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9. 박사 같은 석사 (1) (139/500)


139. 박사 같은 석사 (1)
2021.12.20.


새하얀 빛이 번쩍였다.

눈을 뜨니 복도가 펼쳐졌다. 익숙한 곳이었다. 인문관의 연구동과 강의동을 잇는 긴 복도였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학생 하나가 인사를 해왔다. 낯선 칭호를 뒤에 붙이면서 말이다.

‘교수? 내가?’

깜짝 놀란 민우는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았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강의동에 가까워질수록, 인사를 하는 학생들의 수가 늘어났다.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민우를 교수 혹은 선생이라 불렀다.

저 멀리 한 무리의 교수들이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모두가 명인대 국문과 교수들이었다. 그리고 그 선두엔 서지훈 교수가 있었다.

“박 선생. 마침 잘 만났네. 저녁에 시간 있지? 오늘 같은 날엔 한잔해야지.”

민우는 무어라 대답을 하려 했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임용되고 나서 첫 강의일 텐데 떨지 말고 잘하라고.”

뒤따르던 교수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미소를 지은 서지훈 교수는 민우의 어깨를 다독이더니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임용? 첫 강의?

잠시 멍하니 있던 민우는 양손을 들었다. 왼손엔 출석부와 교재가, 오른손엔 가방이 들려 있었다.

‘도대체 뭐지?’

아무리 생각을 해도 답을 얻을 수 없었다. 그 사이 민우는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강의동 408호는 명인대 국문과 학부 전공 강의실이었다.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절로 발걸음이 그쪽으로 움직였다.

민우는 앞문 쪽에 섰다. 문고리를 돌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는 만석이었다. 수십 명의 학생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교수님. 와, 오늘 넥타이 멋지신데요? 사모님이 골라주신 건가요?”

학생들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울렸다. 하지만 민우는 다른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강단(講壇).

마치 자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듯 따사로운 햇살에 빛나고 있었다.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한껏 벅차오르는 감정. 민우는 가슴에 손을 올리며 그것을 해석해 보았다.

‘나…… 교수가 된 거야?’

민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학생들의 눈엔 존경심이 가득했다.

교수가 된 게 분명했다.

민우는 학생들에게 가볍게 묵례하고 강단에 섰다. 그리고 다른 교수들이 늘 그랬듯, 출석부를 펴고 펜을 들었다.

맨 위에 적힌 이름을 확인했다. 순간 민우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출석부에 적힌 이름은 모두 자신이 아는 사람들이었다. 서지훈을 비롯해 한진섭, 이수빈, 정연주, 주예린, 서강일 등 익숙한 이름들이 보였다.

깜짝 놀란 민우가 고개를 들었다.

마치 누군가가 마술을 부린 것처럼 강의실이 텅 비어있었다. 창문은 열려 있었고, 커튼이 바람결을 따라 춤추고 있었다.

민우가 눈을 뜬 것도 바로 그때였다.

“……어?”

고개를 드니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맞은편에 인문학 공모전에서 받은 트로피가 전시되어 있었다. 307호임이 분명하다.

“뭐야, 꿈이네.”

“이제 깼어요?”

이수빈이 쿡쿡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민우의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무슨 잠을 그렇게 맛있게 자? 깨우면 혼날 것 같아서 건들지도 못했네. 어제 잠 못 잤어요?”

“해 뜨는 거 보고 잤지. 학회에 보낼 논문 때문에.”

민우는 한국근대소설학회에 발표할 논문을 어제, 정확히는 오늘 새벽에 보냈다.

논문 지도는 서지훈 교수에게 받았다. 그는 민영환 교수와 달리 깐깐했고, 수정 지시가 내려올 때마다 민우는 잠을 거의 잘 수 없었다.

수빈이 흐트러진 민우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물었다.

“근데 무슨 꿈을 꿨는데 그렇게 웅얼거렸어?”

