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IAHS (1)
(16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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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IAHS (1)
2022.02.10.
‘소르본의 밤’은 성황리에 마무리됐다.
민우는 홀을 나서려다 핸드아웃이 모아진 테이블 앞에 섰다. 남은 것들이 많았는데, 장갑을 낀 직원이 정리하고 있었다.
「저기요. 이거 남은 거 가져가도 되나요?」
「얼마든지요. 다 가져가 주시면 더 좋고요. 하하하.」
「감사합니다.」
민우는 재빨리 테마별로 두 개씩 챙겼다. 에코백이 두둑해졌다. 지적 포만감을 만끽하며 민우는 숙소로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오늘 오후에 찍었던 사진을 컴퓨터에 옮겨 하나씩 정리했다.
‘내일은 아침 일찍 센트럴파크에 가서 산책 좀 하다가 바로 컬럼비아대로 가면 되겠다.’
내일이 드디어 IAHS 본 학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오프닝 세레머니를 시작으로 3일간 진행되며, 금요일에 모든 일정이 끝난다. 그리고 민우는 토요일 오전에 JFK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귀국할 예정이다.
‘마음 같아서는 다음 주까지 계속 있고 싶지만…….’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는 아니었고, 앱에서 지원하는 무료 통화였다. 호텔에서는 와이파이를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친구들과 연락하기 쉬웠다.
발신자를 확인한 민우가 살짝 놀랐다.
‘유리가 무슨 일로 전화를? 아 맞다. 원고.’
민우는 얼마 전에 보낸 주예린의 소설 원고를 떠올리며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넵. 편집자님. 오밤중에 무슨 일이십니까?”
민우가 장난스럽게 전화를 받자 이유리가 웃음을 터트렸다.
― 뭐야. 갑자기 당황스럽게. 여긴 이제 아침이야.
“아, 그렇지 참.”
― 뉴욕 생활은 어떠니?
“환상적이지.”
― 아, 부럽다. 나도 대학원 갈 걸 그랬나.
“대학원 갈 돈으로 세계여행을 하는 게 더 싸게 먹힐 거다.”
가볍게 농담을 주고받은 두 사람. 쌓인 일이 많았는지 잡담이 술술 나왔다. 이유리는 라온북스에서 있었던 소소한 일들을 들려주었다.
그렇게 10분이 흐르고, 이야깃거리가 다 떨어지자 자연스레 본론으로 들어갔다.
― 그 있잖아. 전에 보내줬던 원고.
“예린이 꺼?”
― 응응. 주예린 씨 소설. 그거 재미있어서 현 팀장님한테도 보여드렸는데 오케이 사인 났어.
오케이 사인이라는 것은 출간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출판 계약을 하겠다는 이야기. 피곤한 민우의 얼굴이 활짝 폈다.
“좋은 소식이긴 한데 좀 의외다.”
― 의외라니?
“여러 출판사에서 거절당했다고 들었거든. 혹시 내가 추천한 작품이라 그냥 계약하려는 건 아니지?”
― 그런 건 아냐. 확실히 앞부분이 조금 루즈하긴 해. 장르소설은 초반 3화에 승부를 본다고들 하는데, 그쪽 출판사에 투고를 했다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끝까지 읽어 본 입장에서 판단한다면, 이건 좋은 소설이라는 확신이 들어.
“그렇구나. 네 확신이라면 믿을 만하지.”
편집자로서의 프라이드가 느껴졌다. 늘 상냥하고 착한 그녀였지만 이런 모습도 매력적이다.
민우는 노트북 메모장을 열고 유리의 감상평을 그대로 옮겨 적었다.
― 아무튼 나는 재미있었어. 여성 작가가 표현해내기 힘든 웅장함에 놀랐고. 웹툰이나 영화로 만들어도 좋을 거 같았어. 우리 출판사가 실험적인 소설을 많이 내는 건 사실이긴 하지만…… 그래도 재미는 있지 않니? 감동이랄까.
“그렇지.”
민우는 동감했다. 다른 이유는 필요 없다. 독자들이 느끼는 재미와 감동. 책이든 영화든 만화든 그것이 가장 중요하니까.
민우는 유리의 코멘트를 빠짐없이 정리했다.
“아무튼 알았어. 학회 끝나면 바로 귀국하니까 예린이 데리고 사무실에 한번 갈게. 계약 준비하면 되는 거지?”
― 응. 계약 조건 같은 이야기는 만나서 하는 게 좋을 거 같아. 작가님 의견도 들어봐야 하니까.
“그래. 아 참. 하나 부탁 좀 하자.”
민우는 작년 여름, 학생회관 뒤에서 주예린과 했던 약속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보통 계약서에 해외 판권 항목은 좀 두루뭉술하게 들어가지? 그 부분에 대한 걸 좀 자세히 넣어서 준비해주면 좋겠어.”
― 해외 판권? 으음, 그건 내가 팀장님께 말씀드려 볼게.
“그래. 그럼 한국에 돌아가서 연락할게. 일 열심히 하고.”
