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새로운 인연들 (1)
(157/500)
157. 새로운 인연들 (1)
(157/500)
157. 새로운 인연들 (1)
2022.01.31.
첫 비행이라서 그런지 많이 긴장되었다. 출국 수속까지는 문제가 없었는데, 비행기에 오르고 나서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열네 시간 동안 잘 버틸 수 있을까?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시간 좀 내서 제주도라도 다녀올 걸 그랬네.’
보통은 먹고 자고 한다는데, 비행 경험이 전무한 민우는 노트북과 책 몇 권을 가져왔다. 마치 시험을 치르러 가는 사람처럼 학회 직전까지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민우는 한숨을 내쉬며 좌석을 찾았다. 짐을 놓고 자리에 앉았다.
‘마음 편히 먹자. 불편하면 될 일도 안 돼. 나도 지금까지 열심히 공부했으니까. 지금처럼만 하면 무사히 학회를 마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자기 암시를 하는 사이 누군가 등 뒤를 툭 쳤다. 민우가 깜짝 놀라 뒤돌아섰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헤이, 여기서 다시 볼 줄은 몰랐는데요?」
「제임스 씨!」
민우는 너무나도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분명 센트럴 북스의 편집장 제임스 마렛이었다.
어제 술을 진탕 마신 건지, 아니면 잠을 자지 못한 것인지 눈 밑이 퀭했다. 굉장히 피곤해 보였다. 하지만 그 개구쟁이 같은 미소는 여전했다.
「깜짝 놀랐잖아요. 이런 우연도 있네요.」
「후후후. 반쯤은 필연이죠.」
무슨 말일까. 민우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는 정답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런데 왜 그렇게 얼어 있어요? 겁먹은 가젤처럼.」
「첫 비행이라서 좀 떨리네요.」
「비행기 처음 타 봐요? 흐음, 생각보다 동체가 많이 흔들릴 겁니다. 특히 착륙할 때. 긴장하지 말고 심호흡해요. 그럼 좀 가라앉을 겁니다. 불편하면 스튜어디스 부르고. 어딘가 의사가 앉아있을지도 모르죠. 자신의 행운을 믿어요.」
「고맙습니다.」
이미 인터넷을 검색해 온 내용이었지만, 제임스의 입에서 다시 들으니 왠지 신뢰가 갔다. 민우는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런데 제임스 씨는 왜 이 비행기에 탔어요? 센트럴 북스는 캘리포니아에 있다고 들었는데.」
「정확히는 로스앤젤레스에 있지요. 원래는 바로 LA로 나가려고 했는데, 민우 씨가 IAHS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흥미가 생겼지 뭡니까.」
우연이라고 하기엔 뭔가 있어 보였다.
‘그래서 반쯤은 필연이라고 한 거구나.’
제임스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 그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민우 씨라는 사람에게도 흥미가 생겼고.」
「그거 뭔가 좀 위험하게 들리는데요.」
「하하핫! 난 이성애자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근데 자리는 여긴가?」
민우는 머쓱하게 맞다고 대답했다.
「아깝네. 난 저기 뒤쪽인데. 자리를 바꿀 수는 없으니 자세한 이야기는 내린 다음 나누도록 합시다. 숙소가 쉐라톤 호텔이라고 했죠? 어느 지역에 있어요?」
「타임스퀘어 쪽이요.」
지명만 알 뿐이었다. 타임스퀘어가 어디 있는지는 민우도 잘 모른다. 공항에 도착하면 랑느 박사의 제자가 마중을 나오기로 했다.
제임스가 손가락을 튕겼다.
「아하, 카네기 홀 쪽에 있는 거구나. 알았어요. 난 그 옆쪽인데, 시간 맞으면 한번 봅시다. 그 근방에 괜찮은 레스토랑을 많이 알고 있거든요.」
제임스는 명함을 건넸다. 민우도 포켓에서 명함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적어도 연락처가 없어 연락을 못 할 일은 없어졌다.
「감사합니다. 꼭 연락드릴게요.」
손을 흔들어 보인 제임스는 뚜벅뚜벅 걸어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세 칸 뒤에 있는 자리였다.
곧 승객들이 하나둘 비행기에 오르기 시작해 민우도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기내방송이 시작되었다.
* * *
민우가 탄 비행기는 순항을 이어갔다.
대부분 눈을 붙이거나 이어폰을 꽂고 영화를 시청하고 있었다. 실내는 어두웠고, 기류 문제로 기체가 다소 흔들린 걸 제외하고는 특별한 건 없었다.
민우는 좌석 앞 디스플레이에 표시된 시간을 계속 확인했다. 아직 도착하려면 한참이나 많이 남았다는 사실에 안타까움과 조바심이 동시에 일었다.
