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9. 아포리아(aporia) (1) (159/500)


159. 아포리아(aporia) (1)
2022.02.04.


민우는 ‘소르본의 밤’의 규모에 살짝 놀랐다. 대학 동문 모임이라 무대가 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잘못 짚었다.

‘이건 웬만한 국내 학회보다 더 크잖아?’

은은한 음악 소리와 함께 수많은 사람들이 홀 안에 운집해 있었다.

테이블은 넉넉했다. 커다란 원형으로 열두 명이 앉을 수 있었는데, 자연스럽게 둘러앉아 세미나를 진행할 수 있을 듯했다.

세계 각국에서 온 소르본 동문과 초청 인사들이 앉아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이 많은 만큼 동양인들도 가끔 보였다.

「미스터 박! 여기.」

구석 쪽 테이블에서 랑느 박사가 손을 흔들었다. 민우와 미셸은 그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민우가 꾸벅 인사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박사님. 외출이 생각보다 길어져서요.」

「하하하! 그런 사소한 건 접어 두시오. 이제 막 시작했는걸. 그런데 뉴욕 거리는 어땠소? 해외여행은 처음이라고 들었는데.」

「무척 즐거웠습니다. 볼 게 상당히 많더군요. 머리가 탁 트이는 느낌이었어요.」

민우는 오후 시간에 뉴욕 거리를 활보했다. 미리 준비해 온 경로로 이동하며 관광 명소에 들렀다. 스마트폰을 이용하니 길을 잃을 염려도 없었다.

생각의 폭이 넓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해외여행을 하는가 싶기도 했다.

「새로운 것을 보는 건 생각의 크기에도 영향을 미치지. 가능하면 여유를 갖고 돌아다녀 보도록 하시오.」

그렇게 말한 랑느 박사는 옆에 앉은 사람을 주목했다. 처음 보는 여자였지만 민우는 그녀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초면인 것 같은데. 인사들 하지. 이쪽은 내 제자인 셀린느요.」

「반갑습니다. 박민우입니다.」

민우는 그녀를 향해 조심스럽게 인사했다. 동시에 오늘 오전 랑느 박사가 그녀의 이야기를 할 때 고개를 가로젓던 이유를 생각해봤다.

‘생기가 없어 보이네. 마치 말라가는 사람 같다.’

셀린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피부는 창백했고, 두 눈은 깊은 우울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 그럴까. 레몬빛 단발의 미인이었지만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마치 시들어가는 꽃 같았다.

셀린느가 입을 열었다.

「민우 씨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셀린느예요.」

「좋은 얘기였길 바랍니다.」

민우가 웃으면서 농담을 했지만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살짝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마침 타이밍 좋게 랑느 박사가 박수를 한 번 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자, 일단 앉아서 식사들 하지. 아 참. 미스터 박. 준비해 온 핸드아웃은 저쪽 테이블에 올려놓으면 돼. 여기에서 사용할 여분을 남겨두고.」

랑느 박사가 가리킨 곳에는 형형색색의 프린트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민우는 잠시 실례의 말을 남기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업체를 통해 인쇄된 것을 시작으로 다양한 핸드아웃이 놓여 있었다. 민우는 에코백에서 핸드아웃을 꺼내 한쪽 구석에 놓았다.

하지만 민우는 선뜻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심리학, 철학, 문학, 고고학에 미술사, 과학사까지…… 정말 없는 게 없구나.」

마치 학문을 위한 백화점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자유로운 방법으로 지식을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민우는 핸드폰을 꺼내 이 장면을 사진에 담았다.

「우리 쪽 학회에도 이런 걸 도입하면 참 좋을 텐데. 나중에 써먹어야지.」

촬영을 끝낸 민우는 핸드아웃을 하나씩 들춰보았다. 대부분 영어로 쓰였고, 간혹가다 프랑스어로 적힌 것들도 있었다.

미술사나 예체능에 관련된 것들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문학과 철학에 관련된 것들은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프랑스 고전주의 시대의 문학을 다뤘구나. 국내에서 접하기 쉽지 않은 자료인데. 좀 챙겨가야겠다.」

민우는 제법 두께가 있어 핸드아웃이라기보다는 소책자에 가까운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서강일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한 부 더 챙겼다.

「강일이도 비교문학을 하니까 도움이 되겠지. 하나 더 챙기고.」

민우는 철학과 문학, 그리고 과학사를 다룬 것들을 에코백에 담았다. 당장 그 자리에 앉아 정독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테이블로 돌아왔다. 어느새 음식이 깔려 있었다.

랑느 박사가 물었다.

