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사람다운 사람이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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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사람다운 사람이란 (1)
2021.12.24.
민우는 서지훈 교수의 뒤를 따라 세미나실로 향했다.
걷는 내내 두 사람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서지훈 교수는 묵묵히 걷기만 했고, 민우는 하고 싶은 말을 꾹 참아야 했다.
‘감주형 선생님하고 분명 무슨 얘기를 하신 거 같은데. 아무래도 좋은 내용은 아닌 모양이네.’
좋은 얘기였다면 서지훈 교수가 연구실에서 그렇게 서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도 고독한 표정을 지으면서.
생각을 이어가던 민우는 서지훈 교수가 연구실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꺼낸 말을 떠올렸다.
‘네 갈 길을 가라고 하셨는데, 대체 무슨 의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한마디였다.
아니, 그런 말을 과거에도 몇 번 하긴 했었다. 묵묵히 학문에 정진하라는 의미에서.
하지만 이번엔 그 의미가 달랐다.
마치 어떤 일에 관여하지 말라는 듯한 뉘앙스가 풍겼다. 그러니 서지훈 교수가 ‘휘말리지 말고’라는 표현을 썼을 것이다.
‘혹시 어학 쪽 선생님들하고 파벌이 갈린 건가? 하긴. 상아대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긴 했었지.’
문학과 어학은 국문학의 중추이기도 하지만 물과 기름 같은 관계다. 학과 예산, 연구비, 전용 공간 등 부딪히지 않는 곳이 없다.
교수의 수가 적거나 학생의 수가 적은 곳이라면 몰라도 많은 이권과 권력이 모인 명인대 국문과는 전공 간 갈등이 심했다.
‘어쩌면 보이진 않았던 상처가 곪은 걸지도.’
민우는 자대 출신이 아니었다. 이제 일 년을 다녔을 뿐이다. 명인대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어느새 대학원 세미나실에 도착해 버린 두 사람. 서지훈 교수는 열린 문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오, 서 선생. 어서 오게.”
“안녕하십니까.”
교수 두 명이 서지훈 교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고개를 숙인 것은 서지훈 쪽이었다. 겉으로 봐도 연배 차이가 꽤 났다.
“자넨 여전하구만. 이젠 좀 나이 든 태가 나나 했는데 여전히 젊어 보여. 하하하!”
오십 줄이 훨씬 넘어 보이는 정한기 교수가 반갑게 맞았다. 옆에 있던 중년의 사내도 인사를 받았는데, 그는 최철웅 교수였다.
정한기 교수가 악수를 청했다.
“늦었지만 부임을 축하하네. 앞으로 기대가 커.”
“열심히 하겠습니다.”
“자네야 뭐 학부 때부터 펄펄 날지 않았나. 하하하. 하긴 송현우 선생님의 뒤를 이을 만한 사람은 자네밖에 없지. 진즉에 명인대로 넘어오지 그랬어.”
그 말에 서지훈 교수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말을 아끼는 듯한 태도였다.
지금은 2월 말. 임용 후 처음 만나는 자리라 두 교수의 사담이 길어졌다.
“다른 선생들하고는 좀 인사를 했나?”
“아직 많이 못 했습니다. 학기가 시작돼야 뵐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예전처럼 방학에도 연구실이 복작거리지 않더군요.”
자리를 비운 교수들이 많다는 것을 지적했다. 정한기 교수가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대가 좀 바뀌긴 했지. 다들 여러 일을 하게 됐으니까. 폴리페서라는 말도 생기지 않았던가.”
“아쉬운 일이죠.”
뿔테 안경을 쓴 최철웅 교수는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대신 강예진에게 다가가 행사 진행에 대해 무어라 하고 있었다.
표정이 바뀐 강예진이 이쪽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조심스레 말했다.
“저, 선생님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시간이 좀 촉박해서요. 바로 순서를 진행해도 괜찮을까요?”
“그래? 으음, 뭐. 그러지.”
“서지훈 선생님께서 먼저 말씀 시작해 주시겠어요?”