“잠꼬대했나?”

“아니, 그 정도는 아니지만.”

민우는 몸을 일으켰다. 너무나도 선명한 꿈이라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명인대 교수가 되는 꿈이었어. 복도를 걷다가 다른 선생님들 만나면서 인사하고…… 맞아. 서지훈 선생님도 계셨지. 첫 강의 떨지 말고 잘하라고 하셨네. 그렇게 강의동 408호에 들어가니 학생들이 잔뜩 있더라고. 아, 맨 앞에 있는 학생이 넥타이가 잘 어울린다고, 사모님이 골라주신 거냐고 물었지.”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어?”

수빈은 교수가 되었다는 건 뒷전이고, 마지막 질문에만 관심을 두었다. 민우가 그 속셈을 모를 리 없었다.

“사모님이 있어야 대답을 하지. 이수빈 선생. 아침부터 김칫국 마시지 마시죠.”

민우는 기지개를 켜며 웃었다. 수빈이 손가락으로 민우의 옆구리를 신경질적으로 쿡 찔렀다. 민우가 움찔 몸을 웅크렸다.

“말이라도 좀 이쁘게 하지.”

“농담도 못 하냐. 근데 애들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준비하러 갔지. 오빠는 안 갈 거야?”

“가야지.”

민우는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벌써 오전 열 시가 넘어있었다.

“오빠.”

물끄러미 민우를 바라보던 수빈은 뭐라고 말하려다 말았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야? 싱겁게.”

“싱거운 게 몸에 좋은 법입니다.”

이수빈은 그 말을 하고 싶었다. 작년 12월 31일. 보신각에서 타종 소리를 들으며 오빠가 꼭 교수가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하지만 그만두었다. 왠지 말하면 효과가 없어질 것 같았던 것이다.

“슬슬 가볼까?”

“같이 나가요. 나도 도서관 가야 해서.”

덜컥.

그때 307호 문이 열리며 남학생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학석사연계과정 중인 김성욱이었다. 나이는 민우보다 두 살이 어렸다.

자대생이라 이수빈과 친분이 있었고, 민우와도 가끔 이야기하는 사이다.

“왔어?”

“아, 선배님. 마침 계셨네요! 다행이다.”

“설마 예진 선배가 보낸 거야? 안 그래도 지금 세미나실 가려는 중인데.”

“아뇨. 그건 아니고요.”

가볍게 인사를 하고 나가려던 민우가 붙잡혔다. 용건이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안 바쁘시면 잠깐 시간 괜찮으세요? 뭐 좀 여쭤보고 싶은데.”

“오래 걸려?”

“아닙니다.”

민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김성욱이 말을 꺼냈다.

“이번에 서사학 관련 과제가 하나 있는데 어떤 레퍼런스를 봐야 하는지 감이 잘 안 잡혀서요. 선배가 서사학 쪽으로 잘 안다고 들었습니다.”

“누구한테?”

“예진 선배한테요.”

민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들어 공부에 대해 이것저것 묻는 후배들이 늘었는데, 대부분 강예진이 뒤에서 사주한 일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내쫓을 수도 없는 일이라 민우가 물었다.

“어떤 내용이 필요한데? 입문? 아니면 전반적인 흐름?”

“입문서의 성격을 띠면서 전체적인 흐름을 조망할 수 있으면 좋을 거 같습니다.”

“이야, 욕심 좀 봐라. 한 큐에 모든 걸 해결하려고 하네. 공부가 그렇게 쉬우면 다들 고생하겠어?”

“아하하하. 역시 그렇죠?”

“그렇게 친절한 책은 없어. 있다고 해도 어딘가 좀 부실하고. 결국 가지를 뻗는 형식으로 공부를 하는 수밖에 없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막막합니다.”

“받아 적어.”

민우의 한마디에 김성욱은 명령을 받은 이등병처럼 빠릿빠릿하게 수첩을 꺼냈다.

