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0. 아포리아(aporia) (2) (160/500)


160. 아포리아(aporia) (2)
2022.02.07.


그 테이블의 좌장은 예일대의 스톤 교수였다. 뿔테 안경을 쓴 백인이었는데, 높은 코와 예리한 눈매가 인상적이었다.

민우는 합석 전에 미셸에게 스톤 교수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들었다. 현대철학 분야에서 꽤 이름이 있는 사람이라고.

‘한마디로 일석이조야.’

셀린느의 ‘출구 없는 미로’라는 말의 의미도 궁금했지만, 스톤 교수의 세미나에서 뭔가 얻을 게 많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실존주의 소설은 사르트르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 계보를 따지면 사르트르는 하이데거 철학에 영향을 받았고.’

민우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어쩌면 내 연구를 질적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몰라.’

그런 기대감에 휩싸였지만, 테이블에 앉아 핸드아웃을 읽기 시작한 민우는 곧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뭐야 이건?’

민우가 기대하던 내용이 아니었다. 제목과 내용이 너무나 달랐다.

‘철학적 접근이 아니라, 하이데거와 히틀러 정권과의 관계를 서술한 다른 사람들의 저작을 위주로 이야기를 하고 있네. 주제랑 거리가 좀 먼 거 아냐?’

민우는 테이블 스탠드에 걸려 있는 이 세미나의 타이틀을 다시 확인했다.

― 하이데거 철학의 비판적 접근

‘어디에 하이데거 철학이 있다는 거야.’

민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함정에 빠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민우는 섣불리 평가를 내리지 않았다. 핸드아웃에 준비된 것과 스톤 교수가 실제로 말하는 것은 다를 수 있으니까.

민우는 스톤 교수와 합석한 다른 학자들의 입을 주목하며 대화의 맥을 파악했다.

곧 결론이 나왔다.

‘이건 세미나가 아니라 호사가들의 모임인데?’

한마디로 ‘소르본의 밤’과는 어울리지 않는 무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하이데거 철학이 아니라 과거 행적에 더욱 관심을 보였다. 주로 히틀러와의 관계를 조명한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다들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던 것인지 반론이나 다른 의견을 내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를 좌장인 스톤 교수가 한번 정리했다.

「맞아요. 맞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탈 나치화 작업을 할 때 독일에 자크 라캉이 없었더라면 하이데거는 철창행을 피하지 못했겠지요. 하하하.」

사람들도 따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철학을 전공했다던 셀린느는 예외였다. 그녀는 완벽한 방관자였다.

호텔 직원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빈 글라스에 와인을 채웠다. 그때 스톤 교수의 반대편에 있는 노년의 학자가 말을 이어 나갔다.

「확실히 하이데거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잡담 같은 장난스러운 문장이라고 폄하하는 사람도 있고, 시인이나 문헌학자로 평가하는 사람도 있지요. 과거 행적에 대해 ‘수동적 방관자’라고 자평하기도 했고. 2014년이었던가요? <검은 노트>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출간됐을 때는 세계가 꽤 놀랐죠.」

「그렇습니다. 영국의 어떤 일간지에서는 하이데거 철학의 종언이라는 카피를 쓰기도 했었죠?」

민우도 얼핏 들은 바가 있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출간된 <검은 노트>에는 두 쪽 반 정도로 반유대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말 그대로 유럽 학계를 중심으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책이었다.

테이블에 모인 학자들은 그 책에 대해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잠시 관심을 끈 민우는 루카치의 만년필을 꺼냈다. 그리고 노트에 불어로 짧게 한마디를 적어 셀린느에게 보여주었다.

― 재미없네요. 셀린느 씨는 어때요?

그걸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셀린느가 펜을 들어 필담에 참여했다.

― 원래 이런 모임이에요. 하이데거 비판론자들의 모임이죠.

― 전 재미있는지 없는지를 물었는데.

― 모르겠어요.

민우는 잠시 생각하다 신중히 두 문장을 적었다.

― 하나 궁금한 게 있어요. 이 자리도 셀린느 씨에게 ‘출구 없는 미로’ 같은 건가요?

셀린느가 펜을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는 차가운 표정으로 펜을 거뒀다.

민우는 안경을 벗었다.

‘그런 거였구나.’

미셸이 말했던 학문적 무기력증이 무엇인지 감을 잡았다. 표현만 다를 뿐이지 한때 자신도 겪었던 그런 증상이었다.

‘인문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고민하는 그것들.’

