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크리스마스 선물 (1)
(136/500)
136. 크리스마스 선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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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크리스마스 선물 (1)
2021.12.13.
파티룸은 과연 골든팰리스라는 이름에 맞는 격조를 보였다.
전체적으로 오리엔탈풍으로 장식되어 있는 대형 객실이었다. 복층으로 되어 있어 공간을 넓게 활용할 수 있는 게 특징이었다.
아래층에는 바형 테이블 두 개와 소파,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장비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위층에는 당구대 등 간단히 즐길 수 있는 오락거리들이 있었다.
“와아아아아!”
목소리의 정체는 주예린이었다.
수빈과 예린은 신문물을 접한 원주민처럼 입을 벌리며 파티룸을 둘러보았다. 반면 대한그룹의 영애인 연주는 자신의 집처럼 조용히 가방을 내려놓을 뿐이다.
주예린이 쪼르르 달려와 민우에게 물었다.
“근데 선배. 오신다는 그분은요?”
“철호? 조금 늦는다고 했어. 오늘 추가 근무하고 온다고 하더라.”
“아니 무슨 토요일에 일을 해요? 지음사 정도면 대기업이잖아요.”
“출판업계란 다 그런 거란다.”
주예린은 틈만 나면 장철호에 대해 물었다. 짜증 날 정도로. 훈남이라는 표현 하나에 꽂힌 모양이었다.
물론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한진섭의 표정은 불편했지만,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민우가 올린 스크린샷 때문에 두 사람의 사이가 애매해진 것이다.
귀찮아진 민우가 제안했다.
“철호 사진 보여줄까?”
“응!”
민우는 잘못 들었나 싶었다. 먼저 대답한 건 예린이가 아니라 수빈이었다. 어쩔 수 없이 민우는 철호의 톡 프로필 사진을 보여주었다.
“끼야! 대박. 대박이양!”
“이상한 소리 내지 마. 좀.”
“연예인 지망생이에요? 완전 귀티난다. 와아.”
너무 반응이 좋아서 민우는 실물이 이것보다 훨씬 낫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그냥 유리를 부를 걸 그랬나.’
뒤늦게 후회를 하는 민우였다.
철호를 선택한 것은 분위기 때문이었다. 다들 공부에 찌들어있는 대학원생이고, 뭔가 활력소가 필요한 상황이라 분위기 메이커인 철호가 파티에 적격이라고 판단했다. 무엇보다도 철호는 최근 실연을 당해 외로워하던 차였다.
우우우웅―
사진을 보던 수빈과 예린이 깜짝 놀랐다. 전화가 온 것이다.
“선배. 우리 왕자님께 전화가 왔어요!”
“왕자? 뭔 헛소리야.”
핸드폰을 넘겨받아 보니 철호였다. 민우는 혀를 차며 통화버튼을 터치했다.
― 미안하다. 차가 좀 막히네. 거의 도착했는데 어떻게 가야 해?
민우는 호수와 오는 길을 설명해 주고 전화를 끊었다.
이수빈은 호기심 정도로 끝나는 것 같았는데, 주예린은 달랐다. 마치 소개팅 상대를 기다리는 것처럼 긴장하며 그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 온대요? 네?”
“아 쫌 재촉하지 말라고! 서울시장도 어떻게 못 하는 교통체증을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칫, 예민하시기는.”
그렇게 가벼운 실랑이가 몇 번 반복되고 나서야 철호가 등장했다.
롱코트가 잘 어울리는 큰 키. 훤칠한 얼굴에 모던한 헤어스타일. 훈남 그 이상의 아우라가 있었다.
“늦어서 미안해요. 차가 좀 막혀서.”
“안녕하세요오!”
“반가워요. 오빠 통해서 말씀 많이 들었어요.”
두 여인네가 적극적으로 인사를 했다. 뒤에 물러나 있던 연주는 살짝 고개만 끄덕였고, 진섭은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나눴다.
“근데 그건 뭐야?”
민우가 철호의 손에 든 물건을 지목했다. 선물 포장이 되어 있는 물건이 백에 가득 담겨 있다. 멋쩍게 웃은 장철호가 선물을 하나씩 돌렸다.
“크리스마스잖아요. 여러분들께 드릴 선물입니다. 하나씩 받으세요.”
