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시장의 논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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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시장의 논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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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시장의 논리 (3)
2022.01.10.
“문 대리야.”
문경원 대리는 흠칫 놀라며 의자를 돌렸다.
미소를 짓고 있지만 눈빛은 잡아먹을 듯 무섭다. 사마귀를 보는 듯한 느낌. 신종식 실장이었다.
문경원 대리는 벌떡 일어나 두 손을 정중히 하나로 포갰다. 평소 실장실에서 잘 나오지 않는 그가 직접 나왔다는 건 중요한 용건이 있다는 의미였다.
“넷, 실장님.”
“번역 건은 어떻게 잘됐냐?”
“안 그래도 지금 접촉 중입니다.”
“어엉? 접촉 중이라고라?”
신종식 실장은 웃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해할 수 없다는 제스처였다.
“전화 한 통이면 해결될 문제 아니었던가? 우리 문 대리 한물가서 어쩐다냐 이거. 프리랜서 하나 구워삶지 못하고. 쯧쯧. 어디 가서 남자 구실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랑가?”
능력이 안 되면 짐을 싸라는 간접적인 경고였다.
문경원 대리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 골든북스에서 보낸 10년은 헛된 게 아니었다. 생존본능이 발동하며 그가 큰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문제없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쇼. 지금 학회 참여 중이라 전화가 어렵다고 해서요. 이따 저녁에 다시 통화해 보려고 합니다.”
“알지? 이번 건 중요한 거. 고 혓바닥 입 안에만 넣어놓지 말고 좀 꺼내서 잘 놀려보라고.”
“맡겨 주십쇼.”
신종식 실장은 뒷짐을 지며 자리를 떴다. 마지막으로 그는 문경원 대리를 한 번 흘겨보더니 실장실로 들어갔다.
그제야 턱 막힌 숨을 내뱉는 문경원 대리.
“내가 드러워서 참.”
“왜. 잘 안 돼?”
옆에 앉아 있던 동료가 말을 걸어왔다. 문경원 대리는 숱이 별로 남지 않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짜증을 부렸다.
“방금 전화해서 언제 시간이 되냐고 물었거든? 그러니까 다음 달에 된댄다. 허 참, 어이가 없어서. 상 좀 받았다고 목소리에 힘 꽉 주던데? 선생님 호칭 오랜만에 해봤는데 역효과만 났어.”
사실 전화에서 말린 이유가 그 대답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수백이 넘는 프리랜서 번역가를 만났지만, 한 달 뒤로 약속을 잡는 사람은 없었다. 길어야 일주일이었다. 생계가 걸린 일이니까.
언제나 갑으로 군림해왔던 문경원 대리 입장에서는 생각만 해도 기가 막힌 일이었다.
“왜 그런 놈하고 엮이려고 해? 싹수가 노라면 후딱 다른 줄 타야지. 아니면 에이전시 통하거나. 그게 안전하지 않냐?”
“얌마. 내가 똘츄냐? 그걸 몰라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 윗선에서 어떻게든 그놈을 잡으라고 하니까 이러는 거지!”
“거참 희한한 일이네. 싸고 잘하는 놈 구하면 장땡 아닌가. 뭐 하는 놈인데 그래?”
한숨부터 내쉰 문경원 대리는 민우의 프로필을 동료에게 툭 던졌다.
“서른도 안 된 핏덩어리야. 명인대 대학원생인데, 아 학부는 지잡이니 높게 치진 말고. 이번에 큰산번역문학상 신인상 받은 것 외엔 특별한 거 없어.”
“오, <사각 살인>, <더 위자드>까지. 가성비 좀 나오겠다? 경력에 비해 히트작이 많네.”
민우의 프로필을 훑은 동료가 반색했다.
그만큼 싸게 부릴 수 있다는 의미였다. 작품을 연이어 히트시켰다고 해도, 민우는 출간 예정작을 포함해 이제 세 타이틀을 번역했을 뿐이다.
