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세계 무대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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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세계 무대로 (2)
2022.01.24.
민우는 중앙도서관 정보열람실에 편하게 앉아 IAHS에서 나온 저널을 읽었다. 학회에 참석하기 전에 분위기를 파악해 두려는 것이다.
다른 해외 학술지와 특별히 다른 점은 없었다. 민우는 이미 조너던 캠벨의 이론을 찾을 때 각종 해외 학술지를 섭렵한 이력이 있었다.
민우가 주목하는 것은 오프라인 행사였다.
IAHS는 국내 문학 관련 학회와는 분위기나 형식 면에서 완전히 다르다.
논문 발표는 물론, 발표자들을 서너 명씩 묶어 토론하는 라운드 테이블(round table), 그리고 포스터 세션(poster session)도 마련되어 있어 다양한 방식의 참여가 가능했다.
‘글로 미리 보긴 했지만 실제로 보면 더 어마어마할 거야.’
어떤 테마가 준비되어 있을지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뛰었다. 심호흡하며 핸드폰을 꺼내 달력 앱을 실행시켰다.
이번 주가 아니라 다음 주에 붉은 표시가 체크되어 있는 게 너무나 아쉬웠다.
‘아직도 8일이나 남았어? 시간 진짜 안 가네. 빨리 출국하고 싶은데.’
학술적인 성취도 성취지만,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학자들과 교류할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 흥분되었다. 잠을 설칠 정도로.
만약 언어의 장벽이 있었다면 기대보단 긴장감이 더 컸을 것이다.
하지만 민우에게 언어의 장벽은 없었다. 영어는 완벽한 수준이었고, 프랑스어도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는 수준으로 올라왔다.
대부분 영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거의 모든 학자들과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후우, 진정하자. 아직 국내에서 해결해야 할 큰일이 많잖아. 냉정하게 생각하고 움직여야지. 침착해! 박민우.’
민우는 컴퓨터를 끄고 자리를 정리한 뒤 가방을 들고 도서관을 나섰다.
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고두열 과장에게서 온 전화였다. 민우는 통화 버튼을 가볍게 터치했다.
“네, 박민우입니다.”
― 통화 가능하시죠? <태엽시계> 건으로 전화 드렸습니다. 발매된 지 일주일이 지나 폴라베어 북스로부터 판매량 자료가 들어왔네요.
“어떤가요?”
― 생각보다는 많이 저조합니다. 한 달 정도 더 지켜봐야 알겠지만 말입니다.
그럼에도 고두열 과장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있었다. 덕분에 잠깐 들었던 실망감이 조금 상쇄되었다.
“작년에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때문에 우리나라 문학이 영국에서 좀 관심을 끌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별로 크지 않나 보네요.”
― 저희도 그렇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국내에서 더 이슈가 되고 있는 상황이네요.
하지만 민우는 판매량이 전부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진정으로 가치 있는 글이 뒤늦게 알려지는 경우는 허다하니까 말이다.
무엇보다도 금년도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은 이미 3월에 최종심사작이 발표되었다. 4월에 출간된 <태엽시계>는 내년을 노려야 했다.
고두열 과장이 차분히 말했다.
― 그래도 해외 진출 소식이 알려지면서 국내판의 판매량이 소폭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여러 이슈를 만들면서 양쪽으로 판매량을 늘릴 계획입니다. 이쪽에서도 쉬고 있으면 안 되니까요.
“그렇군요. 더 이상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의례적인 인사말과 함께 통화를 마친 민우는 인문관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래도 국내에서 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네. 오늘 인터뷰 정신 차리고 잘해야겠다.’
오늘은 인터뷰가 있다. 특별히 국문과 세미나실에서 진행되는데, 중요한 인터뷰인 만큼 학과에서 공간을 열어주었다.
각종 매체에서 <태엽시계>의 영국 진출을 주목했다. 2016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회자하며 기사가 많이 나왔다.
대부분은 김영화 작가에 대한 인터뷰 기사였지만, 민우도 반사이익을 얻었다. <태엽시계>의 번역가로서 인터뷰가 잡히기 시작했다.
총 세 매체에서 연락이 왔는데, 오늘은 예전 인문학 공모전에서 수상을 했을 때 인터뷰를 따간 경한신문의 박윤지 기자와 만나기로 했다.
그녀에겐 한 번 신세를 진 일이 있다.
박윤지 기자가 <사각 살인> 리뷰를 기사화해준 덕에 베스트셀러에 빨리 진입할 수 있었던 것. 그 묵은 빚을 오늘에서야 갚게 된 것이다.
‘아직 아무도 안 왔네. 너무 일찍 왔나?’
시간을 확인한 민우는 세미나실 안에 있는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셔츠 윗단추를 하나 풀어 살짝 캐주얼한 느낌을 줬다.
‘오, 나쁘지 않은데?’
민우가 자아도취에 빠져 있을 바로 그때.