“어머나, 센스 넘치시네.”
철호는 분홍색 포장지로 된 상자를 여자들에게, 파란색 포장지로 된 상자를 민우와 진섭에게 건넸다.
주예린은 굉장히 기뻐했다.
마음 같아서는 오늘부터 1일이라고 하고 싶은 것 같았다.
“역시 훈남이시라 어디의 누구들과는 다르네요.”
“야, 너.”
“왜요? 전 누구라고 콕 찝어 얘기 안 했는데. 왜, 찔리는 거 있으신가?”
“아니. 뭐. 그냥.”
한진섭이 입맛을 다시며 물러섰다.
다들 자리에 앉아 포장지를 뜯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뜯은 이수빈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텀블러네요. 어머, 예뻐라.”
연분홍색 꽃잎이 들어간 텀블러였다. 운치가 있는 디자인이라 다들 마음에 들어 했다. 민우와 진섭의 것은 스포티한 디자인의 은색 텀블러였다.
“아, 그리고 민우 꺼는 하나 더 있는데. 잠깐만. 어디에 뒀더라.”
장철호가 가방을 뒤졌다. 곧 봉투를 하나 꺼내 민우에게 건넸다. 안에는 뮤지컬 초대권이 들어 있었다. 두 장이다.
“파티에 초대해줘서 고마워. 하마터면 혼자 보낼 뻔했지 뭐야. 이걸로 수빈 씨랑 같이 보러 갔다 와.”
“땡큐.”
“고마워요, 철호 오빠.”
“벌써 오빠냐?”
“뭐 어때서.”
수빈이 민우의 옆으로 다가와 어떤 티켓인지 살폈다.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마침 보고 싶은 거였다며, 다시 고맙다고 인사했다.
봉투를 수빈에게 맡기고 민우가 나섰다.
“자, 다들 모였으니까 일단 소개부터 해야지. 이쪽은 지음사 인문사회팀 장철호 주임. 나이는 스물여덟. 나랑 동갑이야.”
“안녕하세요! 장철호입니다.”
장철호는 명함을 돌렸다. 주예린은 명함을 받자마자 번호를 입력하고 톡을 보내는 대담함을 보였다. 이어 다른 사람들의 소개가 시작됐다.
건너 아는 사이라 그런지 허물없이 뭉쳤다. 곧 룸서비스가 들어왔는데, 고급 와인부터 시작해 주문하지 않은 음식들이 끝없이 쏟아졌다.
민우가 나가려는 직원을 붙들고 물었다.
“저기, 이거 저희 시킨 적 없는데요.”
“지배인님께서 특별히 보내신 서비스입니다. 마음껏 즐겨 주십시오.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 호출하시고요. 성심껏 모시겠습니다.”
“아, 네.”
민우는 그제야 상황 파악이 끝났다. 아무래도 연주가 파티에 참여한다는 정보가 윗선에 닿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연주가 역으로 부탁을 했을 수도 있고.
민우는 신경을 껐다. 그리고 막 시작된 크리스마스 파티를 충분히 즐겼다.
* * *
장철호는 여자 셋에 둘러싸여 있었다. 공대 특유의 지적인 분위기를 유감없이 뽐내며 대화를 이어갔다.
예린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근데 공대 출신이면서 어떻게 출판사에 들어갔어요? 신기하당!”
“맞아요. 인문사회팀 소속이라고 들었는데.”
이수빈이 맞장구를 쳤고, 와인잔을 한번 흔든 장철호가 살인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이공계 쪽에서도 최근 글쓰기에 관심이 생기고 있어요. 자연현상이나 공학적 지식을 글로 풀어내야 하는 상황이 점점 늘어나고 있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공대 출신으로 뭔가 도움이 될 만한 걸 기획해보자는 생각으로 지음사에 입사를 했죠.”
“우왕, 짱 멋있다…….”
가장 관심을 보인 사람은 주예린이었다. 수빈은 이미 민우에게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 큰 호감은 없었고, 연주는 그저 대화에 참여한다는 정도로만 관심을 보였다.
문득 주예린이 뒤쪽을 흘끔 살폈다. 한진섭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한번 인상을 찡그리며 다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모습을 보던 진섭이 머리를 긁적이며 짜증을 냈다.