세 교수 중 가장 나이가 어렸으니 먼저 하라는 의미였다. 서지훈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강단에 올랐다.
“반갑습니다. 먼저 대학원 입학을 환영합니다. 현대문학 전공을 맡고 있는 서지훈입니다. 앞으로 여러분들과 수년, 혹은 수십 년 동안 마주하게 될 것 같은데, 좋은 인연 이어갔으면 합니다. 잘 부탁합니다.”
인사가 끝나고 세부전공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됐다.
서지훈 교수는 현대문학을, 정한기 교수는 고전문학을, 최철웅 교수는 국어학에 대해 설명했다.
자리에 앉아 경청하던 민우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교수님들이 와서 그런가. 뭔가 정돈된 느낌이네. 아까와는 다르다.’
교묘하게 시비를 걸던 전이택도 얌전히 앉아 교수들의 설명을 들었다.
그렇게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오리엔테이션이 마무리되었다. 강예진과 주예린이 나서서 교수와 학생을 식사 장소로 안내했다.
식사 장소는 교직원식당이었다. 하나둘 자리를 차지하고 식사를 시작했다.
민우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강예진의 옆자리를 선택했다. 서지훈 교수는 이미 정한기 교수와 독대를 하고 있었다. 낄 수가 없었다.
“누님. 고생하셨습니다.”
“오냐.”
강예진의 표정이 좀 폈다. 민우의 등장이 싫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진짜 고생길은 이제 시작이지. 논문 프로포절도 있고 현대문학연구학회 봄 학회도 준비해야 하고. 할 일이 태산이네.”
“누나도 이제 이번 학기면 박사 수료 아녜요? 슬슬 행사 준비에서는 손 떼야 하는 거 아닌가. 논문 준비해야죠.”
“어차피 수료하고 나면 전국 투어하면서 보따리장수 노릇 해야 하는데 조급하게 굴 필요 있니. 민 교수님 보좌나 열심히 해야지. 떡고물 제대로 받아먹으려면.”
강예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생계와 학문이라는, 대학원생이 피하기 어려운 고뇌가 느껴졌다.
명인대 출신 대학원생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거 없다. 수년 동안 전국을 돌며 강의를 해야 하고, 틈틈이 박사 논문을 준비해야 했다.
정연주처럼 출발선이 다른 사람이라면 또 모를까.
“근데 민우 너도 슬슬 석사 논문 준비해야 하지 않아? 3학기잖아.”
“일단 이번 봄에 발표할 논문 제출 끝났으니까 슬슬 다시 써봐야죠. 민 선생님께 여쭤볼 부분이 많아서 손 못 대고 있어요.”
“벌써 제출했어? 참 재주도 좋다. 넌.”
“재주야 누나도 빠지지 않잖아요. 일이면 일. 공부면 공부. 국문과의 팔방미인 아닙니까.”
“아부해도 뭐 안 떨어져.”
한차례 웃은 강예진은 잠시 숟가락질을 멈추곤 텅 빈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곧 이어지는 한숨. 어깨가 축 처졌다. 민우도 숟가락을 멈췄다.
“석사는 어떻게 꾸역꾸역 따긴 했는데 박사는 모르겠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논문 쓰는 거에 별로 자신이 없어서 말야. 공부랑 논문은 별개잖아. 글재주가 있어야 하는데…… 강의 같은 건 자신이 있는데 논문은 영 자신이 없단 말이지.”
석사 논문과 박사 논문은 그 난이도가 하늘과 땅 차이다. 특히 명인대 국문과 박사 논문 심사는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쉽게 말해 석사 논문은 참고문헌을 보면서 쓰는 거라면, 박사 논문은 참고문헌이 되기 위해 써야 한다.
“그래서 행사 준비나 다른 일에 집중을 하고 있는 거긴 하고. 뭐, 나만의 처세술인 셈이지. 넌 좋겠다. 강의도 잘하고 논문도 잘 쓰고 공부도 잘하고…… 빠지는 게 없네.”
