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시장의 논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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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시장의 논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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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시장의 논리 (1)
2022.01.06.
오랜만에 좋은 시간을 보낸 두 사제는 함께 연구실을 나섰다.
“어디 가시려고요?”
“약속 있다. 학생이 갈 수 없는 곳에서.”
학생이 갈 수 없는 곳?
곧 민우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대학 내에 갈 수 없는 곳이 대체 어디란 말인가. 대학의 주인은 학생인데.
표정을 보니 그 주제로는 더 말을 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민우 넌 스터디?”
“아뇨. 잠깐 일산에 좀 다녀오려고요.”
“일산이라면 호수공원 데이트인가. 아직 꽃도 안 피었을 텐데 뭐하러 가냐. 다음 달에 가. 꽃 축제할 때. 한 번 가봤는데 좋더라.”
“그런 건 아니고, 전에 신세 졌던 출판사에 뭐라도 좀 사 들고 가려고요.”
“라온북스라고 했던가?”
“예. 팀장님이랑 편집자님 뵌 지도 오래됐고, 조만간 또 바빠질 테니 시간 난 김에 가 봐야죠.”
서지훈 교수도 라온북스에서 민우에게 적잖게 도움을 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잘 생각했다며 칭찬했다.
민우가 졸업 후 바로 대학원에 들어와 사회생활을 거의 하지 못해 걱정을 했는데, 나름 지음사에서 사회경험을 쌓은 모양이었다.
인문계는 특히 출판사와 연을 만들어 둬서 나쁠 게 없다. 저술활동이 많기 때문에 어떻게든 출판사와 좋게 엮이는 게 바람직했다.
그런 의미에서 민우는 명실공히 최고의 인맥을 만드는 중이었다.
지음사 출판기획실의 실세인 송승현 실장을 비롯해 최근 급속도로 성장 중인 라온북스에서 매번 러브콜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
서지훈 교수가 말했다.
“그쪽에서 이번에 번역상 추천해 준 거지? 답례하려면 제대로 해. <더 위자드> 팔리는 거 보니 통장 잔고 좀 두둑해졌겠던데. 받은 거 이상으로 베풀어야 다음에 그 이상으로 돌아오는 법이다.”
“알다마다요. 준비 제대로 하고 들어갈 겁니다.”
“가서 코 꿰이진 말고 인마. 계약서 내민다고 혹해서 사인하고 오지는 마라.”
두 사람은 사담을 나누며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명인대 국문과가 배출한 최고의 학자답게 서지훈 교수는 가는 곳마다 인사를 받았다.
민우는 좀 놀랐다.
서지훈 교수가 유명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인사를 많이 받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부임한 지 얼마나 되셨다고 인사를 이렇게 많이 받으십니까? 전에 강의하신 적 있으세요?”
“반 이상은 나도 모르는 얼굴이야. 그냥 교수 같으니까 인사를 하고 보는 거지. 대전 촌놈은 모르겠지만 여기 신입생들은 으레 그렇다.”
“대전이 무슨 촌입니까. 광역신데.”
“내 동료들이 자주 그러더라고. 시골에서 농사 그만 짓고 올라오라고.”
학과별로 층을 나눠 쓰다 보니 종종 생기는 일이었다. 인사를 해서 손해 보는 건 없으니, 학생들은 일단 인사를 하고 본다.
물론 대학원생들은 전공을 불문하고 모두 서지훈 교수를 알고 있었다.
그가 서른한 살에 저술한 <현대문학론>은 명인대 필독도서 100순위 안에 드는 책이었고, 수많은 국문과에서 전공도서로 쓰이곤 했으니까.
하지만 민우는 그런 이유가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선생님에겐 뭐랄까. 교수다운 기품이 있지. 올곧은 인성이 겉으로 드러나 있다고 해야 하나…… 배우고 싶은데 정말 어려운 부분이야.’
민우는 슬쩍 옆을 흘겨보았다. 서지훈 교수가 있는 곳에 시선을 두고.
살짝 타이트하게 걸친 와이셔츠와 슈트는 트랜디한 멋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교수로서의 품위를 정직하게 연출했다.
손에 들린 갈색 가죽 서류 가방은 어떤가. 값어치를 떠나서, 마치 그가 아직 젊은 교수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했다.
거기에 오랜 학업으로 쌓인 지적인 이미지도 빼놓을 수 없다. 그 어떤 것으로도 살 수 없는 아우라. 어느 누가 봐도 교수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민우는 한탄했다. 따라 하고 싶어도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 것들이었다.
“박민우.”
