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시장의 논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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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시장의 논리 (2)
2022.01.07.
민우는 뭔가 자신과 관련된 일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분위기가 어색해질 리는 없으니까.
‘뭐가 잘못됐나?’
이유리를 바라보았다. 한숨을 내쉬는 모습. 사이가 가까워져 이제 회사와 관련된 일은 그녀로부터 바로 전달받는다.
‘그런데 아무런 말이 없었다는 건, 내가 오는 동안 뭔 일이 터졌다는 건데.’
민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현기혁 팀장을 따라갔다. 회의실 쪽이었다. 그때 잠시 멈춰 선 현기혁 팀장이 이유리를 향해 손짓했다.
“유리 씨도 같이 들어와.”
“예.”
두 사람은 긴 테이블을 마주하며 앉았다. 뒤늦게 들어온 이유리 편집자는 어디에 앉아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 현기혁 팀장의 옆자리를 택했다.
착잡한 표정으로 현기혁이 운을 뗐다.
“실은 이번 여름에 진행하려고 했던 <더 위자드> 2부 계약에 좀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랬군요.”
생각보다 큰일은 아니었다. <오멜라스의 마녀>나 기존에 출간했던 <사각 살인> 번역에 뭔가 문제가 생긴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민우의 입장에서였다. 라온북스 입장에서 본다면, <더 위자드> 2부 계약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은 치명타였다.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가 생겼나요?”
“그게…… 2부 계약을 저희 쪽과 진행하기 어렵겠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일방적으로요. 협상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민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유는요?”
“다른 출판사에서 손을 쓴 거 같습니다. 사실 1부를 낼 수 있었던 것도 기적에 가깝긴 했지요. 시장의 논리라고 할까요. 저희 같은 중소규모 출판사들은 유명작 판권을 따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운도 운이지만 자본력에서 싸움이 안 되니까 말입니다.”
‘시장의 논리’라는 한마디가 씁쓸하게 와닿았다. 민우의 표정도 앞의 두 사람과 비슷해졌다.
“하긴, 1부는 잘 알려지지 않았을 때 계약을 체결해서 출판이 가능했겠네요.”
“제대로 보셨습니다.”
“혹시 말인데요. 지음사에서 나선 건 아니겠죠?”
지음사라는 거대한 권력을 등지고 있는 고두열 과장이라면 충분히 해볼 만도 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 말이다.
하지만 현기혁 팀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음사는 아닙니다. 돈이 된다고 해서 후속부 판권을 채갈 정도로 상도의가 없는 기업은 아니지요. 지금 몇 군데 언급이 되고 있긴 곳이 있긴 한데…… 어디가 될지는 저도 잘 몰라서 말씀드리기가 조심스럽습니다.”
“괜찮습니다. 거기까진 말씀 안 하셔도 돼요.”
답답함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표정. 한숨을 내쉰 현기혁 팀장이 억지로 미소를 보였다.
“이거 죄송하네요. 오랜만에 놀러 오셨는데 이렇게 안 좋은 얘기만 하고. 사실 민우 씨와는 크게 관계가 없는 일인데 말이죠.”
“왜 관계가 없나요?”
의외의 한마디에 두 직원이 살짝 눈을 뜨며 놀랐다. 깍지 낀 두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민우가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저는 번역가로서 첫발을 여기서 내디뎠어요. 기회를 얻어 상도 타게 됐고요. 고향이나 다름이 없죠.”
“그래도…….”
민우는 잠시 말을 끊은 이유리를 바라보았다. 시무룩한 표정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현기혁 팀장은 물론, 그녀도 번역 작업에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었다. 작가로 치면 담당 편집자나 다름이 없었다.
다시 민우가 말했다.
“뭐 회사 일이라고 선을 그을 수도 있겠지만 <더 위자드>는 제가 번역한 작품이기도 하잖아요. 후속부가 그렇게 됐으니 저도 알아야 할 문제죠.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장의 논리라는 게 썩 마음에 들지는 않네요.”
“예?”
현기혁 팀장이 되물었지만, 민우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현기혁과 이유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민우가 물었다.
“팀장님. 그럼 아직 <더 위자드> 2부 판권 계약이 완전히 끝난 건 아니죠?”
“일단은 그렇습니다. 계약이 끝났다는 소문은 아직 없었어요. 이 바닥은 워낙 좁아서 금방 알아볼 수 있으니까요.”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엷은 미소를 지으며 창밖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머릿속으로는 수십 수의 미래가 펼쳐지고 있었다.
잠시 후 결론을 내린 민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일어서자 현기혁 팀장과 이유리도 황급히 따라 일어섰다.