논문을 써도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고, 이론들이 허무맹랑해 보인다. 현실과 학문 사이에 괴리가 커지는 순간 허무감이 밀려오는 것이다.

셀린느는 그 시기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민우는 학부 시절에 경험했고, 잘 극복해 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공부를 그만두는 사람도 있다.

민우는 빙긋 웃으며 한 단어를 적었다.

― Aporia.

메모를 셀린느 앞으로 밀어두고 민우가 대화에 슬쩍 끼어들었다.

「한나 아렌트는 하이데거의 철학을 두고 이렇게 말했죠. ‘사유가 다시 살아났다. 죽었다고 믿었던 과거의 지적 보화가 말하기 시작했다’라고.」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민우를 향했다. 갑작스러운 난입이 반갑지는 않은 듯했다.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오?」

「하이데거 탄생 80주년을 기념하여 그녀가 <메르쿠어>에 실은 글의 일부입니다. 혹시 못 보셨나요?」

「시시한 이야기지.」

논쟁이 시작됐다.

메모를 바라보던 셀린느가 고개를 들었다. 민우는 외로이 서서 공격을 받아내고 있었다. 그녀의 눈매가 좁아졌다.

‘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노년의 학자가 여유롭게 나섰다.

「젊은 친구. 당신은 하이데거의 과거 행적을 미화하려는 건가? 안타깝게도 하이데거와 한나 아렌트와의 사적인 관계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은 여기에 없지.」

「미화하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들처럼 비판적인 위치에 서 있는 편이죠. 제 조국도 비슷한 경험을 했으니까요.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의 근대기도 꽤나 치열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들은 바가 있소. 일본의 지배를 받았었지. 전쟁도 겪었고.」

「잘 알고 계시네요. 마치 동포를 만난 듯한 기분인데요?」

민우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는 정색하며 스탠드에 걸린 세미나 제목을 펜으로 가리켰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제가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여러분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문제입니다. 형식상의 문제랄까요. 하이데거 철학의 비판적 접근이라는 테마라서 흥미가 갔는데, 막상 오니 전혀 다른 이야기가 오가는 것 같아서 말이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요?」

좌장인 스톤 교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모두가 공격적인 기색을 보였는데도, 민우는 어깨를 펴고 그에게 충고하듯 한마디 했다.

「타이틀을 좀 손봐야 하지 않을까요? 하이데거와 나치즘의 상호관계 정도로. 뭐 제목만 보고 혹했던 제 탓도 있겠지만, 만 킬로미터 넘게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는데 뜻하지 않게 시간을 낭비했다는 사실이 좀 속상하긴 해요.」

「으음.」

스톤 교수가 침음을 흘렸다. 너무 편하게 세미나를 진행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민우가 이어 말했다.

「저도 하이데거의 과거 행적이나 여성 편력에 대해 들은 바가 있습니다. 여기 앉아 있는 셀린느는 저보다 잘 알고 있겠죠. 전공자니까. 그쵸?」

민우의 돌발 질문에 셀린느가 살짝 놀랐다. 그녀는 민우를 바라보기만 했다. 대답을 원한 것은 아니라 민우가 계속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 목적은 좀 달랐어요. 그리스 시대로부터 찬란한 역사를 이어온 형이상학이 하이데거에 이르러 왜 극복되었을까. 저는 인문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그 궁금증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고 싶어서 온 겁니다. 교수님이 가진 이름의 무게도 있어서 좋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네요.」

셀린느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뚜렷한 생기. 한마디로 드라마틱한 변화였다. 그 사이 민우는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좋은 시간 나누시길.」

「잠깐.」

스톤 교수가 따라 일어섰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가까이 다가왔다.

「내가 이 자리를 너무 편하게 만든 것 같군요. 사과하지요. 사실 세미나라기보다는 다과회에 가깝소. 다들 내 친구들이거든.」

필담을 통해 이미 어떤 분위기인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민우는 모른 척 웃었다.

「그러셨군요. 제가 너무 진지하게 들었나 봅니다. 소르본의 밤은 처음이라서요.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방해는 무슨. 처음이라면 그럴 만도 하지. 가끔은 이렇게 허물없는 이야기도 나오곤 하지요. 정식 학회는 아니니까. 아마 그 부분에서 사소한 오해가 생긴 것 같은데…… 그런데 누구의 추천을 받아서 왔는지요?」

「피에르 랑느 박사님입니다.」

「아아, 랑느의 지인이셨군.」

스톤 박사가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 그가 새삼스럽게 악수를 청했다. 민우는 손을 거절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온…… 누구라고 했지요?」

「박민우입니다. 명인대에서 현대문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스톤 교수는 민우의 명함을 받아 품에 조심스레 넣었다. 그리고 자신의 명함을 꺼내 펜으로 뭔가를 적었다. 객실 번호였다.

