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3. IAHS (3) (163/500)


163. IAHS (3)
2022.02.14.


「두드려서 모든 게 열린다면 세상에서 비극과 낭만은 사라지겠지. 특히 사람의 마음을 여는 것은 어려운 일이야.」

그는 마치 무대에서 연기를 하듯 혼잣말했다. 랑느 박사는 그의 출현에 두 손을 들며 난감해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아틸라이 회장이 고개를 들어 민우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런 의미에서 민우, 당신의 강연은 인상 깊었습니다. 무투브에 올라온 인문학 강연이 특히 기억에 남는군요. 학생들을 설득하는 과정이 인상 깊었죠. 이성보단 감성이 앞설 나이들인데 강의에 빠져드는 모습이 흥미로웠습니다. 한마디로, 당신의 강의엔 보이지 않는 힘이 있었죠.」

멍하니 듣기만 하던 민우가 화들짝 일어서 고개를 숙였다. 청하지도 않았는데 그는 자신의 강연에 대해 평해주고 있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하.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요. 진짜 중요한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인데.」

민우가 허리를 펴고 집중했다. 두 눈에서 지적인 총명함이 반짝였다. 흔히 볼 수 없는 눈빛에 아틸라이 회장이 속으로 탄복했다.

‘맑은 눈빛을 가진 청년이로군! 학구열이 느껴져. 확실히 랑느가 아낄 만해.’

하지만 그 평가를 표정에 드러내진 않았다. 아틸라이 회장이 헛기침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당신의 강의에서 흥미 그 이상의 것은 보이지 않더군요. 학생들의 마음은 여는 것엔 성공했지만 더 큰 그림을 그리는 것까진 나아가지 못했다는 게 개인적인 소감입니다.」

「실례되는 질문입니다만…… 큰 그림을 그린다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요?」

「쉽게 말하자면 포텐셜. 학생들은 말이죠. 우리들의 눈으로는 무지하고 어리게 보이지만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고정관념에 얽매여 있지 않기 때문에 더 크게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있지요. 그것을 끌어내는 힘. 당신에겐 그게 필요합니다.」

하나하나 주옥같은 말들이었다. 녹음해서 반복으로 듣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민우는 그의 말을 빠짐없이 기억했다.

아틸라이 회장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음, 이거 너무 비평이 되어 가는군요. 양해를 구하지요. 실은 랑느 박사가 강연 영상에 대한 평가를 듣고 싶어 한다고 하기에 이렇게 온 겁니다.」

「아뇨. 아닙니다. 충분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민우는 다시 허리를 굽혔다. 아틸라이 회장은 민우의 동양식 인사가 마음에 들었다. 그의 진심을 느끼곤 고개를 끄덕였다.

「학문의 깊이는 차차 채워가야 할 당신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아, 이거 소개가 늦었군요. 실례를. 아틸라이 캐머런입니다. 본 학회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만나서 반갑군요.」

아틸라이가 악수를 청했고, 민우가 손을 맞잡았다. 그때 랑느 박사가 끼어들었다.

「이런 매정한 친구. 내 말을 그렇게 끊는 법이 어디에 있나?」

「하하하. 방해가 됐나? 미안하게 됐네.」

두 사람이 몇 마디 주고받자 긴장이 풀어지며 여유가 생겼다. 민우가 나섰다.

「저도 인사가 늦었네요. 회장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시야가 정말 넓어졌습니다. 제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네요. 전 이번 학회를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다들 그런 시절이 있는 법이지요. 모쪼록 풍성한 결실을 얻어 가길 바랍니다. 자, 식사들 하세요.」

아틸라이 회장이 자리를 떴다. 민우는 마치 좋은 꿈을 꾸다 깬 사람 같은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지켜봤다.

* * *

똑똑.

노크가 울리자 침대에 누워 있던 조너던 캠벨이 신경질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객실 문으로 한달음에 달려가 문을 확 열었다.