「이것저것 보는 거 같던데. 무엇을 챙겼나?」

「프랑스 고전주의에 관한 페이퍼하고, 계몽주의 시대 과학사를 다룬 걸 가져왔어요. 하이데거 철학의 비판적 접근이라는 테마도 있네요.」

하이데거라는 말에 셀린느의 눈이 살짝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곧 그 빛은 사그라졌다.

「관심 있는 분야의 자료를 보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기분 전환을 할 필요도 있겠지. 이따 식사 후에 차분히 가서 다시 살펴보는 건 어떤가?」

그 말을 듣고 보니 너무 입맛에 맞는 자료만 챙겨온 것 같았다. 마치 제과점에 들어온 아이처럼, 무엇을 먹을지 몰라 고민했었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이따 식사 끝나고 다시 가봐야겠어. 하나하나 꼼꼼히 보고 골라야지.’

랑느 박사가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여기 음식은 맛있기로 유명해. 와인도 한잔하면서 묵혀 뒀던 이야기를 나눠보세.」

식사가 시작되었다. 식사라기보다는 간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분위기. 민우는 랑느 박사와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랑느 박사는 최근 프랑스 문학의 동향을 간략하게 짚어 주었다. 그 와중에 미셸이 치고 들어와 자연스럽게 토론 분위기가 형성됐다.

어느새 민우는 주도권을 내려놓고 랑느 박사와 미셸의 토론을 경청했다.

랑느 박사는 신중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셸의 의견을 들었고, 인정하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구분하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민우는 부드러운 스테이크를 씹으며 두 사람이 연출하는 장면에 빠져들었다.

‘제자가 아니라 동료 같은 느낌인데? 역시 문화가 좀 다르긴 해.’

한국에서는 쉽게 생각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물론 최근 명인대에 젊은 교수들이 임용되면서 분위기가 바뀌어 가고 있긴 하지만,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감히 어느 누가 지도교수의 말에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겠는가.

민우는 그들의 대화를 귀로 담으며 잠시 눈을 힐끗했다.

‘셀린느 씨는 한마디도 안 하네. 사이가 나빠 보이는 건 아닌데…… 왜지?’

궁금증이 들었다. 민우는 잠시 대화에서 신경을 끊고 그녀에게 조용히 물었다.

「셀린느 씨는 소르본에서 뭘 전공하죠?」

「철학이요.」

「그래서 아까 하이데거 이야기를 했을 때 관심을 보였던 거군요.」

셀린느가 살짝 놀란 기색을 보였다. 표정의 변화는 거의 없었지만, 느낌상 그랬다.

그런데 그때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근데 랑느 박사님 전공은 문학 아닙니까?」

「그건 왜요?」

「제자라는 말씀을 들었는데 철학을 전공한다고 하시니 좀 의아해서요.」

셀린느가 들고 있는 와인 잔을 빙글 돌렸다. 진한 보랏빛의 액체가 시계방향으로 흔들렸다.

「교수님의 세미나에는 전공의 구분이 모호해요.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누구나 목소리를 낼 수 있죠. 그게 소르본의 이념이기도 하고.」

「그렇군요.」

셀린느는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지 와인 잔을 입에 대고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식사가 끝나고 티타임이 시작됐다.

분위기가 산만해지자 민우가 살짝 긴장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미셸이 웃으며 설명했다.

「세미나로 이어지기 전에 차를 즐기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 시간이에요.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이 꽤 많죠. 저랑 교수님처럼 말이죠.」

「아, 그렇군요.」

랑느 박사는 유명인인 만큼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결국, 랑느 박사는 테이블을 옮겼고, 셀린느도 어디론가 자리를 비웠다. 민우와 미셸만 테이블에 남았다.

「근데 미셸. 셀린느 씨말인데요.」

그때 뒤에서 누군가 다가왔다. 그림자가 드리워져 민우는 하려던 말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깜짝 놀랐다.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남자는 분명 센트럴 북스의 제임스 마렛이었다.

「제임스 씨!」

「의심의 눈빛은 그만. 비행기에서는 그렇다 쳐도 여기에 있을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진짜예요.」

제임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민우는 일어서서 그에게 물었다.

「그러는 제임스 씨는 여기에 어떻게 오신 겁니까?」

「여기보다 훌륭한 비즈니스 장소는 없으니까요. 센트럴 북스에서 책을 낸 분들이 많습니다. 초대장이야 쉽게 구할 수 있지요. 무엇보다도 나도 문학박사 학위 정도는 가지고 있고요.」

「제임스가 센트럴 북스의 편집장이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네요.」

그래도 대단한 수완이라고 생각했다. 제임스는 프린트물을 한번 흔들어 보이고는 씨익 웃으며 자리를 떴다. 민우가 준비한 핸드아웃이었다.

그 미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잠시 고민하는 사이 미셸이 팔을 툭 쳤다.

