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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세계 무대로 (1) (153/500)


153. 세계 무대로 (1)
2022.01.21.


국문과 조교실에서 나온 민우는 멍한 표정으로 복도를 걸었다. 그러다 우뚝 멈추고 손에 쥔 초청장을 다시 들여다봤다.

‘이게…… 정말 나한테 온 거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IAHS의 초대를 받은 교수들은 지금까지 몇 명 있었다. 하지만 학생이 초대를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초대장은 정중한 어조로 민우의 방문을 요청하고 있었다.

‘혹시 이것도 사기 같은 건 아니겠지?’

IAHS 직인과 공인 로고가 찍혔지만 왠지 의심됐다. 예전에 국립 싱가포르 대학에서 온 메일에 한 번 낚인 이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번호를 보니 해외 전화였다.

순간 민우의 머릿속에 퍼즐이 맞춰졌다. 왠지 누가 전화를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도 소르본에서 온 전화일 것이다.

「네, 박민우입니다.」

「오, 미스터 박! 그간 잘 지냈소?」

정답이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피에르 랑느 박사였다. 민우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야 잘 지냈죠. 안 그래도 확인할 게 있어서 박사님께 연락드리려던 참인데 잘됐습니다.」

「확인? 무엇을?」

「IAHS에서 초청장이 왔어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초청을 받을 만한 일을 하지는 않았고…… 혹시 박사님께서 다리를 놔주신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맞습니까?」

「하하하! 정확하군. 탐정을 해도 되겠소.」

민우는 기분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남았다. 언제쯤 자신의 실력으로 세계적인 학회에 초청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하지만 그건 일부야.」

일부?

민우는 생각을 지우고 랑느 박사의 말에 주목했다.

「IAHS의 회장이 미스터 박의 강연 영상을 봤다더군. 무투브와 오픈코스웨어 양쪽 모두. 내가 잘 아는 친구라고 하니까 학회에 초청하고 싶다는 거야. 그래서 초청장이 한국으로 가게 된 걸세.」

민우는 깜짝 놀랐다. IAHS 회장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도 분명 대단한 학자일 것이다.

「평가가 어땠는지 궁금하네요.」

「딱 한마디 했지. ‘인상적’이라고.」

민우는 빙긋 웃었다. 인상적이라는 표현엔 여러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 말의 의미를 직접 미국에서 확인하고 싶어졌다.

「다 좋은데 하필 학회 일정이 학기 중이네요. 좀 부담스럽습니다.」

「공식 초청이니 학교 수업 정도는 슬쩍 빠져도 되지 않나? 지난겨울에 미스터 박이 소르본에 오지 못해서 서운했다네. 그래서 손을 좀 쓴 것도 있지.」

「그러셨군요. 아무튼 신경 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제가 가서 뭘 하면 되는 겁니까? 그냥 오라는 말밖에 안 적혀 있어서요. 외국 학회는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잘 모르고. 대충 몇 명 정도 오나요?」

「저번 학회 공식 기록이 1500명 정도였으니, 실제로는 한 2천 명 정도 다녀가지 않았을까 싶은데.」

「1500명……이요?」

민우는 입을 쩍 벌렸다. 국내 학회는 많아야 100명이 참가할까 말까다. 그런데 1500명이라니. 믿을 수 없는 숫자였다.

「아무튼, 다양한 세션이 준비되어 있으니 와서 구경도 하고 여러 사람과 어울려보게. 미스터 박은 영어를 잘하니까 인맥을 쌓기 수월하겠지. 꽤 흥미로운 경험이 될 걸세.」

민우는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국내 학회와는 규모부터가 다르다. 세계 각국의 명사들이 참여해 자유롭게 지식을 나누는 자리다. 앉아서 듣는 것만으로도 시야가 탁 트일 것이다.

「정말 기대되네요. 그런데 제가 이번 학기에 수업을 두 개 듣는데 선생님들께서 허락을 해 주시려나 모르겠습니다.」

「허락을 안 해주면 박사는 소르본에서 하는 게 좋겠소. 그만큼 합리적이지 못한 곳이라는 이야기니까.」

「귀가 솔깃해지는데요?」

랑느 박사는 반쯤 진담으로 말했지만, 민우는 농담으로 받았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IAHS 학회 시작일이 지음사 퇴직 이후로 잡혔다는 것. 교수 두 명만 설득한다면 다녀오는 데 문제는 없다.

‘돈도 충분히 있고. 가는 김에 날짜 충분히 받아서 여행도 하면 좋겠는데…….’

상상만 해도 즐거웠다. 실없이 웃은 민우가 전화에 집중했다.

「그럼 출국 여부가 확정되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박사님도 학회에 오시는 거죠?」

「물론이오. 제자 몇 명을 데리고 갈 예정이지. 뉴욕에서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겠소.」

전화를 끊은 민우는 심호흡을 한번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일단 이 사실을 선생님께 보고해야겠어.’

민우는 복도의 갈림길에서 고민했다. 4층으로 올라가 서지훈 교수를 만나느냐, 아니면 3층에 있는 민영환 교수를 만나느냐.

