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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세계 무대로 (3) (155/500)


155. 세계 무대로 (3)
2022.01.27.


그 말에 민우는 화들짝 놀랐다. 국제어학원 강사라니? 생각지도 못했다.

국제어학원은 대학이라기보다는 학원에 가깝다.

때문에 학부 강의처럼 전공 커리어에 크게 영향을 주는 자리는 아니긴 하지만, 어쨌든 강의경력으로 인정받을 수는 있다.

게다가 최근 명인대에서 국제어학원에 투자를 많이 하고 있다. 좋은 성과를 내서 나쁠 건 조금도 없었다.

‘선생님이 왜 진섭이를?’

그런 의문이 든 것도 사실이었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민우는 오히려 빙긋 웃었다.

“이야, 녀석 땡잡았는데요? 안 그래도 요즘 강의하고 싶다고 몸을 배배 꼬았었는데. 선생님께 배꼽 인사할 만하네요.”

민우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서지훈 교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네.”

“뭐가요?”

“왜 자기를 추천해 주지 않은 거냐고 따질 줄 알았는데?”

“선 잘 긋고 있습니다. 전에 선생님께서 당부하셨잖아요. 어학 파트 일에 끼어들지 말라고. 요즘 왠지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기도 하고요.”

“오, 그랬군!”

서지훈 교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아도 눈치껏 처신하는 제자가 기특했다.

그만큼 민우와 서지훈 교수는 깊은 신뢰로 이어져 있었다.

단기간에 쌓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또한, 긴 시간을 들인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쌓이는 것도 아니다. 문학적으로 표현한다면, 두 사람의 만남은 다소 운명적이었다.

그래도 서지훈 교수는 기본에 충실하기로 결심했다. 민우가 실망하지 않도록 내막을 자세히 풀었다.

“5월부터 바로 강좌가 열린다고 해서 적당한 사람이 진섭이밖에 없었다. 너는 IAHS에 참여해야 하니 한국에 없을 거고. 수빈이는 평론 쓴답시고 정신이 없고.”

“맞아요. 요즘 다들 바쁜 거 같더라고요. 예진 누나도 이것저것 정신이 없는 거 같고.”

이 상황에서 부탁을 받았다면 꽤 난감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은사의 부탁이니 미국행을 진지하게 고민했을 가능성이 컸다.

물론 서지훈 교수가 그 정도로 배려심이 없는 사람은 아니긴 했지만.

그때 서지훈 교수가 목소리를 좀 낮췄다.

“뭐 네가 국제어학원에서 강의를 하게 된다고 해서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최근 충분히 주목받고 있으니 굳이 나설 필요는 없을 거 같다. 그래서 고민하다 진섭이를 추천한 거야.”

“잘하셨습니다. 반쯤 자화자찬이긴 한데, 한때 송파에서 좀 잘나가는 학원 강사였대요. 잘 해낼 거예요.”

“진심으로?”

“강의 그거 쉬운 거 아니잖아요. 특히나 외국인을 가르치는 거니까 저보단 진섭이가 나을 겁니다. 사람 웃기는 데 재주가 있으니 강의도 재미있게 잘하겠죠.”

서지훈 교수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실력이 붙으면 자연스레 자만하게 되는데, 민우는 달랐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깨닫는 것부터 진짜 실력이 나온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특별한 녀석이야. 또래, 아니지. 선배들과도 비교될 정도로.’

학식을 쌓고 좋은 논문을 쓰는 것보다 학문적으로 겸손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법이다. 학자가 되는 것은 쉽지만 사람이 되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담배를 하나 꺼내며 서지훈이 말을 이었다.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석사까지만 어떻게 잘 따면 강사 자리는 주선해 줄 테니까 조바심내지는 마라.”

“국제어학원에서요?”

“아니. 학부. 살짝 이른 감이 없잖아 있는데 모교에 가서 후배들 가르쳐야지?”

민우가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그게 정말입니까?”

“뭐냐, 그 질문은. 내가 언제 너한테 거짓말하든?”

“요즘 저 놀리는 재미로 출근하시잖아요.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습니다.”

“하하하. 그건 나름대로 즐겁긴 하지.”

두 사람이 피식 웃었다. 서지훈 교수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객관적인 업적으로만 봐도 넌 이미 박사과정급이야. 석사학위만 있으면 얼마든지 강의해도 좋다. 그러니까 학위논문에 집중해. IAHS에 다녀와서는.”

“알겠습니다.”

“그리고…… <더 위자드> 2부는 어떻게 결정이 됐나?”

“아뇨. 아직 고민 중입니다.”

“좀 길어지는 느낌인데. 송 실장하고 의논해 봤어?”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음사 퇴사 이후 개인적으로 송승현 실장에게 연락한 적은 없었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이건 저 혼자서 결정하고 싶어서요. 언제까지 실장님께 신세를 질 수는 없으니까요. 개인적인 일이기도 하고요.”