「오. 반응 한번 빠른데? 없는 척하면 어쩌나 싶어 걱정했는데.」

문밖에 서 있던 사람은 센트럴 북스의 편집장 제임스 마렛이었다. 캠벨은 한숨을 푹 내쉬며 몸을 돌렸고, 제임스는 휘파람을 불며 안으로 들어왔다.

캠벨은 뉴욕 외곽에 위치한 저렴한 호텔에 묵고 있었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이목을 끄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왜 그렇게 예민해? 오늘 뭔 일 있었나?」

「제임스. 부탁인데 오늘은 그냥 날 좀 내버려 둬.」

「그럼 문을 열어주지 말든가. 보아하니 학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군. 어이, 손님이 왔는데 침대에 눕는 건 뭔가? 와서 커피나 한잔해.」

씨익 웃은 제임스 마렛은 캐리어를 내려놓았다. 시원한 아메리카노 두 잔이 들어 있었다. 제임스는 커피를 하나 꺼내 일부러 흔들었다.

「젠장. 못된 버릇은 여전하군.」

유혹을 이기지 못한 캠벨이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들이켰다. 그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표정이었다.

「멍청한 놈들이 세미나에서 허가도 없이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찍지 않나. 그건 뭐 이제 봐줄 만해. 그런데 학회장에서 나오면서 사이비 신도들이 몰려오더니 ‘마귀야 물러가라!’라고 하더군. 최악의 하루였어.」

「신화를 연구한다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나. 자네는 이름도 꽤 있고 말이지. 계란을 뒤집어쓰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라고.」

「그거 고마운 말이군.」

비꼬듯 말한 캠벨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머물렀다. 거기엔 아까 민우가 준 책이 놓여 있었다.

「버린다는 걸 깜빡했네.」

「버린다고? 무얼?」

캠벨은 테이블에서 민우의 책을 집어왔다. 그리고 보란 듯이 흔들었다.

「오늘 세션 끝나고 일어서려 하는데 어떤 동양인 친구 하나가 자기가 쓴 책이라며 주더군. 내 이론을 가져다 썼다나? 호킨스가 내 이론을 오용한 덕에 한차례 홍역을 치렀는데 또 같은 일이 생길까 걱정이야.」

캠벨이 비아냥거리며 커피를 마셨다. 제임스는 출판인답게 책에 관심을 보였다. 그가 표지를 훑었다. 한국어였다.

‘잠깐만. 이건?’

제임스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민우의 이름이 한글로 씌어 있었는데, 자신이 알던 누군가와 철자가 똑같았던 것이다.

제임스는 표지를 넘겨 속에 있는 저자 프로필을 살폈다. 다른 단어는 몰라도 ‘명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는 알아보았다.

흥미로운 미소를 지으며 제임스가 물었다.

「혹시 이 책을 준 사람이 박민우 씨 아닌가? 한국에서 온. 키가 크고 훤칠한 젊은이 말이야.」

「으음, 그랬던 거 같기도 하고…… 맞는 거 같군. 아는 친구인가?」

「알다마다.」

무심하던 캠벨이 관심을 보였다. 그는 제임스와 오랜 친구 사이였다. 목소리의 톤만 들어도 심리상태를 알 정도로.

분명 제임스는 박민우라는 사람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다.

제임스가 책을 흔들었다.

「그런데 이걸 버리려고 했다고? 박사학위도 쓸모가 없군. 자네 실수하는 거야.」

「실수라니?」

「한 30년 지나 봐. 분명 프리미엄이 붙은 책이 될 거니까.」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캠벨은 테이블에 놓인 그 책에 관심이 갔다.

제임스가 센트럴 북스라는 세계적인 출판사에서 자리를 잡은 게 책을 보는 안목이 있었기 때문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그렇다면, 실제로 그렇게 된다. 업계에서는 그의 말이 곧 법이었다.

입술을 한번 달싹인 제임스가 본론을 꺼냈다.

