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스카우트 (3)
(14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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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스카우트 (3)
2022.01.03.
처음엔 잘못 본 건 줄 알았다. 책을 오래 봐서 피로한 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민우는 눈을 비비고 다시 유고를 살폈다.
하지만 잔상은 여전했다.
마치 투명한 지렁이처럼, 그 잔상은 빈 페이지 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민우는 눈매를 좁히며 뚫어져라 그것을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뭐야?’
착시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만약 민우가 루카치의 만년필과 안경을 얻지 못했더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민우는 그 특별한 아이템으로 신기한 능력을 발휘했다. 루카치의 유품에는 어떤 특별한 힘이 있다는 건 경험으로 체득된 사실이었다.
그 유품 중 하나에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뭔가 내가 모르는 게 있어. 분명히.’
민우는 손가락을 뻗어 꾸물거리는 잔영을 만져보았다. 오래된 종이의 질감 외에는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민우는 턱을 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아, 혹시?’
민우는 후다닥 일어나 가방에서 루카치의 안경을 꺼냈다. 즉시 착용한 다음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유고를 살폈다.
‘……!’
보였다.
그것은 환영이 아니라 글자였다. 다양한 외국어 지식이 있던 민우는 그것이 어느 나라 언어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독일어다. 그런데 이거, 단순히 단어의 나열이 아니라 문장인 거 같은데…….’
민우는 떠오르는 환영, 아니 이제 글자가 된 그것들을 차분히 읽어 나갔다. 그리고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유고의 이전 부분하고 내용이 연결되고 있어. 전혀 위화감 없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거지?’
머리와 목을 거쳐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마치 글씨 연습을 할 때 사용하는 흐릿한 문자처럼, 유고에 떠오른 글씨는 자신을 그대로 따라 쓰라고 손짓하는 것 같았다.
민우는 그 부름에 응했다.
간단한 이치였다. 안경으로 그 글자를 볼 수 있다면, 만년필로 그 글씨를 쓴다.
만년필을 쥔 민우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침이 없었다. 생전 써보지도 않은 필기체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흐릿했던 글자가 검은 잉크를 먹어 분명한 색깔의 글씨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번쩍!
순간 푸른빛이 터졌다. 안경과 만년필, 그리고 유고가 마치 서로 공명하듯이 번갈아 가면서 푸른빛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민우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의 시선은 원고의 빈 페이지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고, 펜을 쥔 손은 계속해서 빠르게 움직였다.
‘아!’
정신을 차린 민우가 펜을 멈췄다.
동시에 방안을 휩쓸던 푸른빛도 사라졌다. 민우는 모든 것을 쏟아낸 것 같은 허탈감을 느꼈다.
‘아니, 이건 허탈감이 아니야.’
상쾌함에 가까웠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지적 고양감. 민우는 본능적으로 지식을 담는 그릇이 더욱 커졌음을 깨달았다.
‘믿을 수가 없어…….’
하지만 사실이었다. 볼을 꼬집어보아도 따끔했다. 무엇보다도 두 페이지가량이 더 채워진 유고가 눈앞에 있었다. 현실이었다.
민우는 유고를 들어 꼼꼼히 살펴보았다.
‘내가 전에 읽었던 부분이 여기니까. 이쪽까지 하면 총 두 페이지 정도 쓴 거구나. 어떻게 이렇게 똑같이 쓸 수 있었던 거지?’
신기하게도 필체와 잉크의 스며든 정도가 기존의 것과 완전히 똑같았다. 마치 처음부터 지금 써진 부분까지 한 번에 쓴 것 같았다.
한숨을 내쉰 민우는 유고를 내려놓고, 만년필과 안경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한동안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하나의 거대한 의문이 민우의 머릿속에 박혔기 때문이다.
‘매일 유고를 봐왔지만 이렇게 잔상이 보인 적은 없었어.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좋은 일임엔 분명하다. 머리가 더욱 맑아졌고, 지식을 흡수할 수 있는 기반이 넓어졌으니까. 어렴풋이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는지는 알지 못했다. 특별한 계기라고 생각할 만한 일은 없었으니 궁금증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역시 우연인가?’
그럴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현재로서는. 그때 불현듯 다른 가능성이 떠올랐다.
‘아니면 내가 이 유고를 이어 쓸 만한 자격을 갖추게 된 건가? 쌓은 지식이 일정 레벨에 도달했다든지. 그래서 이 글자가 보인 거고.’
그럴싸한 추측이었지만 어느 것도 진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확실하다고 생각되는 건 하나 있었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유고를 이어 쓸 수 있겠어. 굉장히 어렵고 막연하게만 생각했는데…… 뭔가 방법을 알게 된 것 같아.’
