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사람다운 사람이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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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사람다운 사람이란 (2)
2021.12.27.
술기운이 꽤 올라와 있었기 때문에 춥지 않았다. 오히려 후끈한 기운이 누그러지며 기분이 좋아졌다. 민식은 말없이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누나가 뭐라고 안 해요? 담배 피우는 거 되게 안 좋아하거든요.”
“안 그래도 이게 마지막이야.”
“최후의 만찬이군요.”
“기가 막힌 비유로군.”
민우는 웃었다. 최민식이 누군가에게 숙이고 들어가는 모습은 보기 힘들다. 그래서일까. 그가 얼마나 민아를 아끼는지 알 것 같았다.
담뱃갑을 빤히 바라보던 민식이 그것을 손으로 구겨 한쪽으로 내던졌다. 담배가 조금 남아 있긴 했지만, 그의 행동에는 미련이 없었다.
민우가 웃으며 한 소리 했다.
“벌써부터 그렇게 잡혀 살면 어떡합니까? 앞날이 걱정되는데요.”
“어차피 끊으려고 했어. 요즘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예전 같지 않아서. 건강에도 안 좋고 말이다. 재환이 형도 담배 끊고 머리가 맑아졌다며 좋아하더라고.”
“과연 국문과 박사님다운 변명이십니다. 예전에 그러셨었는데. 술은 끊어도 담배는 못 끊는다고.”
“그랬나?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두 사람이 가볍게 웃었다. 최민식은 신중하게 담배 연기를 한 모음씩 마셨다.
“그런데 말이다. 아까 만났을 때 내 눈치 보는 거 같던데, 그러지 마. 예전처럼 누나랑 투닥거리고 해. 그게 사이좋다는 증거니까. 내가 형제가 없어서 그런가 구경하는 것도 꽤 재미있더라.”
“그건 좀 그래요. 이제 애도 아니고 하니까 자중해야죠.”
민식은 그저 웃기만 했다. 담배가 절반 이상 남아 있었지만, 그는 불을 끄고 꽁초를 버렸다.
어색한 침묵이 돌았다.
쉽게 본론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일단 민우는 분위기도 환기시킬 겸, 아까 하지 못했던 학교 이야기를 꺼냈다.
“선생님들 사이에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예. 문득 느낀 건데, 서지훈 선생님 주변으로 뭔가 공기가 이상한 것 같더라고요. 국어학 선생님들도 갑자기 활발하게 움직이시는 거 같고.”
민식은 씁쓸히 웃었다. 그리고 최근의 사정을 민우에게 전해주었다.
“너도 알다시피 명인대는 사립대학이다. 국립대에 비해 이권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지. 최근 동남아에서 한류가 일어나서 한국어에 대한 수요가 늘었어. 명인대 한국어문학센터도 학생들로 바글바글하고.”
“그게 그렇게 큰일입니까?”
“대학도 기업화된 지 오래야. 수익이 많이 나는 쪽에 힘이 실릴 수밖에 없다. 명인대 국문과는 송현우 선생님을 주축으로 문학 전공이 힘을 써 왔는데, 이제는 시대가 많이 바뀌었지.”
“그런데 서지훈 선생님은 왜…….”
“간단한 논리지. 서지훈 선생님은 명인대 국문과의 프랜차이즈 스타야. 학부 때부터 천재적인 행보로 유명했지. 루카치가 서른 살에 <소설의 이론>을 썼다면, 서지훈 선생님은 서른한 살에 <현대문학론>을 써서 극찬을 받았으니까.”
그제야 민우는 어렴풋하게 떠오르던 단서를 하나로 집중할 수 있었다.
“싹을 밟으려는 건가요?”
“그럴 확률이 높지. 나도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서지훈 선생님이 자리를 잡기 전에 어떻게 해볼 심산들인 거 같아.”
민우의 입에서 뽀얀 김이 한없이 흘러나왔다. 이제야 서지훈 교수가 왜 명인대를 거부했는지 알 것 같았다. 민영환 교수 때문이라는 것은 허울 좋은 핑계였다.
“학교가 시끄러워지겠네요.”
“그래. 하지만 우리들의 문제는 아니지. 괜히 모교 지도교수님이라고 해서 깊게 관여하지는 마라. 말 그대로 고래들의 싸움이니까.”
최민식은 분명히 선을 그었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민우도 더는 그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널 부른 건 아닌데.”
때가 온 것 같았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민식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오늘 너희 누나에게 프로포즈를 할 생각이다.”
“그렇군요.”
최민식이 살짝 놀랐다.
“뭐야. 반응이 미적지근한데?”
