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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박사 같은 석사 (2) (140/500)


140. 박사 같은 석사 (2)
2021.12.23.


석사과정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끝낸 민우는 박수를 받으며 강단에서 내려왔다.

어차피 석사과정을 거치며 해왔던 일들을 설명하는 것이었기에 크게 어려운 것은 없었다. 지도교수 제청과 석사 논문계획서 제출을 언제 하는지, 그리고 종합시험과 외국어 자격시험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설명했다.

너무 빨리 끝내지 말라는 예진의 눈빛을 받은 민우는 대학원 수업 이야기도 했다.

대학원 생활의 핵심이라 질문이 많이 나왔는데, 민우는 자신의 경험을 적당히 섞어서 어떤 방식으로 공부를 하는 것이 좋은지 답변해 주었다.

“수고했어.”

강예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옆자리에 앉은 민우는 노골적인 한숨을 쉬었다.

그때 어떤 남자가 강단으로 올라가 다음 순서를 진행했다.

살집이 좀 있어 보이는 남자였다. 안경을 끼고 머리가 정리되지 않아 지저분해 보였지만 화술은 굉장했다. 청중을 휘어잡는 능력이 있었다.

민우는 문득 호기심이 생겼다.

“저분은 누구예요? 못 보던 분이네요. 선배인 거 같은데.”

“국어학 쪽 사람이야. 전이택이라고, 음운론 전공이지. 올해 서른다섯이던가. 공부를 늦게 시작하긴 했는데 꽤 평판이 좋아. 국어학 쪽 선생님들 사이에선.”

강예진은 마지막 문장을 강조했다. 즉, 다른 사람들에겐 그다지 평판이 좋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민우는 전이택을 바라보았다. 그는 웃으며 설명을 하면서도, 날카로운 눈빛을 민우에게 보이곤 했다.

‘왠지 느낌이 싸늘한데.’

그렇게 생각한 민우는 가방에서 루카치의 안경을 꺼냈다. 안경을 쓰는 모습을 보며 강예진이 물었다.

“안경은 갑자기 왜?”

“요즘 눈이 좀 침침해서요. 큰일입니다.”

민우는 누군가의 말투를 따라 했다. 강예진이 싱겁게 웃었다.

“공부 좀 적당히 해라. 책 못 읽고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니?”

어떻게 보면 귀신이 붙은 게 맞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민우는 다시 강단으로 시선을 옮겼다. 때마침 전이택과 시선이 다시 마주쳤다.

‘이런.’

민우는 살짝 어깨를 떨었다.

‘느낌이…… 좋지는 않구나.’

안경의 다른 기능 중 하나였다. 상대방의 눈빛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게 된다. 호감을 가지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아니나 다를까 전이택은 비호감을 보였다. 그것도 적대심에 가까운.

민우는 다시 안경을 벗고 케이스에 조심스레 넣었다. 그러면서 전이택이 보인 감정에 대해 생각했다.

‘왜 날 싫어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접점이 없는데.’

명인대 국문과 대학원은 규모가 굉장히 큰 편이다. 전공별로 대학원생도 많고, 세부전공 간 교류는 거의 없다. 특히 문학과 어학은 별도의 유닛이라고 봐도 좋았다.

대학원에 입학한 지 일 년이 지났지만 전이택과 마주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민우는 쉽게 답을 찾지 못했다.

‘그냥 내가 타대생이라서 그런 건가? 아니면 실적 때문에? 그런 쪽에 가까운 거 같기도 한데…… 뭐,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세부전공이 다르기 때문에 학계에서 부딪힐 일도 없으니 애써 인정받으려고 할 필요는 없다.

문득 궁금증이 든 민우가 예진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번 오리엔테이션은 왜 이렇게 빨리해요? 저녁에 뒤풀이하려면 시간 엄청 남은 거 같은데. 사람들도 왠지 많은 거 같고.”

“오늘 저녁 뒤풀이는 없어.”

“네?”

“그냥 점심 다 같이 먹는 걸로 끝낼 거야.”

민우는 살짝 놀랐다. 지금까지 두 번의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경험했다. 그때마다 저녁 뒤풀이는 필수 코스였다.

강예진이 이유를 설명했다.

“국어학 쪽 선생님들이 점심에 하자고 하셨다나 봐. 다들 시간이 안 된다고 하시더라.”

“아니. 그쪽 선생님들 여덟 분이 넘는데 한 분도 시간이 안 되신다는 건 좀…….”

“내 말이. 뭐, 준비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편하고 좋은데. 뭔가 아쉽달까.”

강예진의 표정을 보니 그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는 걸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민우가 재차 물었다.

“근데 웬일이래요? 학과 행사엔 조금도 관심 없던 분들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시고.”

“그게…… 뭔가 좀 이상한 느낌이 들더라.”

“이상한 느낌이요?”

잠시 고민하던 강예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뭔가를 짐작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입 밖으로 꺼내는 걸 경계했다.

