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스카우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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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스카우트 (1)
2021.12.30.
청량한 봄 내음과 함께 2017년 1학기가 시작되었다.
민우는 진섭, 수빈과 함께 민영환 교수의 수업을 들으러 움직였다. 한 학기 뒤처진 예린은 설예라 교수의 수업을 택했다.
복도를 걸으며 플래너를 뒤적이던 민우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번 학기는 두 과목만 들으면 되니까 부담이 좀 덜하네.”
“조삼모사임. 석사 논문 준비해야 하니 어차피 거기서 거기지.”
“하긴.”
민우는 이번 학기에 민영환 교수와 서정원 교수의 수업을 듣는다.
학기가 끝나면 규정 학점인 24학점이 다 채워진다. 여기에 종합시험까지 통과하면 석사 수료가 되고, 학위논문을 제출할 자격이 생긴다. 외국어 자격시험도 있지만 민우는 작년에 응시한 TEPM으로 대체했다.
‘절로 한숨이 나온단 말이지. 쓸 자신은 있는데 어떻게 보일지가 걱정이야.’
석사 논문을 생각하면 눈앞이 좀 아득해졌다. 아무래도 교수들 앞에서 심사를 받는 건 떨릴 수밖에 없다. 수업과는 천양지차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 석사 논문 심사가 지도교수를 포함한 명인대 교수 세 명으로 진행된다는 것 정도다.
박사 논문 심사는 외부위원 두 명을 포함해 총 다섯 명으로 진행된다. 그만큼 규모가 커지고 까다롭다.
‘지레 겁먹지 말자.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지. 지금까지 잘 해왔잖아?’
어차피 어려운 건 다른 석사들도 마찬가지다. 민우는 마음을 다잡으며 대학원 세미나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민영환 교수가 들어오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신입생을 포함해 총 열 명이 민영환 교수 수업에 참여했다.
첫 시간인 만큼 민영환 교수는 앞으로의 수업 운영 방식에 대해 설명했다.
“특히 우리가 눈여겨볼 부분은 소설이라는 양식의 형성 과정이다. 소설을 시기적으로 고전소설과 현대소설로 나눌 수 있다면 분명 그 과도기적인 형태가 있을 터. 다시 말해, 그 사이에서 가교역할을 하는 문학의 양식과 문화적 변천사를 짚어보면서 근대적인 의미에서 소설이라는 양식이 어떻게 태동했는지를 확인하는 게 이번 강의의 목표다.”
민영환 교수의 어조에는 힘이 넘쳤다.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프린트물을 바라보았다. 강의계획서는 약간 엉성한 느낌이 들었다. 민영환 교수의 성격답게 설명이 친절하지 않았던 것.
그래서 민우가 물었다.
“그럼 신소설 위주로 수업이 진행되는 겁니까?”
“그렇지. 흔히들 말하는 애국계몽기 신소설에 대해서 다룬다고 보면 된다. 다들 학부 때 신소설에 대해 공부를 했을 테지만, 주요 작가들 작품은 다시 읽어 오는 게 좋을 거다.”
눈을 빛낸 민영환 교수가 한진섭을 물었다.
“한진섭. 애국계몽기 신소설을 대표하는 작가를 꼽는다면 누가 있지?”
“에…… 일단 이인직, 이해조 정도가 있습니다.”
“그렇지. 그 두 사람이 일단은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지.”
하지만 민영환 교수는 뭔가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읽은 이수빈이 나서려고 했지만, 민우가 한 박자 더 빨랐다.
“최찬식의 작품도 보면 좋을 거 같습니다. 특히 <추월색>은 당시에 굉장한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니까요. 다른 의미로요.”
“잘 얘기했다. 지금 나온 세 작가를 위주로 신소설의 발생 양상과 특성을 살핀다. 그런데 다른 의미라고 한다면?”
“최찬식의 작품은 특히 남녀 간의 애정 문제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정치성을 띤 이인직의 작품과는 궤를 조금 달리하죠. 이인직, 이해조, 최찬식 순으로 작품을 살펴본다면 신소설의 특징이 명쾌하게 나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제야 민영환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원하는 답이 나온 것이다.
“박민우의 말을 참고하면 좋을 것 같군. 학부 때는 개별 작품을 위주로 살폈겠지만, 이번 강의는 좀 다를 거다. 작가의 개인사는 물론 그 당시 조선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살필 계획이지.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다면 가장 좋은 결실이라고 할 수 있겠군.”
설명은 거기까지였다. 질의응답 시간이 이어졌다. 서로 눈치만 보다가 한진섭이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선생님. 이번 수업에도 원서를 봅니까?”