‘이렇게 좌석이 불편할 줄은 몰랐네. 잠자긴 그른 것 같고…… 영화나 볼까?’
민우는 몸을 슬쩍 일으켜 뒷좌석을 바라보았다. 제임스 마렛은 수면안대를 쓰고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다. 민우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민우는 디스플레이 패널을 조작하다 그만두고 등을 다시 좌석에 붙였다.
‘볼만한 게 없네. 스케줄 정리나 다시 해보자.’
플래너를 펼쳤다.
학회 일정에 대한 안내를 받지 못해 빈칸이 꽉 채워지진 않았지만, 랑느 박사와 약속한 주요 일정은 기록되어 있었다.
일단 학회 전날 밤 만찬이 있다. 소르본대학의 동문이 주축이 되어 열리는 만찬인데, 특별히 랑느 박사가 초대해 주었다.
이름하여 ‘소르본의 밤’
민우가 듣기론 인문사회학 관련 분야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모임이라고 들었다.
근사한 와인글라스를 들고 세계 각지에서 온 학자들과 지식을 나누는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이 뛰었다. 기대도 되고 그만큼 긴장도 됐다.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 가면 좋을까…… 아무래도 프랑스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좋겠지? 비교문학적 관점으로 우리나라에 프랑스 문학이 어떻게 소개되었는지 이야기할 기회가 있다면 재밌어하겠네. 마침 작년 겨울에 발표 하나 하기도 했고.’
덜컹!
그때 기체가 강하게 흔들렸다.
깜짝 놀란 민우는 허둥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부분의 승객들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곧 난기류 때문에 흔들림이 발생했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흔들림은 곧 잦아들었다. 동시에 민우의 긴장도 차츰 사라져갔다.
자연스레 마음도 차분해졌다. 민우는 어디까지 생각했는지를 떠올렸다.
‘겨울 발표…… 잠깐, 발표?’
순간 민우의 눈이 커졌다. 퍼즐처럼 흩어진 소재들이 하나로 모여들더니, 그럴듯한 시나리오가 짜 맞춰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이야기를 한 꼭지 완성한 민우가 낮은 탄성을 내질렀다.
‘그래, 발표. 바로 그거다!’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민우는 어느새 기대감으로 가득 찬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막연한 흥분을 품던 눈빛이 총명하게 빛났다.
‘바보같이. 내가 왜 진작 이 생각을 못 하고 있었지?’
민우는 바로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전원을 넣었다.
폴더를 뒤지다 보니 다행히 작년 국제비교문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이 그대로 저장되어 있었다. 제목은 ‘실존주의 문학의 재조명’.
민우는 파일을 더블 클릭했다. 곧 하얀 바탕 위에 글 뭉치가 떠올랐다.
‘이 논문을 A4 두 페이지 정도로 축약해서 핸드아웃을 만들고…… 강연은 충분히 할 수 있어. 인쇄는 호텔에서 할 수 있겠지?’
당시 민우는 발표를 위해 캠코더 앞에서 수십, 수백 번을 연습했다. 발성과 제스처가 아직까지 몸에 배어 있었다.
민우가 노리는 것은 ‘소르본의 밤’ 행사 중에 열리는 간이 세미나.
비슷한 분야의 학자들이 모이는 자리이고, 또 동문회 성격이 짙다 보니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 학술적인 대화를 나눈다.
강제성이 있는 건 아니고 자연스럽게 그런 자리가 마련되는 것이다.
해외 학회를 다녀온다는 막연한 기대감에 부풀어 이야기만 들으려고 했는데, 민우는 그게 근본적으로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너무 안일했어. 처음으로 해외에 나간다는 기대감에 취해서. 이것도 정말 큰 기회가 될 수 있는데 말이야.’
민우는 학회에 참가할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만찬 테이블에 앉을 기회도 있다. 참가 신청을 한 게 아니다. IAHS 회장과 랑느 박사의 초대를 받았다.
‘그런 내가 테이블을 주도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
타닥타닥―
민우는 바로 손가락을 움직여 작업을 시작했다. 주위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최대한 키보드를 누르는 힘을 줄였다.
‘자, 생각해보자. 예전에 우리나라 논문을 프랑스어로 번역해서 보냈을 때 소르본 학생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손가락을 멈춘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랑느 박사가 피드백을 메일로 보냈던 게 생각났다. 단점을 지적해 준 게 아니라, 학생들이 어느 부분에서 흥미를 보였는지를 알려 주었다.
그래서 그 분야에 대해 다룬 논문을 몇 개 더 번역해서 보내준 기억이 떠올랐다.
‘좋아. 전쟁 체험을 중심으로 한번 논문을 다듬어보자. 그리고 60년대로 이어진 참여문학에 대한 언급도 하면 좋겠어. 나아가 민주화 투쟁도 살짝.’