‘아무래도 행정적인 부분이니까 지도교수님께 먼저 말씀드리는 게 낫겠지? 허락도 받을 겸.’

민우는 몸을 돌려 민영환 교수 연구실의 문을 노크했다.

들어가자마자 구수한 커피 향이 코를 찔렀다. 강예진이 커피를 내리고 있었고, 민영환 교수는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그래.”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잠시 고민한 민우는 손에 쥐고 있던 초청장을 그에게 건넸다.

“뭐냐? 이건.”

“아, 그게…… 초청장입니다. 이번에 IAHS에서 초청을 받았습니다.”

“뭐?”

“국제인문학회요.”

“아니, 그걸 몰라서 묻는 게 아니라.”

민영환 교수는 안경을 끼고 초청장을 들여다보았다. 어느새 다가온 강예진도 손에 커피포트를 든 채 같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흐음. 이게 네 앞으로 왔단 말이지? 네 연구 성과로 받았을 리는 없겠고, 역시 피에르 랑느 박사의 추천이냐?”

“그렇습니다. 그런데…… 학기 중이라 학회에 참석하려면 수업을 빠져야 해서요. 다녀와도 될지 여쭤보려고 왔습니다.”

민영환 교수가 피식 웃었다.

“여기가 중학교도 아니고, 놀러 간다는 것도 아니고 학회에 가겠다는 건데 일일이 허락을 구할 필요가 있나?”

“하지만 수업을 빠진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학풍이 엄격한 명인대 국문과에서는. 게다가 발표 목적으로 가는 게 아니라 더더욱 조심스러웠다.

“물론 수업을 빠진 것에 대한 페널티는 감수해야 하겠지. 과정 평가는 공정해야 하니까. 하지만 이미 답은 나와 있는 거 아닌가? 학점보다 더한 걸 얻을 수 있는 기회일 텐데.”

민영환 교수는 초청장을 민우에게 돌려주었다. 허락의 의미였다. 환하게 웃은 민우는 90도로 인사한 다음 연구실을 나섰다.

그리고 서정원 교수도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생각보다 쉽게 일이 풀렸다.

‘내가 괜히 어렵게 생각하고 있었나?’

민우는 바로 랑느 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뉴욕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을 확정했다.

* * *

수업을 모두 마친 민우는 지음사로 출근하기 전 인문관 옆 쉼터에 앉았다. 4월 말, 봄꽃이 한창이었다.

‘어렴풋이 기억나네. 꽃이 한창일 때 강 선생님 추천을 받아서 지음사에 처음 갔었지. 그날 윤정민 팀장님하고 밤새 술 마시고. 와. 벌써 일 년이 지났구나.’

오늘이 마지막 출근일이다. 그래서일까. IAHS 참가가 확정된 상황에서도 민우의 표정은 어딘가 침울해 보였다.

그때 옆에서 인기척이 났다.

“좋은 일 있으면서 왜 인상을 팍 쓰고 있어?”

서지훈 교수였다. 그는 앉자마자 담배를 한 개비 꺼내 입에 물었다.

“그냥 생각이 좀 많아서요.”

“비행기 처음 타보는 거라 겁이 나는 건 아니고? 여권은 있냐? 하하하하.”

서지훈 교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민우는 인상을 썼지만 반박하지 못했다. 사실이었으니까.

“여권은 저번 겨울에 만들어 뒀어요. 프랑스 가려고.”

“첫 비행이 뉴욕이라 좀 힘들지 않으려나? 경유로 가면 16시간은 걸릴 텐데.”

“가보셨어요?”

“인마, IAHS 정도는 나도 한번 가봤어. 누구처럼 관광이 아니라 메인 컨퍼런스에 참여했지. 키노트 스피커로.”

민우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대체 이 사람은 못 하는 게 뭐란 말인가.

“아무튼 그건 그렇고. 홀가분하지 않아? 학회 초청도 받고 지음사에서도 탈출하고. 좋은 일만 가득한 거 같은데 말이다.”

“것도 그렇긴 한데요…….”

민우는 멀뚱히 앉아 고개를 들었다. 푸른 하늘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아래 하얀 구름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게 하나 있어서 말입니다.”

“뭔데? 속도위반?”

“왜 갑자기 그런 얘기가 나오는 건지 모르겠네요.”

“하하하. 농담도 못 하냐.”

민우가 한숨을 섞어 말을 이었다.

“<더 위자드> 2부 번역 때문에요.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어요. 연락은 계속 오긴 하는데…….”

서지훈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 민우와 함께한 술자리에서 모두 들었다. 노광남 대표와 안면이 있는지 고집불통이라고 농담을 했었다.

“하여간 그 양반은 은퇴나 하지 왜 괜히 나서서 일을 어렵게 만드는지. 쯧. 계약금 2천이 옆집 개 이름도 아니고.”

“역시 하는 게 좋은 걸까요?”

“내키지도 않은 일 해서 뭐하겠어? 결과물 안 좋을 게 빤히 보이는데. 독자들이 네 번역을 기다린다는 말도 어떻게 보면 포장인 거잖아. 네 실력을 깎아내리려는 건 아니다만.”

