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새로운 인연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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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새로운 인연들 (2)
2022.02.03.
민우는 미셸과 나란히 걸었다. 친절하게도 그는 가는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설명해 주었다.
마음이 놓여서 그럴까. 급격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래도 민우는 폐를 끼치기 싫어 꿋꿋이 걸었다.
곧 주차장이 나타났다.
「차를 가져 왔나요?」
「빌렸어요. 집이 좀 멀어서.」
미셸은 차 키를 흔들어 보이며 빙긋 웃었다. 곧 두 사람은 차에 올랐다. 고급 세단은 아니었지만 시트의 푹신함이 너무 좋았다.
마치 고향에 돌아온 듯한 느낌에 민우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탄성을 내질렀다.
「와…… 조수석이 이렇게 편한 곳인 줄은 몰랐네요.」
「하하하. 정말 피곤했나 보네. 호텔로 바로 갈 거죠?」
「일단은요.」
비행기에 타기 전에는 도착하자마자 여기저기 돌아다닐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비행기에서 내리니 그런 생각이 싹 사라졌다. 푹신한 침대가 떠올랐다.
민우는 슬슬 눈이 감기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엔진음이 울리고 차가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미셸이 전방을 주시하며 말했다.
「피곤하죠? 의자 좀 뒤로 젖히고 쉬어요. 호텔까지는 40분 정도 걸릴 거예요. 근데 한국에서 여기까지 얼마나 걸렸어요?」
「15시간 정도 걸린 거 같아요.」
「허.」
미셸이 혀를 내둘렀다. 상상하기도 싫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민우는 미셸의 호의에 감사하며 조수석 의자를 뒤로 살짝 젖혔다.
민우는 문득 궁금한 게 떠올라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미셸. 제 강의 동영상을 봤다고 했죠? 랑느 박사님이 추천을 해 줘서.」
「그렇죠.」
「자막이 없었을 텐데 끝까지 봤어요? 한국어는 생소한 언어였을 텐데요.」
미셸은 카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그게 랑느 교수님 스타일이거든요. 제자들을 궁금하게 만들어요. 한국어를 잘 아는 친구들을 동원하든 뭘 하든 해야죠. 자료를 읽고 이해하는 건 우리들의 몫이니까. 안 그래요?」
「네에……」
「다행히 제가 있는 버팔로엔 한국 학생들이 많아요. 저녁 한 끼로 도움을 얻었죠. 하지만 역시 기회가 된다면 한국어도 공부를 해보고 싶네요. 발음이 조금 힘들지만 한글은 언어학적으로 굉장히 의미 있는 문자잖아요. 그걸 쓰는 한국어는……」
잠시 말을 멈춘 미셸이 민우 쪽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입을 살짝 벌린 채 잠들어 있었다. 씨익 웃은 미셸이 액셀을 밟았다.
우드하벤(Woodhaven) 대로에 진입한 차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 * *
다음 날, 늦은 아침 반가운 손님들이 찾아왔다. 주인공은 랑느 박사와 미셸이었다. 민우는 랑느 박사와 악수하며 가볍게 포옹했다.
「박사님도 여기에 머물고 계시죠?」
「그렇소. 프랑스가 아니라 서운하지만, 이곳에서 다시 만나니 너무나 반갑군! 초대에 응해 줘서 고맙소.」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그건 제가 드려야 하는 말씀이죠. 덕분에 이렇게 편하게 머물 수 있어서 좋네요. 어젠 정말 잘 쉬었습니다.」
호텔 객실은 생각 이상으로 좋았다. 코튼향이 배인 큰 침대와 갈색 체크 커튼이 잘 어우러져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미셸도 고맙고요. 어제 미셸이 아니었으면 어쩌나 싶었어요.」
미셸은 대답 대신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활달한 성격이라 죽이 잘 맞았다. 랑느 박사는 객실 내부를 한번 둘러보더니 민우의 얼굴에서 시선이 멈췄다.
너무나도 해맑았다. 어제 15시간을 비행한 사람 같지가 않았다.
「시차 문제는 없었소? 쌩쌩해 보이는군.」
「비행기에서 밤새 논문을 다듬었거든요. 그래서 한숨도 못 잔 상황에서 뉴욕에 도착했어요. 미셸의 차를 얻어 탈 때부터 쭉 뻗었죠.」
「밤새 논문을?」
「박사님도 잘 아시는 논문입니다. 그걸 ‘소르본의 밤’에서 소개를 해보고 싶어서 정리했어요. 약간 디벨롭도 하고.」
랑느 박사가 흥미를 보였다.
말보다는 직접 보여주는 게 빠를 것 같아 민우는 마침 작업 중이던 노트북을 들고 왔다.