“민우 씨?”
손으로 머리를 다듬던 민우가 화들짝 놀랐다. 돌아보니 박윤지 기자와 사진기자 한 명이 세미나실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민우는 재빨리 손을 치우고 꾸벅 인사했다. 얼굴이 좀 화끈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박윤지 기자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쿡쿡 웃었다.
“오랜만예요. 근데 머리 스타일 괜찮으신데? 안 만져도 될 거 같아요.”
“아, 그런가요? 사진을 찍으려니까 좀 신경이 쓰여서.”
“그럼요. 그나저나 뵌 지 좀 됐는데 여전하시네요.”
“여전하다뇨?”
“눈빛이 살아있어요. 많은 분들을 만나고 취재하고 인터뷰했지만, 민우 씨 같은 눈을 가진 사람들이 흔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인상에 좀 더 오래 남았고.”
“시작 전부터 칭찬이 과하면 좀 부담되는데…….”
두 사람이 가볍게 웃었다.
사소한 농담이 몇 번 더 오가자 긴장이 조금 풀렸다. 박윤지의 화술은 여전했다. 분위기의 완급조절을 능숙하게 했다.
민우와 박윤지 기자가 마주 보는 구도로 자리했다. 사진기자의 지시로 몇 번 자리를 옮겨야 했다.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오늘 인터뷰 주제는 <태엽시계>이지만, 좀 포괄적으로 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네요. 분량을 많이 잡을 거고요. 녹음해도 괜찮죠?”
“예, 얼마든지요.”
“그리고 먼저 알려드리면 약간 민감한 질문도 하나 섞여 있어요.”
“민감한 질문요?”
민우는 감을 잡지 못했다. 번역과 관련된 인터뷰였고, 기껏해야 다른 번역물에 대한 이야기가 전부일 것이다. 그런데 민감하다니?
‘혹시 골든북스 이야기는 아니겠지?’
민우가 그렇게 혼자 추측할 무렵, 박윤지 기자가 본격적으로 질문을 시작했다.
“먼저 말씀드리면 김빠지니까 이따 천천히 하기로 하고, 우선 <태엽시계> 번역 얘기부터 해볼까요? 신인 번역가가 굴지의 출판사인 지음사와 계약을 하고 한영번역을 했다…… 업계에서는 사실 큰 이슈였는데요. 소감이 어떠신지요?”
완벽한 태세전환이었다. 친구처럼 편하게 이야기를 하다 아나운서 톤으로 질문을 던졌다. 프로다운 실력이었다.
“한국 문학을 세계에 알릴 수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기뻤습니다.”
민우는 우선 큰 그림을 그렸다. 박윤지 기자의 눈에 흥미가 돌았다. 민우는 이어 디테일을 쌓아갔다.
“실제로는 영한번역을 더 많이 했지만, 사실 한영번역에 더 주안점을 두고 있었거든요. 그 과정에서 김영화 작가님의 <태엽시계>를 만났고, 개인적으로 대단히 좋은 경험을 얻었습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영국에서 반응은 아직 미미한 거 같은데요. 매출 전망이 어떻게 될 거라고 보시죠?”
“출판사와 작가, 그리고 번역가가 각자 집중해야 하는 일이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번역가로서 영국인들이 한국 문학에 대해 공감하고, 좋은 평가를 해줬으면 합니다. 매출이나 그런 건 차후의 문제고요. 저변의 확대가 중요한 게 아닐까요?”
“그렇죠.”
“작가님과도 몇 번 만나서 얘기를 했었는데 저랑 생각이 비슷하시더군요.”
“안 그래도 김영화 작가님과도 인터뷰를 했었는데 민우 씨 칭찬이 대단했어요. 번역가로서도 그렇지만 앞으로 기대가 되는 문학도라고.”
민우는 부끄럽게 웃었다. 김영화 작가도 소설가이기도 하지만 전공자이기도 했다. 문학도로서 코드가 잘 통한 것이다.
그 사이에도 플래시는 계속 터지고 있었다. 박윤지 기자가 톤을 조금 낮췄다.
“지난달에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 최종심사작이 발표가 됐는데요. 아쉽게도 <태엽시계>는 한 박자 늦게 출간돼서 기회를 놓쳤습니다. 내년은 어떻게 보시나요?”
“상이야 받으면 좋죠. 하지만 좋은 기대감으로 남겨두고 지금 하는 일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최근엔 어떤 일을 하고 계신가요?”
“IAHS라는 국제 학회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출국 준비를 하고 있어요.”
박윤지 기자가 살짝 놀랐다. 놀란 건 그녀만이 아니었다. 사진기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도 민우가 석사 3학기라는 것을 안다. 게다가 국문학 전공. 해외 학회에 참가가 아닌 ‘초청’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으니 놀랄 수밖에.
민우는 비전문가인 박윤지 기자를 위해 IAHS의 연혁과 다루는 분야에 대해 간단히 소개했다.