일리가 있는 말이라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포기하고 싶은데 한편으로는 욕심이 났다. 1부 번역자인 데다가 센트럴 북스에서 자신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침묵이 이어졌고, 그 끝에서 서지훈 교수가 재를 툭 털었다.

“결정하지 못할 때는 그냥 관망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아니면 송 실장한테 상담을 받아 봐. 업계 사람이니까 적어도 나보단 도움이 되겠지.”

“한심하네요. 이런 거 하나 결정을 못 하고.”

피식 웃은 서지훈 교수가 민우의 어깨를 툭 쳤다.

“공부 많이 했다고 사는 방법까지 잘 알면 누가 힘들게 살겠어? 오히려 공부만 한 사람들이 세상에 나오면 바보가 되지. 깨달음엔 대가가 필요한 법이야. 사기도 당해보고 하면서 크는 거라고.”

“선생님도 사기를 당해보신 적 있어요?”

“있지. 지금도 당했는데? 내가 키운 제자가 IAHS에서 초청을 받다니…… 이거 이거. 꼭 사기 맞은 기분이라고. 하하하하!”

실컷 웃은 서지훈 교수가 꽁초를 쓰레기통에 던지곤 인문관으로 사라졌다.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신기하게도 마음이 좀 가벼워졌다.

‘일단 가보자. 그 끝이 어디든지 간에.’

기지개를 켠 민우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마지막 출근을 위해 버스에 올랐다.

* * *

민우는 직원들의 퇴근 시간에 맞춰 출근했다. 명목상 출근이었고, 작별 인사를 하러 들른 것이다. 송별회도 참여할 겸.
먼저 15층에 올라가 송승현 실장에게 인사를 하려 했는데 외근을 나가고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전남규 차장과 작별 인사를 하고 내려왔다.

민우가 14층에 나타나자 인문사회팀 전 직원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진짜 가는 거예요? 왠지 장난 같다. 참…….”

정은아 대리가 코끝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다들 웃고 있었지만 서운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내가 여기에서 헛되이 시간을 보낸 건 아니구나.’

데이터로 쌓인 성과가 아니라 직원들의 표정을 보고서 알 수 있었다. 신뢰와 정이 듬뿍 담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민우가 꾸벅 인사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정말 좋은 경험이었어요. 아마 여러분들과 함께한 시간은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누가 공부하는 사람 아니랄까 봐 교과서적인 얘기만 하네.”

정은아 대리의 일침에 일동이 한바탕 웃었다. 민우는 얼굴이 빨개졌지만, 함께 웃었다. 그때 장철호 주임이 나섰다.

“오늘은 일찍 갈 생각하지 마십쇼. 다들 송별회 하려고 시간 비워뒀으니까.”

“준비는 완벽합니다.”

민우는 주머니에서 숙취 해소 음료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

“송별회 건배사는?”

“아, 그거까지는…….”

“어디 한번 박 쌤의 센스를 테스트해봐야겠네. 자, 그럼 다들 일 접고 출발할까요?”

윤정민 팀장이 콜을 외쳤고, 직원들이 하나둘 짐을 챙기고 사무실을 나섰다.

근처 삼겹살집에서 술판이 크게 벌어졌다.

열 명이 넘는 인원들이 모여 앉아 고기를 굽고 술을 마셨다. 수평적인 문화였기 때문에 술을 하지 못하는 직원들은 콜라나 사이다를 마셨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자! 박 선생. 쭉 들이켜! 사양 말고!”

윤정민 팀장이 소주를 가차 없이 따랐다. 장력 덕에 흘러넘치진 않았지만, 보기만 해도 입이 쓸 정도로 아주 꽉 채웠다.

그때였다.

“앗, 실장님!”

“안녕하세요!”

소주를 마시던 민우가 깜짝 놀라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 송승현 실장과 전남규 차장의 모습이 보였다. 민우가 화들짝 일어섰다.

“실장님. 오늘 외근 나가셨다고 들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잠시 들렀어요. 여기 다들 모여 있다고 해서. 나도 한 잔 줄래요?”

“소주도 하세요?”

“못 들었나 보네. 나름 국문과 전설이었는데.”

민우가 재빨리 술과 술잔을 준비했다. 두 손으로 공손히 따르고, 송승현 실장도 민우의 잔을 채워주었다.

“그간 고생 많았어요. 덕분에 회사생활이 조금은 재미있었네요. 그리고…….”

송승현 실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덕분에 서지훈 교수와 더 가까워졌다는 이야기는 꺼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IAHS 이야기는 들었어요. 민우 후배라면 어딜 가든 잘 해낼 거라고 믿어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자, 건배.”

잔이 부딪쳤다. 술잔을 들이키며, 민우는 그녀가 처음으로 자신을 후배라고 칭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미소를 지었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술자리도 끝이 나고 찾아온 새로운 아침.

일찍 일어난 민우는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며 다음 행보를 준비했다.

이번 목표는 뉴욕, IAHS 정기 학술대회였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야. 세계 무대로 나아갈 수 있는.’

민우는 루카치의 유고를 덮었다. 그의 두 눈이 밤하늘의 별처럼 총총히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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