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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신의의 계약서 (2) (151/500)


151. 신의의 계약서 (2)
2022.01.17.


‘이제 여기도 곧 안녕이구나.’

민우는 인문사회연구소 연구실을 둘러보며 감회에 빠졌다. 연구원 생활도 이제 보름이 채 남지 않았다.

여전히 자리는 텅 비어 있고, 민우 혼자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마치 학교에 온 것처럼 익숙했다.

‘1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마 평생 잊지 못하겠지.’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일을 경험했다. 먼 훗날 오늘을 돌아봤을 때 의미 있는 경험이었냐고 묻는다면, 기꺼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래도 오늘 할 일은 열심히 해야지!’

민우는 준비한 자료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감회가 남달랐던 탓일까. 오늘따라 인문사회팀 직원들이 민우에게 한마디씩 말을 걸었다. 특히 정은아 대리가 심했다.

“박 쌤.”

“네.”

“쌤 그만두면 심심해서 어쩌죠? 응?”

민우는 한숨을 내쉬며 자료를 복사기에 세팅했다.

“대리님. 그 말씀 정확히 스물한 번짼데요.”

“세상에! 그걸 다 세고 있었어? 박 쌤 은근 독한 면이 있다니까.”

“그럼요. 대리님이 저 놀리려고 출근하시는 거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데.”

민우가 너스레를 떨며 복사기를 돌렸다. 문득 자신도 인문사회팀 사람이 다 됐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옆에서 장철호 주임이 거들었다.

“대리님이 자꾸 박 선생님 괴롭히시니까 못 견디고 그만두는 거잖습니까.”

“와, 장 주임까지 이러기야? 동갑이라고 편들기는. 근데 박 쌤은 연구원 연장 신청해보지 왜 안 했어요? 충분히 될 거 같은데.”

민우는 인쇄가 끝난 종이를 한 부씩 분류하며 스테이플러를 박았다. 오늘 회의에서 사용할 KOC 강연 관련 자료였다.

“이제 공부에 전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번역 일에 연구원까지 겸하려니까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더라고요. 하나는 줄여야 했어요.”

“하긴, 것도 그러네.”

정은아 대리는 턱을 괸 채 민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다른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고작 일 년 사이에 정이 많이 든 모양이었다.

복사를 끝낸 민우는 연구실로 돌아가지 않고 직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정은아 대리가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최근 업계에 소문이 파다하던데. 어떤 젊은 번역가가 겁도 없이 골든북스의 호의를 걷어찼다고. 이거 민우 씨 얘기죠?”

“호의요? 누가 그런 이상한 소리를.”

“암튼 맞죠?”

“번역 제안을 받긴 했어요.”

민우는 씁쓸히 웃었다. 여전히 문경원 대리에게 연락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즈니스가 아니라면 벌써 스팸 설정을 했을 것이다.

골든북스는 어떻게든 민우를 잡으려 번역 수당을 높였다. 인센티브 조항이라는 초강수도 뒀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골든북스에서 그렇게 나올수록 민우의 결심은 더욱 확고해졌다. 돈이면 모두 해결된다는 식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인데……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게 우선 아닌가? 조건은 부차적인 문제잖아.’

문경원 대리와 전화로 이야기할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관심사는 민우도 아니고 작품도 아닌 회사의 이익이었다.

멀뚱히 민우의 얼굴을 바라보던 정은아 대리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물었다.

“그래도 <더 위자드> 2부 정도면 괜찮았을 텐데. 왜 거절했어요? 그쪽 평판이 좋지 않긴 해도 박 쌤한텐 좋은 기회 아닌감?”

“아무리 조건이 좋아도 상도의가 없는 업체와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아요. 2부 판권 계약 과정에서 잡음이 좀 심했다고 들었어요. 번역가 후려치기로도 유명하고.”

“하긴, 그쪽으로 좀 유명하긴 해요. 지음사는 어때요? 아무런 제안이 없었나?”

민우는 입사 제안을 받았던 그때를 생각하며 멋쩍게 웃었다. 하지만 송승현 실장의 체면도 있어 구체적인 언급은 피했다.

“지음사가 좋은 회사인 건 분명해요. 하지만 뭐랄까. 대기업이라 그런지 제가 운신할 수 있는 폭이 좁은 거 같더라고요. 전 아직 자유롭게 일하는 게 좋아요.”

그렇다고 해서 민우가 지음사를 아예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해외 진출만 놓고 본다면 지음사 만한 출판사는 없으니까.

입사 제의는 거절했지만 번역 제안까지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정은아 대리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라온북스랑 계속 작업을 하는 거구나? 이번에 나온 <오멜라스의 마녀>도 반응이 좋던데. 또 베스트셀러 될 느낌이에요.”

“다들 열심히 해 주셨으니까요.”

민우는 겸손하게 공을 돌렸다. 하지만 사실이기도 했다. 판권을 뺏긴 이후, 라온북스 직원들은 철야를 하며 <오멜라스의 마녀> 출간을 준비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성공했다.

