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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새 학기를 준비하며 (138/500)


138. 새 학기를 준비하며
2021.12.17.


민우는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 사실을 바로 친구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그런데, 고두열 과장의 반응은 지나칠 정도로 냉담했다.

― 감사 인사를 받기는 아직 이릅니다. 민우 씨는 이쪽으로 경험이 없으셔서 잘 모르시겠지만 판권 계약을 한다고 일이 다 끝나는 건 아니지요.

“예? 아…….”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뜨겁게 타오르던 감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이 아저씨가. 그냥 좋게 인사를 받아주면 어디 덧나나?’

입 밖으로 꺼내고 싶은 한마디였다.

민우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고두열 과장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는 이쪽 방면으로 경험이 많은 사람이니까.

짧게 한숨을 내쉬며 민우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과장님 말씀대로 전 경험이 부족합니다. 인정해요. 제가 모르는 다른 문제가 또 있는 겁니까? 있다면 가르쳐 주세요.”

― 가르쳐 드리는 거야 어렵지 않지요.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성공하길 원합니다. 영국에서 말이죠.

성공이라는 말에 강조점이 찍혔다. 민우는 가볍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제야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했다.

애초에 두 사람은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달랐던 것이다.

민우는 단순히 생각했다. 폴라베어 북스와 계약이 성공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고두열 과장은 그 너머의 것을 보고 있었다.

쉽게 말해 민우는 손가락을, 고두열 과장은 손가락 너머의 달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고두열 과장이 냉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 해외 출간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지요. 계약하고 번역하면 끝이니까요. 최근 프로존 같은 전자책 플랫폼이 활성화되면서 더욱 쉬워졌습니다. 하지만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해외 진출이라는 명분만 충족하는 게 아니라 실제적인 성공을 추구해야죠. 독자와 회사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방향으로 말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 지음사가 추구하는 목표기도 합니다.

이보다 더 완벽한 정론이 있을까. 루카치의 만년필을 쥐고 있다고 해도 반박할 수 없을 것이다. 잠시나마 그에게 품었던 불만이 수그러졌다.

민우는 쿨하게 인정했다.

“맞는 말씀이네요.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 뭐, 이해합니다. 저도 처음에 계약을 따러 다녔을 때는 그랬으니까요. 눈앞의 이익만을 좇았죠.

이건 좀 의외였다. 자존심이 강한 그가 자신의 부족함을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내다니.

― 아무튼 이제 성공의 열쇠는 민우 씨에게 쥐어져 있습니다. 모쪼록 멋진 번역물 부탁드립니다. 15일까지 마감인 건 알고 계시죠?

“예.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이후 두 사람은 번역물 2차 계약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를 나눴다. 1월 첫째 주에 날을 잡아 계약을 체결하기로 했다.

―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연말에 업무 관련 전화를 드려 미안하네요. 아무래도 소식을 기다리고 계실 거 같아서.

“실은 엄청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화 잘하신 겁니다.”

― 다행이군요. 그리고…… 음.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아, 과장님도요.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전화가 끊겼다.

설마 고두열 과장이 새해 인사를 해올 줄은 몰랐다. 진심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해외진출이라는 막연했던 목표가 고두열 과장 덕분에 더욱 선명해진 느낌이었다. 민우는 목표를 수정했다. 단순히 해외 진출이 아니라 그곳에서 성공을 거두기로.

‘과장님은 성공의 열쇠가 내 손에 쥐어졌다고 말씀하셨지?’

민우는 다리를 꼬고 생각에 잠겼다. 머그컵에 담긴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면서.

‘다시 말해 번역물의 퀄리티가 중요하다는 거야. 현지인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번역. 그게 필요해. 내가 해낼 수 있을까?’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엔 미소가 가득했다.

‘할 수 없다면 할 수 있을 때까지 하면 돼. 아주 간단한 이치지.’