“벌써 가시려고요?”
“잠깐 들르려고 했던 건데 시간을 너무 많이 뺏었네요. 그래서 일부러 말 안 하고 온 겁니다. 괜히 팀장님 스케줄 잡으실까 봐.”
“민우 씨 정도면 하루 정도는 비워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농담처럼 들렸지만, 농담이 아니었다. 라온북스에서 민우의 입지는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사장부터가 그를 챙기고 있으니까.
현기혁 팀장이 이어 말했다.
“그럼 <오멜라스의 마녀> 출간 즈음에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근사한 곳으로 모시지요. 명인대 근처에 좋은 식당을 알아뒀습니다.”
“좋습니다. 그땐 유리 씨도 나오시는 거죠?”
그 말에 이유리가 현기혁 팀장의 눈치를 살폈다. 현기혁이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하하. 당연한 말씀을. 담당 편집을 안 데려가면 누굴 데려가겠습니까?”
“다행이네요.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밖으로 나온 민우는 직원들과 간단히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현기혁 팀장 대신 이유리가 사무실 밖까지 따라 나왔다.
“너무 금방 가는 거 아냐?”
“일 바쁜 거 뻔히 아는데 어떻게 시간을 뺏어. 간식거리 전해드렸으면 됐지 뭐. 너도 어서 들어가 봐. 괜히 팀원들한테 눈치 보이겠다.”
“이것도 일이야. 팀장님 지시.”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민우는 웃어넘겼다.
그렇게 두 사람은 계단을 내려갔다. 옆쪽에서 이유리의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정말 아쉽다. <더 위자드>는 계속해보고 싶은 작품이었는데.”
“계속할 수 있을 거야.”
“뭐?”
“2부에서 끝나는 작품 아니잖아. 3부도 있을 거고, 그 이후로도 계속 나올 수도 있고. 계약 문제만 잘 해결되면 다시 할 수 있을 거야.”
“그게 어려우니까 그렇지.”
어느덧 건물의 입구가 나왔다. 민우는 손을 슬쩍 들어 보였다.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을 남긴 채 지하철역으로 걸어갔다.
“좋은 소식을 기다리라고?”
마법 같은 한마디였다.
이유리는 멀어져가는 민우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 *
한국근대소설학회에서의 발표는 성공적이었다. 학회 자체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참가자가 무척 적었으니까. 그럼에도 민우는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토론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수고했어요. 박 선생. 젊은 나이에 굉장한데?”
“아뇨. 여러모로 부족한데 좋게 봐주시니 부끄럽네요.”
민우는 악수를 받으며 꾸벅 인사했다. 휴식 시간이 시작됐고, 두 사람은 연단에서 내려와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박 선생은 정확히 몇 살이에요?”
“스물여덟, 아니지. 이제 스물아홉 됐습니다.”
“몇 학기?”
“3학기요. 선생님은요?”
“나는 작년에 박사 땄어요.”
토론자는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았다. 많이 잡아야 서른 후반. 박사 취득 후 시간강사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난 박 선생 나이 때는 발표 같은 건 생각지도 못했는데. 이 정도 레벨이면 좀 더 큰 학회에서 발표해도 되겠는데요?”
“작년 겨울에 국제비교문학회에서 발표 하긴 했었어요. 이번 여름에도 발표 한 건 있고요.”
“어디서?”
“현대문학연구학회에서요.”
“오!”
두 학회는 꽤 이름이 있는 학회였다. 토론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무슨 석사과정생이 그렇게 많이 발표를 해요? 그것도 메이저 학회에서. 석사 논문 쓰기도 벅찰 텐데.”
“재밌어서요.”
“허.”
재밌다는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는지, 토론자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규모가 큰 학술대회는 아니었지만 민우는 최선을 다했고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무엇보다도 루카치의 만년필을 쓰지 않았다.
‘그게 이번 발표의 가장 큰 수확이야.’
민우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논문의 완성도가 높아 질문은 많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토론자도 빈틈을 짚기보단 논문의 의의를 해설하는 데 주력했다.
좋은 의미로 동업자 정신이 투철한 사람이었다. 석사라서 봐준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의 배려가 내심 고마웠다.
허윤종. 민우는 그의 이름 세 글자를 똑똑히 기억했다.
“아무튼 덕분에 공부 잘하고 갑니다. 다음에 또 봐요. 민영환 선생님께 안부 좀 전해 주시고.”
“예. 그런데 선생님은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
“강은대에서 시간강사로 있어요. 다른 대학에도 나가긴 하는데 지방이라서. 나중에 강은대 근처에 올 일 있으면 한번 봅시다.”
