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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시장의 논리 (4) (149/500)


149. 시장의 논리 (4)
2022.01.13.


―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아까 전화 드린 문경원 대리입니다. 통화 괜찮으십니까?”

“네. 말씀하시죠.”

민우는 걸음을 빨리 옮겨 사무실을 나갔다. 두꺼운 유리창 너머로 바깥 풍경이 보이는 곳에 서서 전화에 집중했다.

― 아까 말씀드린 대로 박 선생님하고 같이 작업을 하고 싶은데요. 제가 처음에 어떤 타이틀인지 말씀을 안 드린 거 같아서 말입니다. 이번에 번역에 들어갈 작품은 <더 위자드> 2부입니다. 세계적으로 흥행하고 있는 작품이지요!

“네, 그렇군요.”

민우는 별 관심 없는 어조였다. 시큰둥한 반응이 계속되자 문경원 대리는 조바심이 났다.

분명 자신의 주가를 높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떡밥을 던지면 수백의 물고기를 낚을 수 있는 그런 기회. 하지만 민우는 입질조차 하지 않았다.

― 그래서, 음, 그러니까 번역 관련해서 차분히 말씀도 나누고 저희 회사 설명도 드리고 싶습니다. 한번 뵙는 건 어떠신지요?

“아까 말씀드렸는데 요즘 좀 정신이 없어서 시간 내기가 여의치 않네요. 그런데 골든북스가 어디에 있죠?”

― 파주 출판단지에 있습니다.

“파주라면 거리도 좀 부담스럽고…… 제가 차도 없어서요. 다음 달에 여유가 좀 생기면 한번 찾아가겠습니다.”

― 저기, 박 선생님?

한숨 소리와 함께 어투가 조금 바뀌었다.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 건가. 민우는 빙긋 웃으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 저희가 일정이 좀 빡빡해서요. 다른 타이틀도 아니고 <더 위자드>입니다. 예? 선생님께도 엄청나게 도움이 되는 기회라고요. 국내에서, 아니 세계적으로 얼마나 팔렸는지는 선생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1부 번역을 하셨으니까요.

“하하하하.”

민우가 소리 내어 웃었다. 어쩜 이렇게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걸까.

민우는 번역 일을 시작하면서 번역가들이 모인 인터넷 커뮤니티에 가입했다. 거기에서 골든북스의 만행을 생생히 들을 수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최근 SNS에서 유행하는 대나무숲에서도 정보를 얻었다. 악명이 높은 만큼 골든북스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물론 과장된 내용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까.

― 저, 여보세요?

“대리님. 뭔가 관계를 명확하게 설정해야 할 거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 관계……요?

“지금 통화가 계속 겉도는 것 같지 않나요? 그러니까 지금 저한테 번역을 부탁하고 싶으신 거잖아요. 대리님이, 아니 골든북스에서.”

― 예에. 뭐 따지면 그렇지요.

“그런데 지금 제가 보기에 대리님은 전혀 부탁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거든요.”

민우가 일침을 날리자 아무런 대꾸도 못 했다. 창가에 놓인 의자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채 편하게 얘기를 이어갔다.

“라온북스와 작업할 때도 그쪽 팀장님은 직접 명인대까지 오셔서 계약을 해 주고 가셨어요. 뭐 꼭 그러라는 게 아니라, 제가 골든북스에 번역을 하고 싶다고 청한 것도 아니고 에이전시와 계약이 되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제 개인 시간을 낭비하면서 파주까지 가서 설명도 듣고 해야 하는지 몰라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 아아, 그게, 아니. 오해십니다. 하하하! 왜 이렇게 되는지 모르겠는데 여건이 어려우시면 제가 가도 됩니다. 회사 구경도 시켜드리고 이것저것 하려고 그런 말씀을 드린 거죠.

“제가 그쪽에서 출판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취업을 하려는 것도 아닌데 회사 구경은 해서 뭐 합니까? 외주잖아요.”

민우의 어투는 짐짓 화가 나 보였지만, 표정은 웃고 있었다.

