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7. 크리스마스 선물 (2) (137/500)


137. 크리스마스 선물 (2)
2021.12.16.


― 무슨 일이냐. 이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선생님께 긴히 상의드릴 게 있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 긴히?

잠시 뜸을 들인 민영환 교수가 이야기해 보라고 말했다. 민우가 수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라는 의미로.

“방금 한유중 선생님께 전화를 받았습니다. 좀 믿기지 않지만 논문 청탁을 해 오셨는데요.”

― 뭐? 청탁을?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다. 다소 어이가 없다는 의미도 섞인. 민우는 잠시 이어질 말을 기다렸지만 반응이 없어 설명을 계속했다.

“1960년대 신세대 작가와 관련된 테마인데요. 그쪽 학회에서 발표를 해도 좋을지 여쭤보려고 연락을 드렸습니다. 예전에 상의하라고 하신 게 떠올라서요.”

― 그랬었지. 그나저나 너도 마음이 많이 급했나보군. 이 시간에 전화를 한 걸 보니.

책망하는 듯한 목소리에 민우는 그제야 아차 싶었다. 지금은 저녁 7시 반. 늦은 시간은 아니지만 전화하기는 좀 애매하다.

민영환 교수가 짚은 대로 마음이 급한 탓도 있지만, 잘못 들인 버릇이 컸다.

모교의 서지훈 교수와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통화를 했다. 그때 버릇이 남아 있어 아무렇지도 않게 전화를 한 것이다.

“죄송합니다. 쉬시는 데 방해가 됐네요. 제가 다음 주에 다시 찾아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 할 말 다 해놓고는 무슨 다음 주야. 크흠…… 한유중 선생이라면 지금 한국근대소설학회에 연구이사로 있던가?

“예, 맞습니다.”

― 테마가 1960년대 신세대 작가라고?

“예.”

― 저번 학기에 네가 제출한 과제를 보완하면 되겠구나. 최인훈론을 썼었지? 일단 발표를 해 봐. 어차피 봄에 논문 쓴다고 하지 않았나? 대신…….

대신?

미소를 짓던 민우가 긴장했다. 무슨 말이 이어질까. 숨을 죽이며 기다렸다.

― 논문 지도는 서지훈 선생에게 받아라. 서 선생이 1960년대 문학론 전문이니까. 그쪽이 서로 편할 거다.

“그건 좀…… 서지훈 선생님은 아직 명인대로 부임하지 않으셨는데요.”

―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라. 이만 끊는다.

전화가 끊겼다. 민우는 멍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민우의 반응이 이상한 걸 확인한 친구들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같은 지도 학생이자 민영환 교수의 성향을 잘 알고 있던 진섭이 물었다.

“뭐라셔? 설마 퇴짜 맞았냐?”

“아니. 그게…… 발표하라고 하시긴 했는데 논문 지도를 서지훈 선생님한테 받으라고 하시네.”

“그건 좀 아니지 않아요? 아직 완전히 명인대로 옮기신 게 아니잖아요. 뭔가 민 선생님이 오빠를 밀어내는 것 같은 느낌인데.”

수빈의 추측이 그럴싸했다. 뭔가 귀찮은 듯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민우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민영환 교수는 원하면 지도교수를 바꿔주겠다고 했다. 그것을 바꿔 말하면.

‘내가 잘되기를 바라셔서 그런 게 아닐까? 이번 일도 마찬가지고. 서지훈 선생님의 전문성을 인정하고, 그쪽으로 지도를 받아 더 좋은 논문을 쓰라고.’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보니 그렇게 결론이 나왔다. 민우는 고개를 끄덕여 마음을 정했다. 민 교수의 말대로 하는 걸로.

내일 점심쯤 서지훈 교수에게 전화하기로 하고 다시 방에서 나왔다. 이번엔 떨어지지 않고 모두 테이블에 모였다.

“그런데 내가 대학원을 안 다녀봐서 모르겠는데 말이야. 논문 청탁을 받은 게 그렇게 대단한 거야?”

장철호가 순진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러자 주예린이 빛의 속도로 반응했다.

“물론이죠! 보통 교수나 박사급들한테 청탁이 가는데 민우 선배는 아직 석사학위도 없는 나부랭이잖아요. 제 입으로 이런 말하기 좀 그렇지만 대애애~단한 거죠.”

“나부랭이 주제에 나부랭이를 논하냐? 배 아프지?”

민우가 꾸짖자 주예린이 입술을 빼죽 내밀었다. 그 모습을 보며 모두가 웃었다.

“바꿔 말하면…… 학계에서 인정을 받았다는 거겠죠.”

조용한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정연주가 한마디 꺼낸 것이다.

그녀는 움찔 놀라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제가 말실수를…… 했나요?”