민우는 기존의 내용과 새롭게 써진 내용을 이어 읽었다. 인간의 영혼과 이성을 다룬 그 위대한 에세이는 위화감 없이 잘 이어졌다.
고개를 끄덕이며 민우는 유고를 덮었다.
‘결국 그런 거야. 더 열심히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공부해야 한다고. 유고가 말해주려는 건 바로 그런 게 아니었을까?’
그제야 민우는 스탠드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실, 유고를 이어 쓰는 것은 오로지 민우의 선택 문제였다.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미루고 미루다 흐지부지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민우는 작년에 들었던 그 목소리를 아직까지도 잊지 않고 있었다.
― 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인 건가. 내 물건을 찾아주다니 고맙네. 소중히 사용해 주길 바라네. 자네라면 내 유고를 맡길 수 있겠어. 이어서 써줄 텐가?
그때 그 목소리.
민우는 마치 화답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물건을 이어받았다는 건 그와 약속을 한 거나 다름이 없어. 평범한 약속은 아니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약속. 무엇보다도 이 물건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나도 존재하지 않았을 거야.’
민우는 이 유고를 언젠가 반드시 완성해서 세상에 공개하기로 굳게 마음을 먹었다.
‘내 이름이 아니라 죄르지 루카치의 이름을 넣어서.’
물론 그전에 유고의 발견 경위 등 여러 부가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그건 그때 생각할 문제였다.
생각이 깔끔히 정리되자 민우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머리가 어느 때보다 총명하게 돌아갔다.
창밖은 어느새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주홍빛 가로등이 외롭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민우는 커튼을 치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톡이 여러 개 와 있었다.
하나하나 답장을 다 했다. 침대에 걸터앉은 그는 시계를 확인했다. 밤 10시가 거의 다 되었다.
‘이대로 자는 건 왠지 아까운데?’
민우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얼마 전 진섭의 권유를 이기지 못하고 게임을 질렀다. 여유롭게 게임을 할 수도 있지만, 민우는 그 대신 메일함에 접속해 논문 평가지를 열었다.
‘고쳐야 할 부분이 많았지? 왠지 지금이라면 더 잘 해낼 수 있을 거 같다.’
민우는 논문 평가지를 인쇄했다. 그리고 정독한 뒤 논문 파일을 열었다. 문제로 지목된 부분을 확인하고, 하나씩 고쳐나가기 시작했다.
그 과정을 거치며 민우는 깨달았다. 논문을 바라보는 시야가 훨씬 넓어졌음을.
오늘 처음 평가지를 받았을 때는 심사위원들의 지적이 조금 막연하게 느껴졌는데, 이제는 어디가 어떻게 문제인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또 성장한 건가?’
키보드를 두드리며 논문을 고쳐가는 민우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단순히 수정만 하는 게 아니었다. 민우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부분에서는 심사위원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논리적 정합성도 중요하지만, 연구자의 소신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정도면 됐어. 바로 보내자.’
민우는 학회 총무간사에게 수정된 논문을 첨부해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잘 부탁드린다는 말을 남겼다.
벌써 자정에 가까워졌다.
침대에 대자로 뻗은 민우는 눈을 감았다. 운동을 한차례 한 것 같은 좋은 피로감이 몰려왔다. 미소를 지은 채 민우는 깊은 잠에 빠졌다.
* * *
“오빠. 어제 뭐 좋은 일 있었어?”
아까부터 계속 민우의 얼굴만 살피던 이수빈이 물었다. 민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몇 가지 있었지.”
“논문 게재 확정된 거랑 스카우트 제의 말고 내가 모르는 게 또 있어요?”
“걱정 마. 모르는 여자한테 번호 따이거나 하진 않았으니까.”
“그럴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없을 테니 걱정 안 하는데.”
민우가 피식 웃었다. 하긴, 그건 이수빈이 아니라 자신이 걱정해야 하는 문제다. 가끔 연예기획사에서 명함을 받았다고 자랑을 해댔으니.
그렇다고 루카치의 유고를 이어서 써서 기분이 너무나 좋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의 유품에 대한 것은 아직까지는 비밀이었으니까.
“그냥 요즘 일이 잘 풀려서 그렇지 뭐. 좋은 일만 쏟아지고 있잖아.”
“너무 잘나간다고 으스대지 말고 열심히 하세요.”
“언제 내가 열심히 안 한 적 있냐. 이따 저녁에 인문관으로 와. 섭섭이가 오랜만에 같이 저녁 먹자고 하더라.”
“알았어요. 이따 연락할게.”
민우는 수빈과 헤어지고 인문관 4층으로 올라갔다. 서지훈 교수 연구실을 찾았는데, 마침 그는 연구실 안에 있었다.
“선생님. 바쁘세요?”