민우는 <태엽시계> 번역본을 다시 살펴보기로 했다. 루카치의 안경을 쓰고 번역한 것이지만 다시 봐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완성본을 들고 앨런 스미스 교수와 자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디테일한 면에서 그보다 나은 스승은 없을 거니까.

가방에서 플래너를 꺼냈다. 일정 섹션을 펼쳐 1월에 있는 일정을 하나하나 체크했다.

‘<태엽시계> 완성본 납기일은 1월 15일까지. 그리고 그달 말에 <오멜라스의 마녀>도 마감해야 하는구나. 이거 생각보다 시간이 여유롭진 않겠는데?’

그때 민우가 놓치고 있던 하나를 떠올렸다.

‘맞다! 프랑스. 큰일이네. 이 정도로 일정이 타이트하면 해외에 나가기가 곤란해질 각이야.’

자금은 충분히 모았다. <더 위자드>가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다. 크리스마스 특수를 맞아 10쇄까지 증판을 했고, 그 판매액만큼 민우의 통장도 두둑해졌다.

‘역시 문제는 시간.’

만약 한유중 교수에게 원고 청탁을 받지 않았더라면 2월에 다녀오면 그만이다. 하지만 청탁을 받은 이상 <오멜라스의 마녀>를 마무리하고 바로 논문 작업에 들어가야 했다.

‘<오멜라스의 마녀>도 쉽지 않을 텐데. 처음으로 하는 일어 번역이라서. 흐음, 이번 겨울엔 역시 힘들겠어.’

민우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곤 입맛을 다셨다.

아쉽긴 했지만 지금은 내실을 다질 때였다.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고 위로하며 핸드폰으로 랑느 박사에게 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때마침 카페 안으로 이수빈이 들어왔다.

검은색 긴 생머리와 하얀 목도리가 대비되며 아름다움을 뽐냈다. 명인대 여신이라는 칭호를 가진 그녀였다. 주변의 시선이 쏠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가 민우를 발견하곤 환하게 웃었다.

“오빠.”

“어. 왔어? 잠깐만. 이것 좀 마저 하고. 일단 마실 거 사와.”

가방을 내려놓은 수빈은 주문대로 가서 커피를 시켰다. 그녀가 머그잔을 들고 돌아올 무렵에는 랑느 박사에게 메일을 보낸 뒤였다.

“미안. 많이 기다렸지? 차가 좀 막혀서.”

“예전에 비하면야 기다린 축에도 못 끼지. 그때는 커피 한 잔 다 마실 때 돼서야 나타났잖아.”

민우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7분 정도야 눈 감고 봐줄 수 있었다. 이수빈은 입을 씰룩이면서도 미소를 감추지 않는다.

“그런데 핸드폰으로 뭐 하고 있었어? 열심히 뭐 쓰는 거 같던데. 숨겨놓은 애인한테 편지라도 보냈나?”

“귀신이네. 어떻게 알았대.”

순간 이수빈이 정색하며 잡아먹을 듯 양손을 뻗었다. 무엇을 하든 그 모습이 예뻤다. 민우는 뺨을 꼬집혔고, 그제야 수빈은 웃음을 되찾았다.

“랑느 박사님한테 메일 보냈어. 아무래도 이번 겨울에 프랑스에 못 갈 거 같아서.”

“왜? 오빠 부자 됐잖아.”

“부자는 무슨…… 방금 지음사에서 연락 왔는데, <태엽시계> 말이야. 폴라베어 북스와 계약하기로 했대. 그래서 번역에 신경을 좀 써야 할 거 같아.”

“정말?”

이수빈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좋아했다. 진심으로.

만약 크리스마스이브 파티에서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나누지 않았더라면 더 거리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일 없다.

서로에 대한 믿음은 물론, 마음도 공고해졌다.

“잘됐다! 축하해 오빠. 새해 소원 빌기도 전에 이루어졌네. 그치?”

“그러게. 게임이 쉬우면 재미가 없는데. 너무 일이 쉽게 풀리는 느낌이야.”

