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신의의 계약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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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신의의 계약서 (3)
2022.01.20.
마그네틱이 ‘재실’로 맞춰진 것을 확인한 민영환 교수가 가볍게 노크했다. 들어오라는 소리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학생일 줄 알았는지 서지훈 교수가 살짝 놀랐다. 곧장 자리에서 일어서 책상 앞까지 나와 민영환 교수를 맞았다.
“뭘 또 일어나? 그냥 앉아 있지.”
“버릇인데요 뭐. 상아대가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더군요.”
“쯧, 그러니까 오랄 때 왔어야지.”
“잔소리하러 오신 거 같지는 않고, 어쩐 일로 여길 다 오셨습니까?”
아직 두 사람의 앙금은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지나가면서 인사하는 게 전부였는데, 오늘은 이렇게 민영환 교수가 직접 찾아온 것이다.
그만큼 중요한 사안이라는 얘기다.
“혹시 전화 받은 거 있나? 감 선생한테.”
서지훈 교수의 표정이 굳었다. 감주형 교수는 학부 선배이기도 하지만, 워낙 정치성이 짙어 가까이하지 않고 있었다.
“혹시 감 선배가 뭔가 요구를 해온 겁니까?”
“강사가 필요하다는군.”
“강사요? 이미 학기가 시작됐는데 무슨 강사를…….”
“학부 말고. 국제어학원.”
국제어학원.
그 이름은 최근 명인대를 서서히 흔들기 시작한 하나의 화두였다.
대학도 이해관계에 따라 패가 갈린다. 국어학 전공 교수들이 국제어학원의 권력을 틀어쥐면서 학부와 대학원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최근 명인대 국문과의 분위기가 뒤숭숭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근본적으로는 송현우 교수의 퇴임이 머지않았다는 게 가장 컸지만 말이다.
민영환 교수가 말을 이었다.
“그쪽에서는 네가 나서주길 원하는 눈치였어.”
“교양 강좌에 정교수가 나서는 건 낭비 아닙니까? 괜히 후배와 제자들 앞길 막는 꼴밖에 안 되는데. 악수를 두는군요.”
“그건 그렇지.”
왠지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았다. 서지훈 교수는 소파 쪽으로 손을 뻗었다.
“일단 좀 앉으시죠.”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았다.
한동안 말없이 두 사람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얼마나 지났을까. 서지훈 교수의 머릿속에 그럴듯한 계획이 떠올랐다.
“굳이 심각하게 생각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글쎄. 오히려 그 반대일 수도 있지. 부탁할 만한 선생들이 없어. 다들 발을 빼려고 하니까.”
“누구도 바지에 흙탕물이 튀길 바라진 않으니까요.”
“그나마 지도 학생이 없는 네가 제일 여유롭지 않나? 뭣보다도…….”
민영환 교수는 말을 하려다 말았다. 문득 자신의 부하를 사지로 몰아넣는 지휘관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 눈빛을 읽은 서지훈 교수가 빙긋 웃었다.
“지도 학생이야 다음 학기부터 줄을 설 거 같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보다, 국제어학원 교양 강좌죠? 정규 과목이 아니라.”
“일단은 그렇다고 들었어.”
“간을 보겠다는 거군요. 문학 파트에서 누가 나올지.”
재미있다는 듯 웃은 서지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그럼, 대학원생 중에서 한 명 뽑으시죠.”
“……!”
생각지도 못한 대안에 민영환 교수의 눈매가 좁아졌다. 하지만 서지훈 교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외국인들에게 한국 문학을 가르치는 데 박사학위까지 필요 없습니다. 학사 학위로도 충분해요. 후배들에게 경력을 쌓을 기회를 주는 게 낫지 않을까 싶네요.”
“그럴듯한 명분이긴 하다만…… 상황이 더 나빠질 텐데?”
“높고 낮음을 따지려면 먼저 주사위는 던져봐야겠지요. 그쪽에서 먼저 던졌으니 우리도 던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지훈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연구실을 걷기 시작했다.
아직 봄인데 햇살이 따갑다.
피하고 싶었지만,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눈앞에 성큼 다가온 듯한 느낌이었다.
서지훈 교수가 몸을 돌렸다.
“이번 건은 제가 맡겠습니다. 선배는 물러서 계십시오.”
“신중히 생각해. 쉽게 볼 일이 아니야.”
걱정스러운 한마디를 남겼지만, 그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민영환 교수가 조용히 연구실을 나갔다.
“감주형.”
서지훈이 이름 세 글자를 낮게 읊조렸다.
책장 앞을 지나던 그는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공교롭게도 그 책은 르네 지라르의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이었다.
내용을 떠나 제목만큼은 지금 상황에 아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서지훈 교수는 미소를 지으며 오랜만에 책을 펼쳤다.
익숙한 한 문장이 튀어나왔다.