스크롤을 올려 제목을 확인한 랑느 박사가 빙긋 웃었다.
「아, 이 논문이었군. 국제비교문학회였던가? 한일대학교에서 열렸던.」
「맞습니다.」
「아직도 눈앞에 생생해. 당당하게 발표하고, 토론을 이어나가는 그 모습이…… 한국어는 몰라도 토론자를 압도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었지. 그때 통역을 해줬던 박진영 교수도 칭찬을 하던데.」
민우는 웃음을 터트렸다. IAHS 초청 소식을 듣고는 복통을 호소하던 서강일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웃음은 잠깐이었다.
그와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개월 뒤면 명인대에서 현대문학연구학회 하계 학술대회가 열리고, 그 무대에서 다시금 맞붙게 된다.
‘지금쯤 열심히 쓰고 있겠지. 어떤 논문을 들고나올지 기대되는데?’
한편 랑느 박사는 모니터에 집중하고 있었다.
민우는 핸드아웃을 영어로 만들었다. 그래서 랑느 박사가 읽기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2페이지를 소화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으음, 인상적이야!」
어설픈 영어가 아니라 제대로 된 영문이었기에 읽는 데 무척 편했다. 민우는 무엇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핸드아웃을 무척 잘 만들었군. 특히 용어의 전달력이 좋소. 소설을 하나 번역하더니 실력이 아주 많이 는 것 같은데?」
「어? 알고 계셨습니까?」
「자네의 궤적을 따라가는 게 요즘 추가된 내 취미 중 하나지. <태엽시계> 영문판을 구해서 읽어 봤는데 좋더군. 번역도 훌륭했지만 작품의 수준도 대단했소. 좋은 것에 좋은 것이 더해져 시너지가 극한으로 올라간 느낌이랄까?」
한마디로 극찬이었다. 민우는 부끄럽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를 바라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은 랑느 박사가 노트북을 돌려주었다. 대강 덮어 한쪽에 치워 두려고 했는데, 미셸이 나섰다.
「저도 잠깐 봐도 돼요?」
「얼마든지요.」
노트북을 받아 든 미셸은 재빨리 한쪽에 앉아 스크롤을 내리기 시작했다. 집중하는 모습이 민우와 어딘가 닮아 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랑느 박사가 말했다.
「‘소르본의 밤’에서 동료들에게 소개하기에 적당한 주제라고 생각해.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예상할 수 없지만, 미스터 박이 그걸 무서워하는 사람은 아니니 걱정 없겠지.」
「한국 문학에 대한 관심을 끌어내는 게 목표입니다. 지루하지 않게 프랑스 문학의 수용사도 조금 다뤄볼까 해요.」
「잘 생각했소.」
랑느 박사가 고개를 까닥했고, 민우가 물었다.
「그런데 보통 ‘소르본의 밤’엔 몇 명 정도 참석하나요?」
「때마다 달라서 뭐라고 확답은 못 해주겠는데…… 그건 왜?」
민우가 노트북을 가리켰다.
「좀 인쇄를 해야 할 거 같아서요.」
「많이 인쇄해서 나쁠 건 없지. 굳이 테이블에 합석하지 않아도 참고자료로 나눠주면 되니까. 넉넉하게 하시오. 한 100부 정도?」
「예. 감사합니다.」
모든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그들에게 자료를 나눠주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때 좋은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인쇄본 철을 할 때 명함을 같이 껴 넣어볼까?’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는 연구는 없다. 하지만 누군가는 자신의 연구에 관심을 가져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겼다.
연구 주제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이라면 명함을 보고 연락할 것이다. 그렇게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가면 분명 도움이 되리라.
‘명함 많이 챙겨오길 잘했네. 일 잘 풀리면 서지훈 선생님께 한턱 쏴야겠다.’
민우는 출발 전에 명함을 새로 팠다. 명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소속임을 알리는 명함으로. 서지훈 교수의 조언 덕분이었다.
「근데 박사님. 혹시 호텔에서 인쇄할 만한 곳이 없을까요?」
「컨시어지 데스크로 가서 부탁하시오. 내 이름을 대면 알아서 해줄 거요. 이 호텔은 우리들의 숙소이기도 하지만 ‘소르본의 밤’ 개최 장소이기도 하거든. 사무용품이 필요하다면 그쪽에 요청을 하시오.」
호텔 안내문을 읽은 터라 데스크를 찾는 데 크게 문제는 없었다. 민우가 머릿속으로 호텔 구조도를 떠올려 보려는 그때.