“조심히 가세요.”
“아 참, 번호.”
번호를 교환하고 그와 헤어진 민우는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아직 학회는 두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허윤종은 학회장을 떠났지만 민우는 남은 발표를 모두 듣기로 했다.
‘이제 학회 발표는 완전히 감을 잡았어. 어떻게 토론을 해야 하는지도 알 것 같고.’
민우는 이번에도 강연식 발표 방법을 택했다. 그러다 보니 강단에서 어떤 식으로 발표를 하는 게 효과적인지 알 수 있었다.
‘슬슬 강의를 잡아도 되겠는데?’
작년 무투브에서 반짝인기를 끈 이후로 쉴 새 없이 강연 요청이 왔다. 하지만 모두 거절했다. 경험이 충분하지 않다는 판단에서였다.
요즘도 드물긴 하지만 요청이 온다. 이제는 좋은 자리가 있다면 한 번쯤은 해봐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KOC에 올라간 강연 동영상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서지훈 교수도 허락해줄 것이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게 가장 좋긴 한데. 그러려면 학위가 필요하고. 역시 석사를 따고 나서 생각해 봐야 하나…… 괜히 어설프게 강연만 하고 다니면 시간 낭비일 수도 있어.’
생각이 복잡해졌다. 민우는 의자에 몸을 편히 기대며 핸드폰을 꺼냈다.
‘그나저나 연락이 안 오네. 슬슬 올 타이밍인데.’
그런데 마치 그게 신호라도 된 듯, 전화가 걸려왔다.
모르는 번호였다.
마침 휴식 시간이었기 때문에 민우는 강당을 나서며 전화를 받았다. 민우는 음음, 헛기침하며 목소리를 깔았다.
“네, 박민우입니다.”
― 안녕하십니까. 저는 골든북스의 문경원 대리라고 하는데요. 명인대의 박 선생님 맞으시지요?
자신감이 넘치는 목소리였다. 협상에 능숙할 것 같은 그런 목소리.
그나저나 골든북스라.
‘<더 위자드> 2부 판권을 여기서 가져간 모양이네.’
민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드디어 기다리고 있던 전화가 온 것이다.
“맞습니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무슨 일이신지요?”
― 반갑습니다! 요즘 업계에 박 선생님의 번역이 기깔나다는 얘기가 자주 들려와서 말입니다. 이번에 상도 타셨죠? 괜찮으시면 저희와 함께 일을 해보시는 건 어떤지 싶어서요.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는 본론을 바로 말했다.
약간 거만한 말투가 거슬렸지만, 골든북스라면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번역가는 프리랜서라 갑을관계가 확실하니까.
하지만 민우는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시군요. 그런데 제가 지금 학회에 와 있어서 길게 통화하기 어렵습니다.”
― 아아, 네에.
문경원 대리가 살짝 당황했다. 하지만 호쾌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 그럼 한번 뵙고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 혹시 언제 시간이 괜찮으실까요? 최대한 빠를수록 좋은데요. 저희 사무실에 오셔서…….
“이번 달은 좀 어렵고, 다음 달 초가 괜찮습니다.”
― 예?
민우는 싱긋 웃었다.
“여기가 강당이라 통화가 잘 안 되나 보네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음 달 초가 괜찮습니다. 방금 언제 시간이 괜찮냐고 물어보셨잖아요. 공부도 하고 있고, 일도 여러 개 하고 있어서 이번 달엔 시간 내기가 좀 곤란합니다.”
― 아…… 그게.
“뭐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 아니, 아닙니다. 하하하. 바쁘시니 제가 저녁에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괜찮으시죠?
“네, 얼마든지요.”
― 그럼 이따 다시 뵙지요.
전화가 끊겼다. 핸드폰을 집어넣은 민우는 다시 강당 안으로 들어왔다.
민우는 처음부터 자신에게 연락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더 위자드>는 일반 소설과는 다르다. 판타지 소설이고, 고유어를 바꾸는 것부터 시작해 특유의 세계관이 있기 때문에 번역이 쉽지 않다.
그 상황에서 출판사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경험이 적으면서도 완벽한 번역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을 섭외하는 것.
‘그래서 나에게 전화를 했겠지. 만만하니까. 어쩌면 센트럴 북스에서 계약 조건으로 나를 번역가로 쓰라는 항목이 들어가 있을지도 모르고. 그렇게 된다면 일이 재밌게 되겠지.’
민우는 여유롭게 학회지를 펼쳤다.
어차피 계획은 모두 세워져 있었다. 이제 학회에서 남은 발표를 듣고, 저녁에 올 전화만 기다리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