― 막스 셸러는 원한의 근원 가운데에서 ‘선망, 질투 그리고 경쟁심’을 꼽고 있다.
* * *
수업을 마친 민우는 바로 지음사로 출근했다. 컴퓨터를 켜고 자리에 앉자마자 전화가 왔는데, 라온북스의 현기혁 팀장이었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어젠 잘 들어가셨어요? 꽤 많이 드시던데요.”
― 전 괜찮습니다. 접대 하루 이틀 하나요. 그나저나 통화 괜찮으시죠?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
민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현기혁 팀장의 목소리가 조금 이상했다. 주눅이 들었다고 할까. 평소의 쾌활함과는 조금 거리가 멀었다.
― 다른 게 아니라, 어제 계약 건 때문에…… 저희 대표님께서 좀 뵙자고 하시네요.
“대표님께서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한마디였다.
계약 조항에는 문제가 없었다. 계약금도 넉넉했고, 보호 조항이 들어가 있어 번역을 못 하게 되는 경우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영한번역에만 한정한 전속 계약이었다.
“인사를 하시려는 거면 괜찮습니다. 평소에 잘 챙겨주시기도 했고, 계약금도 많이 걸어 주셨잖아요. 그걸로도 충분합니다.”
― 아뇨. 인사는 아니고. 으음.
핸드폰 너머에서 앓는 소리가 들렸다. 숙취인지 고민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 아무래도 직접 뵙고 말씀드리는 게 나을 거 같습니다. 혹시 오늘 저녁 괜찮으십니까? 대표님 모시고 가겠습니다.
“오늘 저녁이라면 괜찮긴 한데요. 제가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대표님도 오시는 자리라면요.”
― 마침 그 근처에 일정이 있으셔서요. 제가 지음사 근처에 식당 예약하고 톡 하나 드리겠습니다. 그쪽으로 오시면 될 것 같네요.
“알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대체 무슨 일일까 신경이 쓰였지만, 곧 있을 미팅을 위해 잡념을 털어내고 서둘러 자료를 정리했다.
* * *
저녁 6시 반, 민우는 현기혁 팀장이 보내준 지도를 따라 식당을 찾았다. 근사한 한정식집이었다. 민우는 카운터로 움직였다.
“현기혁 씨 일행인데요.”
“예, 손님. 이쪽으로 오시죠.”
종업원이 민우를 방으로 안내했다. 미닫이문이 입을 벌리자 안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일어섰다.
총 세 명이었다. 두 명일 줄 알았는데 이유리 편집자도 있었다.
민우가 현기혁 팀장과 이유리 편집자에게 묵례로 인사하고 상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노광남 대표가 서서 민우를 맞았다.
“갑자기 자리를 청해서 미안하군요. 노광남이라 합니다.”
“안녕하세요. 박민우입니다.”
두 사람이 가볍게 악수했다.
흰 수염이 인상적인 노인이었다. 아니, 노신사라고 해야 할까. 수염뿐만이 아니라 눈썹도 희끗희끗했는데 체격이 좋아서 그런지 나이가 들어 보이진 않았다. 흰 개량 한복을 입고 손에는 부채를 들고 있었다.
‘회사가 젊은 이미지라서 대표님이 이런 분일 줄은 몰랐네. 신선 같은 느낌이다.’
방심하고 있다가 한 방 맞은 기분이었다.
한복이 참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이 노광남이 앉으라고 권했다.
분위기는 조용했다.
모두 노광남의 말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으음. 현 팀장. 그걸 좀.”
노광남의 지시에 현기혁 팀장이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민우의 눈이 흠칫 커졌다. 어제 작성했던 번역 전속 계약서였다.
노광남 대표가 계약서를 상에 올렸다.
“먼저 제안을 주시고…… 이렇게 서명까지 해 주셔서, 회사의 대표로서 무척 기쁩니다.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아닙니다. 경력도 없는데 세 번이나 기회를 주셔서 오히려 제가 감사한 일이죠.”
“허허허. 실력이 있는 분이라 어딜 가든 좋은 대우를 받으셨겠지요. 뭐…… 작품 계약을 따온 현 팀장도 고생했지만, 박 선생도 고생이 많았겠습니다.”
느릿느릿한 목소리로 노광남이 이야기를 풀어갔다. 그의 눈빛은 온화했고, 평안해 보였다.
서론은 거의 끝난 느낌이었다.
그가 손을 뻗어 계약서를 맨 마지막 페이지로 넘겼다.
민우의 서명이 들어간 페이지였다.
민우는 깜짝 놀랐다. 자신이 남긴 서명에 아직 연푸른색의 광채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저희 회사에 대한 믿음으로 전속을 청하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현 팀장의 말을 들어보니…… 그게 아닌 거 같더군요. 골든북스에 대한 일이 껴 있는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맞습니다. 골든북스가 <더 위자드> 2권 판권 계약을 할 때 조건으로 걸렸던 게 바로 제가 번역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얘기가 좀 달라지지 않을까요?”