“야, 철호 쟤 왜 부른 거야 대체. 엉?”
민우와 진섭은 약간 떨어진 테이블에서 맥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장철호의 등장으로 단번에 떨이가 된 두 사람이었다.
“철호 아니었으면 쟤네들이 이렇게 재미있게 놀겠어? 희생했다고 생각해.”
“희생이 아니라 학살 느낌이잖아. 양민학살.”
“그러니 말조심하지 그랬냐.”
민우가 낄낄거리고 웃었다. 진섭은 뭐라고 쏘아붙이려다 참았다.
“근데 진척은 없는 거야?”
“진척은 무슨. 니가 스샷 올린 거 때문에 완전 냉전 중이잖아.”
“냉전이라고 할 거 있어? 만나는 사이도 아닌데.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시간 끌지 말고 확 밀어붙여. 아니면 깔끔하게 포기하든가.”
진섭이 입맛을 다셨다. 민우의 말대로 쉽게 될 일이 아니었다. 주예린은 허술한 외양과는 달리 쉽지 않은 여자였으니까.
“내일 승부를 걸어봐야지.”
“잘해보라고. 친구. 그리고 예린이 쟤. 진짜 마음이 가서 저러는 거 아니야. 너 도발하려고 저러는 거라고. 반쯤은.”
“그래?”
한진섭이 덧없는 희망을 품는 그때, 진동이 울렸다. 민우가 테이블에 올려둔 핸드폰을 집었다.
모르는 번호였다.
일전에 지음사에서 만난 앨런 스미스 교수일 가능성이 높았다. 액정을 내려다보던 민우는 일단 통화버튼을 터치했다.
“여보세요.”
― 안녕하십니까. 에…… 명인대 박민우 선생의 번호가 맞지요?”
나이가 제법 있어 보이는 목소리였다. 학교 이름이 나오자 민우는 살짝 긴장했다. 적어도 자신의 소속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얘기였으니까.
“맞습니다. 실례지만 어디시죠?”
― 한국근대소설학회의 한유중입니다. 기억을 하려나 모르겠군요. 전에 학회에서 한번 이야기를 나눴었는데.
민우가 벌떡 일어섰다.
“아, 한 선생님! 안녕하세요. 기억납니다. 이렇게 전화를 주실 줄은 몰랐네요.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죠?”
두 사람은 지난여름 현대문학연구학회에서 한번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다. 민우가 먼저 말을 걸었다. 한유중 교수의 논문을 보며 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책에서만 보던 사람을 실제로 만나는 기분은 특별하다. 마치 연예인을 보는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 이제 막 학문의 세계에 입문한 민우의 입장에서는 그랬다.
때마침 맞은편 테이블에서 웃음소리가 터졌다. 민우는 스피커 부분을 가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주변이 좀 소란스럽군요. 통화 괜찮습니까?
“죄송합니다. 지금 친구들하고 파티하고 있었거든요. 잠시만요.”
민우는 재빨리 옆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침대와 소파가 있는 휴식 공간이었다.
“이제 좀 괜찮으십니까?”
― 예에. 그러고 보니 오늘이 크리스마스이브군요. 친구들과 좋은 시간 보내고 있을 텐데 방해해서 미안합니다. 젊음이란 부럽군요.
“별말씀을요. 그나저나 한번 찾아뵌다고 말씀드렸는데 죄송합니다. 시간을 내지 못했네요.”
― 학회 준비 때문에 바쁘단 얘기는 건너 들었습니다. 너무 마음에 두진 마세요.
한유중 교수는 강은대 국문과에 재직 중이다. 강은대는 경기권에 위치한 사립대학인데, 최근 다른 대학과 합병을 한 뒤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인사치레가 끝나고 본론이 시작됐다.
― 이번에 실존주의에 관한 논문을 읽다가 우연히 박 선생의 발표 영상을 찾았습니다. 호기심에 봤다가 20분이 순식간에 사라지지 뭡니까. 여러 의미로 인상 깊은 발표더군요.
“첫 발표라 많이 부족했을 텐데요.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자그마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품격 있는 목소리였다. 한유중 교수는 교수라는 칭호에 맞는 그런 품위를 소유한 사람이었다.