― 박 선생님. 잠시 진정하시고…… 제가 그럼 명인대로 가서 설명을 좀 드리겠습니다. 계약서도 좀 보여드리고 해야 할 거 같은데요.

“오시는 거야 대리님 마음이니 상관없는데 계약서는 됐습니다. 안 할래요. 어차피 저 말고도 잘하는 번역가는 많지 않습니까? 제가 뭐 번역으로 먹고사는 것도 아니고. 다른 분 알아보세요.”

― 바, 박 선생님!

“식사하러 가야 해서 이만 끊겠습니다. 저녁 맛있게 드세요.”

민우는 전화를 끊었다.

곧바로 문경원 대리에게 전화가 다시 왔지만 민우는 받지 않았다. 드르르르, 한 번 진동이 울리더니 문자가 왔다. 민우는 나중에 확인하기로 하고 지음사 건물을 나갔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옥 구석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수빈의 모습이 보였다. 민우가 그쪽으로 달려갔다.

“많이 기다렸어? 나오는 도중에 전화가 와서 받느라 늦었네. 미안.”

“괜찮아요.”

다행히 토라진 표정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팔짱을 끼고 밤길을 걸었다. 적당히 쌀쌀한, 걷기 좋은 밤이었다.

뭔가를 떠올린 이수빈이 고개를 민우 쪽으로 살짝 돌렸다.

“근데 오빠. <더 위자드>는 어떻게 됐어? 판권 다른 데로 넘어갈 수도 있다면서요.”

“벌써 넘어갔어.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전화하느라 늦은 거야. 골든북스에서 판권을 가져간 거 같더라고. 번역하지 않겠냐고 전화가 왔어.”

민우는 그것과 관련된 내용을 차분히 풀어갔다. 수빈은 맞장구를 쳐주며 이야기를 들었다.

가로등 빛에 반사되어서일까, 아니면 아무나 상상할 수 없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어서일까. 민우의 모습이 오늘따라 멋있게 보였다.

수빈이 민우의 팔을 더 꼭 붙들었다.

“그래도 어찌어찌해서 골든북스에서 번역가를 바꾸고 출판을 하게 되면?”

“오히려 그렇게 되면 라온북스가 3부 판권을 따는 데 유리해질 거야.”

“왜?”

“퀄리티에 문제가 생길 게 분명하니까.”

“우와…… 이거 뭐라고 해야 하지. 오빠 자신감이 너무 지나친 거 아냐?”

안경의 도움을 얻어 한 번역이다. 그 누구도 쉽게 따라올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더 위자드> 1부 번역은 번역 그 이상이라는 찬사가 많았다.

민우가 말했다.

“자신감의 문제가 아냐. 골든북스는 물론, 많은 출판사들이 하나 간과하는 문제가 있어서 그래.”

“그게 뭔데요?”

“독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거.”

민우의 말은 하나의 명제처럼 다가왔다. 수빈은 그 한마디를 곱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담긴 속뜻이 뭔지 이해한 것이다.

“지금이야 당장 어떻게 되지는 않겠지만 그런 사소한 것들이 하나씩 쌓이고 나면 언젠가 업보처럼 돌아올 거야. 내가 라온북스를 좋게 평가하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고. 작은 것부터 독자들을 기만하려고 하지 않거든. 어떻게 해야 좋은 책이 나오는지도 잘 알고 있고.”

“응.”

잠시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자연스러웠다. 이제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식당에 들어가 주문을 하고 나서야 민우가 말을 꺼냈다.

“다음 달에 누나 상견례한대.”

“벌써?”

“우리 누나 행동력은 옛날부터 유명했지. 민식이 형도 뒤지지 않잖아. 가만 보면 닮은 구석이 많아. 두 사람.”

“그러네.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다.”

“나도.”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나아가서는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 * *

큰산번역문학상 시상식이 열리는 아침, 민우는 얼마 전 새로 맞춘 정장을 입고 자취방을 나섰다.

‘어?’