“우선 <현대 서술 이론의 흐름>을 먼저 봐. 논문집인데 주네뜨는 물론 리쾨르, 채트먼, 그레마스의 저술이 실려 있어 종합선물세트 같은 느낌의 책이지. 그리고 채트먼의 <이야기와 담론>, <영화와 소설의 수사학>도 보고. <이야기와 담론> 빼고는 모두 절판됐으니 도서관으로 가는 게 빠를 거다.”

“아, 넵.”

“그리고 시간 나면 웨인 부스의 <소설의 수사학>도 읽어.”

“그건 읽었습니다.”

순간 민우의 눈이 번뜩였다. 그가 흥미로운 미소를 지으며 질문을 던졌다.

“<소설의 수사학>을 보면 모든 작자는 객관적이라는 두 번째 일반법칙이 있지. 하나 묻자. 작자에 있어서 객관성이란?”

“어…….”

갑작스러운 질문에 김성욱이 말을 흐렸다. 생각이 날 듯하면서도 명확히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수빈이 나섰다.

“작자에 있어서의 객관성은 먼저 모든 가치에 대한 중립적인 태도, 선악 간 모든 일의 무사무욕(無私無慾)한 보고를 하려는 태도를 의미한다. 였죠?”

“이야, 역시 국문과 수석은 다르네.”

민우가 칭찬하자 이수빈이 방긋 웃었다. 김성욱은 마치 괴물을 보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걸 어떻게 외우고 있는 걸까?

민우가 말했다.

“읽은 게 아니라 훑은 거니까 그 책 다시 읽고. 덧붙여 롤랑 바르트의 <텍스트의 즐거움>을 참고하면 좋아. < S/Z >는 컨디션 좋을 때 진통제 한 알 먹고 읽어라.”

정신없이 적기만 하던 김성욱이 필기를 멈추고 잠시 노트를 바라보았다.

“좀…… 많네요.”

“엄살은. 할 수 있잖아. 너라면.”

민우는 그를 격려하며 어깨를 다독였다.

“시간 날 때 틈틈이 읽어 봐. 논문 쓸 때 피와 살이 되거든. 내가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 느낀 건데, 발표를 하든 뭘 하든 널 지켜줄 수 있는 건 선배도 아니고 선생님들도 아니야. 네 머릿속에 든 지식이지.”

“예. 알겠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이수빈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한때 한 사람 몫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던 민우는 어느새 멋진 선배가 되어 있었다.

“아, 참. 하나 빠트린 게 있었네.”

민우가 사물함을 열었다. 그의 손에 딸려 나온 것은 책이었다. 작년 강철훈 교수의 프로젝트에서 번역한 책, <서사학개론>이었다.

“받아라. 내가 작년에 프로젝트에 참여해서 번역한 건데 입문서로 도움이 될 거야. 맨 뒤 페이지 보면 레퍼런스 정리되어 있으니까 참고하고. 혹시 원서 필요해?”

“아, 아뇨. 원서는 괜찮습니다.”

“솔직하긴.”

피식 웃은 민우가 사물함을 다시 잠갔다.

“읽고 이해 안 가면 전화해. 설명해 줄 테니까. 당분간은 도서관에 있을 예정이니 그쪽으로 와도 좋고.”

“옛. 감사합니다!”

김성욱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하지만 민우는 아직 할 말이 더 남은 모양이었다.

“도움을 청하기 전에 혼자 고민해 보는 거 잊지 마. 시간을 아까워하지 말고 충분히 생각해. 대학원 공부는 수학 공부와 똑같아. 답지를 먼저 보고 문제를 풀면 재미가 없어져. 생각하는 힘을 기르라고. 무슨 뜻인지 알겠지?”

“명심하겠습니다.”

“명심까지는 하지 마. 그냥 참고문헌 정도로 생각하라고. 학문하는 데 정답은 없으니까. 그럼 수고해.”