“아유, 이 자신감 좀 봐요!”

그래도 그런 모습이 싫지 않았다. 새삼스러운 모습은 아니었다. 대학원에 갓 입학했을 때도 소신 하나는 충분했으니까. 그 모습에 반한 것이기도 하고.

수빈이 물었다.

“근데 저녁 뭐 먹을까? 근방에 사람 바글바글할 거 같은데.”

“치콜? 여기 퐁듀치킨 맛있는 데 있어. 전에 가봤는데 괜찮더라고. 좀 시끄럽긴 해도 배만 채울 거면 거기가 적당하지.”

“그럼 거기 가자!”

두 사람은 저녁 7시가 될 무렵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빈은 자연스레 민우의 팔짱을 끼고 카페를 나서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어?”

“어어?”

민우가 문 앞에서 걸음을 우뚝 멈췄다. 수빈도 깜짝 놀랐다. 카페 안으로 민우의 누나인 박민아가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이렇게 놀라지도 않았을 터다.

민아에겐 일행이 있었다. 그것도 민우와 수빈이 아주 잘 아는 사람이.

“이야, 이거 기막힌 우연이네. 서울 한복판에서 마주치다니. 너희들도 타종 들으러 온 거냐?”

목소리의 주인공은 최민식이었다. 그도 조금 놀란 듯했지만 곧 여유를 찾았다.

민우와 수빈은 쉽게 대답을 꺼내지 못했다. 이 상황이 너무 놀랐던 것이다.

“아, 안녕하세요, 형. 그런데 형이 왜……?”

“나는 종소리 들으러 오면 안 되나?”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만. 제 말은…….”

왜 누나의 옆에 딱 달라붙어 있는 거냐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때 불현듯 드는 생각.

‘맞아. 파티룸 숙박권을 받았을 때였나? 누나가 민식이 형 이야기를 했었지. 내가 하지도 않았던 이야기를 알고 있었어.’

그 말은, 누나가 최민식과의 접점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민우는 누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노려보았다. 그녀는 민우와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이리저리 피해 다니고 있었다.

“박민아 씨? 이게 어떻게 된 건지 빨리 해명하시죠. 아까 들어올 때 팔짱 끼고 있는 거 같던데. 내가 헛것을 봤을 리는 없고.”

“아, 그게…….”

“두 분, 사귀어요?”

수빈이 대신 물었고, 민아는 부끄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의 눈치를 살살 보면서.

수빈은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좋아했다.

“와, 정말요? 축하드려요! 어쩐지 요즘 언니 톡 프로필이 예사롭지 않더니!”

민우가 끼어들었다.

“전에 회사에서 내가 연애하냐고 물었을 때 아니라고 발뺌하더니 이거 약을 팔고 다니셨네. 어?”

“그, 그땐 진짜 안 하고 있었어!”

“그럼? 최근에?”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았다. 최민식이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일단 자리를 옮기자. 사람들이 다들 여기만 쳐다보네. 너희들 저녁 먹으러 가는 길이지? 앞장서. 점심을 늦게 먹긴 했는데, 그냥 우리도 미리 먹지 뭐.”

민우와 수빈이 앞장을 섰다. 박민아는 죄를 지은 사람처럼 민식과 함께 뒤를 따라갔다.

치킨집을 가려고 했는데, 조용한 곳이 좋을 것 같아 민우는 조금 멀리 떨어진 곳으로 방향을 잡았다. 청계천 너머에 있는 일식 레스토랑이었다.

인테리어를 둘러보던 수빈이 걱정스레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오빠. 여기 좀 비싼 데 아냐?”

“직장인 있는데 뭔 걱정이야. 학생은 맛있게 먹으면 그만이지.”

민우는 대수롭지 않게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비싼 코스요리를 시켰다. 수빈이는 튀김우동을 시켜 민아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었다.

민우가 팔짱을 끼며 거만하게 앉았다.