길가에 늘어진 화분에 노란 꽃이 얼굴을 피우고 있었다. 아직 설익은 꽃봉오리도 있었지만, 곧 하나둘 만개할 것이다.

‘이제 정말 봄이구나.’

기분이 좋아졌다.

민우는 상쾌한 봄 내음을 느끼며 큰산문화재단으로 향했다. 버스에 올라 창가에 앉아 펼쳐진 풍경을 눈에 담았다.

그러다 보니 문득 작년 이맘때가 떠올랐다. 갓 입학해서 한창 학교에 적응할 때의 모습이.

‘그때는 이렇게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는데. 이제 나도 이런 생활에 완전히 적응한 건가?’

민우의 입가에도 봄꽃이 폈다.

한 시간 뒤, 민우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큰산문화재단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시상식장을 알리는 입간판이 줄지어 서 있었다.

‘좀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네.’

민우는 서둘렀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시상식이 진행되는 10층 컨퍼런스룸으로 움직였다. 입구 옆 데스크에 직원들이 서 있었다.

“어떻게 오셨지요?”

“박민우입니다. 상 받으러 왔어요.”

“어머, 안녕하세요.”

직원은 친절하게 웃으며 민우의 가슴께에 꽃을 하나 달아주었다. 이런 건 또 처음이라 어색했다.

“저 앞쪽으로 가시면 성함이 붙어 있는 의자가 있을 거예요. 그쪽에 앉아 주세요. 곧 시상식이 시작되니 가급적이면 자리를 지켜주시고요.”

“예, 감사합니다.”

민우는 식장으로 들어갔다. 컨퍼런스룸은 꽤 넓었다. 100석 정도 준비되어 있었는데, 사람들이 많이 와 있었다. 커다란 카메라를 든 기자들의 모습도 보였다.

낯익은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307호 멤버들이었다. 수빈과 진섭, 예린이 손을 흔들었다. 강예진이 덤으로 껴 있었다.

민우도 손을 들어 보이며 지정석에 앉았다. 곧 식이 시작될 것 같아 움직이기가 좀 그랬다.

그때 한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잠깐. 저 사람 대한그룹의 정연주 씨 아니야?”

“맞는 거 같은데? 유진태 비서실장이잖아. 옆에 있는 남자.”

“어어, 가보자!”

정연주가 유진태 비서실장을 대동한 채 식장에 들어오자 기자들이 하나둘 그쪽으로 달려갔다. 특종을 문 것 같은 태세로.

꽃다발을 들고 있던 연주가 살짝 놀랐다.

유진태가 나서서 촬영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연주는 괜찮다며 물러서라고 지시했다.

“정연주 씨 맞으시죠?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최근 선우기획 이사직에서 물러나신 걸로 알고 있는데, 본사로 이동하시는 겁니까? 향후 행보가 궁금합니다.”

“정태윤 회장님의 건강은 어떻습니까? 요즘 크게 이슈가 되고 있는데요.”

플래시가 터지며 질문이 쏟아졌다. 유진태는 걱정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연주는 빙긋 웃으며 응수했다.

“아는 분이 오늘 수상하셔서 축하하러 왔어요. 나머지 질문에 대해서는…… 코멘트하지 않을게요. 그룹을 통해 정식 절차를 밟아 질문해 주세요.”

“정연주 씨!”

연주는 기자들을 지나쳐 걸었다. 민우와 눈이 마주치자 눈웃음을 보였다. 하지만 그녀가 간 곳은 307호 멤버들이 있는 곳이었다.

팀원들과 연주는 오랜만에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그것 자체로도 기삿거리가 되는지 기자들은 열심히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촬영은 그만해 주십시오. 프라이버시입니다. 요청을 받은 건에 대해서만 취재에 응하겠습니다. 본사 차원에서 대응하는 일이 없도록 협조 바랍니다.”

결국 유진태 비서실장이 한소리하고 나서야 촬영을 그만두었다.

곧 민우의 가족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민우는 손을 흔들며 어머니와 누나, 그리고 미래의 매형을 맞았다.