“네?”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다가 가랑이 찢어지는 수가 있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석사 3학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부터 생각해. 앞길이 구만리인 놈이 딴생각은.”
민우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꾹 다물었다. 맞는 말이었다.
얼마 전 유고를 이어 쓰면서 학문의 세계를 보다 확장시킨 민우였다. 하지만 여전히 서지훈 교수의 앞에 서면 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도 그랬다. 티를 거의 내지 않았는데, 서지훈 교수는 자신의 마음을 읽었다.
민우가 투덜거렸다.
“제가 모르는 사이 독심술까지 익히셨나 봐요.”
“독심술까지 배울 필요가 뭐 있나. 박민우 속마음이야 빤한 게 아니겠어? 공부 아니면 이수빈 선생이겠지.”
농담조였지만 은근 의중을 찌르는 말이라 민우는 섣불리 반박하지 못했다.
“좀 더 청춘을 즐겨. 넌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니까. 지금도 충분히 잘 해내고 있다.”
서지훈 교수가 어깨를 두드렸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덕담이었지만, 서지훈 교수가 해서 그런지 더욱 마음에 와닿았다.
오늘따라 칭찬이 잦았다. 인색한 사람이었는데, 그래서 기분이 좋았다.
만약 상아대에서 그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지금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까. 문득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
“왜.”
“제가 만약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요?”
“생각하지 않는 게 정신건강에 좋지 않겠냐?”
민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한마디로 우문현답(愚問賢答)이었다.
띵동―
1층에 도착한 민우와 서지훈 교수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때 바람이 한차례 불어오더니, 커다란 그림자가 두 사람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늘에서 무언가 펄럭거리며 만드는 그림자였다.
걸음을 멈춘 서지훈 교수가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곤 미소를 짓는다.
“뭐야, 저건 언제 걸었대?”
“뭔데요?”
민우도 뭔가 싶어서 고개를 돌리고는 깜짝 놀랐다. ‘큰산번역문학상 신인상’을 축하하는 플래카드였다. 당연 그 주인공은 민우였다.
― 박민우(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 학우의 큰산번역문학상 영한번역부문 신인상 수상을 축하합니다!
“보기 좋구나.”
그 한마디엔 많은 감정이 들어있었다.
“처음이라고 들었어요.”
“무엇이?”
“학생들 중 번역으로 수상한 사례요. 다른 전공에는 몇 명 있었던 모양인데 국문과는 개교 이래 처음이라더군요.”
가만히 플래카드를 바라보던 서지훈 교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도 처음이지만, 타대 출신은 저런 거 잘 안 걸어 줄 텐데. 의외로구나.”
저건 단순히 수상을 축하하는 플래카드가 아니었다.
인문관 꼭대기에 걸린 만큼 민우의 위상이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민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작년에 인문학 공모전에서 대상 받았을 때도 걸렸었는데.”
“그건 이야기가 좀 다르지. 그땐 수빈이도 껴 있었잖냐.”
“그러네요. 생각해보니.”
“뭣보다도 민식이하고 약속했었다며. 대상 타면 직접 걸어주기로. 그 녀석, 약속 하나는 근성 있게 지키는 친구니까.”
최민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서지훈 교수가 뭔가를 떠올리고 다시 물었다.
“참, 그런데 민식이 너희 매형 되게 생겼다는 소문이 있던데?”
“소문이 벌써 거기까지 갔어요?”
“얼마 전에 진섭이에게 들었다. 일이 되게 재미있게 되었구나. 잘만 풀린다면 집안에 명인대 박사가 셋이나 생기겠어. 하하하!”
시원하게 웃은 서지훈 교수가 몸을 돌렸다.
그 사이 학생 하나가 인사를 해 왔다. 서지훈 교수의 수업을 듣는 학부생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서지훈 교수는 고개를 숙이며 반갑게 학생의 인사를 받았다. 교수라는 권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었다.
“좋은 오후네요. 이름이…… 아마 김형석이었지요? 16학번.”
“아, 맞습니다. 기억해 주셨네요.”
“공부도 좋지만 햇볕도 좀 쬐면서 쉬엄쉬엄해요. 오랜만에 날도 따뜻하고 좋군요. 마음이 여유로워야 글이든 뭐든 더 넓게 보이는 법이니까.”
“말씀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커피 한잔하려고 가려고요.”
고개를 끄덕인 서지훈이 몇 마디 덕담을 남기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던 민우가 서둘러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새 애들 이름 외우셨나 봐요? 많아야 강의 한두 번 하셨을 텐데. 게다가 수강신청변경기간이라 많이 왔다 갔다 하잖아요.”
