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IAHS (2)
(16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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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IAHS (2)
2022.02.11.
미셸은 민우의 손에 들린 양장본 책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어로 씌어 있어 읽지는 못했다.
「대체 뭐 하는 거예요? 그 책은 뭐고?」
「이 책이요? 아, 한글이라서 읽기 어렵겠네요.」
「그러니까 한국어 좀 가르쳐 달라니까요.」
미셸은 전공이 문학이지만 언어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실제로 4개 국어를 할 정도로 언어적인 센스도 뛰어났다.
그래서 한국어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다. 정확히는 민우라는 사람과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호감을 가진 것이지만.
「나중에 천천히. 시간 많잖아요.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연락 안 할 것도 아니고.」
「음, 뭐 그건 그렇죠.」
모든 준비를 마친 민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학회 가방에 책을 집어넣고 핸드폰을 꺼내 학회 앱 화면을 보여주었다.
학회 스케줄표가 떴다. 거의 텅 비어 있었는데, 오늘 스케줄에 민우가 등록한 세션 하나가 분홍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여기 ‘현대 신화학의 보편적 조건’이라는 세션 보이죠?」
「조너던 캠벨 교수의 세미나네요. 신화학으로 무척 유명한 분인데. 그거 들으려고요?」
「사실 아까 싸인한 그 책, 제가 학교 선배랑 공저한 책이에요. 한국 소설에 나타난 신화적 모티프를 정리하고 분석했죠.」
미셸이 깜짝 놀랐다.
「책을 썼다고요? 그 나이에?」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요? 외국은 더 흔할 줄 알았는데요.」
「설마요! 학회 페이퍼를 인쇄하는 경우는 있어도 그렇게 멋지게 장정한 책을 내기는 쉽지 않죠.」
친근한 눈빛에 존경심이 더해졌다. 왠지 부담스러워 민우는 시선을 살짝 피했다.
「아무튼 그 책은 캠벨 박사의 이론을 가지고 집필을 한 거예요. 그래서 감사의 인사도 드릴 겸 책을 선물로 드리려고요. 그냥 명함을 드리고 인사를 하는 것보다는 기억에 오래 남겠죠?」
「어메이징!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저라면 정말 기분 좋을 거 같아요. 내가 만든 이론으로 공부를 한 학생이 책을 들고 찾아온다…… 그것도 이역만리의 학생이. 휘우! 생각만 해도 짜릿한데요? 셀린느가 이 장면을 봐야 하는데.」
민우는 당분간 셀린느의 모습을 보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화두를 던져 주었으니, 생각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실제로 미셸이 고백하기도 했다.
랑느 박사가 셀린느를 데려온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민우 때문이었다고. 의욕적인 모습을 보면 자극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었던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나서는 건 무의미해. 어쨌든 자기가 결론을 내려야 하는 부분이니까.’
그렇게 매듭을 지은 민우가 미셸의 핸드폰을 기웃거렸다.
「미셀은 어떤 세미나 들을 거예요?」
「지금부터 고민해 봐야죠.」
일단 미셸은 핸드폰 앱에 조너던 캠벨의 세미나를 등록시켰다. 그리고 서로 의견을 교환하면서 관심 있는 발표를 하나씩 추가해 나갔다.
오늘 자 스케줄을 모두 정리한 두 사람은 서로의 핸드폰을 나란히 놓고 비교했다.
「이런, 별로 겹치는 게 없네요. 이따 캠벨 박사 세미나에서나 한 번 만나겠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할게요.」
「오케이. 그럼 이제 오프닝 세레머니 보러 가죠.」
미셸이 앞장섰고, 민우가 그 뒤를 따랐다.
한국 학회와는 달리 먹을 게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생수가 담긴 물통이 비치된 것 말고 특별히 간식으로 삼을 만한 게 없었다.
두 사람이 메인 홀로 들어서자 연단에 누군가 올랐다. 헐거운 셔츠와 블레이저를 걸친 50대 남성이었다. 박수가 끊이질 않았다.
얼굴에 주름이 많았는데, 인상이 깐깐한 남자였다. 미셸이 그 사람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저분이 IAHS 회장인 아틸라이 캐머런 씨예요. 하버드 대학에 있죠. 임원단들은 대개 아이비리그 출신이에요.」
「그렇군요.」
민우가 고개를 들어 연단을 바라보았다. 아틸라이 회장이 마이크를 잡고 연설을 시작했다. 재치 있는 유머로 서두를 장식했다.
하지만 민우는 웃을 겨를 없이 진지하게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이 나를 초대해 준 사람.’
연단이 한없이 높게만 보였다. 다가가서 말을 걸 수 있을까 고민될 정도로.
하지만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렵다, 무섭다, 힘들다. 그런 말들은 투정에 불과했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당당하게 나선다면 문은 열릴 것이다.
‘세션 도중엔 기회가 없을 거 같고…… 오늘 학회 끝나고 만찬이 있으니 그때를 노려봐야지. 다른 건 몰라도 내 강연 영상이 어땠는지 꼭 물어보고 싶어.’