「하이데거 철학에 관심이 있다고 했지요? 내가 비판론자이긴 해도 그의 철학은 잘 이해하고 있지. 학회가 끝나는 날 밤 내 숙소에 잠시 들러주시길. 오늘 하지 못한 이야기를 마저 나눠봅시다. 아마 그때는 당신이 원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겁니다.」

민우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사실 민우는 일부러 세미나의 형식에 대해 지적했다. 좌장이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다른 방법으로 자신에게 접촉해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쨌든 자신이 한 말은 정론에 가까웠으니까.

그리고 셀린느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없다고. 출구 없는 미로는 환상일 뿐이라고.

다른 관점이나 방법으로 새롭게 시작한다면 얼마든지 원하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민우가 노트에 마지막으로 적은 ‘아포리아’라는 말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었다. 포기하고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출발점이라는 철학적인 의미에서 말이다.

민우가 명함을 챙기며 물었다.

「교수님. 제 친구와 함께 가도 됩니까?」

「편하게 스톤이라고 불러요. 몇 명이든 좋습니다. 와인은 충분히 준비해 놓지요.」

「그럼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민우는 곧 자리를 떴다. 스톤 교수가 스탠드를 철거하기 시작했다. 앉아 있던 사람들도 다른 테이블로 뿔뿔이 흩어졌다.

민우는 왠지 자기 때문에 테이블이 없어진 것 같아 미안했지만, 한편으로는 속이 시원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했으니까.

잠깐 속도를 줄여 셀린느와 나란히 걸었다.

「셀린느 씨도 학회 끝나고 같이 갈래요?」

「어딜요?」

「스톤 교수님 객실에요. 혼자 가기는 좀 무서워서. 미셸한테도 말해 볼 테니 같이 가요.」

가만히 민우를 바라보던 셀린느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메모 때문일까. 귀찮고 지쳐 있던 얼굴이 조금은 풀려 있었다.

바로 그때.

「흐흐흐. 여우같은 회의론자들의 테이블을 한 방에 부수다니. 재밌는 친구야. 정말.」

모든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제임스 마렛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오래가지 않았다. 곧 불만이 섞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 제임스! 대체 어딜 가신 겁니까? 왜 오늘 회사에 나타나지 않은 거죠?

「뉴욕에 있으니까 못 갔지.」

― 세상에. 말도 없이 다른 회사로 이직하신 건 아니죠?

「하하핫. 농담이 지나친데?」

전화를 받은 사람은 센트럴 북스의 알렉산더 콕스였다. 한숨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제임스는 상황을 설명했다.

「중간에 한국에 들르느라 일정이 밀렸지. <더 위자드> 계약 문제 때문에 말이야.」

― 한국에까지? 출장비 상한선에 대해서는 설명을 들으셨죠?

「걱정 마. 뉴욕에 올 때는 이코노미에 앉았어.」

― 와아. 그건 또 그거대로 충격이네요…….

피식 웃은 제임스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시선은 민우를 향해 있었다.

「이봐. 혹시 한국의 골든북스 관계자가 아직 LA에 있나?」

― 내일까지는 있다는군요. 안 그래도 오늘 와서 편집장님 찾았어요.

「내일 당장 담당자 출판사로 불러서 계약서 수정해.」

― 어떻게요?

「번역가 박민우 씨를 계약 조건에서 빼는 걸로.」

수화기 너머에서 침묵이 시작됐다. 제임스가 ‘헬로우?’라고 말하자 반응이 왔다.

― 제임스. 혹시 취한 건 아니죠? 번역가의 중요성은 제가 누누이 말씀을…….

「그런 시시한 거 할 시간 없어.」

그렇게 운을 뗀 제임스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는 더 재미있는 사람이야. <더 위저드> 같은 거 번역하는 데 시간 낭비할 틈이 없다고. 네가 좋아하는 게임도 그렇잖아. 확장팩이 나왔는데 오리지널을 붙들고 있을 이유 있나?」

용건을 마친 제임스는 전화를 끊었다.

민우는 미셸, 셀린느와 함께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제임스는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가뿐한 걸음으로 홀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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