“그게 너의 한계다.”
한계?
그 한마디에 민우의 표정이 오리무중에 빠졌다.
두 사람은 여전히 길을 걷고 있었다.
민우를 힐끔 바라본 서지훈 교수는 벤치가 있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아까 본 김형석 학생은 ‘현대소설의 이해’라는 강의를 듣는 친구야. 총 35명의 학생들이 함께하는 수업이지. 저 학생은 말이다. 나에게는 35명의 학생 중 하나일 뿐이지만…… 저 친구에게는 내가 단 하나뿐인 선생이겠지. 그 과목에 한정한다면.”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는데요. 아무래도 사람인 이상 관심을 두는 것엔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수업 준비도 하고 과제 피드백도 해줘야 하고, 시험 기간에는 채점도 해야 하고 학생들 불만을 받아가면서 성적 정정도 해줘야 하고요.”
“쯧, 석사 주제에 어디서 들은 건 있어가지고.”
서지훈 교수가 벤치에 앉았다.
눈앞에 버스정류장이 보였다. 민우가 타야 하는 버스가 마침 도착했지만, 옆자리에 앉은 민우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서지훈 교수가 품에서 담배를 꺼냈다. 그리고 라이터를 당겨 불을 붙였다.
“넌 쌓은 지식에 비해 현장 경험이 전무하다. 하긴, 아직 정식으로 대학 강단에 서본 적이 없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만.”
“강단에 서는 건 학생들에게 지식을 나눠주기 위한 것 아닙니까? 진리에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그런 지식을요.”
“틀린 말은 아니지. 하지만 잘 쳐줘도 비제로급 답안이군.”
서지훈 교수는 웃으며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민우는 마냥 기다리기만 했다.
잠시 후 서지훈 교수가 담배를 비벼 껐다. 옆에 놓인 쓰레기통에 꽁초를 버렸다.
“강의를 하는 건 말이다. 단순히 지식을 던지고 학생들에게 소화를 강요하는 행위가 아니야. 학생들이 자신의 길로 잘 나아가고 있는지 끊임없이 살펴줘야 해. 때로는 햇볕도 쬐어 주고 물도 줘 가면서 말이다.”
“뭔가 좀 막연하네요.”
“작은 관심이 큰 변화를 일으키는 법이지. 네가 학부 때 경험했던 것을 떠올려봐라. 어떻게 대학원에 진학할 결심을 내렸는지를.”
민우는 그때를 떠올렸다. 학부 2학년 때, 서지훈 교수는 책을 읽고 싶다고 청하는 민우에게 흔쾌히 자신의 서고를 열어 주었다.
그 사소한 관심이 있었기에 민우가 죄르지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을 집게 만들었다.
그리고 인생이 변했다. 완전히.
“요즘 대학들은 학생을 등록금을 내는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경향이 강하지. 지금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면 조만간 전화를 받을 때 학생이라고 하지 않고 고객님이라고 할 날도 머지않은 느낌이야. 난 그런 게 싫다. 너무나도. 그러니 너도 진짜 교수가 되고 싶다면 매사에 진지하게 임해. 자리에 안주하지 말고, 학생들의 작은 목소리 하나 놓치지 말고.”
“제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요?”
“그걸 왜 나에게 묻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맞는 이야기 같은데.”
자리에서 일어선 서지훈 교수가 민우의 어깨를 툭툭 치고 자리를 떴다. 대학본부가 있는 곳이었다. 민우는 그 자리에서 한참을 생각하다 버스에 몸을 실었다.
지하철 3호선에 올라 정발산역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서지훈 교수가 남긴 마지막 말을 곱씹었다.
* * *
민우는 간식과 음료수를 잔뜩 사서 라온북스 사무실을 방문했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민우는 반갑게 인사했는데, 직원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특히 편집팀은 모여 앉아 뭔가를 심각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 민우 씨.”
뒤늦게 이유리 편집자가 달려 나왔다. 현기혁 팀장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분위기가 좀 이상했다.
“이거 받으세요.”
“어유, 뭘 이런 걸 다 사 오셨어요.”
이유리는 간식을 들고 탕비실로 들어갔다. 이어 현기혁 팀장이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어느새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십니까? 이거 깜짝 놀랐습니다.”
“인사도 드릴 겸 놀러 왔어요. 그런데…… 무슨 일 있나요? 왜 다들 표정이.”
“아, 그게 말입니다.”
현기혁 팀장이 입맛을 다셨다. 난처한 표정이었다.
“일단 자리를 좀 옮기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