“또라이가 아니길 빌어야지. 하, 다음 달이 뭐야 다음 달이! 지금 당장 번역에 들어가도 여름에 출간할까 말까인데.”
“후려쳐봐. 네 주전공이잖어.”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위에서 까라는데 시발.”
문경원 대리는 민우의 프로필을 다시 훑었다. 업계에 오래 몸담아 온 사람 입장에서는 특별할 거 없는 프로필이었다.
명인대 석사과정, 큰산번역문학상. 이 정도 커리어는 번역 시장에 수두룩했다. 박사급은 물론 해외파들도 널려 있었다.
‘어설픈 수작 부리려다 큰코다치지. 이따 저녁에 보자고.’
피식 웃은 문경원 대리는 신경질적으로 민우의 프로필을 한구석으로 치웠다. 정 안되면 돈으로 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 남았다.
‘대체 윗선에서는 왜 이놈을 잡으라고 하는 거지? 영한번역 쪽은 인력이 넘치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네.’
왠지 입 안이 텁텁한 느낌이었다. 문경원 대리는 책상 위의 가글을 집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더 위자드> 1부를 번역했다고 해서 잡으라는 건 아닐 거고.’
지금까지 골든북스에서는 몇 번이나 히트작의 후속부를 뺏어왔다. 번역가가 바뀌는 일은 많지 않았지만 없지도 않았다.
재미가 쏠쏠했다. 요구조건을 수용하기 위해 생산단가를 낮추다 보니 책의 품질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많이 남는 장사였다.
‘쯧, 모르겠다. 혹시 모르니 플랜 B나 짜 놓자.’
문경원 대리는 검은색 파일을 꺼냈다.
수많은 연락처가 정리되어 있었다. 까다로운 인물들도 몇 있지만, 자신의 한마디면 방울 소리를 내며 뛰어올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크, 이 맛에 일하지!’
흐뭇한 미소가 문경원 대리의 입가에 걸렸다. 그는 적당한 사람을 하나 골라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쌓인 스트레스를 말끔히 풀었다.
* * *
“오늘 박 선생의 발표를 듣고 있으니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연락을 하길 잘했다고.”
한국근대소설학회 이사인 한유중 교수가 미소를 지었다. 학회가 끝나고 돌아가려는데 그가 친히 다가와 대화를 청했다.
한유중 교수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사실 그때 좀 망설였습니다. 확신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앞으로도 많이 논문 보내줬으면 합니다.”
“저에겐 대단히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우우우웅!
그때 민우의 손에서 진동이 울렸다. 액정을 확인한 민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까 저장한 문경원 대리의 이름이 떠 있었다.
‘저녁에 전화를 하라고 했는데 못 알아들었나? 뭐가 이리 급한 거야.’
지금은 오후 네 시 반이었다. 저녁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간은 아니었다.
민우는 받지 않고 그대로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어 버렸다. 그 모습을 보던 한유중 교수가 온화하게 웃었다.
“급한 전화면 받으시지요.”
“아뇨, 스팸이에요. 아무튼 앞으로 이곳에서도 열심히 활동해 보겠습니다.”
이로써 민우는 활동 학회를 세 개로 늘렸다. 현대문학연구학회, 국제비교문학회, 한국근대소설학회. 앞으로도 목록이 추가될 걸 생각하니 기분이 짜릿했다.
하지만 민우는 메이저 학회에만 논문을 몰아서 발표할 생각은 없었다. 기회가 되는 대로 여러 학회에 참여하여 학자로서의 소양을 착실히 쌓을 생각이었다.
바로 그곳에서 전공책으로는 배울 수 없는 여러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한유중 교수가 진지하게 물었다.
“에……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말입니다. 박 선생 입장에서 볼 때 우리 학회에서 개선해야 할 부분이 뭐라고 생각합니까? 아쉬웠던 부분이랄까. 뭐 그런 것이요.”