「그런데 말일세.」
「예?」
분위기가 좀 바뀌었다. 랑느 박사는 어느새 민우를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전에 한국에서 물어보지 못했던 게 하나 생각이 나서 말이야. 내가 작년에 보낸 논문을 적극적으로 인용하지 않은 이유가 있나?」
「그게…… 약간 사정이 좀 생겼었습니다.」
민우가 머뭇거리자 랑느 박사가 여유롭게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럼 나가서 천천히 들어볼까. 이봐, 미셸! 먼저 돌아가 있게. 셀린느 좀 불러내서 잘 챙겨 주고. 요즘 많이 핼쑥해졌어.」
「알겠습니다. 점심 전엔 오실 거죠?」
「그래야지.」
미셸은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고, 민우와 랑느 박사 두 사람은 자리를 옮겼다. 티 종류와 브런치를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랑느 박사는 자주 와봤는지 발걸음에 거침이 없었다. 적당한 자리에서 민우는 커피를, 랑느 박사는 홍차를 마셨다.
민우가 먼저 물었다.
「셀린느 씨는 누군가요? 함께 온 제자인가요?」
「그렇소. 소르본에서 함께 왔지.」
그렇게 운을 뗀 랑느 박사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뭔가 속사정이 있는 것 같은 그런 표정이었다.
「그보다 아까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해보지. 인용 문제에 대해서.」
「사실 지도교수님께서 충고를 해주셨습니다.」
「어떤 충고를?」
「제가 해외 이론에 너무 의존하고 있다고 하셨어요.」
턱을 괸 랑느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가 듣고 싶은 말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지도교수의 말에 따라 논문을 바꾼 것이오?」
「그건 아닙니다. 저 나름대로 깨달음이 있었어요. 제 베이스는 국문학이니까, 한국 문학과 이론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랑느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그를 만족시키기엔 충분했다.
그는 한국의 학문 풍토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다. 지도교수의 입김에 좌지우지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것이 기우에 그쳤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그래도 미스터 박은 이제 석사 3학기일 뿐이지.’
박사를 딸 때까지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그런 생각이 들수록 랑느 박사는 민우가 더욱 탐났다.
「무슨 일이든 중심을 잡는 건 중요하지.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 중심을 잡기가 대단히 어렵다고 들었소.」
「그렇죠. 아무래도.」
「만약 버티기가 어렵다면 프랑스로 건너오시오. 내가 버팀목이 되어 주지.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지만 가볍게 듣지 마시오. 내 제안을 받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거든.」
민우는 싱긋 웃으며 커피를 한잔 들이켰다. 소르본에서의 생활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나중에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오면 그때 말씀드려도 괜찮겠죠?」
「하하하. 물론. 하지만 이건 이거대로 참 애매하군.」
랑느 박사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민우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미스터 박을 소르본으로 오게 하려면 명인대에서 불운이 생기기를 빌어야 하니까 말이오.」
「일리가 있는 말씀이네요. 박사님의 지혜에 탄복했습니다.」
「뭐요?」
민우의 너스레에 랑느 박사는 시원하게 웃었다.
* * *
그날 밤, 미셸이 객실로 찾아왔다.
복장이 오전과는 좀 달랐다. 자유분방한 머리에 단정한 옷을 걸치니 언밸런스한 느낌이 났다.
「민우! 아직 준비 안 됐어요? 곧 시작할 텐데!」
「다 됐어요!」
민우는 수북이 쌓인 핸드아웃을 에코백에 쑤셔 넣었다. 거울 앞에 서서 복장을 체크한 다음 백을 들고 입구로 달려 나왔다.
운 좋게도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랑느 박사님은요?」
「벌써 내려가셨죠.」
「늦는다고 못 들어가거나 하지는 않죠?」
「그럴 리가. 빨리 오기나 해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두 사람은 리셉션 홀로 빠르게 걸었다. 곧 데스크가 나타났고, 직원 한 명이 등록을 진행하고 있었다.
「민우. 저기서 이름을 말하고 명찰 받고 들어가면 돼요. 요구사항이 있으면 말해도 되고요.」
미셸은 시범하듯 데스크에서 등록을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민우는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었다.
주변을 빙 둘러본 민우는 그 이유를 깨달았다. 데스크 근처에 있는 동양인은 자신밖에 없었다. 덜컥 긴장감이 들었다.
「그쪽 분도 성함을 알려주시겠어요?」
「헤이, 민우.」
미셸이 민우의 팔을 툭 쳤다. 깜짝 놀란 민우가 다시 데스크 쪽으로 돌아섰다.
「박민우입니다.」
「잠시만요…… 아, 여기 있군요. 명인대학교에서 오신 박민우 씨 맞죠?」
「맞습니다.」
「‘소르본의 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그제야 민우는 명찰을 받아 가슴에 달았다. 하지만 쉴 틈 없이 미셸이 채근했다.
「어서 가죠. 교수님께서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두 사람이 행사가 막 시작된 홀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