랑느 박사의 말에 의하면, 그는 분명 자신의 강연을 보고 초대할 마음이 생겼다고 했었다. ‘인상적’이었다는 평가와 함께.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인상적이었는지 물어봐야지. 강의력 향상에 도움이 될 거야.’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아틸라이 회장의 연설도 막바지에 달하고 있었다.
「……모쪼록 우리 모두를 위한 학문적 경연이 이곳에서 순조롭게 이어지기를 희망합니다. 축사는 이것으로 끝입니다. 고맙게도 컬럼비아에서 장소 협조는 물론 축하 공연까지 마련해 주었다고 하네요. 그럼, 모두 환한 얼굴로 웰컴 리셉션에서 다시 만납시다. 고맙습니다!」
축사가 끝나고 축하 공연의 막이 올랐다.
컬럼비아대 학생들로 구성된 공연 팀이었다. 흥겨운 음악과 함께 축하 공연이 시작됐다. 민우의 두 눈은 한시도 그곳에서 떠나지 않았다.
* * *
특별 연사로 참여한 랑느 박사의 연설까지 모두 들은 민우는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전에는 포스터 세션에 참여하기로 했다.
포스터 세션은 발표자가 지정된 규격의 포스터를 걸어두고 한 시간 정도 서서 진행하는 간이 세미나였다. 주로 학생들이 많이 참가했다.
민우는 밖으로 나와 무대에 마련된 테이블을 둘러보았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호기심이 들어 그쪽으로 움직였다.
청안의 금발 청년이 반갑게 맞았다.
「와우, 어디서 왔어요? 일본?」
「아뇨. 한국에서 왔어요.」
「아! 한국! 류의 고향이군요!」
민우는 뭔가 싶어 고개를 갸웃했는데, 곧 그가 LA를 연고지로 하는 야구팬임을 밝혔다. 대전 출신인 민우는 반갑게 악수했다.
그의 이름은 톰이었다. 이번엔 민우가 그에게 물었다.
「이곳엔 어떻게 참가하게 됐어요? 사실 제가 해외 학회엔 처음이라서 견학 중인데…… 제 또래들은 어떻게 오게 됐는지 궁금했거든요.」
「견학도 좋죠. 저도 포스터 세션 끝나면 돌아다닐 예정이에요. 일단은 공동 연구자를 모으려고 이렇게 나왔어요.」
이렇게 직접 학회에 나와서 자신의 연구물을 알리고, 거기에 공동으로 연구할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 신기했다. 새로운 문화였다.
「톰이 준비한 건 셰익스피어에 대한 이야기인가요?」
「맞아요.」
톰은 5분 정도 짧게 연구 목적과 주제를 설명했다. 군더더기 없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했다.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특이하네요. 셰익스피어의 습작 시기를 연구하다니. 주로 4대 비극을 많이 이야기하지 않나요?」
「사실 습작 시기에 들어가는 1590년대는 영국 연극사에서 제일 재미있는 시기예요.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를 졸업한 젊은이들의 세상이었으니까. 물론 그중 제일은 셰익스피어였지만요. 하핫.」
톰이 해맑게 웃었다. 연구 테마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기분이 어떤지 잘 알고 있던 민우도 따라 웃었다.
「얘기 잘 들었어요. 기회가 되면 또 봐요.」
민우는 톰과 명함을 교환하고 다른 포스터를 보기 위해 자리를 떴다. 인문예술을 아우르는 국제학회답게 테마는 정말 다양했다.
여기에서 민우가 가진 능력이 빛을 발했다.
바로 외국어 능력.
‘영어를 하지 못했다면 정말 말 그대로 구경만 하다 갈 뻔했어.’
의사소통에 전혀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민우는 거침없이 활보했고, 넘칠 정도로 견문을 넓힐 수 있었다.
‘오늘 눈에 담은 것들은 분명 좋은 영양분이 될 거야.’
마음껏 견문을 넓힌 민우는 교환한 명함을 가방에 넣고 메인 홀로 돌아왔다. 슬슬 시간이 되었다. 핸드폰을 꺼내 학회 앱을 실행했다.
‘이제 캠벨 교수님을 만나러 가야겠네. A―2 섹션으로.’
IAHS 학회의 세미나는 동시다발적으로 열린다. 여러 공간에서 서로 다른 테마로 발표와 토론이 벌어지는 것이다.
민우는 애플리케이션에 적힌 A―2 섹션을 찾았다.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자리가 꽉 차서 서서 듣는 사람들이 많았다.
「민우!」
때마침 미셸이 이쪽으로 달려왔다. 두 사람은 한구석에 나란히 섰다.
「포스터 세션은 어땠어요?」
「생각보다 정말 좋았어요. 대부분 학생들이라 그런지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많더라고요. 동영상을 틀거나 행위예술을 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그게 IAHS만의 장점이죠. 예술 분야의 연구도 포함되니 볼거리가 많아요.」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들을 자기의 것으로 끊임없이 소화시켰다.