민우는 수빈과 함께 307호를 나섰다. 산더미 같은 짐을 넘겨받은 느낌이었지만, 성욱은 흐릿하기만 했던 길이 좀 보이는 것 같았다.

‘역시 민우 선배한테 물어보길 잘했다.’

그렇게 생각한 성욱은 재빨리 중앙도서관으로 뛰기 시작했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 민우의 평판은 조금씩 상승하고 있었다.

* * *

“성욱이 너무 잡은 거 아녜요? 다 보려면 힘들겠던데.”

세미나실로 걸어가며 이수빈이 한마디 했다. 민우는 피식 웃었다.

“후배라고 감싸기야?”

“아아뇨. 그런 건 아니고. 울 오빠는 알아서 척척 잘 해냈는데 성욱이만 왠지 횡재한 거 같아서요. 무협에서 그런 말 쓰잖아요. 비급을 주웠다고.”

“비급을 주우면 뭘 해. 그게 비급인지 알아먹지 못하면 소용이 없는걸.”

지나가던 학부생이 민우와 수빈에게 인사했다. 덕분에 잠시 대화가 끊겼다. 복도를 다시 걷기 시작하고 나서야 민우가 말을 이었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어떤?”

“내가 대학원 막 들어왔을 때 나 같은 선배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그래서 그런지 하나라도 더 챙겨주게 되더라고.”

“그러니까 예진 언니한테 건방지다는 소리 듣지.”

“칭찬으로 듣겠다고 했어.”

두 사람은 이따 저녁을 같이 먹기로 하고 갈림길에서 헤어졌다. 민우는 세미나실에 들어가기 전 핸드폰을 한번 확인했다.

걸려온 전화나 문자는 없었다.

‘만약 수상자로 선정이 되면 오늘쯤 연락이 올 거라고 했는데…… 역시 안 된 건가?’

민우가 말하는 수상은 큰산문화재단에서 주최하는 큰산번역문학상이었다.

라온북스의 현기혁 팀장은 약속한 대로 <사각 살인>을 영한번역 부문에 추천했다. 2월 중순까지 심사가 진행되었고, 내일 결과가 발표된다.

관례상 공지 전날 개별적으로 연락이 간다고 들어서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지. 마음을 비우자.’

민우는 짧게 한숨을 내뱉고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문고리를 돌려 세미나실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선배. 어서 오세요.”

환영의 목소리가 제법 크다. 참여한 학생들이 굉장히 많았다.

그중 석사 신입생은 총 7명. 남자 한 명에 여자 여섯 명이었다. 국문과, 특히 대학원에서는 성비가 고르지 못하다.

“안녕하세요. 석사 3학기 박민우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민우는 신입생들과 가볍게 인사를 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라고 해서 선배가 군기를 잡거나 그러는 일은 없다. 이곳은 학부가 아니라 대학원이니까. 선배들은 대학원에서 무엇을 하는지 설명하고, 후배들은 질문하는 그런 시간이다. 술은 덤이고.

작년까지는 타대생에 대한 은근한 차별이 있었지만 지금은 많이 줄어들었다. 명인대 출신이 아니면 열등하다는 편견을 민우가 보기 좋게 깨버린 것이다.

자리에 앉은 민우가 강예진에게 슬그머니 물었다.

“어떤 순서였어요?”

“그냥 서로 인사하고 자기소개하고 그랬지.”

강예진이 기다렸다는 듯 마이크를 건넸다.

“이제 석사과정 커리큘럼 설명할 차례야. 마침 잘 왔다. 네가 해.”

“아니 그걸 왜 제가 해요? 박사급이 해야지.”

“너 박사 같은 석사잖아.”

강예진의 일침에 민우는 어쩔 수 없이 마이크를 쥐었다. 강단에 오르며 생각했다. 이 설명을 하려고 그런 꿈을 꾼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기이한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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