전화를 끊은 민우는 나른한 한숨을 내쉬었다.
‘국내 출판이 문제는 아니지.’
이미 민우는 그녀의 작품을 읽으며 어떻게 번역을 하면 좋을지 계획을 다 세워둔 후였다.
제목은 <세계수>.
북유럽 신화와 세계 각국의 문화를 절묘하게 섞은 판타지 소설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국내보다 해외에서 반응이 더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민우의 입가에 미소가 천천히 걸렸다.
“이제 녀석도 날개를 활짝 펴게 되려나?”
민우는 톡 앱을 실행시켜 주예린의 번호를 찾았다. 그리고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 * *
민우는 아침 일찍 샌드위치와 물통 하나를 가방에 넣고 센트럴파크로 향했다.
숙소에서는 그리 멀지 않았다. 호텔에서 나와 7번가를 따라 쭉 올라갔다.
“우와!”
과연 뉴욕의 심장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했다.
마천루로 가득한 도시 한복판에 자연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민우는 푸른 나무와 빌딩이 어우러진 풍경을 살피며 산책로를 걸었다.
‘가을에 오면 참 좋겠네. 낙엽도 있고. 눈길을 걷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차 세 대 정도가 지나갈 수 있는 큰길에 드문드문 노점상이 보였다. 민우는 사람들이 두어 명 모여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작은 장식품을 시작으로 각종 수공예품을 팔고 있었다. 민우는 수빈의 취향을 고려해 그녀가 좋아할 만한 물건 몇 개를 구입했다.
그렇게 목적지 없이 걷다 보니 커다란 분수가 하나 나왔다. 그 가운데로 청동으로 만들어진 천사의 모형이 높게 세워 있었다.
‘여기가 베데스다 분수구나.’
뒤쪽으로는 보트가 떠 있는 녹색 호수가 보였다. 주변을 둘러보며 사진을 담던 민우는 깜짝 놀랐다. 분수가에 낯익은 누군가가 앉아 있었던 것이다.
셀린느였다.
놀랍게도 그녀는 웃으며 청설모와 놀고 있었다. 작고 재빠른 청설모는 그녀가 내민 손을 이리저리 오가며 몸을 비비고 있었다.
그 동화 같은 모습을 지켜보던 민우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셀린느 씨.」
살짝 놀란 셀린느가 손을 거뒀다. 놀란 것은 청설모도 마찬가지였는지, 민우 쪽을 째릿 바라보더니 잔디밭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이런. 미안해요. 제가 방해를 했네요.」
「아뇨.」
잠시 어색한 기운이 돌았다.
셀린느가 몸을 일으킨 건 바로 그때였다. 숙소로 돌아가려는 걸까. 하지만 그녀는 출구 쪽으로 이어진 대로로 가지 않고, 민우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민우의 바로 옆에 앉았다.
「어제 스톤 교수님 테이블에서 왜 그랬어요? 그냥 듣고 가도 그만인 자리였는데, 굳이 나서서 다른 사람들과 논쟁을 벌일 필요가 있었을까요.」
여전히, 그녀의 학문적 무기력증은 계속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민우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원래 테이블 세미나라는 게 그런 거 아닌가요?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서로 토론을 벌이는 거. 전 그 룰에 충실히 따랐을 뿐이에요.」
「민우 씨는 마이너리티잖아요.」
그때 발 쪽에서 이질적인 감각이 느껴졌다.
내려다본 민우는 싱긋 웃었다. 아까 잔디밭으로 도망갔던 청설모가 몰래 다가와 있었다. 앞발을 모으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귀여웠다. 먹이라도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민우가 빈손을 내밀며 물었다.
「셀린느 씨가 말하는 마이너리티는, 뭐 유명하지 않은 대학, 지역, 인종 이런 걸 말하는 건가요?」
「솔직히 말하면 그래요.」
「보이지 않는 차별이 있었던 건 사실이에요. 공항에서도, 호텔에서도 몇 번 겪었죠.」
민우는 청설모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훑고는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셀린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간단하게 생각했어요. 내가 이 뉴욕에, 소르본의 밤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고. 어쩌면 그게 실존주의 철학에서 말하는 ‘존재’가 아닐까요? 정해진 답은 없겠지만 내 스스로의 존재를 긍정하는 게 가장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나조차도 나를 마이너리티라고 생각한다면 답이 없는 거니까.」
민우를 바라보는 셀린느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민우 씨는……」
셀린느는 말을 잇지 못했다. 청설모가 자신의 발치로 옮겨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랑느 박사에게 귀가 닳도록 들은 사람이다. 실제로는 다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조금도 다른 게 없었다. 그는 지금도 치열하게 살고 있었다.
어제 ‘소르본의 밤’에서 민우가 좌장을 맡은 테이블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던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찾아오는 손님이 많지 않았는데도 포기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열심히 세미나를 이끌었다.
한두 사람을 위한 세미나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생각했는데, 그것은 오산이었던 것 같다. 그는 전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더 높은 곳을.
민우가 멋쩍게 웃었다.