“골든북스에서 연락은 계속 오고?”

“예.”

예전처럼 빈번하게 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문경원 대리는 아직 민우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럴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골든북스 경영진은 문경원 대리를 계속 쪼며 대안을 마련 중에 있었다. 힘들게 따낸 판권이다. 이대로 잃을 수는 없었다.

서지훈 교수가 담배 연기를 뿜었다.

“힘든 결정이겠지만 출국하기 전에는 정리를 해라. 그래야 너도 편하게 미국 다녀오지.”

“안 그래도 그럴 생각입니다. 이번 학회에서 탄력 좀 받아서 제대로 써 봐야죠. 학위를 위한 논문이 아니라 레퍼런스로 쓸 수 있는 논문을 써보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서지훈 교수는 더는 잔소리를 꺼내지 않았다. 나머지 문제야 민우가 알아서 잘 해내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때 민우가 가방에서 펜과 메모장을 꺼냈다.

“그건 뭐 하려고?”

“선생님께 여쭤볼 게 잔뜩 있어서 왔는데 딴 얘기만 했네요.”

“응?”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IAHS에서 좋은 세션을 골라 듣는 비결이 있을까요? 그리고 뉴욕에서 가볼 만한 장소도 알려주세요.”

“하, 이런.”

서지훈 교수는 골치 아픈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민우의 눈은 장난감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 * *

목적을 이룬 민우는 307호로 돌아왔다. 받아 적은 게 두 페이지나 될 정도로 질문을 많이 했는데, 서지훈 교수는 성실히 답해 주었다.

민우가 자리에 앉아 메모를 다시 살펴보려는 순간 누군가 방해했다.

“선배, 바빠요?”

주예린이었다. 민우는 여전히 메모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건성으로 대답했다.

“보면 모르냐.”

“어머나. 학회 준비하느라 바쁘실 줄 알았는데 한가하시다니 다행이네요! 그럼 이거 좀 봐주시죠?”

주예린이 원고 뭉치로 옆구리를 찔러왔다. 의문문인데 명령조로 들리는 건 왜일까. 민우는 인상을 쓰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연재 잘하고 있다면서 왜, 또, 뭐.”

“전에 약속했던 거 지키라고 드리는 말씀이죠.”

“약속?”

그렇게 되묻자 주예린이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경멸에 조금 더 가깝다고 해야 할까.

“실망이네요. 해외에서 크게 한번 놀아보자며!”

“아. 그거? 난 또 뭐라고.”

민우가 어설피 웃었다. 완전히 까먹고 있었던 것이다. 예전에 학생회관 뒤편에서 주예린을 다독이며 했던 말이었다.

그 말을 주예린이 다시 반복했다.

“근사한 거 하나 쓰기만 하라면서요. 기가 막히게 번역해 준다고 했으니 이제 번역에 착수하세요. 롸잇 나우!”

민우는 엉겁결에 원고를 받아들었다. 꽤 두꺼웠다. 단행본 한 권은 돼 보였다.

“근데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데 네가 생각했던 근사하다는 기준은 뭐냐?”

“작가로서의 직감?”

“계약은 됐고?”

“아뇨. 아직. ‘작가님의 글은 흥미로우나 우리 출판사와는 맞지 않습니다’라는 복붙 답장만 받고 있습죠. 네에.”

질문이 아무래도 잘못된 모양이다. 재기발랄하던 주예린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가셨다.

민우가 턱을 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유리한테 한번 검토해달라고 해볼까? 라온북스에서 장르 쪽을 다루지는 않지만 예린이 정도의 필력이라면…….’

가능성은 충분했다. 결국, 통하는 글은 장르나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재미에서 오는 것이니까.

민우는 원고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이따 저녁에 한번 읽어 볼게. 하던 일 마저 하고.”

“넵. 대신 피드백 꼼꼼히 해주기?”

“너 자꾸 말끝 올릴래?”

주예린이 도망치듯 307호를 나섰다.

진섭과 사귀게 된 이후로 좀 버릇이 없어진 것 같지만, 민우는 그래도 그녀의 원고를 소중히 가방에 넣었다.

다시 메모장을 들었다.

아까 서지훈 교수와 질의응답을 한 내용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 하나하나 확인하며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라운드 테이블에서 토론에 참여하게 되면 도중에 일어나는 게 실례니까 주의해야 하고…… 그리고 IAHS 가방. 안내 부스에서 꼭 챙겨야지.’

가방은 기념품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서지훈 교수의 설명을 듣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가방은 안내 부스에서 학회에 등록한 사람에게 나눠주는데 안에 스케줄, 명찰, 사은품, 필기류, 홍보물 등 다양한 아이템이 들어있다.

하지만 진짜 용도는 따로 있었다.

