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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세계 무대로 (4) (156/500)


156. 세계 무대로 (4)
2022.01.28.


‘설마 농담은 아니겠지?’

그게 민우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센트럴 북스의 관계자, 그것도 편집장급이 한국에 오다니 믿기가 힘들었다.

그때 며칠 전 지음사에서 있었던 일이 뇌리를 스쳤다.

‘맞아. 전에 송 실장님이 통화하셨던 그분, 일본 출장 중이었다고 했지? 아무래도 이 사람인 것 같은데…….’

한편 제임스 마렛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민우를 살펴보고 있었다. 구석구석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눈빛이었다.

제임스가 앨런에게 슬쩍 물었다.

「통역이 필요할 리는 없겠지?」

「작업물을 봐서 잘 알잖나. 회화도 수준급이야.」

「하긴.」

제임스와 앨런은 허물없이 대화했다. 사이가 꽤 돈독해 보였다.

실제로 두 사람은 함께 일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한국에서 교수를 하고 있지만, 앨런은 센트럴 북스 디렉터 출신이었다.

제임스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자넨 놀지 말고 마실 거나 좀 사 와. 중요한 순간이라고.」

「한국에서까지 이러긴가?」

「이봐. 난 손님이잖아. 멀리서 왔다고. 그러니 대접을 받아야지 않겠나? 한국엔 그런 문화가 있다고 들었는데.」

「이상한 것만 배웠군!」

아이들처럼 옥신각신하는 두 사람을 보며 민우는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제가 사겠습니다. 방금 앨런 씨에게 점심을 얻어먹었거든요.」

「오, 그럼 사양하지 않고.」

민우가 두 외국인에게 주문을 받은 뒤 카운터로 걸어갔다. 계산하는 사이 제임스와 엘런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무작정 입국해서 민우 씨를 만나게 해달라 하고 말이야. 제정신인가? 공금을 그렇게 펑펑 유용하다니.」

「유용? 이 친구 단어 선택 참 서운한데. 애초에 계획에 있던 일이었어. 일본 쪽 일은 잘 풀렸으니 한국에서도 잘 마무리하고 나가서 인센티브 좀 챙겨야지.」

「그놈의 돈 타령은 여전하군.」

앨런이 쓴소리를 늘어놓자 제임스가 피식 웃더니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흐흐흐. 당연한 거 아닌가? 우린 돈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고. 앨런, 정신 차려. 고고한 상아탑에서 어서 내려와서 다시 센트럴 북스로 돌아와. 부귀영화가 자네를 기다리고 있다고.」

「관심 없다는 말은 몇 번째인지 이제는 생각조차 나질 않는데.」

「자네의 대답은 너무 뻔해서 예측 가능하다는 게 문제야. 아무튼 전에 보내준 자료는 잘 받았어. 친절히 번역까지 해주고. 다음에도 잘 부탁하지.」

「센트럴 북스의 자문위원이니 할 건 해야지.」

앨런 교수가 제임스에게 보낸 자료는 <더 위자드> 1부 번역에 대한 독자들의 평가였다. 주로 블로그와 댓글 자료를 모아 보냈다.

그런데 제임스는 이미 그 전부터 민우를 주목하고 있었다.

민우의 다른 작업물, 특히 <사각 살인>의 성공을 말이다. 같은 영미권 작가의 소설이었고 베스트셀러 1위를 꽤 오래 유지했다.

그것이 민우의 첫 번역이었고, 이어 <더 위자드> 1부를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작품 자체도 좋았지만, 거기에 금칠을 한 건 박민우라는 번역가의 몫이었지. 분명.’

제임스가 면도가 덜 된 까끌까끌한 턱을 쓸어 만졌다. 그는 인정할 건 인정하는 합리적인 사고의 소유자였다.

‘확실히 비슷한 시기에 출시된 다른 몇몇 국가들과는 독자 반응이 많이 달랐어. 한국은 언어적 감수성이 유별난 나라지. 그런데도 성공했다는 건…… 이 번역가. 젊고 순박하게 생겼는데 실력은 예사롭지 않아.’

그가 분석한 <더 위자드>의 성공 원인 중 하나가 바로 ‘번역’이었다. 일부 비영어권 나라에서는 현지화에 실패했는데, 한국에서는 호평을 받으며 성공했다.

한마디로 평가하자면 첫 단추를 잘 끼웠다.

국내 출판시장의 규모가 작다고 해도 영화나 게임 등의 OSMU(one source multi use) 시장은 꽤 크다.

오리지널 콘텐츠인 소설이 성공했으니 차후 애니메이션이나 영화, 게임 등의 판로를 쉽게 열 수 있게 됐다. 입소문의 힘은 그만큼 무서우니까.

그 모든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센트럴 북스의 힘도, 라온북스의 힘도 아니었다.

바로 민우의 능력이었다.

