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스카우트 (2)
(14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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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스카우트 (2)
2021.12.31.
평가가 너무나 신랄했기 때문이다. 아니, 애초에 수정 후 게재 판정을 내렸는데 이렇게까지 공격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수정 후 재심사라면 또 모를까.
‘이거 심사위원이 점수 잘못 매긴 거 아냐?’
그런 생각에 민우는 다시 채점표를 확인했다. 확실히 수정 후 게재가 맞았다. 이상했다.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평가를 정독했다.
― 상기 연구자의 논문에는 깊이가 없다.
‘하, 대박이다 진짜. 어쩜 단 한 문장으로 사람의 마음을 이리도 후벼파냐.’
가슴이 찌릿 아팠다. 민우는 칼에 찔린 사람처럼 인상을 쓰며 이어 읽었다.
― 1960년대의 시대 상황과 그 사상적 배경에 대한 통찰이 부족한 채로 논문이 쓰였기 때문에 깊이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특히 최인훈 작품의 배경에 대해서 작가의 개인 체험이나 작중 인물의 특성을 겹치는 방식으로 서술한 것은 관록 있는 연구자들도 쓰지 않는 고루한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문제가 있다.
여기까지 읽은 민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끝맺음이 어딘가 익숙했기 때문이다.
다음 부분을 읽었다.
― 겉멋 든 용어의 사용이 빈번하다. 충분히 고민을 하고 쓴 것 같지는 않다. 애석하게도 이는 매우 초보적인 실수로 논문의 질적 하락을 야기하는 요소다. 용어에 대한 고민을 계속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몇몇 익숙한 표현이 눈에 들어왔다. 민우의 표정이 뚱해졌다. 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이어 읽었다.
― 문제점들을 보완한다고 이 논문이 극적으로 환골탈태할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196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이 지닌 태생적인 한계와 연구자의 학문적 능력이 부족한 총체적 난국이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따지자면 ‘게재 불가’급 논문이다. 하지만 이 정도 수준의 논문을 수급하는 것도 쉽지 않은 학회의 현 상황과 대한민국의 학문적 풍토를 고려한다면 수정 후 게재가 적당할 것으로 사료된다.
수업에서도 받기 힘든 혹평이었다. 그나마 글자로 나열되어서 덜했지, 면전에서 저런 소리를 듣는다면 눈물이 쏟아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민우는 의외로 덤덤했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거 왠지 누가 심사했는지 알 것 같은데?’
익숙한 문장이었다. 특히 학부시절 지겹도록 봐 왔던. 민우는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민우인데요. 통화 괜찮으시죠?”
― 목소리가 왜 그러냐? 따지려고 전화한 사람처럼 말이야.
“정확히 보셨습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서지훈 교수였다. 그는 핸드폰 너머에서 조용히 웃었다. 민우가 왜 전화했는지 알았던 것이다.
“제 논문 심사하셨죠?”
― 최근에 논문을 몇 개 심사한 적은 있는데 누구 논문인지는 몰라. 마스킹되어 있으니까.
“농담 마시고요. 직접 지도해주셨으면서 모른다는 게 말이 됩니까.”
민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서지훈 교수가 계속 웃는 것을 보니 확신이 섰다. 곧 그가 시인했다.
― 모를 줄 알았는데 용케 맞췄네. 그래. 내가 심사했다. 혹시 총무간사가 심사위원 이름을 알려준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문장을 보니 왠지 선생님 냄새가 났어요.”
― 야, 그건 좀 소름이다.
“선생님이 쓰신 저서는 모조리 읽었으니까요. 척 보면 딱이죠. 근데 그렇게 혹평을 하실 거면 지도해 주실 때 미리 말씀을 해 주시지 쪽팔리게 이게 뭡니까?”
― 쪽팔릴 게 뭐 있어? 어차피 심사평이 논문집에 실리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학회 관련자들은 볼 수 있잖아요.”
민우는 한껏 칭얼거렸다. 학부 시절부터 못마땅한 일이 있을 때 늘 하던 버릇이었다.
―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다. 어차피 다른 심사위원들이 후하게 평가를 할 게 뻔하니까. 자만심 갖지 말라고 냉정하게 한번 평가를 해 봤지. 네 반응을 보니 성공한 것 같구나. 하하하하!
문득, 지금 터진 그 쾌활한 웃음이 반가웠다.
최근 명인대 국문과를 떠도는 불안정한 기류 때문에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았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이 웃음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민우가 물었다.