“웬일로 약한 소리를 다 하시네요. 안 어울리게.”
칭찬을 들어 기분이 좋다기보다 걱정이 들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강예진은 씨익 웃고 말았다.
“됐다! 내가 누구 앞에서 하소연이야. 앞길이 구만리인 석사 앞에서. 밥이나 먹자구.”
식사를 마치고 교수들은 연구실로 돌아갔고, 재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신입생들은 307호에서 모여 다과를 나누기로 한 모양이다.
강예진에게 양해를 구한 민우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집에 가기 전에 수빈의 얼굴이나 한번 보고 갈까 싶었다.
진동이 울린 건 바로 그때였다.
모르는 번호다. 지역 번호는 서울.
‘설마?’
마침 전화를 기다리고 있던 민우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전화를 받았다.
“네, 박민우입니다.”
― 안녕하세요. 큰산문화재단 학술진흥팀의 이윤식입니다. 박민우 선생님 핸드폰 맞죠? 잠시 통화 가능하신지요?
됐다!
민우는 속으로 함성을 외쳤다. 큰산번역문학상 주최사에서 전화가 왔다. 이유는 딱 하나일 것이다.
“아, 예. 가능합니다.”
― 좋은 소식 전해드리려고 전화 드렸습니다. 이번에 큰산번역문학상 신인상 부분에 선생님께서 번역하신 <사각 살인>이 선정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신인상?
민우의 표정에 살짝 아쉬움이 스쳤다. 신인상은 장려상 격이다. 세 명이 받게 되고 상금도 적다. 본상은 따로 있었다.
하지만 민우는 웃었다.
신인상이라고 해서, 상금이 적다고 해서 가치가 떨어지는 건 아니다. 어쨌든 번역가로서 한 걸음 내디딘 게 분명하니까.
“감사합니다. 영광이네요. 정말.”
― 개인적으로 <사각 살인>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더 위자드>도 번역하셨지요? 이쪽으로 굉장히 탁월하신 것 같더군요. 올해엔 또 어떤 활동을 하실지 기대가 큽니다.
“과찬이십니다. 더 열심히 해야죠.”
― 자세한 이야기는 식장에서 나누고 싶네요. 선생님. 시상식 일정 및 장소에 대한 안내는 라온북스에서 할 겁니다. 그쪽에서 따로 연락을 드린다고 하네요.
“알겠습니다.”
전화가 끊기기가 무섭게 현기혁 팀장에게 전화가 왔다. 민우는 활짝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팀장님 덕분에 상 탔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그게 왜 저 덕분입니까? 다 민우 씨가 잘해 주신 덕이지. 하하하. 아무튼 축하드립니다. 이건 민우 씨도 그렇고 저희 출판사의 경사기도 하네요. 사장님께서 무척 좋아하십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축하드려요!’라는 외침이 들렸다. 목소리로 보건대 이유리 편집자가 분명했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눈에 선했다.
― 시상식은 보름 뒤 큰산문화재단에서 진행됩니다. 참가하실 수 있죠? 꼭 오셔야 합니다. 꼭이요.
“가야죠. 근데 좀 의외네요.”
― 뭐가요?
“마치 자기 일처럼 좋아해 주시는 게.”
잠시 침묵이 돌았다. 이어 감격이 묻은 현기혁 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 저희 출판사에서 나간 책이 상을 타는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정말…… 회사도 저에게도 특별한 의미가 있는 상이죠. 제 눈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한 거니까요. 무엇보다도 이 순간을 민우 씨와 함께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이 상황에서 매출이니 뭐니 그런 숫자 놀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의 진심이 물씬 느껴졌다. 민우는 하마터면 고개를 숙일 뻔했다.
“그건 제가 드릴 말씀인데요? 곧 출간될 <오멜라스의 마녀>도 마지막까지 잘 부탁드려요.”
― 맡겨만 주십시오. 멋지게 세상에 내놓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민우는 제일 먼저 어머니에게 전화해 수상 사실을 알렸다. 민우의 어머니는 당장 서울로 올라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기뻐했다.