“안 본다. 하지만 깊게 공부를 하려면 외서를 봐야 할 거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외서는 서양의 것이 아니다. 이인직은 일본에서 수학했고, 이해조는 한학자 출신이지. 아마 일본과 중국의 원서를 봐야 할 경우가 생길 수도 있을 거다.”
학생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판도라의 상자를 연 느낌. 학생들의 입장에서 볼 때 깊게 공부하려면 보는 게 좋다는 말은 봐야 한다는 말과 다를 게 없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유일하게 웃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바로 민우였다.
‘일본서와 중국서. 특히 옛날 책들은 어법이 지금과 좀 달라서 어렵지. 하지만 나한테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오히려 잘된 일이야.’
민우는 이번에도 어렵지 않게 강의를 주도할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다.
그렇게 수업이 모두 끝났다.
민우는 진섭과 함께 307호로 돌아왔다. 수빈은 설예라 교수에게 볼일이 있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
학기 초라 그런지 307호에 석사들이 많이 앉아 있었다. 잡담하는 건 아니고, 몇몇 선배들이 신입생들에게 이것저것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자리를 잡고 공부를 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오후 일정은? 난 도서관 갈 생각인데.”
진섭이 물었다. 민우는 사물함에 책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지음사 나가봐야 해. 새 프로젝트 떨어졌거든.”
“새 프로젝트? 뭔데?”
“KOC 강의 돌려보면서 괜찮은 강의 리스트 작성하고 강사와 컨택하는 거. 오픈 라이브러리 관련 프로젝트야.”
“오픈 라이브러리도 착착 진행되고 있는 모양이네. 아무튼 그런 일이라면 네 꺼 뽑으면 되겠다. 양쪽으로 개이득 아님?”
민우는 피식 웃기만 했다. 사물함을 닫고 진섭과 307호를 나섰다.
그때 복도 저 끝에서 최민식의 모습이 보였다. 강의하고 온 모양인지 강의동과 연결된 복도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마침 계단 옆이라 진섭이 슬쩍 발을 뺐다.
“나 먼저 튄다. 수고해.”
“그래.”
진섭이 이탈했고, 민우는 최민식에게 다가갔다.
그는 KERIS의 도유진 원장이 약속한 대로 명인대에서 ‘신화와 문학’이라는 강의를 맡게 됐다. 지금 그 강의를 마치고 오는 길이었다.
“강의 다녀오시는 길인가 봐요. 어떠셨어요?”
“한두 번 해보는 것도 아닌데 뭐 호들갑 떨 거 있나. 그런데 생각보다 학생들이 몰려서 놀랐다. 80명이 넘어. 강의 제목이 그렇게 대중적이지는 않은 거 같은데 말이다. 한 삼사십 명 정도가 아닐까 예상했는데. 아무튼 과제를 줄여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아마도 강의계획서 때문이겠죠.”
민식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물었다.
학기가 시작되기 전, 흥미가 가서 민식의 강의계획서를 본 적이 있었다. 자기도 수강 신청을 하고 싶을 정도로 흥미로웠다.
“결국 형의 강의에서 다루려는 게 신화가 어떻게 콘텐츠로 변용되냐는 거잖아요. 요즘 콘텐츠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어요. 한콘진 쪽 스토리 공모전에도 신화나 역사에 관련한 콘텐츠가 많이 뽑히고 있어요.”
“아, 그래서 그런 거였군. 어쩐지 그런 쪽으로 묻는 학생들이 많았다 싶었어.”
대학 강의에서 80이라는 숫자는 굉장히 많은 편에 속했다. 전공이라면 분반을 해서라도 반으로 나눠야 할 숫자다.
민식이 농담처럼 말하긴 했지만 과제를 내는 것도 부담이 크다.
강의 준비를 하면서 80개나 되는 페이퍼를 채점하고 피드백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애초에 과제물을 걷어 가는 것 자체도 힘들다. 조교를 동원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과제는 줄이지 마세요. 과제가 많아야 학생들이 그만큼 얻어가는 게 많으니까 말입니다.”
“그 수업 안 듣는다고 막말하기냐?”
“반쯤은요.”
두 사람은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며 지하 카페로 향했다.
평소라면 인문관 옆 벤치에서 담배를 피웠겠지만, 이제는 끊어 소용이 없게 되었다.
계산대 앞에 선 민식이 물었다.
“따뜻한 거지?”
“옙.”
민식이 커피값을 치르고 커피를 받았다. 적당히 빈자리에 앉았다. 커피를 한 번 홀짝거린 민우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런데 프로포즈 건은 어떻게 됐습니까?”
“아, 그거. 안 그래도 말하려고 했는데. 일단 성공은 했다.”