바로 친목 도모.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학회 기간 동안 가방을 이용한다. 호텔 근처에서 산책하거나 혼자 식사를 하러 나갈 때 같은 가방을 가진 사람을 발견하면 쉽게 동석할 수 있다.

‘마치 루카치의 안경 같은 아이템이네. 꼭 챙겨야겠다.’

무엇을 배우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대화를 트는가도 민우에겐 중요했다.

일단 공통점이 있어야 학회나 최근 연구 동향에 대한 정보를 공유할 수 있으니까. 언어의 장벽이 없으니 대화를 트는 게 우선이다.

민우는 신나게 웃으며 다음 부분을 살폈다.

‘프로그램 안내표는 스마트폰 앱으로도 볼 수 있구나. 하긴, 식순이 엄청나게 많던데. 장소도 한두 군데가 아니고. 앱으로 하면 꽤 편리하겠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종이로 된 프로그램지에 형광펜을 칠해가며 여기저기 뛰어다녀야 했는데, 최근에는 애플리케이션 하나로 쉽게 동선을 그릴 수 있다고 들었다.

실제로 어떻게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짐작은 갔다. 스마트폰 세대였으니까.

‘자세한 건 랑느 박사님께 물어보면 될 거 같고. 여행지는…….’

여행지는 정말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시작으로 자유의 여신상, 엘리스 섬, 센트럴 파크, 록펠러 센터, 매디슨 스퀘어 가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등 다양한 장소가 적혀 있었다.

숫자만 놓고 보면 일정 내에 다 갈 수 있나 싶기도 했다.

‘일단 시도는 해봐야지. 우선순위를 정하고. 그나저나 수빈이도 같이 가면 좋을 텐데 좀 아쉽긴 하네.’

얼마 전까지는 민우가 바빠 데이트를 많이 하지 못했는데 4월 말을 기점으로 상황이 역전되었다. 수빈이 더 바빠진 것.

작년 겨울에 냈던 신춘문예 평론부문에서 고배를 마신 탓이었다.

하지만 수빈은 포기하지 않고 올해에는 꼭 문학평론가로 등단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밤새도록 작품을 읽고 평론을 쓰며 설예라 교수에게 지도를 받는 중이다. 그래서 미국에 같이 가자는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아무튼 섭섭이도 그렇고, 예린이도 그렇고. 올해는 수빈이도 잘 풀렸으면 좋겠다!’

자신의 성공도 중요하지만 민우는 친구들과 함께 커나가고 싶었다. 그래야 서로 자극이 되어 한발 더 나아갈 수 있으니까.

그때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민우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 * *

“오랜만입니다. 박민우 씨.”

청안의 백인이 능숙하게 구사하는 한국어는 언제 들어도 신기하다. 그는 지음사에서 만난 앨런 스미스 교수였다.

민우도 웃으며 악수했다.

“출간 이후로 처음 뵙네요. 잘 지내셨죠?”

“저야 뭐 별다를 거 없었습니다. 그나저나 안타깝습니다. <태엽시계>가 생각보다 많이 안 팔려서 신경이 쓰이겠군요.”

“괜찮습니다. 최선을 다했으니까.”

앨런 교수는 흡족하게 웃었다. 번역 경력이 일 년도 안 되는 신인인데, 그 한마디로 프로의식을 느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가볍게 점심 식사를 같이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민우의 학교 이야기와 앨런 교수의 사생활이 적당히 버무려진 즐거운 시간이었다.

민우가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보자고 하신 겁니까? 그냥 부르신 거 같지는 않아서요.”

“역시 날카로우십니다. 실은 누가…… 민우 씨를 좀 소개해 달라고 해서 이렇게 뵙기를 청했습니다.”

“소개요?”

스파게티를 순식간에 해치운 앨런 교수는 냅킨으로 입술을 닦았다.

“괜찮으면 자리를 한번 만들고 싶은데 어떻습니까?”

“저야 괜찮은데…….”

민우는 누굴까 궁금했다. 앨런 교수는 만나 보면 알 거라고만 이야기할 뿐이다. 그때 앨런 교수에게 전화가 왔고, 그가 양해를 구하며 통화를 했다.

본토 발음의 회화가 잠시간 이어졌다.

곧 전화를 끊은 앨런 교수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마침 이 근처에 있다는군요. 식사 다하셨으면 나가시지요.”

얼떨결에 민우가 일어섰다. 점심은 앨런 교수가 계산했다. 민우는 잘 먹었다고 인사하고 함께 식당을 나섰다.

앨런 교수는 한국 사람처럼 앞장서 민우를 카페로 안내했다.

먼저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키가 작은 서양인이었다. 갈색 눈동자와 회색 머리카락이 멋스러웠는데, 그가 두꺼운 손을 내밀며 자신을 소개했다.

민우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손을 내민 그는 센트럴 북스의 편집장 제임스 마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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