“와, 대단하네요. 인문학에 대한 애정이 크다고 느꼈는데 실력도 만만찮으셨나 봐요.”
“아직 제 운이 다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한 기회였다고 할까요?”
“실력에 겸손까지. 우리나라 학계의 앞날이 왠지 밝아지는 것 같네요.”
박윤지 기자가 능숙하게 화제를 돌렸다.
“다시 번역 얘기로 돌아와서요. <오멜라스의 마녀>도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지요? 업계에서는 번역하는 작품마다 연이어 1위를 찍는 민우 씨의 능력에 놀라고 있습니다. 흥행 보증수표다, 이런 얘기도 있고요. 비결이 뭘까요?”
“어려운 질문이네요. 굳이 말하자면…… 번역은 논문을 쓰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민우는 손짓을 섞어가며 설명을 시작했다.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텍스트를 바라봐야 한다는 겁니다. 논문도 그렇거든요. 읽는 사람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지를 계속 고민해야 하지요. 번역도 마찬가집니다. 작가의 의도와 개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문장을 만들어 내야 하죠.”
“양쪽을 모두 취해야 한다는 말씀인데, 비전문가의 입장에서는 역시 꽤 어렵게 들리네요.”
“쉽지 않은 일이죠.”
박윤지 기자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때, 그녀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실은 얼마 전에 재미있는 기사를 읽었는데요. 큰산번역문학상 시상식 사진이었는데, 그 사진에서 민우 씨에게 꽃다발을 건네는 어떤 분이 눈에 띄더군요. 대한그룹의 정연주 씨였는데, 어떤 사이신지요?”
그제야 민우는 깨달았다. 아까 박윤지 기자가 말한 민감한 질문이 무엇인지를.
하지만 민우는 가벼이 웃었다.
그녀가 원하는 건 호사가들이나 좋아하는 스캔들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으니 걱정이 없다. 별로 할 말도 없고.
“명인대 불문과의 이경훈 교수님 프로젝트에서 같이 일을 하는 사이입니다. 대학원 선배기도 하고요. 나이는 제가 더 많긴 하지만요.”
“아하.”
박윤지 기자가 선뜻 다음 질문을 꺼내지 못했다. 뭔가 켕기는 게 있다면 조금이라도 당황을 해야 하는데 민우는 너무나 당당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시는 거죠?”
“아뇨. 그냥 궁금해서 여쭸네요. 방금 건 기사에 실리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박윤지 기자는 정연주에 대한 질문을 이어가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 이번 자리가 불편해지면 다음 인터뷰를 따내기 어려워질 것이다.
기자의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민우는 앞으로도 중요한 취재원(取材源)이 될 거라고. 특종을 쓰려면 관계를 좋게 유지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박윤지 기자는 <태엽시계>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 * *
인터뷰를 마친 민우는 인문관 앞까지 박윤지 기자 일행을 배웅했다.
입구를 통과하고 계단을 내려가기 전에 박윤지 기자가 몸을 뱅글 돌렸다. 그리고 민우를 마주 보며 두 손 모아 공손히 인사했다.
“오늘 인터뷰 감사드리고요. 다음에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저도요. 아, 근데 기자님. 기사는 언제쯤 나갈까요?”
“빠르면 일주일 정도면 나갈 거예요. 일정 나오면 따로 연락드릴게요.”
“기사 잘 부탁드립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민우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박윤지 기자라면 믿을 만했다. 기자로서 평판도 좋은 편이고, 지금까지 기사를 잘 써줬으니까.
‘그래도 아까 연주 이야기는 좀 위험했었지.’
문득 연주가 공인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일은 많이 없겠지만, 앞으로 학교 밖에서 둘이 만나거나 하는 일은 가급적 피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사진이라도 찍혀 기사에 나가게 된다면 적잖게 난처해질 것이 분명했다. 모든 기자들이 박윤지 기자 같지는 않을 테니까.
‘그럼 슬슬 올라가 볼까? 이제 가서 선생님 괴롭힐 시간이다!’
민우는 서지훈 교수 연구실로 걸음을 옮겼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IAHS와 뉴욕 여행에 대해 이것저것 물을 게 너무 많았다.
똑똑―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가니 먼저 온 의외의 손님이 있었다. 민우는 일단 서지훈 교수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한진섭을 주목했다.
“무슨 일이야? 여긴.”
“난 뭐 오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후후후. 나 먼저 간다!”
싱긋 웃은 한진섭이 서지훈 교수에게 90도로 인사하고 연구실을 나섰다. 저렇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 모습은 거의 처음이었다.
민우는 고개를 갸웃하며 서지훈 교수와 마주했다.
“무슨 얘기 하셨길래 애가 저래요? 완전 들뜬 게 유체이탈 수준인데요.”
“그럴 만도 하지. 강사 추천 해줬거든.”
“강사요?”
“그래. 국제어학원 문학파트 강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