“아냐. 맞는 말 했어. 울 오빠가 인정받은 거 맞아.”

이수빈이 말했다. 그녀는 잠시 말을 끊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한숨을 쉬지?’

이상함을 느낀 민우는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대단하지. 석사 2학기. 한창 공부하면서 잡일 할 땐데 학회에서 초대도 받고 교수님들께 청탁도 받고. 정말 대단한 거지…… 가끔 보면 울 오빠 석사 같지 않을 때가 많아. 인문학 강의 때도 그랬고, 단행본 출간도, 외서 번역도 그렇고.”

좋은 말을 하는데도 표정이 이상했다. 민우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따 잠깐 이야기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분위기가 애매해진 것을 느꼈을까. 장철호가 잔을 들고 한마디 했다.

“아무튼, 그럼 축하할 일이라는 거지? 그런 의미에서 거국적으로 건배하자!”

“좋죠!”

모두가 술잔을 들고 건배를 외쳤다.

술이 적당히 들어가자 끼리끼리 노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장철호는 재즈 음악을 틀더니 정연주와 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수준이 맞으니 통하는 게 있나 보네. 그러고 보니 철호네 집안도 꽤 괜찮았다고 했었지. 근데 진섭이 얘는 어디 갔어?’

민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는 테라스 쪽에서 분위기를 잡고 있었다. 상대는 예린이었다. 진섭이 뭐라고 이야기를 하더니 선물을 건넸다.

정사각형 상자였다. 목걸이 아니면 귀걸이인 것 같았다. 상자를 연 주예린은 받을까 말까 고민을 하는 것 같았다.

‘내일 승부를 건다면서 벌써 거는 거냐. 부디 신의 축복이 있기를.’

민우는 관심을 끄고 수빈에게 집중했다. 옆에서 와인을 홀짝이고 있었다. 아까 전화 사건 이후로 쭉 표정이 좋지 않았다.

기분이 나쁘다기보단 왠지 풀이 죽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민우는 무슨 일일까 곰곰이 생각했고, 답을 찾았다.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았다.

‘예전에 예린이가 명인대에 시험을 치던 그날이었던가. 비슷한 일이 있었지.’

민우는 그때의 기억을 더듬었다. 이수빈이 했던 말이 어렴풋하게 생각났다.

“이수빈.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냐?”

“이 정도로 뭘요. 아직 취하려면 멀었어.”

“센 척하긴.”

양쪽 볼이 새빨개져 있었다. 경험상 이대로라면 한 시간도 버티지 못했다.

“오빤 안 마셔?”

“난 천천히 마시려고. 이상하게 와인은 입에 잘 안 맞네. 비싼 거라던데.”

“입이 저렴해서 그런가 보다.”

민우는 피식 웃었다. 그리곤 이수빈이 다시 와인잔을 입으로 가져가려는 걸 손으로 막았다.

“왜?”

“그만 마시고 잠깐 얘기 좀 합시다.”

민우는 수빈의 손을 잡고 2층으로 올라갔다. 당구대 옆에 놓인 의자에 그녀를 앉히고, 자신도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얘기는 밑에서 해도 되잖아. 다들 오해하면 어쩌려고 그래?”

“남들이 들으면 안 되는 얘기라서.”

민우가 진지하게 대하자 수빈도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 곧 민우가 본론을 시작했다.

“너 왜 그래? 아까부터 표정도 안 좋고.”

“나 표정 안 좋아?”

이수빈은 모른 척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민우의 눈을 속이기엔 어설펐다.

“논문 청탁받은 거 때문에 언짢아서 그러는 거지? 예전에도 한 번 그랬잖아. 나 단행본 공저하는 거 결정됐을 때. 내가 앞서나가는 거 같다고 얘기했었지.”

정곡을 찔린 걸까. 수빈은 입을 꾹 다물었다.

더 이상 민우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며 민우는 확신했다.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는 것을.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게 싫어? 나는…….”

“아니.”

그렇게 말을 끊은 수빈이 민우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애써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싫을 리가 있겠어? 그냥, 그냥 멀어지는 게 안타까워서 그런 거야.”

“그게 왜.”

“너무 멀어지면 안 보이잖아요. 오빠의 모습이. 너무 빨리 달려 나가는 거 같아서. 나는 아직도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이대로라면 망원경으로 봐도 오빠 모습이 잘 안 보일 거 같아.”

“너 바보냐?”

민우가 웃는 모습에 수빈은 울컥 화가 났다. 바보라니. 이 중요한 순간에 그가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안 보이는 건 나도 마찬가지야. 망원경으로 봐도 안 보일 정도로 멀어졌다면 내가 돌아봤을 때 네 모습도 안 보이겠지. 그 상황에서 쓸쓸함을 느끼는 건 너만이 아닐 거라고.”