“근데 심사의뢰가 어떻게 간 거예요? 학부 때 지도하셨으니 이해관계가 있는 건데. 보통 그러면 심사 못 하지 않아요?”
― 일개 학회에서 거기까지 어떻게 알겠냐. 공식적인 대학원 지도교수는 민 선생님이잖아. 그 외에는 고려사항이 아니지.
“아, 하긴 그러네요.”
그의 말대로 행정상 지도교수는 민영환 교수였다. 때문에 그에게 심사를 의뢰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서지훈 교수에게 심사를 의뢰하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다.
무엇보다도 그는 1960년대 문학론으로 학계에 이름을 날린 사람이었다. 관련 페이퍼는 대개 그가 심사를 맡을 정도로.
이번에도 1960년대 문학에 대한 논문이었으니 예외 없이 그에게 심사의뢰가 들어간 것이다.
― 그런데 심사 결과는?
“어떤 분의 표현대로 깊이가 없는 논문이지만 일단은 통과됐어요. 게재 가능 하나, 수정 후 게재 두 개요.”
― 호오, 생각보다 점수가 후하군.
“계속 놀리실 겁니까?”
― 당연히.
민우를 실컷 놀린 서지훈 교수는 열심히 수정하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하아, 가끔은 애 같으시단 말이지.’
그렇게 실컷 당해놓고도 민우는 문득 자신이 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른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최근에 마음에 걸렸던 것들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다른 교수님들하고 일이 잘 풀리신 건가? 기분 좋아 보이시네.’
잘됐다고 생각하며 민우는 기지개를 켰다.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거울을 한번 보고 옷매무새를 다듬고 바로 위층으로 올라갔다. 송승현 실장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서.
* * *
똑똑―
노크하니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민우는 살짝 문고리를 돌려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입니다. 실장님.”
“어서 와요.”
사무실은 여전했다. 책상엔 결재를 기다리는 서류가 잔뜩 쌓여 있었고, 송승현 실장은 그것을 보며 골치를 앓고 있었다.
그녀가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앉아서 기다려요. 바로 결재를 해야 하는 서류가 있어서.”
“전 괜찮으니까 편히 일 보세요.”
“그럼 책이라도 읽고 있어요.”
민우는 기꺼운 마음으로 책장을 기웃거렸다.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꽂혀 있었다. 책장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민우는 그걸 의식하며 책을 골랐다.
‘어?’
익숙한 책을 발견했다. 라온북스에서 출간한 <사각 살인>이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옆쪽에는 <더 위자드> 1부 세트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출판사가 라온북스라는 것을 제외하고 두 책의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민우가 번역한 책이라는 것.
‘쭉 지켜보고 계셨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증정본 하나 드릴 걸 그랬네.’
경쟁사에서 출간한 책이다 보니 조심스러운 면이 없잖아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자신의 번역물을 읽어 주었다. 마음이 뿌듯했다.
‘그나저나 뭘 읽지?’
보이는 것마다 흥미를 느꼈지만, 민우는 하나만 골라 소파에 앉았다.
<스켑틱(Skeptic)>이라는 이름의 교양 과학 잡지였다. 예전에 진섭에게 들은 적이 있어 그걸 선택했다. 무엇보다도 잠깐 짬을 내서 읽기엔 잡지류가 좋다. 섹션의 길이가 짧으니까.
“민우 씨. 마실 거 필요해요?”
“커피 좋습니다.”
민우는 사양하지 않았고, 송승현 실장은 내선으로 직원에게 커피를 준비해달라고 부탁했다. 곧 민우는 따뜻한 커피를 즐기며 과학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한창 집중을 하고 있는 차에 송승현 실장이 맞은편에 앉았다. 어쩔 수 없이 민우는 책을 덮었다.
송승현 실장은 민우의 표정에서 아쉬움을 읽었다.
“더 읽고 싶으면 빌려 가서 읽어요. 난 이미 읽어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습니다.”
“못 본 사이에 많이 능청스러워졌네요.”
“이제 석사 3학기니까요.”
그 한마디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송승현의 표정이 아련해졌다. 대학원을 꿈꿨던 그 젊은 시절이 떠오른 것이다.
하지만 그 느낌은 오래 가지 않았다.
“<태엽시계>는 번역이 잘됐다고 보고를 받았어요. 고두열 과장이 칭찬에 인색한 사람인데, 보고서에 좋은 평가를 내렸더군요.”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좋게 봐주셔서 다행이네요.”