「그나저나 인문과학총서 건은 생각해 봤나?」

「으윽.」

왜 그 얘기가 안 나오나 했다. 캠벨은 약점을 잡힌 사람처럼 이마를 찡그렸다.

「아직 생각 중이야.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고. 조금만 더 시간을…….」

「이런! 캠벨. 이 미련한 친구. 시간 낭비 좀 그만해. 네 지식을 더 넓은 세상에 내보내야지! 다른 친구들은 모두 동의를 했는데 자네만 왜 이렇게 튕기나?」

「더 넓은 세상에 내보낸다면 나에게 쏟아지는 비난의 화살만 더 많아지겠지. 이제 지쳤어. 스탑.」

「흥!」

콧방귀를 낀 제임스가 벌떡 일어났다. 민우의 책을 쥐더니 그것을 캠벨에게 휙 던졌다. 엉겁결에 캠벨이 그 책을 두 손으로 받았다.

「한국에서 온 석사 3학기 대학원생은 고지식하기로 유명한 스톤 교수에게 큰 거 한 방 먹일 패기가 있는데, 유럽의 석학이라는 놈은 겁쟁이로군. 때려치워. 인류학 파트는 콜린 교수에게 맡길 테니. 나 간다.」

「이봐!」

하필이면 라이벌의 이름을 언급할 줄이야. 잽싸게 일어선 캠벨이 문을 나가려던 그를 붙잡았다.

「알았어. 하면 되잖아! 계약서 가져왔나?」

「됐어. 콜린 교수와 이야기를 먼저 해보지. 그가 하지 않겠다면 다시 오겠어. 마침 쉐라톤에 있다고 하니까.」

「짐!」

어릴 적 부르던 애칭이 나오고서야 제임스가 한 발 물러섰다.

「진즉 그럴 것이지. 비즈니스는 깔끔하고 신속하게. 오케이?」

씨익 웃은 제임스가 서류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냈다. 자신이 지금까지 발표한 저작물 몇 개를 전집 작업에 쓰겠다는 계약서였다.

캠벨이 서명하고 한 부를 챙겼다. 제임스는 장난감을 선물 받은 어린아이처럼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로써 센트럴 북스의 새로운 프로젝트가 모든 준비를 끝냈다.

인문과학총서.

말 그대로 인문학의 역사와 미래를 하나의 책으로 묶으려는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총 2부 20권으로 기획된 이 책은 9권까지 편찬이 완료되었다. 이제 캠벨의 서명을 받았으니 10권을 준비할 차례였다. 그렇게 되면 1부 출간 준비가 끝난다.

「그런데 방금 스톤 교수 이야기는 뭐야? 누가 예일대의 거목을 건드렸어?」

「아, 그 친구?」

볼일을 끝내고 가방을 챙긴 제임스가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켰다. 그곳엔 민우의 책이 놓여 있었다.

「그거 쓴 사람.」

「뭐?」

씨익 미소를 지은 제임스가 호텔 방을 나갔다. 홀로 남은 캠벨은 민우의 책을 손에 쥐었다. 하지만 한국어는 그에게 너무나 낯설었다.

* * *

만찬을 마치고 객실로 돌아온 민우는 씻은 다음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오늘 보고 느낀 것들을 요약해보자.’

민우는 핸드폰을 노트북에 연결해 사진을 옮겼다. 그리고 기행문을 쓰듯이 보고 느낀 것들을 사진 밑에 달거나 따로 문서로 정리했다.

서지훈 교수가 시켜서 하는 일은 아니었다. 민우는 이번 경험을 어떻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다 떠올린 방법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흐릿해질 거야. 그때 이 사진과 메모를 보면서 기억을 되새겨보면 좋겠지. 분명 도움이 될 거야.’

거기에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민우는 정리한 것을 제본해서 후배들에게 나눠줄 생각이었다. 민영환 교수가 자신에게 노트를 물려준 것처럼.