뜻밖의 질문이었다. 민우는 잠시 고민을 하며 할 말을 골랐다.
“아쉬운 부분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장점은 있었어요. 발표 분위기가 개방적이라 편했어요.”
“개방적이라 한다면?”
“학회 활동을 몇 번 해오면서 그런 부분이 아쉬웠습니다. 발표 자격 같은 게 정해져 있는 것이요.”
“아, 그건 그렇지요.”
“보통 석사과정 이상만 발표를 할 수 있잖습니까. 학부생들도 발표 기회를 주면 어떨까 싶었어요. 학문 후속세대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학부생이나 석사과정생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으니까요. 조금 허술하긴 해도 창의적인 논문이 많이 나올 것 같아요. 개방적인 분위기를 잘 이용한다면요.”
“좋은 지적이군요. 으음, 그건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한유중 교수는 진심으로 탄복했다. 젊은 학자의 한마디에 몇 가지 좋은 아이디어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앞으로도 좋은 의견이 있다면 기탄없이 말씀 주시지요.”
“오히려 제가 좋은 말씀 부탁드려야죠. 경험이 일천합니다. 그럼 선생님.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또 인사드릴게요.”
꾸벅 인사한 민우는 학회장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부재중 전화 표시를 없앴지만 문경원 대리에게 전화를 걸지는 않았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야지. 일단 지음사로 가자.’
민우는 대중교통을 이용해 지음사로 움직였다.
인문사회팀이 자리한 14층이 아니라 15층으로 바로 올라갔다. 출판기획실에 들어가자마자 여직원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실장님 외출하셨나요?”
“아뇨. 안에 계세요. 손님 와 계신 거 같던데, 가셨나 모르겠네요. 자리를 잠시 비워서.”
“알겠습니다.”
여직원이 뭔가를 말하기 전에 민우는 바로 걸음을 옮겼다. 또다시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끌 것이 분명했기에.
* * *
실장실에는 서지훈 교수가 있었다. 그런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아니다. 서지훈이 못마땅한 눈으로 송승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책상을 손가락으로 탁탁 두드렸다. 마치 항의하듯이.
“인쇄소를 바꾸든가 아니면 종이를 좀 더 비싼 걸로 써. 지금 나가는 걸로는 안 돼. 10년도 안 돼서 덜렁거릴 거야. 이태준 전집이면 앞으로 수십 년은 계속 연구자료로 사용될 게 분명한데 그렇게 허술하게 출간을 하면 되겠어?”
못마땅한 건 송승현도 마찬가지였다. 팔짱을 낀 그녀가 눈매를 좁히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인쇄 품질은 출판사가 결정해요. 편자가 나설 문제는 아닌 거 같은데요.”
“아니, 이건 상식이잖아. 학술서는 좋은 종이를 써야지. 장서라는 말 몰라?”
“애초에 상업성이 없는 출간이잖아요. 그러면 출판사도 리스크를 줄여야지. 타협점을 자기 쪽으로 일방적으로 끌어가면 어쩌자는 거예요.”
“상업성이 없는 출간으로 기획했으니 돈 좀 더 쓰란 말이야. 어설프게 아끼는 것보다 그게 낫지 않나?”
송승현 실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가끔, 이렇게 현실감각이 없는 이야기를 할 때가 있었다.
“그럼 실무자인 전남규 차장하고 얘길 하세요. 나한테 직접 하지 마시고.”
“어차피 너한테 보고가 갈 건데 뭐하러 번거롭게 그래?”
“선배.”
머리가 지끈거렸다. 서랍을 연 송승현 실장은 아스피린 두 알을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그 모습을 보며 서지훈 교수가 빙긋 웃었다.
“좋은 책을 만들고 싶어서, 작가와 독자를 모두 만족시키는 책을 만들고 싶어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거 아니었어?”
뭐라고 반박하려던 송승현 실장은 마지막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서지훈 교수의 저 미소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아무튼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해요. 고민해 볼게요.”