“형도 그렇고 누나도 그렇고 나이가 찼으니까 결혼 얘기가 슬슬 나오지 않을까 싶었어요. 조금 빠른 느낌이긴 하지만. 이제 만난 지 두 달 됐던가요?”
“알고 지낸 지는 반년이 넘었지.”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여름에 병원 신세를 졌고, 그때 민아를 알게 됐으니 알고 지낸 지는 반년이 넘은 게 맞다.
‘그래도 두 달이면 조금 빠른 거 같은데.’
민아는 틈이 날 때마다 민식의 자랑을 하곤 했다. 자상하고 가정적이고 배려심이 넘친다. 너는 좀 본받을 필요가 있다는 잔소리까지 섞어가며.
평생 누나가 자신의 남자친구를 그렇게까지 자랑해본 적이 없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민우는 누나가 인연을 만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최민식의 입장을 생각해보면 조금 의아했다. 그는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인생의 동반자를 결정하는 일에 너무 속단하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물었다.
“제가 결혼을 반대할까 봐 물어보시는 거죠?”
“뭐,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지. 일이 잘 풀렸다고 해도 과거의 일이 청산되는 건 아니잖냐. 마음의 상처가 쉽게 낫는 것도 아니고.”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저 그렇게 옹졸한 놈 아니라고.”
작년 제야의 종소리를 들을 때의 일이었다. 그날 저녁을 먹으며 민우는 분명히 했다. 다 지난 일 가지고 뭐라고 할 생각 없다고.
하지만 그게 못내 마음에 걸린 최민식이었다. 그 또한 마음의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었으니까. 귀신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민우가 웃으며 말했다.
“오히려 전 기회로 생각했어요. 타대생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거야. 받아들여야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녔죠. 조너던 캠벨의 이론을 찾은 건 좀 우연이긴 했지만요.”
마치 한참 전의 일 같았다. 같은 추억을 공유한 두 사람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그게 제 실력 향상에도 도움이 됐고, 동료들이나 선생님들의 평판도 올라갔어요. 형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 겁니다. 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 일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마운 일이구나. 너도 그렇고 민아도 그렇고, 선한 사람들이야.”
“형. 누나 별명 뭔지 모르죠?”
“뭔데?”
순간 민우는 아차 싶었다. 후환이 두려워 대악마라는 이야기는 차마 꺼내지 못했다.
민우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아무튼, 저는 오히려 궁금해요. 왜 형이 우리 누나를 선택했는지. 아, 오해는 마세요. 저희 누나 같은 사람 이 세상에 또 없다는 거 누구보다도 제가 더 잘 압니다.”
민우는 그 이유를 설명하진 않았다. 개인적인 일이고, 또 집안의 일이니까.
누나는 생계를 위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일찍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화장품 하나 덜 사고, 머리 한 번 덜 하고, 친구들과 여행 한 번 덜 가면서 동생의 대학 진학은 물론 대학원 학비와 생활비까지 지원해줬다.
그건 단순히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누나의 청춘과 맞바꾼 거니까.’
찬란히 빛나는 20대를 돈벌이와 맞바꾸었다.
철없던 시절엔 그 고마움을 잘 몰랐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연구하면서, 민우는 그것이 얼마나 큰 희생인지 잘 알게 됐다.
‘어떻게 해서도 갚을 수 없을 거야. 청춘은 돌이킬 수 없으니까.’
민우의 미간이 순간 일그러졌다.
취한 탓일까. 울컥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아니, 아닐 거다. 그걸 떠올리고 눈물을 쏟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닐 테니까.
민우는 애써 웃었다. 그리고 계속 말을 이었다.
“형은 박사잖아요. 그냥 박사도 아니고 명인대 박사. 학부도 명인대를 나왔으니 조만간 교수도 할 수 있겠죠. 형네 부모님도 기대를 많이 하실 거고. 그런데, 그런 형의 입장에서 누나를 선택한다는 게 솔직히 잘 이해가 안 가요. 누나는 고졸이고, 평범한 직장인이니까요.”
“네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아. 그리고 예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알고.”
“누나한테 다 들으셨나 봐요. 저만 아니었더라면 그렇게 희생할 일 없었을 텐데.”
최민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희생이라.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구나. 착각이라고 할까.”
착각?
민우는 고개를 들어 민식을 바라보았다. 그는 웃고 있었다. 자상한 눈빛으로.
“너희 누나는 희생을 한 게 아니다. 선택을 한 거지.”
“그게…… 무슨 말인가요?”
“대학을 못 간 게 아니라 안 간 거야. 취업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니라 취업을 하고 싶었던 거라고.”
어렴풋한 깨달음이 밀려왔다.
민우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최민식이 계속 이야기를 풀었다.