“자, 박민아 씨. 그럼 이야기를 마저 들어볼까요. 대체 형은 어디서 어떻게 만난 겁니까?”

최민식이 대신 이야기를 하려고 하자 민우가 단호하게 손을 뻗었다.

“형. 죄송한데 이건 저와 누나의 일입니다. 끼어들지 마세요.”

“음…… 알았다.”

학교에서는 무서운 선배지만 지금은 아니다. 학교가 아니라 집안 문제다. 자칫하다가는 최민식이 매형이 될 수도 있으니까.

한숨을 푹 내쉰 민아가 순순히 자백했다.

“너 입원했을 때 병원에서 만났어. 고독해 보이는 모습이 너무 멋있는…….”

“자랑하라고는 안 했다.”

“아무튼, 마음에 들어서 연락처 살짝 물어봤어.”

“누나가?”

끄덕끄덕.

민우는 한숨을 내뱉었다. 조금은 의외였다. 남한테 쉽게 마음 주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허, 팔자도 좋다. 불쌍한 동생은 과로해서 병상에 누워있는데 그새 번호를 따? 그건 그렇다 치고 왜 나한테 얘기 안 했어?”

“다 들었으니까. 너랑 민식 오빠 사이에 있었던 일. 지금은 아무렇지 않다고 해도 너는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잖아.”

민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마 학기 초에 민식과 얽혔던 이런저런 사건을 말하는 것이리라.

민우는 슬쩍 최민식을 바라보았다. 그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미안한 표정이었는데, 시선이 민아를 향해 있었다.

그 모습에 꿍해 있던 민우의 마음이 스르륵 풀렸다.

만약 그 시선이 자신을 향했다면 민우는 좋게 끝내지 않았을 것이다.

누나의 애인이라면, 자신보다는 누나를 먼저 생각해야 맞는 것이니까.

민식은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실망이네. 다 지난 일 가지고 뭐라고 할 정도로 내가 속 좁은 사람처럼 보였어?”

“응.”

너무나 뻔뻔한 대답에 민우는 할 말을 잃었다. 옆에 있던 수빈이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진지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이 흐트러졌다.

그제야 민식이 나섰다.

“미안하다. 민아가 아니라 내가 사과할 일이야. 안 그래도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많았는데. 민아 의견도 존중해 줘야 하니까. 아무튼, 사과의 의미로 오늘 저녁은 내가 사마.”

“좋습니다. 그걸로 합의를 보죠.”

민우는 벨을 눌러 직원을 불렀다. 나머지 세 사람은 무슨 일인가 싶어 민우를 주목했다.

“필요하신 거 있으십니까?”

“아까 주문 들어간 튀김우동 취소되나요?”

“예, 가능합니다.”

“다행이다. 그럼 아까 시킨 거 B코스로 바꿔 주세요. 누나는?”

“나는 제일 비싼 A코스로.”

“그냥 둘 다 A코스로 해주세요.”

종업원이 고개를 숙이며 물러섰다. 민식은 두 남매의 팀플레이에 소름이 돋았다.

민우가 물었다.

“근데 사귄 지 얼마나 됐어?”

“일주일……이지?”

민아가 묻듯이 민식을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좋을 때다. 그치?”

민우의 조롱 섞인 한마디에 이수빈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깔깔거렸다.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만찬을 즐겼다. 그리고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다 함께 보신각을 찾았다. 타종이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수빈이 물었다.

“오빠는 소원 뭐 빌 거야?”

“우리 수빈이 신춘문예 평론부문에 당선되게 해주세요!”

부끄럽지도 않은지 민우가 큰소리로 외쳤다. 이수빈은 반사적으로 민우의 등을 찰싹 때렸지만, 싫지는 않은 표정이다.

이번엔 민우가 물었다.

“너는?”

“비밀이지롱.”

“야.”

뎅― 데엥―

민우가 불평하려던 그때 타종이 시작됐다. 수빈은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고 소원을 빌었다.

2017년, 새해가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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