민우는 그렇게 대답을 하긴 했지만 속으로는 웬일인가 싶었다. 그 까칠하기로 유명한 고두열 과장이 칭찬했다니. 뭔가 함정이 있는 게 아닐까?
민우가 물었다.
“그런데 출간일은 언제로 잡혔습니까? 아직 관련 사항에 대해 전달받은 게 없어서요. 앨런 교수님도 궁금해하시는 거 같고요.”
“아직 확정은 안 됐어요. 다음 달 중순 정도로 보고 있는데 변동이 있을 수 있어요. 좀 더 기다려 봐요. 연락이 갈 테니.”
“언제 나오든 잘되기만 하면 좋겠습니다.”
“민우 씨 기준으로 잘됐다는 건 어떤 건가요?”
“많이 팔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역시 현지 문단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작년에 나온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이 우연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어요.”
그 말에 송승현 실장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가벼이 웃었다.
“욕심이 지나치다고 할까. 하긴, 이번에 큰산번역문학상에서 신인상 탔죠? 그 정도라면 그런 마음을 품을 만도 하겠네요. 아, 늦었지만 수상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대화가 끊겼다.
시계를 한 번 쳐다본 송승현 실장은 가만히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운을 뗐다.
“내가 민우 씨를 부른 건 다름이 아니고…… 하나 제안을 하고 싶어서요. 돌려 말하진 않을게요. 혹시 지음사에 입사할 생각은 없나요?”
“입사요? 전 이미…….”
“연구원 말고 정직원으로.”
스카우트 제의가 올 거라는 사실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예전부터 지음사의 최무진 전무가 자신을 탐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하지만 민우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조급함을 느낀 송승현 실장이 조건을 읊었다.
“연봉 4천만 원에 상여 200퍼센트. 자기계발비와 도서구입비, 운동비, 해외여행비가 지원되고요. 연봉을 제외한 다른 건 공통적인 내용이고…… 민우 씨는 특별히 석사과정 졸업 후 채용할 계획이에요. 나중에 산학협동과정으로 박사과정 학비도 책임지겠습니다. 계약서에 서명만 해 준다면.”
박사과정 학비까지?
실로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일반적인 출판사 초봉이 2천 초반이라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복지가 정말 좋았다.
실제로 민우도 혹하긴 했다. 자기 또래의 나이에 저 정도 조건을 받기 위해서는 대기업밖에 답이 없으니까.
“하지만…… 역시 거절하겠죠?”
민우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이 기회에 확실히 해두는 게 좋겠다 싶어 그가 말을 이었다.
“석사 연구원을 끝으로 더 이상 회사 일은 하지 않을 겁니다. 저도 이 생활이 마음에 들긴 해요. 도움도 많이 받았고. 하지만 역시 저는 대학에 있는 게 제일 마음이 편하네요.”
“번역 일은 계속하고요?”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직업이라기보다는 제 목표에 가까워요. 한국 문학을 세계로 알리는 작업은 끊임없이 해야죠. 그러려면 번역 일을 쉴 수는 없어요.”
민우의 목표가 무엇인지는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승부가 정해져 있던 게임이었다. 송승현 실장은 한숨을 내쉬며 결과에 승복했다.
“뭐, 알겠어요. 두 번 권하지는 않을게요. 서로 피곤한 일이 될 거 같으니까.”
“좋은 대답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답이 뻔히 보여서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일단은 상부 지시라 어쩔 수 없이 민우 씨를 불렀네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면 얘기해요. 자, 내 할 말은 여기까지.”
“예. 실장님.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책 잘 읽을게요.”
민우는 꾸벅 인사를 하고 실장실을 나섰다. 홀로 남은 송승현 실장은 책상 서랍에서 아스피린을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전무님께 어떻게 보고를 한담…….”
그녀의 작은 입술에서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 * *
민우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논문도 통과됐고, 좋은 제안을 받아서 그런지 기분이 좋았다.
‘연봉 4천만 원. 그러니까 내 위치가 지금 그 정도 된다는 거지?’
송승현 실장이 읊었던 조건을 떠올려 보았다. 하나같이 솔깃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무슨 소용이야? 내 길이 아닌데. 아직 유고에 한 글자도 쓰지 못한 잉여잖아. 공부에 더 집중해야 해. 그래야…….’
민우는 보관함에서 루카치의 유고를 꺼냈다. 페이지를 넘기며 글자를 눈에 담았다. 이윽고 빈 페이지가 나왔다.
‘어떻게 이어가야 할까.’
민우가 생각에 잠기던 바로 그때, 빈 페이지에 흐릿한 잔상이 일었다.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