센트럴 북스와 계약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조건까지 전부.

“뭐어?”

“진짜요?”

“역시 선배님이십니다! 존경해요!”

효과는 굉장했다.

그날 밤, 세 친구들은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자취방에 모여 맥주를 홀짝이며 민우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다.

* * *

‘아, 피곤해 죽겠네…….’

시차 적응에는 시간이 좀 필요했다. 일요일 하루를 푹 쉬었지만 여전히 피로가 남아 있었다. 루카치의 유고를 읽다가 존 것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명인대에 도착한 민우는 힘겹게 서지훈 교수 연구실의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 살아 돌아왔구나. 요즘 총 맞는 사람들이 많아서 걱정했는데.”

“……무서운 말씀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네요.”

민우가 선물을 내려놓았다. 유명한 브랜드의 아로마 향초였다. 서지훈 교수 연구실은 공기가 좋지 않았다. 그가 담배를 많이 피우는 까닭에.

“마침 필요했는데. 고맙다.”

“담배를 끊으시는 게 좋다는 메타포가 담겨 있는 선물입니다.”

“알고 있으니 강조하지마 짜샤. 요즘 여기저기서 끊으라고 난리네.”

“송 실장님도 그러세요?”

“미국 다녀오더니 눈치가 좀 늘었다?”

서지훈 교수가 캔들을 열어 불을 붙였다. 청량한 바다의 향기가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마음에 드는지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민 선생님께는 인사드렸냐?”

“오는 길에 먼저 들렀어요. 선물 고르는 데 애먹었습니다.”

“뭐 샀는데?”

“면세점에서 명함 지갑 하나 샀어요.”

“호, 돈 좀 썼겠네. 하긴 너 이제 부자 됐지?”

“얘기 들으셨어요?”

서지훈 교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담배를 꺼내려다 아로마 향초를 보고는 다시 집어넣었다.

“자, 그럼 어디 한번 들어볼까? 미국물 좀 먹고 온 우리 학자님의 계획을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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