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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신의의 계약서 (1) (150/500)


150. 신의의 계약서 (1)
2022.01.14.


“박 선생님!”

문경원 대리였다. 그는 헐레벌떡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잠시 잊고 있던 불청객의 등장에 민우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누나.”

“왜.”

“어머니 모시고 먼저 식사 장소로 좀 가 있어. 금방 갈게. 수빈이 너도.”

이야기가 금방 끝날 것 같지 않아 수빈을 포함한 가족들을 먼저 출발시켰다. 그때 문경원 대리가 눈앞까지 다가왔다.

부담스러운 거리라 민우가 반 발자국 물러섰다.

“휴우, 박 선생님. 하마터면 놓칠 뻔했네요. 아무튼 수상 축하드립니다. 진심으로요.”

“감사합니다. 굳이 안 오셔도 되는데.”

“무슨 그런 서운한 말씀을. 잠깐 이야기 괜찮으실까요?”

뭐라 한마디 하려고 했다가 꾹 참았다. 문경원 대리도 한낱 월급쟁이에 불과했다. 이렇게 정성을 들이는 게 안쓰러웠다.

생각해보면 그도 주말을 반납하고 업무에 나서고 있는 게 아닌가.

“잠깐은 괜찮습니다. 가족들이 와서요. 짧게 끝내 주시죠.”

“아이구. 이거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게…… 전에 고민해 보겠다고 하신 건 어떻게 되셨는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얼마 전 지음사에서 통화했을 때 민우는 그를 궁지로 몰고 갔다. <더 위자드> 2부 번역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그는 끈질겼다. 이어 문자가 하나 왔는데, 민우는 그걸 다음 날 확인하고 답장했다. 번역에 대해서는 더 생각을 해 보겠다고.

그 이후로 민우가 연락을 하지 않자 이렇게 시상식장에 멋대로 나타난 것이었다.

민우가 사무적인 표정으로 응대할 만했다.

“아직 생각 중입니다. 다른 곳에서도 몇몇 제안이 있어서요. 내용을 충분히 검토해보고 결정할 계획입니다만.”

“다른 곳이요? 어디서 말입니까?”

“실례잖습니까. 그런 질문은.”

한 방 얻어맞은 문경원 대리가 입을 꾹 다물었다. 속으로 이 젊은 새끼 운운했지만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계속 말을 걸었다.

“죄송합니다. 너무 궁금한 나머지…… 하하. 실은 제가 계약서를 뽑아서 왔는데요. 번역 조건을 한번 검토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정말 잠깐이면 됩니다.”

문경원 대리는 자신이 있었다.

민우급의 번역가들이라면 흔쾌히 받아들일 만한 조건을 준비했던 것이다.

“나중에요. 가족들이 기다립니다. 다른 건 몰라도 가족들과의 시간을 방해받는 건 불편하네요.”

“얼마든지 기다리겠습니다. 식사 후에라도…….”

“그러시죠.”

민우가 간단히 대꾸하고 돌아섰다.

때마침 옆쪽에서 현기혁 팀장과 이유리 편집자가 나타났다. 민우의 얼굴이 놀랍도록 밝아졌다.

“팀장님! 유리 씨!”

민우가 반갑게 외치며 두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보던 문경원 대리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동종업계 종사자라 그도 현기혁 팀장이 누구인지 알아본 것이다.

‘라온북스 놈들이잖아? 젠장할. 저렇게 좋아할 건 또 뭐야!’

그들을 살갑게 대하는 민우의 모습이 꼴 보기 싫었는지 문경원 대리는 즉시 그곳을 빠져나갔다. 애초에 민우는 그가 무엇을 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골든북스의 문경원 대리지요? 여기까지 와서 귀찮게 하다니. 역시 소문대로군요.”

현기혁 팀장이 혀를 차며 말했다. 이유리는 화난 표정으로 문경원 대리의 등을 쏘아보았다.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실례되는 질문이지만, 번역 계약은 진행하실 겁니까?”

“별로 내키진 않네요.”

“저희 눈치를 보실 건 없습니다. 비즈니스니까요. 2부 판권을 따내지 못한 건 아쉽지만, 민우 씨가 번역가로서 커리어를 쌓는 것도 마찬가지로 중요합니다.”

감동적인 한마디였다. 민우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굳게 결심한 것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런데 팀장님. 식사하고 가시는 거죠?”

“그래야죠. 여기까지 왔는데 밥은 먹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튼 다시 한번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꽃다발 정말 많이 받으시던데요. 전 민우 씨가 대상 받는 줄 알았습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직 축하를 받기는 좀 이른 거 같은데요.”

현기혁 팀장과 이유리가 무슨 소리냐는 듯 민우를 바라보았다.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린 민우가 조용히 말했다.

“계약서를 하나 준비해 주세요. 라온북스 이름으로.”

“계약서요? 그게 무슨…….”

곧 민우가 계약 내용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걸 듣는 두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민우는 미소를 지었다.

“제가 드린 말씀대로 가능하죠?”