그 부분에서 제임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이상하단 말이지…… 그는 왜 2부 번역을 맡지 않으려는 걸까? 골든북스 측의 말처럼 바빠 보이는 것 같진 않은데 말이야. 조건도 괜찮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민우가 음료를 들고 테이블로 돌아왔다. 앨런 교수에겐 아메리카노를, 제임스에겐 에스프레소를 건넸다.

민우는 제임스와 마주 앉았다.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한번 쭉 들이켜고 물었다.

「제임스 씨. 뭐 하나 여쭤봐도 됩니까?」

「얼마든지요. 대신 제 질문에도 하나 답해 주셔야 합니다.」

제임스는 노련하게 조건을 달았다. 민우는 다소 경계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혹시 전에 지음사의 송승현 씨와 통화를 하셨습니까? <더 위자드> 2부 계약 조건에 대해서요.」

「맞습니다. 아마 그땐 일본에 있었죠. 그런데 그건 어떻게 아셨는지?」

「옆에 있었거든요. 제가 확인을 요청한 거고요.」

「그렇습니까?」

제임스의 표정에 흥미가 돌았다.

그는 단순히 민우가 바빠서 번역 청탁을 거절하고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왠지 그런 이유가 아닌 거 같았다.

「뭔가 제가 아는 것 이상의 복잡한 사연이 있는 거 같군요. 미스터 박…… 아, 혹시 영어식 이름이 있습니까? 요즘 한국인들도 영어식 이름을 많이 사용하던데요. 부르기 편하니까.」

「그냥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 발음하기 쉬운 편이니까요.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앨런 씨도 그렇게 해주셨으면 하네요.」

「그럴까요?」

단순히 호칭만 변했는데도 친근감이 생겼다. 앨런 교수가 처음 만났을 때 왜 이름으로 부르라고 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제임스는 얼마 남지 않은 에스프레소를 한 번에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자!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야겠네요. 서론이 너무 길었네.」

「참고로 한 번 꽂히면 불도저처럼 저돌적으로 밀고 나가는 성격이지요. 이 친구는.」

「친절한 해설 고마운데? 야구 중계를 보는 줄 알았군. 아무튼 저는 궁금합니다. 민우 씨가 왜 골든북스의 제안을 거절하고 있는지. 이게 제가 드리고 싶은 질문입니다.」

처음 그의 정체를 듣게 된 이후로 줄곧 그 문제에 대해 고민해왔다. 이런 질문이 안 나올 수가 없을 테니까 말이다.

「일단 제가 IAHS에 참여하게 돼서 최근 정신이 없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미국에 나가 있어야 해요. 해외 학회는 처음이라 준비해야 할 게 많더군요.」

「오, IAHS요? 이번엔 어디서 열린답니까?」

「뉴욕입니다. 그런데 제임스 씨도 IAHS를 압니까?」

「알다마다요! 우리 출판사에서도 학술서적을 다루는데 그곳의 많은 분들이 책을 내셨지요. 모르면 오히려 이상한 겁니다.」

그 한마디로 센트럴 북스의 위상이 피부로 와 닿았다.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학회는 컬럼비아대학에서 열린다고 들었습니다. 제 숙소는 쉐라톤 호텔로 잡혔고요. 다행히 학회에서 지원을 받았습니다.」

「하긴, 뉴욕에서는 학회를 열기가 마땅찮죠. 숙박비나 이런저런 것들이 비싸니까 마이너리티에 대한 배려가 없다고 비판당하기 쉽지요. 아무튼. 그건 그렇고…… ‘일단’이라는 표현으로 서두를 텄으니 학회 말고 번역을 하지 못하는 다른 이유도 있다는 거지요? 민우 씨한테.」

제임스가 핵심을 찔러왔다. 민우는 왠지 대화에서 밀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는 생각 이상으로 말솜씨가 좋았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골든북스의 경영방식에 회의감을 갖고 있습니다. 라온북스에서 판권을 따 갔다면 즐거운 마음으로 번역에 임했겠지만, 상황이 달라졌네요.」

「그 이유는요?」

그때 옆에서 앨런 교수가 헛기침을 냈다. 그제야 제임스가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질문이 좀 성의가 없었나. 다시 풀어서 설명하자면, 민우 씨가 골든북스에 회의감을 갖게 된 원인을 좀 알려달라는 겁니다.」

「우선……」

민우는 가감 없이 사실만을 말했다. 시장의 질서를 흔드는 행위는 물론, 작가와 번역가를 후려치는 일까지 서슴지 않는 곳이라고.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제임스는 표정의 변화가 별로 없었다. 오히려 되물었다.

「하지만 골든북스가 보유한 판로와 영향력을 이용한다면 우리의 책이 더 많이 팔리지 않을까요? 그건 작가와 독자 모두 원하는 일일 텐데요.」

「많이 팔린다고 다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다가 될 수도 있지요. 최대다수의 독자에게 양질의 책을 공급한다는 것은 출판사의 사명과도 같은 것이니까 말입니다.」

「요컨대 비즈니스라는 말씀이죠?」

제임스는 손가락을 딱 튀기더니 민우를 가리켰다. 정답이라고.