그리고 누나에게도 전화했다. 친한 친구들과 307호 멤버들에게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 참, 서지훈 선생님께도 알려 드려야지.’
민우는 핸드폰을 꺼냈지만, 고개를 가로저으며 도로 집어넣었다. 직접 말씀드리는 게 은사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인문관으로 돌아온 민우는 곧장 4층으로 향했다.
서지훈 교수 연구실을 노크하려던 민우가 손을 든 채로 멈췄다. 마그네틱이 ‘외출’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새 어디 나가신 건가?’
혹시나 싶어 문을 두드려봤다. 하지만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민우는 한 층 내려와 민영환 교수의 연구실을 노크했다.
* * *
누나의 부름을 받은 민우는 저녁 전에 선우기획으로 향했다. 원래 함께 저녁을 먹기로 한 이수빈도 같이 움직였다.
박민아는 회사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최민식이 옆을 듬직하게 지키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민우와 수빈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형도 계셨네요. 오늘 학교에 안 계시던데, 어디 다녀오셨어요?”
“경문대 다녀왔다. 재환이 형 만나러.”
최민식은 명인대는 물론 경문대에서도 강의를 맡게 됐다. 이재환이 주선을 해준 것이다.
“잘 계시죠? 요즘 통 연락을 못 드렸네요.”
“여전하시지. 오다가 좋은 소식이 있다기에 바로 들렀다. 축하한다. 가만 보면 넌 참 상복 많은 거 같아.”
“상복만 있나요. 인복도 많습니다.”
그 인복에 자신도 포함된다는 걸 뒤늦게 눈치챈 최민식은 민우의 어깨를 툭 쳤다. 웃으면서.
“안녕하세요. 선배님.”
이수빈은 좀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민식을 학교 선배로 대해야 할지, 아니면 미래의 가족으로 대해야 할지 고민이 됐던 것.
“수빈인 왜 그렇게 어색하게 굴어? 오호라. 민식 오빠가 선배가 아니라 가족 같아서 그러는구나?”
“아, 아녜요!”
“아니긴. 정곡을 딱 찔린 사람 표정인데. 아주버님이라고 불러 보렴. 후후후.”
과연 눈썰미가 좋았다. 박민아는 은근히 이수빈을 놀리기 시작했다.
민우는 누나에게 한소리를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최민식 때문이었다.
처음엔 안 그랬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눈치가 점점 보였다. 그래서 예전처럼 누나와 투닥거리지 못했다.
그러나 눈치가 빠른 건 박민아만이 아니었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최민식도 그랬다.
“그만들 하고 추운데 빨리 들어가자. 뭐 먹을지는 정했어?”
“아니. 그냥 근처에서 아무거나 먹으려고 했는데. 전에 갔던 거기 어때?”
“좋은 생각이긴 한데, 2차 갈 거면 아예 처음부터 그냥 술집으로 가는 게 낫지.”
고개를 끄덕인 민아는 주머니에서 핫팩을 꺼냈다. 그리고 그걸 민식의 주머니에 넣어주며 싱긋 웃었다.
민우가 움찔했다.
‘……내가 잘못 본 건 아니지?’
대악마로 명성을 떨쳤던 누나의 상냥한 모습은 아무리 봐도 낯설었다. 대강 내막을 알던 이수빈은 입을 가리며 웃었다.
어쨌든, 그렇게 네 사람은 근방에 있는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적당히 술과 안주를 시키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민우의 수상 축하를 시작으로 각자의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취기가 적당히 올랐을 때 민식이 담뱃갑을 들고 일어섰다.
“박민우. 잠깐 나갈까?”
“예.”
민우는 군말 없이 일어났다. 예전에도 몇 번 이렇게 도중에 불려 나간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으레 중요한 말이 오가곤 했다.
이번엔 과연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할까.
민우는 가벼운 긴장감을 품으며 민식의 뒤를 따라 술집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