“아, 그게…… 하, 참. 난감하군요. 가능은 한데. 정말 그렇게 하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으니까 드리는 말씀이죠. 저도 충분히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에요. 그럼 저녁 식사 맛있게 하시고, 계약서 준비되면 연락 주세요. 유리 씨도 다음에 또 봐요.”

민우가 재빨리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점점 멀어져가는 그 뒷모습을 보며 현기혁 팀장이 낮게 탄식했다.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야. 저렇게 젊은 나이에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지? 대단해. 정말.”

“그거 저 들으라고 하시는 말씀인가요? 저랑 민우 씨 동갑인 거 아시면서.”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유리 씨 욕하는 거 아냐. 오해하지 마.”

“농담이에요. 당황하시긴.”

그렇게 대꾸하긴 했지만 이유리는 한편으로 걱정이 되었다.

라온북스에겐 정말 이익이 되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민우가 가져가는 이익은 크지 않았다. 오히려 손해가 클 수 있었다.

친구로서 민우가 너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하지만 라온북스의 편집자로서는 고마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곧 그녀의 입가에 예쁜 미소가 걸렸다.

“팀장님. 우리도 갈까요?”

“유리 씨. 왠지 요즘 사람 놀리는 재주가 는 것 같단 말이지.”

“에이, 설마요.”

두 사람은 사이좋게 걷기 시작했다.

* * *

만찬 장소는 재단 건물 옆에 있는 뷔페 하우스였다. 꽤 유명한 곳인지 손님들이 많았다. 자리도 굉장히 넓었다.

민우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빈 접시를 들고 음식을 담으려는 수빈의 모습이 보였다.

“수빈아. 어머니는?”

“아, 저기.”

수빈이 가리키는 곳에 어머니와 누나, 그리고 민식의 모습이 보였다. 한창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분위기가 좋았다.

수빈이 물었다.

“근데 아까 누구였어? 영업하는 사람 같던데.”

“골든북스 직원이야. 하, 여기까지 따라올 줄은 몰랐다. 방심했어.”

“완전 지극정성이네. 좀 봐주지 그래요?”

“영양가 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밥이나 먹읍시다.”

수빈은 자신이 쓰려던 빈 접시를 민우에게 선뜻 건넸다. 그녀의 그런 사소한 배려가 좋았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민우는 음식을 담기 시작했다.

자리로 돌아가려던 민우는 연주와 유진태 실장이 식사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의외네. 금방 돌아갈 줄 알았는데.’

민우는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연주 때문이 아니라 유진태에게 할 말이 있었다. 유진태가 먼저 알아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 박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실장님까지 오실 줄은 몰랐어요.”

“겸사겸사 왔습니다. 오랜만에 아가씨 수행도 할 겸 해서요. 요즘 그룹에 일이 좀 많다 보니 바깥바람을 자주 못 쐤습니다.”

“앞으로 상 좀 많이 타야겠네요. 실장님 바깥 구경 좀 시켜드려야지.”

민우의 농담에 두 사람이 웃었다. 연주는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수빈이 앉은 테이블이었다. 그녀가 손으로 그쪽을 가리켰다.

“저기 저분이 오빠 어머니세요? 수빈 언니 맞은편에 앉아계신 분이요. 보라색 옷 입은 분.”

“응? 어. 맞아. 옆에 있는 사람이 우리 누나고. 알지? 박민아 대리. 그리고 앞에 있는 남자는 매형 될 사람이야. 우리 과 선배이기도 하고.”

연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들었다. 그녀의 눈빛이 깊어졌다. 유진태 실장은 그 눈빛을 읽었지만 민우는 읽지 못했다.

“그럼 저녁 맛있게 먹고. 실장님도 다음에 또 뵐게요. 다음엔 둘이서 술 한잔해요.”

“좋습니다.”

민우가 돌아가자 두 사람이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유진태는 문득 궁금해졌다. 연주가 저 테이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민우 씨 여자친구분이 정말 미인인데요? 모델 해도 되겠습니다.”

“언니는 예쁘기도 하지만…… 머리도 좋고, 성격도 착한 사람이야.”

“힘드시겠네요.”

“누가?”

“아가씨가요.”

“내가 왜?”

“박 선생님 좋아하시는 거 아니었습니까?”

방울토마토를 입에 넣으려던 연주가 흠칫 놀랐다. 비밀을 들킨 사람처럼. 포크에서 떨어진 방울토마토가 접시 위를 굴렀다.

“알고 있었어?”

“모르면 그건 그거대로 업무 태만 아닙니까? 이래 봬도 저 아가씨 모신 지 10년이 넘었습니다.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지요.”

“……집에는 비밀로 해줘.”

“짝사랑은 힘든 법이지요.”

유진태는 대답 대신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남겼다. 연주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별생각 없이 접시에 떨어진 방울토마토를 다시 입에 넣었다.

* * *

저녁 식사를 마친 민우는 가족들과 함께 식당을 나섰다. 하지만 함께 돌아갈 수는 없었다. 문경원 대리가 보낸 문자 때문이었다. 근처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단다.