그제야 민우가 한 바보라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간단한 물리법칙이었다.

왜 그걸 몰랐을까. 왜 자기의 입장에서만 생각한 걸까. 수빈은 고개를 숙인 채 대꾸하지 못했다.

“그런데 난 왜 조급한 느낌이 안 드는 줄 알아?”

“……왜요?”

“난 한 번도 너를 앞질렀다고 생각한 적이 없거든. 오히려 한참 뒤처졌지.”

“그건 말도 안 돼요.”

수빈이 반론했지만 민우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실이야. 나중에 평론으로 등단하려고 해도 끌어줄 사람도 없고, 학부가 상아대라는 건 평생 지워지지 않을 거고. 여러 핸디캡이 있으니 널 앞서는 건 쉽지 않아. 오히려 교수가 될 확률이 높은 건 내가 아니라 너라고. 논문 실적이 좋다고 임용되는 시대는 아니잖아. 아무리 날고 기어도 학벌이 안 되면 소용이 없지.”

그러면서도 민우는 웃었다. 쓴웃음도, 자조 섞인 웃음도 아니었다. 진짜 미소였다.

수빈은 궁금했다.

자신의 한계를 열거하면서도 어떻게 저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걸까. 그를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포기하고 싶진 않았어.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많거든.”

민우는 해변의 풍경을 떠올렸다.

백사장을 걷다 멈춰선 그가 모래를 한 움큼 쥐었다. 힘을 푸니 손바닥 사이로 모래알이 조금씩 흩날리기 시작했다.

끝에 남은 것은 몇 개 되지 않는 모래알이었다. 민우는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까지 해낸 것이 딱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모래로 가득 찬 해변이 되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는 바다가 되고 싶다.

그 마음을 수빈에게도 전해주고 싶었다. 민우는 그 마음이 흘러내리지 않게 조심스레 꾹꾹 눌러 담아 말을 꺼냈다.

“그래서 매 순간 열심히 노력하는 거야. 누군가를 앞서기 위해서 발버둥 치는 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거라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맞아.”

피식 웃은 이수빈이 눈물을 한 움큼 흘렸다. 민우는 소매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일 년, 아니 정확히는 9개월 사이에 상황이 바뀌었다. 힘들고 좌절하던 자신을 위로하던 게 수빈이었는데, 어느새 역할이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민우는 그걸 두고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세상은 늘 변했다.

그렇다면 왜 변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변하는 것이니까. 변했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가가 중요할 따름이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서로 응원해주자고. 알았지?”

끄덕끄덕.

수빈의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민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그녀를 살짝 끌어안았다.

그때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홱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계단 난간 사이에 익숙한 얼굴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진섭과 예린이었다.

“박민우 멋있다.”

“그러게요.”

“특이점이 온 거 같은데 진도 더 안 빼?”

“고고!”

민우는 인상을 썼다. 그러면서도 비어있던 예린의 목에 목걸이가 걸려있는 것을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진섭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일이 잘 풀린 모양이다.

* * *

12월 31일. 올해의 마지막 날이 찾아왔다.

제야의 종을 듣기 위해 민우는 종각역을 찾았다. 시계를 보니 아직 약속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다. 인파를 헤치고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오늘은 생각보다 덜 춥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민우는 역에서 조금 떨어진 카페에 들어가 수빈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녀에게 그쪽으로 오라고 톡을 보냈다.

그때 전화가 왔다.

수빈인가 싶어 핸드폰을 꺼냈는데, 민우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요즘 가장 통화하고 싶지 않은 사람 2순위에 올라와 있는 고두열 과장이었다.

참고로 1순위는 진섭이었다. 주예린과 연애를 시작한 이후로 자랑질을 일삼고 있었다.

“네, 박민우입니다.”

― 안녕하세요. 고두열입니다. 통화 괜찮으십니까.

신기하게도 이 고압적인 목소리는 들을 때마다 짜증을 일으킨다. 하지만 민우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친절하게 응대했다.

“안녕하세요, 과장님. 통화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

― 소식을 빨리 전해드려야 할 거 같아서 말입니다. 폴라베어 북스와의 해외출판 건, 방금 승인되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내년 초에 정식으로 판권 계약에 들어갑니다.

“판권 계약이라면…….”

― 예. <태엽시계>의 해외출판이 확정되었다는 얘깁니다.

민우는 순간 멍해졌다.

갑작스러운 전화 때문은 아니었다. 어렴풋하게 보이던 자신의 꿈이, 현실로 한 발자국 성큼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 여보세요? 박민우 씨. 듣고 계신 겁니까?

주변의 시선이 느껴졌다.

정신을 차린 민우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몇몇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민우는 쾌활하게 웃으며 전화에 대고 대답했다.

“과장님. 감사합니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16557835026472.jpg

16557835026478.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