민우는 ‘일단’이라는 표현에 주목했다. 문제가 아직 더 남았다는 말이기도 하니까.
“형네 부모님 설득하는 문제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그렇지. 뭐, 하지만 어떻게든 해 봐야지.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잖아.”
“그래도 쉽지 않을 겁니다. 사실 저도 비슷한 일 겪었거든요. 수빈이네 부모님한테 들켜서. 그거야 사귀는 정도라 쉽게 넘어갔지만 결혼은 다르잖아요.”
민우는 그때의 일을 민식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지금에야 웃을 수 있지만 그때는 달랐다. 첫 연애인 데다가 그런 일은 처음이었으니까.
이야기를 다 들은 민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해냈구나. 그래도.”
“누나라면 더 잘 해낼 거예요. 저보다 훨씬 씩씩하고 올곧은 사람이니까.”
“그래도 최대한 그런 상황이 일어나지 않게 내가 잘해야겠지. 시작부터 험한 꼴 보이는 건 서로에게 좋지 않은 거 같구나. 너에게도 미안한 일이고.”
“그런 의미에서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매형.”
매형이라는 표현은 처음이었다. 살짝 놀란 민식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두 사람은 짧지만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 * *
예비 매형과 헤어진 민우는 바로 지음사로 출근했다. 해가 바뀌었지만 인문사회팀 특유의 느긋한 분위기는 여전했다.
장철호 주임은 선임과 당구를 치고 있었다. 정은아 대리는 음악 감상 중이었고, 윤정민 팀장은 웬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민우가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 왔어?”
윤정민 팀장이 웃으며 맞았다.
이어 당구대에 있던 두 사람이 손을 들었다. 정은아 대리도 고개를 까딱거리며 알은척을 했다.
윤정민 팀장이 민우를 붙들었다.
“박 선생. 이따 시간 되면 송승현 실장님 뵈러 가. 아까 찾으시더라고.”
“예? 무슨 일로요?”
“글쎄. 이슈 거리는 없었는데. 뭐, 급한 일은 아닌 거 같다. 시간 날 때 아무 때나 오라고 하시더군.”
“알겠습니다.”
민우는 바로 연구실로 들어갔다.
컴퓨터를 켜고 겉옷을 벗었다. 자리에 앉아 책상을 정리하니 부팅이 딱 끝났다.
‘송 실장님은 왜 갑자기 부르시는 거지? <태엽시계> 건은 아닌 거 같은데. 그랬다면 고두열 과장이 나한테 연락을 했을 거고. 오픈 라이브러리 때문인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최근에 교류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민우는 무의식적으로 마우스를 움직였다.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메일 체크였다. 마침 메일이 하나 도착해 있었다. 발신인을 보니 한국근대소설학회에서 온 메일이었다.
‘심사결과서다! 드디어 왔구나.’
민우는 메일을 클릭했다.
가슴이 두근거리며 긴장감이 엄습했다. 일전에 보낸 논문의 평가가 끝나고 그 결과를 담은 평가서가 온 것이다.
일단 민우는 내용을 확인하기 전에 첨부파일부터 열었다.
딸칵.
일반적으로 학술지의 심사는 세 명의 위원이 참여한다. 무기명으로 진행되며, 심사자의 신상정보는 물론 심사받는 사람의 인적사항도 알 수가 없다.
평가 등급은 총 네 가지로 나뉜다. 게재 가능, 수정 후 게재, 수정 후 재심사, 게재 불가.
학회마다 내규가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보통 심사위원 두 사람 이상이 수정 후 게재 이상으로 판정하면 논문을 학회지에 실을 수 있게 된다.
‘서지훈 선생님께 한 달 동안 털려가면서 간신히 써낸 논문인데. 설마 떨어지지는 않았겠지?’
곧 로딩이 끝나고 파일이 열렸다. 총평을 확인한 민우의 표정에 미소가 걸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게재 가능이었다.
‘됐다!’
기쁨을 만끽하며 상세 내역을 확인했다. 심사위원 한 명이 바로 게재 가능을 줬고, 나머지 두 사람이 수정 후 게재로 판정했다.
보통 대부분이 잘 쓴 논문도 수정 후 게재 판정을 내리는데 한 명이 즉시 게재 판정을 내렸다는 것은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생각보다 점수가 후하다. 수정 후 재심사가 하나 정도 뜰 줄 알았는데.’
민우는 세부 평가항목을 살폈다.
첫 번째 심사위원은 아주 호평했다. 두 번째 심사위원도 비록 수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피력했지만 몇 줄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심사위원의 평가가 나왔다.
‘뭐야 이거?’
민우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