그때 강단에 선 전이택이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여기에 언어학 전공으로 들어온 분들 있나요?”

세 명이 손을 들었다. 전이택이 그들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좋은 선택입니다. 요즘 언어학은 정말 다양한 분야에서 응용되고 있죠. 한마디로 전망이 밝다고 할 수 있겠네요. 국제적인 연구가 가능한 언어계통학은 물론, 분야를 초월한 전산언어학 분야에도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최근 여러 선배들이 A&HCI는 물론 SCOPUS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기도 했죠. 우리 대학의 위상은 물론, 대학평가에 긍정적인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강예진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착각일까?

마치 너희들은 하지 못하지? 그렇게 묻는 것 같은 눈빛이다.

“쓸데없는 말을.”

강예진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시키지도 않은 세부전공 자랑을 하고 있었으니까.

사실 현대문학 분야는 SCI급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기가 어렵다. 언어의 장벽이 높은 데다가, 연구자들도 특별히 국제적인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묘하게 도발하는 느낌이네.’

기분이 좋지 않은 건 민우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화를 삭이는 강예진과는 달리 차분히 문제를 진단했다.

‘그래도 저 선배 말이 아예 허황된 건 아니야. 교육부에서 대학연구역량을 평가할 때 KCI급 논문은 크게 힘을 쓰지 못하니까.’

정부는 물론 일반 시각에서 대학의 연구능력을 평가할 때 주요 지표로 삼는 것은 따로 있다. SCI, SCIE, SSCI, A&HCI, SCOPUS가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위에서 말한 다섯 등급을 SCI급으로 취급하는데, 그것에 의존하는 경향이 심해지자 정부에서는 한국형 SCI, 즉 KCI를 만들었다.

하지만 KCI는 국제적으로 통용되기 어렵다는 태생적인 한계와 구조적 편견이 존재해 여전히 SCI급 학술지에 의존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길게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이미 전공을 정하고 들어오셨을 테니까요. 하지만 나머지 분들 중에서도 어학 분야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상담 환영합니다. 요즘 문학 쪽에서도 어학적 방법론으로 쓴 논문이 가끔 나오지 않습니까? 융합의 시대니까요.”

대답을 원하는 시선이 강예진을 향했다. 신입생들도 그녀를 쳐다봤다. 강예진이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다.

“뭐, 그런 논문이 가끔 보이긴 하죠.”

“앞으로는 더욱 많아질 겁니다.”

전이택은 쾌활하게 웃으며 설명을 마쳤다. 박수가 쏟아졌다. 민우는 설렁설렁 박수를 치며 강예진에게 귓속말했다.

“제가 잘못 본 건가 싶긴 한데…… 저거 시비 거는 거 맞죠?”

“그런 듯.”

강예진이 다시 강단에 올랐다. 마이크를 잡고 설명을 시작했다.

“저희들이 준비한 순서는 이제 끝입니다. 좀 쉬고, 11시부터는 선생님들 모시고 말씀을 들을 건데요. 가급적이면 시작 전에 모두 자리해 주세요. 그전까진 자유롭게 쉬시면 돼요.”

강예진이 마이크를 끄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세미나실을 채운 학생들도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민우는 진섭과 예린이가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

민우가 잔소리했다.

“이런 자리에서는 좀 붙어 앉지 좀 마라. CC인 거 티 내냐? 하여간 개념은.”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는 속담이 이리도 명쾌할 줄이야.”

진섭이 받아쳤다. 그런데 주예린은 별 신경 쓰지 않은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고만 있다.

민우가 물었다.

“왜 그래?”

“분위기가 좀 이상한 거 같아서요. 저번 오리엔테이션 때는 뭔가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는데 이번엔 다른 거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 재학생들도 엄청 온 거 같고.”

“오구오구. 울 애긔 이상해쪄요?”

민우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구역질이 나왔다. 확 짜증이 솟구쳤다.

“제발 그런 거 내 눈앞에서 하지 마. 어?”

“장난도 못 치냐.”

“엥. 오빠 그게 장난이었어? 나랑 사귀는 게 장난이야? 핵실망.”

민우는 귀를 닫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재학생들이 많다. 거의 못 보거나 얼핏 보기만 했던 얼굴들.

주예린은 소설가 출신이다.

분위기나 풍광을 느끼는 감각이 남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같은 학부 출신인 민우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확실히 재학생들이 많이 왔네. 얼굴은 알아도 이름을 모르겠다. 선배? 아니면 다른 쪽 전공…….’

명인대 국문학과는 크게 세 가지로 세부전공이 나뉜다. 현대문학, 고전문학, 국어학. 여기에 희곡도 독립적으로 볼 수 있지만 행정상 현대문학에 포함된다.

세 전공 중 가장 학생이 많은 분야는 단연 현대문학이었다. 국내 최고의 교수진들이 포진되어 있고, 학문적 접근성이 좋아 쉽게 선택할 수 있는 분야다.