민우가 웃었다.

예전이라면 아 그렇구나 하며 딱히 반론을 하지 못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관점의 차이는 분명히 있겠죠. 그래서 좀 이상하단 생각도 듭니다. 비즈니스적으로 접근하려는 거면 오히려 저 말고 다른 번역가를 쓰는 게 맞으니까요. 이렇게 시간을 끌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한국엔 저 말고도 훌륭한 번역가들이 많습니다.」

「음, 알겠습니다. 잠깐 정리해 볼까요. 2부 번역을 하지 않겠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는 거지요?」

「네.」

제임스는 가방에서 플래너를 꺼내 메모를 시작했다. IAHS와 골든북스, 불화, 관점의 차이 등. 그는 문장으로 적지 않고 키워드만 간략히 적었다.

툭, 그가 플래너를 힘차게 덮었다. 제임스의 얼굴엔 개구쟁이와 닮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민우 씨의 생각은 잘 들었습니다. 본사로 돌아가서 할 일이 늘었네요. 그래도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기회가 되면 뉴욕에서 한번 뵙지요.」

제임스는 민우와 악수를 하고는 재빨리 카페를 나갔다. 발걸음이 흥겨웠다. 앨런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용건이 끝나면 바로 일어나는 사람이라서 말입니다.”

“괜찮습니다. 개성 넘치는 분인 거 같네요. 느낌이 좋았습니다. 해맑다고 해야 하나요?”

“센트럴 북스의 개구쟁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요. 오래도록 알고 지냈지만, 저도 종잡을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민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남은 아메리카노를 깨끗이 비웠다.

어떤 방식으로 조정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민우는 신경을 껐다. 코앞에 닥친 IAHS부터 집중을 하는 게 우선이었다.

* * *

출국 이틀 전, 이수빈은 직접 민우의 원룸에 찾아와 출국 준비를 도왔다. 해외여행 경험이 없는 터라 민우가 부탁한 것이다.

“바쁜데 미안하네.”

“아냐. 안 그래도 해주려고 했어. 울 오빠가 신문물을 접한다는데 협조를 해 줘야지.”

“기왕 해주는 거 좋게 해주면 안 되냐.”

“ESTA 신청은 했죠?”

“나 그 정도로 바보 아닙니다.”

수빈은 옷가지와 필요한 물품을 캐리어에 직접 담았다. 정성스러운 손길로.

곧 정리가 모두 끝나고 수빈은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민우는 그냥 나가서 사 먹자고 했지만 그녀는 한사코 고집을 부렸다.

민우는 책상을 정리하다 얼마 전에 읽은 예린의 원고를 발견했다.

‘아차, 유리한테 전화한다는 걸 깜빡했네. 출국하기 전에 보내주고 가야겠다.’

민우는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7시. 퇴근 시간이다. 일단 이유리 편집자에게 통화 가능하냐고 톡을 보냈다.

그로부터 5분 뒤에 전화가 왔다.

― 무슨 일?

“아는 후배가 이번에 소설을 하나 썼는데 검토 좀 해줄 수 있나 싶어서. 큰산대학문학상으로 등단한 친구인데 장르소설을 쓰고 있어.”

― 으응? 등단한 사람이 장르소설을 써? 희한하네.

“사연이 좀 있어. 아무튼 <반지의 대왕>하고 <더 위자드>의 장점만 추려서 섞은 느낌인데, 주인공 개성이 강하고 캐릭터들이 입체적이라 오리지널리티가 있어서 재미있더라. 세계관도 탄탄하고. 설정집만 50페이지가 넘어. 아류작 느낌은 별로 안 나.”

― 일단 메일로 원고 보내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 추천이니까 꼼꼼히 읽어 볼게.

“땡큐.”

― 내일모레 출국이지? 조심히 잘 다녀와.

“갔다 와서 사무실에 한번 들를게. 대표님하고 팀장님께 대신 안부 전해줘.”

전화를 끊은 민우는 예린의 원고 파일을 메일로 첨부해 이유리 편집자에게 보냈다.

‘자, 이제 해야 할 일은 모두 끝났나?’

민우는 플래너를 꺼내 일정을 신중하게 검토했다.

<더 위자드> 2부 번역 문제도 끝났고, 주예린의 원고도 라온북스에 보냈다. 이경훈 교수의 번역 프로젝트도 마무리 단계에 진입했다.

‘프로젝트 마무리는 연주가 해주겠다고 했으니까 문제없겠지?’

작년 강철훈 교수 프로젝트 때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는지 연주는 자신이 마무리하겠다고 했다. 민우는 사양하지 않고 그녀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모든 게 완벽해. 이제 출국 날만 기다리면 되겠어. 가서 멋지게 하고 오는 거야!’

민우는 미소를 지으며 플래너를 덮었다.

그렇게 이틀 후, 민우는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뉴욕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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