「하하하. 저도 아직 석사 3학기라 남한테 이래라저래라하는 게 좀 웃기긴 하지만요. 재밌지 않아요? 공부하는 거.」
「……」
「프랑스에선 어떤지 모르겠는데 한국에서는 굉장히 힘들거든요. 인문학이라는 분야 자체가, 아까 셀린느 씨가 말한 것처럼 마이너리티한 분야죠.」
「그런데 민우 씨는 왜 계속 공부를 하죠?」
민우는 알 수 있었다. 자신에 대해 묻는 게 아니라고. 그 질문을 통해 스스로의 의문을 해결하려는 것이다.
과연 출구 없는 미로를 헤매고 있는 그녀에게 출구를 만들어 줄 수 있을까?
민우는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에서 하나의 실마리를 찾았다.
「혹시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이라는 영화 봤어요?」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자 민우는 그게 한국판 제목임을 깨닫고 질문을 바꿨다.
「< Attila Marcel >이요. 2013년에 개봉한 영화인데.」
「봤어요.」
「다행이네요.」
민우는 그 영화의 한 장면, 진한 갈색 테이블 위에 놓인 쪽지 하나를 떠올리며 계속 말했다.
「전 그 장면이 계속 기억에 남더라고요. 마담이 폴에게 작은 쪽지를 남겼던 장면이요. 혹시 기억나요?」
「Vis ta vie.」
「맞아요. 네 삶을 살라는 뜻이죠.」
민우는 대학원 진학을 결정한 그때를 떠올렸다. 지인들은 하나같이 말렸다. 자신의 선택을 존중해 준 사람은 가족들과 서지훈 교수밖에 없었다.
「제가 공부를 하겠다고 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철없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억울하잖아요. 하나뿐인 인생인데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아야지.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있나 싶어서요.」
민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셀린느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래서 저는 이 자리에 있게 됐어요. 박사학위도 없고, 백인도 아니고, 아이비리그 학생도 아니지만…… 나름 제 삶을 찾아가고 있어요.」
「…….」
「그럼 이제 제가 물을 차례네요. 셀린느 씨의 삶은 무엇인가요?」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싱긋 웃은 민우는 가방을 챙기고 베데스다 분수를 빠져나왔다. 대답을 듣고 싶어 물은 건 아니었으니까.
쏴아아―
때마침 물의 천사가 축복을 하듯 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 * *
민우는 미셸과 함께 컬럼비아대학으로 이동했다. IAHS 학회가 열리는 메인 홀은 이미 인파가 가득했다. 등록 부스에 사람이 줄을 서 있었다.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민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좀 일찍 올 걸 그랬네요.」
「아직 오프닝 세레머니 시작하려면 시간이 좀 남았으니까 괜찮아요. 일단 등록하고 주는 거 챙기고 나서 합류하죠.」
「랑느 박사님은요?」
「키노트 스피커라서 이미 안에 들어가 계세요.」
「셀린느 씨도 안 보이네요.」
「몸이 안 좋아서 호텔에서 쉬겠대요.」
고개를 끄덕인 민우는 줄을 섰다. 미셸의 친절한 설명 덕에 학회 등록은 어렵지 않았다. 가방을 받아들고 나와 내용물을 살폈다.
‘안내지, 명찰, 스케줄표…… 응? 이건 사은품인가.’
케이스를 열어 보니 볼펜 세트가 들어 있었다. 종류별로 다양했다. 꽤 비싸 보였다. 무심결에 케이스를 뒤집어 본 민우는 깜짝 놀랐다.
‘센트럴 북스에서 후원했나 보네.’
멋들어진 센트럴 북스의 로고가 박혀 있었다. 그것 말고도 다른 기업들의 사은품이 끼어 있었다.
민우는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핸드폰을 꺼냈다.
‘우선 앱을 깔자.’
민우는 안내지를 꺼냈다. 등록 부스 직원이 안내지를 보고 어플리케이션을 다운받으면 보다 편리하게 세션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민우는 매뉴얼대로 따라 해 앱을 다운받았다. 그때 미셸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함께 들을 세션을 정리했다.
「민우는 뭐 듣고 싶어요?」
「잠시만요.」
앱을 실행시키니 학자의 이름과 논문이 테마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스크롤을 내려 보던 민우가 흠칫 놀랐다.
‘어? 조너던 캠벨?’
작년 여름, 민우의 대학원 생활을 극적으로 바꿔준 그 주인공이었다. 민식의 박사논문에 이론적 배경을 제공해 줬던 그 사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민우가 세션을 클릭하더니 백팩을 열었다.
「민우. 갑자기 왜 그래요?」
「기다려 봐요.」
민우가 꺼낸 것은 책 한 권.
작년에 민식과 공저한 <신화와 인간: 소설의 신화적 상상력>이었다. 그는 맨 앞장을 펼치더니 서명을 하기 시작했다.
받는 사람의 이름은 조너던 캠벨이었다. 미셸은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은 눈으로 민우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이 책으로 캠벨 박사와 접점을 만들어 보는 거야. 할 수 있을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현실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