「저 사람이 진짜 센트럴 북스의 편집장이에요?」

「맞아요. 제임스 마렛.」

「와우, 민우는 한국에서 꽤 유명한 사람인가 보네요!」

「전혀요. 어쩌다 보니 알게 됐어요.」

「어쩌다가 아닌 거 같은데?」

민우를 바라보는 미셸의 눈빛이 좀 달라졌다. 편한 친구를 바라보는 느낌에서 약간의 존경심이 더해졌다.

「그런데 민우. 아까 셀린느 이야기는 왜요?」

「아, 그게요. 원래 저렇게 무뚝뚝한 분인가 해서. 우울해 보이기도 하고요. 랑느 박사님도 뭔가 걱정하시는 것 같은 눈치고.」

「이야기가 좀 길죠. 셀린느는 학문적 무기력증이라고 해야 하나…… 거기에 빠져 있어요.」

「학문적 무기력증이요?」

민우는 문득 그런 병이 있나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처음 듣는 단어의 조합이었다.

「본인의 입을 표현하자면 출구 없는 미로에 갇혀 있죠. 학문을 하는 동기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랄까. 뭔가 활력을 주려고 랑느 박사님이 직접 챙기시고 있는데 영 효과가 없는 거 같네요. 전 염세주의를 떠올리면 쇼펜하우어가 아니라 셀린느가 생각날 정도예요.」

그때 종소리가 한 번 울렸다. 티타임이 끝났다는 의미였다. 그 소리에 맞춰 수많은 학자들이 하나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미셸이 씨익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부터가 진짜 소르본의 밤입니다. 민우. 핸드아웃 제목 인쇄해 왔죠? 여기다 걸면 돼요. 그럼 사람들이 보고 찾아올 거예요.」

「알았어요.」

민우는 테이블 위에 놓인 기역자 모양 스탠드에 종이를 걸었다.

「자, 이제 어떤 손님들이 오나 지켜보자고요.」

「미셸은 여기 있게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민우는 내심 미셸의 배려가 고마웠다. 혼자 있는 것보다는, 많이 가까워진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는 게 도움이 되니까.

얼떨결에 좌장이 된 민우가 세미나를 준비했다. 아직 이쪽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없었다.

「아무나 한 명 오면 바로 시작하면 돼요. 저는 그냥 옵션이라고 생각하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듯 진행하는 게 포인트죠.」

「알았어요.」

그때 배가 나온 중년 사내가 커피를 들고 민우의 자리에 합석했다. 첫 손님이었다.

「한국 소설과 실존주의라니! 이거 소르본의 밤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흥미로운 조합이군요. 이야기를 좀 들을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세미나가 시작되려는 그때, 멀리 떨어진 곳에서 민우의 모습을 바라보는 시선 두 개가 있었다.

제임스 마렛과 셀린느였다.

두 사람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전혀 다른 목적으로 그 테이블을 응시하고 있었다.

* * *

‘두 명이라. 성공이라고 하기도 실패라고 하기도 애매한 숫자네.’

민우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핸드아웃을 정리했다. 세미나는 모두 끝났고, 가볍게 의견을 교환한 두 학자들은 자리를 떴다.

그래도 민우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거니까.

「의외네요.」

「뭐가요?」

「사람들이 별로 안 와서 주눅들 줄 알았는데.」

민우는 싱긋 웃는 여유를 보였다. 세미나가 끝나니 긴장이 풀렸던 것이다.

「전 여기에 참석한 것만으로도 만족해요. IAHS 학회도 남아있고. 기회는 앞으로도 충분하니까.」

민우가 스탠드에서 종이를 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깜짝 놀란 미셸이 따라 일어섰다.

「어디 가려고요? 좀 더 기다려보는 게 좋지 않나? 사람들이 더 올 수도 있잖아요.」

「이제 저도 다른 세미나에 껴야죠. 마침 관심 있는 테마가 하나 생겨서요.」

민우는 고개를 돌려 아직 한창 이야기가 오가는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셀린느가 그곳에 앉아 있었다.

‘출구 없는 미로라고 했지? 그게 무슨 의미일까?’

민우는 그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셀린느의 옆에 앉으며 자연스럽게 토론에 참여했다.

보통은 대화를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가지만, 테이블에 있던 사람들은 낯선 동양인의 등장에 흥미를 가진 모양이다.

「반갑소.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디서 오셨소?」

「명인대학교의 박민우입니다. 한국에서 왔어요.」

「오, 한국. 멀리서 오셨군.」

분위기가 다소 풀어졌다. 하지만 민우는 테이블 옆에 놓인 핸드아웃을 하나 집었다. 그리고 말했다.

「자, 계속하시죠.」

그 순간, 민우의 품 안에서 루카치의 만년필이 푸른빛을 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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