통할 거라는 확신이 섰다. 명확한 길이 잡히자 민우의 손은 거침이 없이 움직였다.
좌석이 좁아 어려움이 많았지만 민우는 꿋꿋이 키보드를 쳤다. 모든 지식은 머릿속에 담겨 있었다. 쉽고 재미있게 풀어내기만 하면 됐다.
그러면서도 민우는 굳게 다짐했다.
‘낯선 동양인 학생이 아니라, 내 이름 세 글자를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시키고 오겠어.’
민우의 투지가 불타올랐다.
그래서 그럴까. 그는 옆에서 스튜어디스가 부르는 것도 잊은 채 타이핑에 몰두했다.
“저, 손님?”
두어 번 민우를 부른 스튜어디스가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민우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손님.”
“아, 죄송합니다. 뭐라고 하셨죠?”
그녀가 수빈이었다면 민우를 방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음료 좀 치워드릴까요?”
“감사합니다.”
스튜어디스가 주스 컵을 치웠다. 그때 민우가 조심스레 부탁했다.
“저기, 죄송한데 맥주 좀 가져다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녀는 예쁜 미소를 남긴 채 돌아갔다. 흥분을 가라앉히는 데는 맥주만 한 게 없으니까.
잠시 후, 민우는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논문 작업을 계속해 나갔다. 마음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곧 두 페이지 분량의 핸드아웃이 완성됐다.
다음 날, 민우를 태운 비행기가 JFK공항에 안착했다.
* * *
「호텔엔 어떻게 갑니까?」
비행기에서 나서며 제임스가 물었다. 고향에 돌아와서 그런지 그는 활기가 넘쳐 보였다.
「누가 마중을 나오기로 했어요. 호텔까진 문제없이 갈 거 같아요. 혹시 몰라서 교통편도 알아 왔으니 괜찮겠죠.」
「입국 심사 잘 통과하시길. 요즘 테러 때문에 좀 어려운 모양이더군요. 일관성 있게 대답하면 됩니다. 영어를 잘하시니까 크게 문제는 없겠죠. 그럼 또 봅시다.」
제임스가 앞서 걷기 시작했다. 민우는 주변을 눈에 담으며 천천히 걸었다. 똑같은 사람이 사는 곳인데 모든 게 새로워 보였다.
곧 입국 심사가 시작됐다.
엄한 표정의 심사관이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민우는 학회 겸 여행 목적으로 왔다고 하고, 품에서 초청장을 꺼내 심사관에게 보여주었다.
생각지도 못한 질문도 나왔지만 민우는 잘 넘기고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와…….’
민우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풍경을 감상했다. 특별한 것은 없었다. 유명한 햄버거 체인이 보였고, 케이크점과 잡화점이 줄지어 있었다.
약속장소를 향해 걸으며 민우는 주변을 기웃거렸다. 풍경들이 눈에 익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특별한 건 없네. 여기도 사람 사는 동네구나.’
약속장소에 도착하니 누군가 이쪽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연갈색 아프로 헤어의 젊은 청년이 손을 흔들었다. 이 사람이구나 싶은 순간.
「민우?」
「미셸?」
젊은 청년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정답이에요. 소르본의 미셸을 찾았다면.」
소르본이라는 이름이 마치 암호처럼 느껴졌다. 민우는 긴장을 풀었다. 캐리어 두 개 중 하나를 그가 빼앗듯 들었다.
「아, 고맙습니다.」
「천만에요. 멀리서 왔는데 이 정도 호의야. 그런데 미국은 자주 와 봤어요? 헤맬 줄 알았는데.」
「아뇨. 처음이에요. 비행기도 처음 타봤고.」
「허?」
미셸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치 외계인을 보는 듯하게.
「민우. 지금까지 뭐 하고 살았어요?」
「그러게 말입니다……」
민우는 할 말이 없어졌다. 여기저기 다닐 시간이 없다는 말이 떠올랐지만, 핑계였다. 그가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다.
민우가 적당히 말을 돌렸다.
「그런데 어떻게 절 알아보셨어요?」
「얼굴을 알고 있었어요. 강의 동영상 봤거든요. KOC였던가? 거기에서. 랑느 교수님이 추천해 주셨죠. 그런데 프랑스어 캡션은 바라지도 않으니 다음엔 영어 캡션이라도 넣어 주세요. 한국어 너무 어려워요.」
그러면서도 싱긋 웃는 그의 모습에서 여유가 느껴졌다. 좋은 영향을 느끼며 민우는 그의 뒤를 졸졸 따라 공항을 나섰다.
「자, 이제 시작입니다. 미국에 온 걸 환영해요!」
주근깨가 적당히 버무려진 미소를 지으며 미셸이 말했다. 그 모습 뒤로 뉴욕의 밤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