‘포스터 세션은 국내 학회에도 도입하면 좋을 거 같은데? 학부 졸업논문이나 그에 준하는 자격을 주면 꽤 활발해질 거 같아. 적어도 영어점수로 졸업요건 채우는 촌극보단 나을 테고.’
민우가 졸업한 상아대학교 국문과는 아이러니하게도 졸업하려면 영어점수가 필요했다. 일정 점수 이상을 달성하지 못하면 졸업할 수 없다.
‘나중에 자리 잡으면 꼭 해봐야지. 아니, 그러면 너무 늦는데. 한국에 돌아가서 서지훈 선생님께 한번 말씀드려 볼까?’
땡―
그때 종소리가 울렸다. 세미나를 시작하겠다는 신호였다. 웅성거리던 소리가 일순 사라졌다. 민우도 상념을 치우고 집중했다.
‘누가 캠벨 교수님이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가운데 자리에 앉아 있는 깡마른 남자의 명찰이 눈에 들어왔다. Jonathan Cambell. 민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런데 조금 의외였다. 건강하고 밝은 인상일 줄 알았는데 피곤하고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곧 그가 마이크를 쥐고 발언을 시작했다.
「우리가 여기 모인 이유를 간단히 생각해 봅시다. 성스러움을 상실한 이성의 시대에서 신화학이 어떤 포지션을 취할 수 있는가. 여기에 이견은 없을 것입니다. 시작하지요.」
필기도구를 꺼낸 민우는 눈을 빛내며 메모를 시작했다. 작년 최민식의 논문을 도와줄 때 신화학 관련 저널을 뒤져본 게 도움이 되었다. 적어도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발표가 끝나고 토론이 이어졌다.
토론 참가자들은 현대 신화 연구의 흐름을 논하며 앞으로 신화학이 가야 할 방향에 대해 열띤 발언을 했다. 그 와중에 가벼운 논쟁도 벌어졌다.
‘그래, 바로 이게 세미나지!’
민우의 눈과 귀가 바쁘게 움직였다. 돈 주고도 볼 수 없는 진귀한 강의가 눈앞에 생생히 펼쳐지고 있었다.
땡―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종이 울렸다. 세미나가 모두 끝난 것이다. 민우는 미셸에게 양해를 구하고 재빨리 테이블 앞쪽으로 달려갔다.
「캠벨 교수님!」
여전히 나른한 표정을 짓던 캠벨 교수가 민우를 주목했다. 그의 눈빛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멍한 것이,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 사람의 눈이었다.
「누구?」
「안녕하세요. 저는 박민우입니다. 한국에서 왔어요.」
「그래서?」
호의적이지 않은, 아니 가시가 날카롭게 서 있는 그의 태도에 민우는 당황했지만, 자신의 책을 건네며 이유를 설명했다.
설명을 모두 들은 캠벨 교수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내 이론으로 책을 썼다고?」
「예. 그래서 한 권 드리려고요.」
「제대로 이해하고 썼으려나 모르겠는데.」
그 한마디를 남긴 채 캠벨 교수는 자리를 떴다.
* * *
「하하하! 그러니까 캠벨 교수에게 무시를 당한 것 같다고?」
랑느 박사가 시원하게 웃었다. 오늘 일정이 모두 끝나고 열린 웰컴 리셉션에서 민우와 미셸은 그와 함께 만찬을 즐겼다.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표정은 떨떠름했다.
「무시까지는 아니고, 좀 그랬습니다. 반응이. 그래도 책을 가져가셔서 다행이긴 하네요.」
「저도 옆에서 봤는데 완전 칼바람이 쌩쌩 불던데요. 보통 그러면 좋아하지 않나요?」
「그가 날카롭기로 유명한 사람이긴 하지만, 사람이 늘 웃을 수는 없지. 자신이 애써 만든 이론을 누군가 썼다면 다양한 반응이 나오지 않을까?」
「다양한 반응이요?」
민우가 물었고, 랑느 박사는 와인으로 목을 축이며 대답했다.
「이론을 곡해하고 이상한 방향으로 해석했다면 오히려 빛이 바랬다는 생각이 들 테니까 말이네. 신뢰의 문제라고 할까.」
「아……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네요. 어떻게 이용되느냐도 만든 사람의 입장에서는 중요할 테니까. 제가 좀 경솔하게 행동했나 봐요.」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새파랗게 젊은 동양인일 뿐이었다. 명인대 국문과라는 말도 한국에서나 통하는 수식어다.
랑느 박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결과보다는 그런 용기가 중요한 걸세. 두드리면 언젠간 열린다는 말도 있지 않나? 그러니…….」
랑느 박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 테이블로 다가와 말을 이었다.
「두드려도 때론 열리지 않는 것들도 많지.」
그 남자의 시선은 민우의 명찰로 향해 있었다. 한차례 미소를 짓는 그의 이름은 아틸라이 캐머런, 바로 IAHS의 회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