“하긴, 아직 규모는 작긴 해도 라온북스가 평판은 좋아요. 민우 씨가 앞으로 잘 키우면 되겠네. 그런데 <태엽시계>는 언제 출간된대요?”

“4월 17일이라고 들었어요. 영국 주요서점, 그리고 워터스툰스에서도 예약판매가 되고요. 온라인 마켓에 대형 배너도 받기로 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머, 잘됐네.”

워터스툰스는 영국의 대표적인 서점 체인이다.

입점까지는 별다른 이슈가 없었지만 온라인 마켓의 메인 배너를 받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홍보 경쟁은 치열했다. 하지만 고두열 과장은 여기에서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다. 워터스툰스의 온라인 마켓 페이지의 메인 배너를 따낸 것이다.

“아무튼 <태엽시계>까지 대박 나서, 내년에는 번역상 대상 받으세요. 꼭. 장가도 가고, 공부도 열심히 해서 교수 되고. 나중에 유명해졌을 때 모른 척하기 없기예요?”

“아직 한참 뒤의 일인데요. 될지 안 될지도 모르고. 벌써부터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라니까?”

민우는 그 말에 긍정했다.

1년 전만 해도 신기루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조금 멀리 떨어져 있긴 해도,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 손에 쥘 그런 미래였다.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도 이따 회의는 어떻게 될지 알아야죠. 슬슬 회의 준비하실까요?”

민우는 복사물을 챙기고 회의실로 향했다.

* * *

그날 저녁. 민우는 근처에 있는 스몰비어집으로 들어갔다. 늘 앉는 그 자리에 현기혁 팀장이 앉아 있었다.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기분이 좋아 보였다.

“뭐 좋은 일 있으세요?”

“이것저것 많지요.”

“드디어 애인 생기신 겁니까? 어서 장가가셔야죠. 곧 마흔이신데.”

“이런 서운한 말씀을. 아직 1년 남았습니다.”

씨익 웃은 민우는 크림맥주 한 잔을 시켰다. 술은 금방 나왔고, 감자튀김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기분 좋게 건배를 했다.

현기혁 팀장이 운을 뗐다.

“<오멜라스의 마녀> 판매 추이가 심상치 않습니다. 아직 중위권에 머물러 있긴 한데 금방 올라갈 거 같네요. 초판 소진량이 작년에 냈던 <사각 살인>보다 배는 빠릅니다.”

“대강 둘러보긴 했는데 평이 좋아서 마음이 놓였습니다. 아무래도 일어 번역은 처음이니까요.”

“처음이라는 그 말 아무도 믿지 않을 겁니다. 하하하하.”

하지만 오늘은 <오멜라스의 마녀> 매출보다 더욱 중요한 일이 있었다. 민우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팀장님. 계약서는 가져오셨죠?”

“예. 일단 가져오긴 했습니다만…….”

현기혁 팀장은 잠시 머뭇머뭇했다. 차가운 김이 서린 맥주잔을 움켜쥐며 그가 진지하게 물었다.

“정말 계약하실 겁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희 출판사를 배려해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건 엄연히 비즈니스고, 민우 씨 개인의 이익도 중요한 거니까요.”

“제 개인의 이익은 충분히 고려했습니다. 큰 욕심은 없어요. 지금도 먹고살 만합니다.”

확고한 눈빛.

한숨을 내쉰 현기혁 팀장은 가방으로 손을 뻗었다. 그 어떤 말로 회유한다고 해도 민우는 넘어갈 거 같지 않았다.

곧 계약서가 담긴 투명한 파일이 모습을 드러냈다. 현기혁 팀장은 파일에서 계약서를 꺼내 민우 앞에 내려놓았다.

“말씀하신 계약서입니다. 그때 말씀하신 조항은 모두 넣었습니다. 저희도 이런 계약은 처음이라 나머지는 일반 상관례를 따랐고요. 차근차근 검토해 보시죠.”

민우는 계약서를 펼쳤다.

상단에 ‘라온북스 콘텐츠 번역 계약서’라고 적혀 있었다. 제목은 여타의 계약서와 같았지만, 내용은 전혀 달랐다.

이건 외주가 아니라 전속 계약이었다.

민우는 빠르게 계약서를 훑었다. 조건은 자신이 말한 대로 모두 맞춰져 있었다.

기간은 3년, 계약금은 2천만 원이었다. 번역 보수는 타이틀마다 협의를 거치도록 되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항목 하나. 전속이기 때문에 외부 업체에서 민우에게 번역 의뢰가 들어올 경우 라온북스에서 직접 교섭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특별히 문제 되는 부분은 없는 거 같네요. 그럼 서명하겠습니다.”

안주머니에서 펜을 꺼냈다. 특별한 물건. 바로 루카치의 만년필이었다.

신의(信義)가 만든 자리였다. 그에 어울리는 아이템은 이거라 생각했다.

민우는 마음을 담아 계약서에 서명했다.