식이 시작되기 직전 서지훈 교수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라온북스의 현기혁 팀장과 이유리 편집자도 꽃을 하나 들고 찾아왔다. 주말인데 괜히 특근을 시키는 게 아닌가 미안했다.

한일대의 서강일이 자신의 이름을 불렀을 때는 좀 놀랐다. 그 옆에는 메로나를 입에 물고 있는 강민희도 있었다.

‘대체 얼마나 온 거야?’

민우는 살짝 걱정이 들었다. 지인들이 들고 온 꽃을 다 받으려면 팔이 열 개는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때 장내가 암전되며 사회자 쪽으로 조명이 몰렸다.

“안녕하십니까. 먼저 참석해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며, 지금부터 제26회 큰산번역문학상 시상식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재단 이사장의 축사를 시작으로 시상식이 시작되었다. 신인상과 대상 순으로 수상이 진행되었는데, 민우의 이름이 제일 먼저 호명되었다.

민우는 직원의 안내를 받아 단상에 올랐다.

“시상에는 큰산문화재단의 예태완 이사장님께서 직접 해주시겠습니다.”

트로피와 상장이 민우의 손에 쥐어졌다. 뒤에서 보조하던 여직원이 꽃다발을 하나 건넸다. 마지막으로 예태완 이사장과 악수했다.

“그럼 박민우 님의 수상 소감을 듣겠습니다.”

민우가 마이크 앞으로 나서려던 그때 지인들이 하나둘 무대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꽃다발이 하나씩 품에 안겼다. 연주가 단상에 올라갈 때는 평소보다 더 많은 플래시가 터졌다.

결국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민우는 어쩔 수 없이 꽃다발을 내려놓았다. 연말 연예대상에서나 보던 진풍경이 펼쳐졌다.

그런데 그때 모르는 남자가 뒤늦게 무대에 올라 꽃다발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박 선생님!”

머리숱이 적은 남자였다. 민우는 누군가 싶었는데, 곧 그가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골든북스의 문경원 대리입니다! 하하하. 오늘 수상하신다기에 축하드리려고 왔습니다. 이따 잠깐 이야기를…….”

“예.”

민우는 표정 관리를 하며 불청객을 내려보냈다. 그리고 수상 소감을 말했다.

수상 소감은 간단했다. 가족을 포함한 여러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그 감사한 만큼 앞으로도 더 열심히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박수갈채를 받으며 민우는 연단을 내려왔다. 큰산문화재단 직원의 도움을 받아 꽃다발을 무사히 자리까지 옮겨올 수 있었다.

수북이 쌓인 꽃들을 보며 민우가 미소를 지었다.

‘왠지 내가 대상을 탄 거 같은 느낌인데?’

시상식이 모두 끝나고 기념촬영이 시작됐다. 민우는 가족들과 그리고 친구들과 각각 사진을 찍었다. 특별히 서지훈 교수와는 따로 찍었다.

사진을 모두 찍고 민우는 어머니를 모시고 서지훈 교수를 찾았다.

“선생님. 저희 어머니십니다.”

“아! 어머님. 안녕하십니까. 서지훈입니다.”

“아유, 교수님. 정말 저희 아들이 신세 많이 지고 있네요. 예전부터 말씀 많이 들었는데. 이제야 인사드려서 죄송해요.”

“하하하. 신세는요. 훌륭한 아드님을 두셨습니다. 앞으로 고생깨나 하시겠어요.”

서지훈 교수는 민우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앞으로도 이런 행사에 여러 번 왔다 갔다 하셔야 하니까 말입니다. 상복이 많은 친구라서요. 정말 자식 농사 잘 지으셨습니다. 나중에 시간 되시면 비결 좀 가르쳐 주십시오.”

“아이구, 그런…….”

교수답지 않은 면모에 민우의 어머니는 감격한 표정이었다. 인사가 끝나고 민우는 가족들과 함께 만찬 장소로 이동했다.

그때 뒤에서 민우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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