“누나. 엄마 모시고 먼저 들어갈래? 출판사 직원하고 미팅이 있어서 잠깐 가봐야 해.”

“이 시간에 미팅을? 대신 늦게라도 집에 들러. 오랜만에 엄마 자고 가는데 그냥 집에 가지 말고.”

“알았어.”

“걱정 말고 다녀와라. 장모님은 내가 모시고 갈 거니까.”

“옙. 잘 부탁드립니다.”

민식의 한마디에 마음이 든든해졌다. 민우는 하루빨리 어머니를 서울로 모셔와야겠다고 생각하며 가족들을 주차장까지 배웅했다.

이수빈은 차에 타지 않고 민우의 옆에 섰다.

“저도 이만 가볼게요. 다음에 또 인사드릴게요. 어머니.”

“그래. 다음에 꼭 대전 한번 놀러 오려무나. 맛있는 거 해 놓을게. 응? 공부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건강 잘 챙기고.”

“알았어요. 꼭 갈게요.”

민우의 어머니는 수빈의 손을 꼭 쥐었다. 벌써부터 며느리 대접을 받고 있었다. 기분이 좋은지 수빈이 애교 섞인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와 누나를 태운 차가 출발했다. 민우는 수빈을 데리고 주차장에서 올라와 재단 건물 앞에 있는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갔다.

때마침 반포로 가는 버스가 들어오고 있었다.

“잘 들어가. 도착하면 톡하고.”

“그 직원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말아요. 그 사람도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잖아. 주말인데 왠지 불쌍하네. 잘 돌려보내요.”

“알아서 잘할게.”

민우는 수빈의 등을 살짝 떠밀었다.

버스 좌석에 앉아 차창 너머로 손을 흔드는 이수빈의 모습이 보였다. 곧 버스가 떠나고, 민우는 근처에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아, 박 선생님. 여깁니다!”

문경원 대리가 손을 흔들었다. 창가 쪽 자리였다. 민우는 그가 계산하지 못하게 바로 카운터에 가서 빠르게 주문을 했다.

역시나 문경원 대리가 달려왔다.

“아니, 선생님! 커피는 제가 대접하게 해 주셔야죠.”

“괜찮습니다. 이미 계산했어요.”

싱긋 웃은 민우는 커피를 받아들고 자리로 이동했다. 테이블에 각대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골든북스 로고가 박혀 있었다.

‘계약서인가? 지금까지 수많은 번역가들을 후려친.’

민우가 호기심을 보이자 문경원 대리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시작했다. 봉투를 열면서.

“긴말하는 것보다는 직접 조건을 말씀드리는 게 빠르겠네요. <더 위자드>라는 타이틀의 명성! 그리고 박 선생님이 보여주신 번역의 퀄리티에 맞게 계약서를 준비했습니다. 분명 마음에 드실 겁니다.”

그는 자신 있는 표정으로 계약서를 꺼내 보여주었다. 민우는 오타를 찾는 매의 눈처럼 꼼꼼하게 계약서를 읽기 시작했다.

피식, 입가에 웃음이 흘렀다.

‘좋은 말은 다 해 놓고 조건이 이게 뭐야? 나쁘진 않은데 좋은 것도 아니잖아.’

그래도 양심이 있는지 매절 계약은 아니었다. 판매 부수 계약이었는데, 단서 조항이 많았고 조건도 라온북스와 크게 다른 게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안 좋다고 봐야지.’

만약 라온북스가 <더 위자드> 2부 판권을 따내 재계약을 추진했다면 이보다 조건이 훨씬 좋았을 것이다.

‘인센티브는 물론 인세도 상향 조정해 주셨을 거야. 역시 이번 계약은 안 하는 게 낫겠어. 어차피 할 생각도 없었지만.’

그래도 민우는 계약서를 끝까지 읽는 성의를 보였다.

검토가 끝나고 민우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역시 계약은 좀 어렵겠습니다.”

문경원 대리가 흠칫 놀랐다.

거절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민우 수준의 커리어를 가진 번역가라면 말이다.

“잠깐만요. 박 선생님. 다시 검토를 좀…….”

“조건 자체는 나쁘지 않아요. 하지만 역시 제 시간을 할애할 만큼의 메리트는 느끼지 못하겠네요. 다른 일에 더 신경을 써야겠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드시지 않는 겁니까? 인세는 조정 가능합니다. 저희가 더 드릴 수 있는 건…….”

“아뇨. 인세 문제가 아닙니다. 근본적인 문제라고 할까요.”

“근본적인 문제라 하시면…….”

민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수없이 그에게 사인을 보냈는데 헛수고였다.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 영업을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솔직히 말씀드리죠. 저는 골든북스와 작업하길 원하지 않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을 들고 오셔도 제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아니 그게 무슨…….”

“문 대리님이 여기까지 오신 성의를 봐서 계약서를 검토한 겁니다. 그럼 제 뜻은 충분히 전달해 드렸으니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수고하세요.”

민우는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 문경원 대리가 벌떡 일어나 팔을 뻗었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민우는 카페를 나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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