“송 실장님만 믿고 갑니다!”
그때 노크가 들렸다. 송승현 실장이 들어오라고 말하자 민우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어? 선생님 계셨네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전집 작업에 사소한 문제가 생겨서 말이다. 이제 볼일 끝났으니 가야지. 발표는?”
“끝내줬죠.”
“겸손의 미덕을 잊지 마. 학교서 보자.”
서지훈 교수가 미련 없이 실장실을 나섰다. 민우는 송승현 실장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는 살짝 긴장했다.
“저, 실장님. 바쁘세요?”
송승현 실장이 아무런 표정 없이 민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박민우 씨. 퇴사 얼마 안 남았다고 막 나가면 곤란해요.”
“아, 죄송합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깜빡했다. 그제야 송승현 실장이 의자에서 일어나 자리를 옮겼다.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무슨 일이죠?”
“예전에 센트럴 북스 쪽에 아는 분이 계시다는 말씀을 들은 거 같은데, 혹시 그쪽에 하나만 알아봐 주실 수 있는지 해서요.”
“뭐를?”
“<더 위자드> 2부 출간 조건이요.”
송승현 실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우리 지음사와 무슨 관계가 있는 일인지 모르겠는데.”
“인문사회연구소 연구원으로서가 아니라 실장님의 후배로서 드리는 부탁입니다.”
“후배라.”
기가 찼다. 송승현 실장은 손가락으로 머리를 짚었다. 편두통이 오늘따라 심했다.
“민우 씨가 잘 모르나 본데, 기본적으로 출간 조건은 외부에 발설하지 못하게 되어 있어요. 계약서에 비밀유지 조항이 있으니까. 불가능해요.”
“어떻게 안 될까요? 전체 조건은 아니고, 특정 번역가를 옵션으로 넣었는지만 확인하면 됩니다.”
“판권 넘어간 문제 때문에 그러는 건가요? 라온북스를 도와주려고?”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혜를 입었으면 갚아야죠. 그게 사람이니까.”
“참…….”
송승현 실장이 일어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 와중에 오늘따라 명인대 남자들이 머리를 아프게 한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래서, 민우 씨 플랜은 이런 건가요? 민우 씨가 판권 계약조건에 들어가 있는 가정하에 움직여 골든북스를 낙오시키고, 다시 라온북스가 2부 판권을 따내는 것을 돕는다.”
“역시 대단하시네요. 정확합니다.”
“그런 짓을 했다간 업계에서 퇴출당할 수도 있어요. 번역 일도 거의 안 들어올 수도 있고. 거기까진 생각 못 해본 건가요?”
민우는 빙긋 웃었다.
“실력 없이 그러면 실장님 말씀대로 퇴출당하겠죠. 하지만 실력이 있다면 얘기는 다를 겁니다. 세상을 바꿀 수도 있겠죠.”
“어려서 철이 없는 건지…….”
하지만 박민우라면.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송승현 실장은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은 오후 5시 40분.
센트럴 북스가 있는 캘리포니아는 새벽이었다. 그러다 문득 유학 시절 친하게 지내던 센트럴 북스의 디렉터가 일본 출장 중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송승현 실장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유창한 영어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민우도 놀랄 정도로. 원어민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잠시 후 전화를 끊은 송승현 실장이 말했다.
“계약조건이라는 말은 없었지만 센트럴 북스에서 민우 씨를 원하고 있는 건 확실해 보여요.”
“그렇군요. 어려운 부탁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진짜 골든북스와 싸우려는 건가요?”
“실장님이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거 같은데요.”
자리에서 일어난 민우가 웃으며 말했다.
“저는 싸우려는 게 아니라 잘못된 걸 바로잡으려는 겁니다.”
민우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는 그녀를 향해 인사하고 실장실을 나섰다. 때마침 문경원 대리에게 전화가 왔다.
사무실을 가로지르며 통화버튼을 터치했다.
“네, 박민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