“민아는 누군가를 위해 희생한 게 아니라 자신의 또 다른 인생을 개척한 거야. 앞으로는 희생이라고 말하지 마라. 그건 너희 누나한테, 박민아라는 사람에게 무척 실례가 되는 말이야.”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희생.
관점을 달리 생각해보니 확실히 민식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역시 넌 아직 석사야. 용어 사용에 여전히 문제가 있어. 그새 까먹은 모양이군. 내가 전에 말하지 않았나? 용어를 쓸 때는 의미를 분명히 파악하고 써야 한다고. 이럴 때는 희생이라는 용어 대신 신념이라는 용어를 써야 맞다.”
“신념이요?”
“그래. 박민아의 신념. 누군가를 위해 소중한 것을 포기하고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있는 용기. 그걸 사람들은 신념이라고 하지.”
민우의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이제야 분명히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신념…….”
“사람다운 사람은 그런 신념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어.”
지금까지 알고 있던 ‘신념’이라는 단어가 새롭게 들렸다. 마음 같아서는 노트를 꺼내서 루카치의 만년필로 뜻을 해석해 보고 싶었다.
침묵이 돌았다.
몇몇 사람들이 민우와 민식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두 사람은 하나의 주제를 놓고 여전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와서, 내가 왜 민아를 선택했는지 물었지?”
“예.”
“가족을 위해 자신의 길을 포기하고, 새로운 길을 개척한 사람이라면 내 인생을 걸어 봐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반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결정을 내린 거야.”
“멋있는 사람이네요. 형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람은 진짜다. 같은 남자가 봐도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피식 웃은 민식. 하지만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것을 부정했다. 민우는 왜일까 싶었다.
“아까 네가 그랬지. 나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지금의 네가 없었을 거라고.”
“예. 분명 그랬었죠.”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나도 너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없었겠지. 학력이 전부가 아니라는 진리를 가르쳐준 사람도, 민아라는 멋진 사람을 만나게 해 준 사람도 바로 너였다.”
“형.”
“아직 네게 갚아야 할 빚이 많구나.”
이번에는 참지 못했다. 민우는 울컥,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표정은 웃고 있었다. 환하게. 기쁨을 유감없이 표현했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민우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저희 누나 잘 부탁드립니다.”
“내가 할 소리를.”
민식은 포근하게 민우의 어깨를 다독였다. 하지만 곧 짓궂은 표정을 하며 말했다.
“그런데 눈물은 좀 어떻게 해 봐라. 누가 보면 내가 한 대 친 줄 알겠어.”
“아, 죄송합니다.”
민우는 소매로 눈물을 거두고 민식의 뒤를 따랐다.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민우는 알지 못했던 인생의 일면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 * *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민아가 팔을 휘적이며 말했다. 네 사람은 술집을 나선 뒤였다.
“수빈이 잘 데려다줘. 괜히 혼자 보내지 말고. 응? 요즘 세상 흉흉하잖아.”
“걱정 말고 빨랑 가.”
“왜 이렇게 재촉해? 그렇게 수빈이랑 단둘이 있고 싶었니? 짜식이. 진즉 말하지.”
“하, 이분 많이 취하셨네. 형, 팔 좀 잡아요.”
오늘 프로포즈를 받을 사람인데 이렇게 취하다니 큰일이었다. 아무래도 계획은 다음으로 미뤄야 할지도 모르겠다.
민우와 수빈도 택시를 잡았다. 반포동까지는 금방이었다.
“근데 아까 민식 선배랑 무슨 얘기 했어?”
“학교 얘기했어. 요즘 분위기 좀 안 좋잖아. 민식이 형의 인생 마지막 담배도 구경했고.”
“끊으신대?”
“그래야지. 우리 누나 등쌀은 아무도 못 이겨.”
목적지에 도착한 민우는 수빈을 아파트 안에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나왔다. 돌아올 때는 버스를 탔다. 술이 깨기 시작하니 몹시 추웠다.
자취방 안으로 들어온 민우는 옷을 벗기도 전에 노트부터 꺼냈다. 그리고 루카치의 만년필을 들었다. 그리고 빈칸에 신중히 적기 시작했다.
― 누군가를 위해 소중한 것을 포기하고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을 신념이라 말한다. 사람다운 사람은 그런 신념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2017. 2. 27. 민식이 형과의 대화 중에서.)
민우는 펜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한참이나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아차, 도착했다고 톡 보내야 하는데.’
그제야 민우는 핸드폰을 꺼내 수빈에게 톡을 보냈다. 그리고 겉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하지만 머릿속으로는 민식과의 대화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민우가 적어둔 노트에서 연푸른빛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의 미래를 축복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