사사삭―

펜촉에서 시작된 푸른색 광휘가 궤적을 남겼다.

서명을 마친 민우는 계약서 한 부를 현기혁 팀장에게 건넸다. 계약서를 품에 안았지만, 그는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이다.

그때 민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잠시만요.”

문경원 대리가 보낸 문자였다. 민우가 전화를 잘 받지 않아서 그런지 문자를 남겼다.

구구절절 안쓰러웠다. 어떻게든 계약을 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생각해 보면 영업맨으로서는 정말 훌륭한 근성을 가졌네. 이 사람. 방향은 좀 어긋나긴 했지만.’

계속 거절을 하는데도 달라붙어 어떻게든 계약을 따내려고 했었다. 지치기도 지치고 짜증도 났지만, 집념을 느낄 수 있었다.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어땠을까?’

민우는 답장하지 않고 핸드폰을 껐다. 핸드폰을 손에 쥔 채로 현기혁 팀장에게 물었다.

“팀장님. 계약서 앞면 촬영해서 공개해도 상관없죠? 별 내용은 없는 거 같아서요.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만 찍을까 하는데.”

“그 정도는 괜찮습니다. 큰 문제는 없어요.”

씨익 웃은 민우는 핸드폰을 켜고 사진 앱을 실행했다.

찰칵!

계약서의 상단부가 사진에 담겼다. ‘라온북스 콘텐츠 번역 계약서’와 ‘전속 계약’이 들어간 문구, 그리고 갑과 을의 정보가 사진에 선명히 찍혔다.

“그런데 그 사진은 뭐에 쓰시려구요?”

“센트럴 북스에 확인해 보니 제가 번역하는 것을 조건으로 골든북스와 2부 판권계약을 체결한 것 같더군요. 그쪽 디렉터에게 확인한 내용이니 아마 확실할 겁니다.”

“예에?”

싱긋 웃은 민우는 문경원 대리에게 답장했다. 사진을 첨부한 다음, 두 엄지로 열심히 핸드폰을 두드렸다. 그러면서 말했다.

“전 비즈니스를 잘 모릅니다. 업계 사정도 잘 모르고요. 그러니까 앞으로 문의가 오면 팀장님께서 잘 해결해 주세요.”

“잘 이해가 안 가는군요. 어떤 문의가…….”

“방금 찍은 사진 골든북스 관계자에게 보냈습니다. 전에 봤던 문경원 대리한테요.”

그 한마디에 현기혁 팀장이 맥주잔을 쥔 채로 움찔 놀랐다. 하마터면 잔을 놓칠 뻔했다.

민우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오늘 번역 전속 계약을 체결했고, 저한테 교섭권이 없으니 라온북스에 문의하라고 솔직하게 얘기했어요.”

현기혁 팀장은 머리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민우가 한 이야기는 모두 알아들었다.

이제 골든북스는 라온북스와 협상을 해야 한다.

하지만 두 출판사의 관계는 이미 완전히 틀어진 상황. 협상은 무의미했다. 그리고 칼자루는 골든북스가 아니라 라온북스의 현기혁 팀장이 쥐게 됐다.

“혹시 골든북스 때문에 전속 계약을 하자고 하신 겁니까? 일부러?”

“저는 갑질에 소질이 없어서요. 어른스럽지도 못하고. 그러니까 팀장님께서 제대로 보여주세요. 진짜 갑이 무엇인지를. 참, 센트럴 북스엔 당분간 비밀로 하시고요. 미리 알려지면 게임 끝나니까.”

민우가 잔을 들었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제야 환하게 웃은 현기혁 대리가 잔을 들고 부딪쳤다.

쨍―

그날 밤, 술자리는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 * *

전화를 받은 민영환 교수가 미간을 찡그렸다.

“강사를?”

― 이번에 국제어학원 커리큘럼이 좀 바뀌지 않았습니까. 교양강좌로 한국문학 파트를 누가 좀 맡아줬으면 하네요.

수화기 너머 사내의 목소리는 냉철했다. 요구사항만 분명히 전달했다.

민영환 교수는 침음을 흘렸다. 가급적이면 국제어학원 사업에 얽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전화를 피할 수는 없었다.

국제어학원은 사립대인 명인대 내에서 최근 주목받는 이권 사업 중 하나였다.

한류 열풍으로 한국어를 배우려는 유학생들이 몰려든 것이 시작이었다. 작년을 기준으로 한국어 강좌의 수요가 외국어를 앞질렀고, 국제어학원장 보직도 처음으로 국문과 교수가 받게 되었다.

지금 전화를 건 것도 바로 현 국제어학원장이자 국문과 교수인 감주형이었다.

“알았네. 내 적당한 사람을 찾아보지.”

― 선생님만 믿고 있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핸드폰을 놓은 민영환 교수는 책상에 놓인 전화를 들었다. 내선 번호를 누르려던 그는 그만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화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가 향한 곳은 서지훈 교수 연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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