싱긋 웃은 민우는 신나게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창문 너머로 별보다 찬란한 뉴욕의 밤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선선히 불어온 바람이 객실을 시원하게 훑었다.

객실 문에서 노크가 들린 건 바로 그때였다.

‘누구지? 미셸인가?’

민우는 잠시 타이핑을 멈추고 문을 열었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문밖에 서 있었다.

「제임스 씨!」

「이런, 제가 너무 늦게 왔나요?」

그러면서도 제임스는 한 발을 객실 안으로 들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이미 소파에 다리를 꼬고 편히 앉아 있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

「아아, 민우 씨가 들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이야기를 두 개 들고 왔어요. 그래서 자기 직전에 왔죠.」

민우는 간단히 마실 걸 준비해서 제임스 앞에 놓았다. 제임스는 눈인사를 건네며 주스를 쭉 들이켰다.

「뭐부터 들을래요? 하나는 좋은 거고 하나는 나쁜 건데.」

「음…… 나쁜 거부터요.」

「<더 위저드> 2부는 다른 번역가가 번역을 하기로 결정됐어요. 골든북스와 계약한 내용 중에 박민우 씨의 이름이 조건으로 들어가 있는데 그 부분을 삭제했지요.」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예상하던 일이었다. 아쉽게 됐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다. 자신이 결정한 일이기도 하니까.

「그럼 좋은 거는요?」

「센트럴 북스에서 새로 시작한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인문과학총서 프로젝트죠. 심플하게 설명하면 문학, 역사, 지리, 철학 등 주요학문의 개론서라고 할 수 있겠네요. 2부 20권으로 기획되었고, 지금 1부 9권까지 편찬이 완료된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게 왜 좋은 소식이죠?」

「정중하게 요청합니다. 저희 인문과학총서 한국어 번역을 박민우 씨에게 맡기고 싶네요. 기밀인데, 이미 지음사와 이야기가 진행 중이고요. 아, 이미 말했으니 기밀은 아니게 됐네요. 하하핫.」

민우는 깜짝 놀랐다. 단행본 번역이라면 몰라도 학술서는 기술번역에 포함되어 난도가 높은 번역이다. 게다가 총서다.

「총서류는 보통 대학이나 기관에 의뢰하지 않나요?」

「개론서기 때문에 깊은 지식보다는 보편적인 전달력이 중요합니다. 전문성에 대해서는…… 글쎄요. 영어는 물론, 프랑스어로 여러 논문을 번역했고, 일본어와 중국어로도 기술번역이 가능한 분을 눈앞에 놔두고 굳이 여러 손을 거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민우는 내심 제임스의 정보력에 놀랐다. 비공식적으로 페이퍼를 번역한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그것을 묻기도 전에 제임스는 쉴 새 없이 몰아쳤다.

「책은 퍼즐과 같습니다. 여러 사람이 개입할수록 복잡해지죠. 그래서 박민우 씨 당신이 처음부터 끝까지 퍼즐을 맞춰주면 좋겠군요.」

민우는 입을 꾹 다물고 제임스를 바라보기만 했다. 잠시간의 침묵 후에 민우가 의문을 꺼냈다.

「센트럴 북스 입장에서는 제가 <더 위저드> 2부를 번역하는 게 수익 면에서 더 좋지 않습니까? 인문과학총서라면 판매량도 적을 텐데요.」

「그 말이 언제 나오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임스는 주스 잔을 마저 비우고 몸을 민우 쪽으로 좀 더 가까이 숙였다.

「하지만 이번 총서는 좀 다른 의미가 있죠. 수백 년이 흐른 뒤에도 인류 지성사에 회자될 책을 만들자! 그런 목적으로 기획한 책이니까요. 생각해 보세요. 과연 그 가치를 돈으로 환산할 수 있을까요?」

민우는 소름이 돋았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 그것을 번역한 자신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걸까?

한참을 생각하던 민우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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