반면 고전문학은 전공자가 거의 없다. 작년 후기모집에서는 지원자가 없어 충격을 주기도 했다.

국어학은 포지션이 애매하다. 전공자가 많지도, 적지도 않다.

전임교수 태반이 해외에서 대학원을 마치고 온 터라 교수 간 결집력도 강하지 않은 편. 무엇보다도 송현우 교수의 치세에 눌려있었다는 게 컸다.

그러다 보니 각종 행사에 고전문학은 물론 국어학 전공자들의 참여 비율이 썩 좋지는 않은 편이었다.

그런데 느끼지 못하는 사이 상황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고전문학 쪽은 여전했지만, 국어학 쪽에서는 분명한 변화가 보였다. 이번 오리엔테이션을 시작으로.

그때 문득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상념.

‘잠깐. 송현우 선생님.’

민우는 막연한 무언가를 손에 쥔 듯한 느낌이었다.

생각을 조금 더 구체화시켰다. 그러자 문장 하나를 완성할 수 있었다.

‘송현우 선생님이 곧 정년퇴임 하시는데. 혹시 선생님들 사이에 파벌싸움이라도 생긴 건가?’

가능성이 없지는 않은 이야기였다. 학생들 사이에서만 알력이 있는 게 아니다. 교수들 사이에서는 그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다.

‘일종의 레임덕.’

민우는 턱을 쓸어 만지며 계속 생각을 이어 나갔다. 그 종착역엔 서지훈 교수가 있었다.

‘송현우 선생님 후임으로 오셨는데 혹 피해라도 보시는 건 아닌지 걱정이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어깨를 툭 쳤다. 돌아보니 강예진이 서 있었다.

“뭔 생각을 그렇게 해? 불러도 대답도 않고.”

“아, 죄송합니다.”

강예진이 문 쪽으로 턱짓했다.

“불쌍한 멍 그만 때리고 가서 서지훈 선생님이나 모셔 와. 오늘 환영사 하기로 하셨으니까.”

“알겠습니다. 다른 선생님들도 모셔 올까요?”

“다른 쪽은 내가 갈 테니 다녀오기나 하세요.”

민우는 재빨리 세미나실을 나갔다.

서지훈 교수의 연구실은 한 층 위에 있었다. 3층엔 남은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송현우 교수 퇴임 후에 그의 연구실을 이어받기로 정해진 상태다.

그런데 연구실 배정 과정에서 잡음이 좀 생겼다. 몇몇 교수들이 공간 활용을 두고 문제를 제기한 것.

하지만 송현우 교수는 후임이 연구실을 이어받는 것은 명인대 국문과의 당연한 전통이라며 일각에서 제기된 잡음을 일축했다.

‘확실히 서지훈 선생님이 들어오시고 나서부터 학교가 시끄러워진 느낌이야. 조용하던 곳에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처럼.’

문 앞에 선 민우가 노크하려던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깜짝 놀랐다.

민우는 나오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중년의 남자였다. 안경 너머의 서릿발 같은 눈으로 민우를 쳐다봤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사내는 명인대 국문과 교수 감주형이었다. 국어학 주임교수이며 음운론을 전공했다.

감주형은 고개만 끄덕이고는 연구실을 나섰다. 민우는 곧장 연구실 안으로 들어갔다.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방금까지 대화를 했을 텐데 서지훈 교수는 일어나 있었다. 몸을 돌린 채 창밖을 바라보면서.

고독한 눈빛.

인기척이 들렸을 텐데도 돌아보지 않았다.

“선생님?”

잠시 후 서지훈 교수가 천천히 돌아섰다.

“왜?”

“오리엔테이션…… 아, 곧 환영사 하실 시간입니다. 슬슬 가셔야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서지훈 교수는 옷걸이에서 재킷을 집었다. 그와 상아대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얼굴만 봐도 무슨 일이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민우가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방금 감 선생님 나가시던데.”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석사는 앉아서 공부나 해라.”

서지훈 교수가 민우를 지나쳤다. 그리고 문을 열었는데, 민우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그렇게 궁금하냐?”

“궁금하다기보단 걱정돼서요. 요즘 과 분위기도 뭔가 어수선한 거 같고. 선생님 여기에 적 많다고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기도 했잖아요.”

“그건 그랬지.”

“여긴 선생님 모교인데 왜 적이 많은 겁니까?”

민우의 한마디가 화살처럼 날아와 꽂혔다. 잠시 고민하던 서지훈 교수가 문을 도로 닫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어떤 표현이 좋을까…… 그래. 이게 좋겠군. 왕위를 계승할 때는 말이다. 필연적으로 잡음이 들리게 마련이지. 혹은, 누군가 피를 흘리게 되거나.”

“예?”

“괜히 휘말리지 말고 넌 네 갈 길을 가라.”

순간 민우는 서지훈 교수의 눈에서 이질적인 욕망을 느꼈다. 곧 그는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서지훈 교수는 이미 연구실을 나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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