― 첫 발표는 원래 좀 미숙한 맛이 나야 하는데 자연스럽게 잘하셨더군요. 발표 주제는 물론이고 연구방법론도 신선하고 좋았습니다. 논문이 아직 올라오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시론에 가깝게 쓰신 거 같더군요. 맞습니까?
“예. 발표한 논문은 다음 주 내로 업로드된다고 합니다. 그게, 당장 필요하신 거라면 제가 메일로 보내드릴게요.”
― 그거 고맙군요. 좀 부탁합니다. 메일 주소는 알고 있습니까?
“예전에 명함 주셨잖아요. 그쪽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논문 집필하시려는 겁니까?”
― 일단은 그렇지요. 레퍼런스를 찾는 중이라.
민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레퍼런스를 찾는다는 말은 자신의 논문이 피인용될 확률이 그만큼 높다는 말이었다.
― 아무튼 전화를 한 건 다름이 아니라…… 박 선생에게 논문을 하나 부탁하려고 말입니다.
“예? 논문을요?”
민우는 잘못 들었나 싶었다. 논문을 부탁한다는 것은 논문 청탁을 말하는 것일 텐데.
― 내년 봄에 한국근대소설학회 학술대회가 있어서 발표자를 선정 중인데, 박 선생에게 특별히 부탁하고 싶어서 전화를 한 겁니다.
“발표를요? 좀 갑작스러운데…… 테마는 뭡니까?”
― 1960년대 신세대 작가들 작품을 대상으로 하려고 합니다. 구체적인 테마는 없고, 시기를 테마로 잡았지요. 1960년대 문학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을 취합한다, 정도가 목표가 되겠습니다.
“그렇군요.”
민우는 1960년대 신세대 작가 리스트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대표적으로 김승옥, 최인훈이 있다. 나아가서는 이청준도 다룰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저번 학기에 과제로 제출한 논문이 있었지? 최인훈론이 제일 완성도가 좋았는데. 그걸 리뉴얼해서 제출한다면…….’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계산을 마친 민우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쉽게 떡밥을 물어줄 생각은 없었다. 지금 자신이 가진 우위를 충분히 활용하면서, 가치를 높여 나갈 필요가 있었다.
“제가 연초에 해야 할 일들이 좀 많은데요. 스케줄 조정해 보고 다시 연락드려도 괜찮을까요? 번역을 하고 있는 게 몇 개 있어서 말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기회를 주셨으니 긍정적인 방향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
― 아, 물론입니다. 좋은 소식 기대하지요.
전화가 끊겼다.
잠시 멍하니 있던 민우가 핸드폰을 꽉 쥐며 소리를 질렀다.
“으라차차!”
처음으로 논문 청탁을 받았다. 그것도 KCI급 학회에서. 너무나도 기쁜 일이었다.
그때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수빈이 물었다.
“깜짝이야. 무슨 일 있어요?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방금 논문 청탁받았어.”
장철호를 제외한 모두가 대학원생이었다. 논문 청탁의 의미를 모르지 않을 터다. 그래서 다들 깜짝 놀랐다.
논문 청탁은 사실 대단한 게 아니다. 학회 발표자가 부족하기 때문에 관련 전공 교수들이 품앗이 격으로 받는 것들 중 하나다.
하지만 민우가 받았다는 건 의미가 좀 다르다. 아니, 좀이 아니라 많이.
이제야 연구실적을 하나 올린 석사 2학기 햇병아리. 그것이 민우를 표현하는 말이었는데, 박사도 아닌 그에게 청탁이 온 것이다.
진섭이 물었다.
“어디서?”
“한국근대소설학회.”
“헐, 거기 메이저 학회잖아. 석사 나부랭이한테 무슨 논문 청탁을 해?”
“형이잖아.”
민우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했다. 그걸 보며 두 사람이 정색했다.
“밥맛이네.”
“그러게요.”
처음으로 진섭과 예린이 합심했다. 철호와 연주가 축하의 말을 건넸고, 수빈이 물었다.
“그래서 논문 쓰기로 했어요?”
“확답은 안 했어. 선생님하고 상의하고 진행해야지.”
민우는 전화번호부를 검색했다. 버릇처럼 서지훈을 찾았다가 지우고 민영환 교수의 번호를 찾았다. 그는 즉시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