노광남 대표는 손자를 바라보는 듯한 인자한 미소를 보이고는 계약서를 내려다봤다.
정확히는 민우의 서명을. 은은한 푸른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는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계속 그것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달라진다는 말씀이신지.”
“한마디로…… 저들과 비슷한 방법을 써서 싸움에서 이기고 싶진 않다는 게 내 의견입니다.”
여전히 인자한 표정으로, 노광남 대표는 현기혁 팀장과 이유리 편집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실무자들이 화가 난 것은 이해합니다. 뺏기다시피 2부 판권을 넘겨주고…… 제대로 된 협상도 해보지 못했으니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노광남 대표가 천천히 물잔을 입에 대고 목을 축였다. 그 잠깐의 시간이 천추처럼 느껴졌다.
“이건…… 그렇게 단순히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기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할까요. 우리 라온북스가 추구하는 이상과 맞지 않지요. 우리는 공정한 경쟁을 하길 원합니다.”
“하지만 공정한 방법으로는…….”
“압니다. 우리 박 선생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사람이라면 편한 방법으로 가려고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허허허. 쓸데없는 이상론일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가끔 현 팀장에게 혼나기도 합니다만.”
노광남 대표가 수염을 쓰다듬었다. 부채를 손에 쥐고 다른 쪽 손바닥을 툭툭 치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역시 길게 본다면…….”
노광남 대표의 눈이 아득해졌다. 민우는 문득 궁금했다. 대체 그는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이런 말이 있지요.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혹시 들어보셨는지.”
순간 전율이 일었다.
민우도 알고 있는 말이었다. 니체의 <선악의 저편>에 있는 구절이었다. 예전에 독일어 공부를 할 때 읽은 적이 있었다.
‘그런 거였나…….’
민우는 고개를 살짝 떨궜다. 그것으로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뭐, 박 선생을 책망하려는 게 아닙니다.”
“대표님.”
노광남 대표는 계약서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리고 민우가 서명을 한 부분을 어루만졌다.
“간단한 이유였습니다. 박 선생이 우리에게 믿음을 준 것처럼…… 우리도 1부를 출간한 출판사로서 <더 위자드>를 아끼고 사랑해주는 독자들에게 믿음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지극히 이상론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노광남 대표의 경영 철학이었고, 지금까지 라온북스가 버틸 수 있는 힘이기도 했다.
“독자들은 박 선생의 번역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루빨리 <더 위자드> 2부가 출간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지요. 이런 잡음이 생겨서는 안 됩니다. 그건 독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요.”
“대표님. 그럼 제가 골든북스와 작업을 하는 게 좋겠습니까?”
“그건 내가 강요할 수 없는 부분이지요. 분명한 건…… 우리는 박 선생을 이용해 상황을 바꾸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인자하게 웃은 노광남 대표가 현기혁 팀장에게 눈짓했다. 그가 바로 나섰다.
“저도 느끼는 바가 많았습니다. 박 선생님께서 동의해주신다면, 이번 계약은 없었던 걸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정정당당히 싸워서 이기겠습니다.”
“이번엔 어쩔 수 없지만요. 언젠가는 우리의 방식이 통할 거라고 생각해요. 누군가 했던 말처럼 독자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요.”
이유리 편집자의 말까지 더해졌다. 그녀가 표현한 ‘누군가 했던 말’의 주인공은 자신이었다.
세 사람을 둘러본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 팀장님, 그리고 편집자님의 의견에 따르겠습니다. 좀 더 크게 보겠습니다.”
“그럼 동의하신 걸로 알고 계약 파기 절차를 밟겠습니다.”
알겠다고 대답한 민우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에 잠겼다.
‘아직 다 해결된 게 아니야. 어려운 문제가 하나 남았어.’
독자들은 자신의 번역을 원한다고 한다. 그러나 골든북스와 작업을 하기는 꺼려졌다.
모순의 상황.
마침 그때 문이 열리고 상차림이 시작됐다.
* * *
“아휴, 오늘도 잔뜩 왔네.”
국문과 행정조교 이다해는 우편물을 한 아름 들고 조교실로 들어왔다. 투덜거리며 우편물을 하나씩 정리해 교수들의 우편함에 넣었다.
그런데 해외에서 온 우편이 하나 껴 있었다.
영어로 씌어 있어 자세히 봐야 했다. 곧 그녀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국제인문학회?”
국제인문학회, IAHS는 International Association for Humanistic Studies의 약자로 세계적인 인문예술학회였다. 그곳에서 온 초대장인 것이다.
“송현우 선생님께 온 건가?”
수신인을 확인한 이다해는 깜짝 놀랐다. 거기엔 송현우 교수의 이름이 아니라 ‘Minwoo Park’이라는 이름이 대신 들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