“아니. 그런데 왠지 너 때문에 바빠질 거 같다만. 논문 수정 막혀서 왔지?”
“아뇨.”
민우는 짧게 대답하고는 소파에 앉았다. 서지훈 교수는 커피포트에 미리 내려둔 커피를 한 잔 따라 민우에게 건네며 맞은편에 앉았다.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아뇨라는 대답은 예상 범위 내에 없는 건데. 뭐 어떻게 된 거야?”
“어젯밤에 바로 수정해서 학회에 보냈습니다.”
서지훈 교수가 살짝 놀랐다.
“논문을 수정하고 바로 보냈다고? 수정 지시가 꽤 많았을 텐데. 나랑 한번 상의하고 보내지 그랬냐.”
“선생님 바쁘실 거 같아서요. 제가 이해한 대로 수정해서 보냈습니다.”
민우는 가방에서 논문 최종본을 꺼내 서지훈 교수에게 전달했다.
그는 단번에 논문을 싹 읽었다.
그런데 표정이 밝지 않았다. 서지훈 교수는 턱을 괸 채 민우와 논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으음, 좀 이상한데.”
“뭐가요?”
오히려 민우는 당당했다. 서지훈 교수는 옆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분명 네 수준으로는 놓칠 거라고 생각된 부분이 몇 개 있었거든. 평가서에 일부러 적어놓지는 않았는데…… 그 부분이 잘 다듬어졌네.”
“선생님. 그거 악취미입니다. 먹을 거 가지고 장난치는 거랑 똑같아요.”
좋은 비유였다. 피식 웃은 서지훈 교수가 말을 받았다.
“작가의 의식세계와 작품의 서사를 연결하는 부분이 좀 이상했거든. 이건 말로 설명해 주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일부러 쓰지 않았는데. 다른 심사위원이 지적해 줬나?”
“아뇨. 그냥 읽다 보니 그 부분이 눈에 밟혀서 이런 식으로 수정을 해봤어요.”
“그래?”
여전히 서지훈 교수는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이 정도면 준수한 논문이었다.
“아무튼 고생했다. 이걸로 벌써 KCI급 논문 두 개구나. 석사 3학기 주제에 굉장한걸? 나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하고 있고.”
“무슨 말씀을요. 전 그저 선생님 어깨를 짚고 앞을 보고 있을 뿐인데요.”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다?”
민우는 겸손히 웃었지만, 겉으로는 꽤 건방진 한마디를 꺼냈다.
“박사과정 때는 조금 더 높은 수준의 학술지에 도전을 해볼 생각입니다.”
“더 높은 수준이라면, 설마 해외 학술지?”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SCOPUS급, A&HCI급 가리지 않고 해외 학술지에 논문을 투고해 볼 생각이에요.”
“그건 처음 듣는 얘긴데. 갑자기 왜 그런 계획을 세운 거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선생님 제자인데 그 정도 급은 돼야죠.”
서지훈 교수는 무릎을 탁 치며 큰소리로 웃었다.
“하하하하! 이거 비꼬는 건지 살짝 헷갈리긴 하는 데 기분은 나쁘지 않네. 뭐, 너는 외국어를 잘하니까 해외 학술지에 논문을 내봐도 문제는 없겠어. 잘 쓴다는 전제하에서.”
“영국하고 프랑스 쪽에 줄이 닿아 있으니까, 그걸 잘 이용하면 의외로 쉽게 풀릴 거 같기도 해요.”
영국은 앨런 스미스 교수를, 프랑스는 피에르 랑느 박사를 뜻했다. 두 사람 모두 민우의 저술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너. 괜한 호승심으로 일을 벌이는 건 아니겠지? 전에 오리엔테이션 때 있었던 얘기는 대강 들었다만.”
서지훈 교수가 진지하게 물었다.
오리엔테이션 때의 일. 전이택이 SCI급 논문을 언급하며 다른 세부전공 학생들을 도발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살짝 짜증이 난 건 사실이지만…… 어차피 해야 할 일인데요 뭐.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일단 석사 먼저 따고 박사 때 천천히 할 거니까.”
“괜히 그쪽하고 얽혀서 좋을 건 없으니 조심하도록.”
서지훈 교수는 분명히 선을 그었다. 민우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참, 너 시상식 언제냐?”
“다음 주 토요일입니다. 오후 다섯 시예요. 끝나고 저녁도 준댑니다.”
“그렇군. 마침 그 근방에서 약속이 있어서 말이다. 시간이 되면 들르지.”
“꽃다발은 괜찮습니다. 어차피 애들이 많이 가져올 거 같으니까요.”
“이 짜식이.”
서지훈 교수는 흐뭇하게 민우를 바라보았다. 어리바리하던 학부생이 언제 이리도 컸는지. 새삼 지나간 세월이 피부로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