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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양자택일 (2) (135/500)


135. 양자택일 (2)
2021.12.10.


의외의 대답에 서지훈 교수는 잠시 멍해졌다. 하지만 잠깐이었다. 어렴풋이 예상은 하고 있던 대답이었으니까.

“바꾸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다?”

“아무리 민 선생님이 허락을 해주셨다고 해도 중간에 논문 지도교수를 바꾸는 건 모양새가 별로 좋아 보이진 않을 거 같습니다.”

“하긴, 그 말도 일리가 있지.”

“무엇보다도…….”

잠시 말을 줄인 민우는 지금까지 있었던 여러 사건들을 떠올렸다. 그중 민영환 교수와 관련된 일들을 하나씩 나열해 보았다.

처음에는 힘들었다. 욕이 나올 때도, 눈물이 찔끔 나올 때도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차별이 이렇게 심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우연한 계기로 루카치의 유물을 얻게 됐다. 그리고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고 노력해서 지금의 위치에 섰다.

무엇보다도 민영환 교수에게 인정을 받았다. 타대생으로는 처음으로.

국제비교문학회 발표 논문을 준비하며 그에게 참교육을 받았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선생’이라는 칭호가 어떤 건지 알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민우는 자신의 책장에 꽂혀 있는 민영환 교수의 실존주의 스터디 노트를 떠올렸다.

그는 말했다.

이 노트를 나중에 자신의 제자에게 물려 주라고.

“아직 민 선생님께 배울 게 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걸 배우게 될지는 확실하지 않은데…… 분명히 뭔가 더 있을 거 같아요.”

민우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아직 석사 2학기다. 그에겐 포장지를 뜯지 않은 선물상자 같은 2학기가 더 남아 있었다.

서지훈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좋은 결론을 내렸구나. 그래! 어른스럽고 좋네. 많이 성장했어. 학자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 말이다.”

“민 선생님이 용서를 구해야 할 만한 일을 하셨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뭐?”

“다만…… 우리들이 열정을 쏟고 있는 학문이라는 세계에서 인정을 받느냐 그렇지 못하냐의 문제가 아닐까 해요. 여긴 대학원이니까요. 듣기 좋은 말 백 개보다 심금을 울리는 한 편의 논문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서지훈은 내심 감탄했다. 민우가 말한 마지막 대목은 스스로를 돌아보게 할 정도로 깊은 울림을 주었다.

‘녀석. 못 본 사이에 내면이 훨씬 깊어졌구나.’

서지훈 교수는 훌쩍 자란 자신의 제자를 흡족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널 여기로 보내길 잘했어. 잘 해냈다.”

“아뇨, 이제 시작입니다. 석사 마무리 잘하고 박사에서도 힘내봐야죠. 본격적인 게임은 그때부터일 겁니다. 아마 깜짝 놀라실걸요?”

“하하하! 그래. 좋아. 어디 한번 깜짝 놀래켜 봐라. 내년 봄에 바로 발표한다고 했지? 다음 학회도 기대하고 있으마.”

“한번 열심히 준비해 보겠습니다.”

민우는 고개를 숙이며 겸손을 보였다.

평소라면 잘했으니 떳떳하게 고개를 들고 어깨를 펴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서지훈 교수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이번 국제비교문학회에서 그것을 깨달았다. 민우는 지적을 당하면 예, 하고 끝내는 게 아니라 논문을 지키기 위해 상대방을 도발하고 목소리를 높이기까지 했다.

즉, 민우는 겸손할 때와 그러지 않아야 할 때를 분명히 알고 있다는 것이다.

서지훈 교수는 그 점이 대단히 마음에 들었다.

그것은 자신의 연구물에 대한 자부심과 직결되는 부분이니까.

연구물을 제삼자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고 자신의 자식처럼 생각하는 것. 그것이 학자의 장인정신이라고 언젠가 민우에게 말해 주었던 일이 생각났다.

“시간 참 빠르네.”

그래서 서지훈 교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갑자기 시간 타령은 왜 하세요?”

“그냥.”

서지훈 교수는 싱겁게 웃었다. 민우는 아직 할 이야기가 더 남은 표정이었다.

“그런데 말이죠. 일이 이렇게 됐는데 굳이 전공을 바꿔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드네요.”

“그건 그렇지. 민 선생님도 이제는 너를 인정해 줬으니까. 국문과 박사과정에 지원한다고 해서 쳐내거나 하는 일은 없겠지.”

“거기에 선생님도 계시고요.”

민우는 빨대를 휘휘 저었다.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보였지만, 민우의 두뇌는 바둑 기사처럼 수십 수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

서지훈 교수가 물었다.

“전에 너 출판기념회 때 지음사 옥상에서 했던 얘기가 마지막이었나? 아직 이경훈 선생한테는 확답을 하지 않았지? 전공 바꾸는 것에 대해.”

“예. 안 그래도 전에 강철훈 선생님을 만날 일이 있었는데 비교문학 전공으로 바꾸려는 거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소문이 좀 돌고 있는 거 같습니다. 미리 말씀 안 드리길 잘했다고 생각했었죠.”

“하긴, 전공이 달라도 인문대는 한 다리만 거쳐도 다 소문을 들을 수 있으니까. 이경훈 선생, 생각보다 입이 무거운 편은 아닌 모양이네.”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 이후부터는 특히나 입조심하고 있다.

“일단…… 박사도 국문과에서 하겠습니다. 박사 논문 지도교수는 선생님으로 할게요.”

“야, 그렇게 빨리 생각을 바꿔도 돼?”

민우가 싱긋 웃었다.

“이번에 논문 쓰면서 깨달았거든요. 굳이 전공을 바꿔가면서까지 할 필요가 없다는 거.”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전공은 말 그대로 행정상의 구분일 뿐이잖아요. 진정한 학자라면 전공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논문을 쓸 수 있어야죠.”

“하, 건방진 자식. 난 또 뭐라고.”

그러면서도 서지훈은 시원하게 웃었다. 고즈넉한 카페가 그의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하지만 민우는 근거 없이 그런 이야기를 한 게 아니었다. 최근에 벌어진 여러 사건들이 그의 선택을 보다 확실하게 만들어 주었다.

“얼마 전에 랑느 박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소르본의 문학 전공 학생들이 한국 논문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그런 일이 있었어?”

“제가 국문학 관련 논문을 몇 개 번역해서 보냈는데 효과가 있었던 거 같아요. 거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어요. 제가 국문학과 세계문학 사이의 창구 역할을 하면 어떨까 하는.”

“창구 역할이라…….”

“그러려면 애매한 비교문학이라는 포지션에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국문학 분야에 말뚝 박고 있는 게 좋지 않을까요?”

턱을 쓸어 만지며 생각에 잠긴 서지훈 교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대로 풀린다면 그게 오히려 좋을 수 있지. 하지만 결정을 섣불리 하지는 마. 아직 시간은 일 년이나 남았으니까.”

“옙.”

“석사 논문 준비도 슬슬 시작하고. 석사학위가 없으면 박사 못 들어온다는 건 알고 있지?”

“설마 그걸 모를까요.”

민우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하지만 방심은 하지 않았다. 명인대 학위논문 심사가 얼마나 까다로운지는, 몇 번의 디펜스를 견학하며 충분히 알게 되었으니까.

* * *

그날 저녁, 서지훈 교수는 지음사 앞에서 송승현에게 연락했다.

“저녁 전이지? 나 회사 앞이다. 가볍게 반주나 합시다.”

― 서지훈 교수님. 제가 전에 말씀드린 거 같은데요. 약속을 미리 잡고 오라고.

“그랬나?”

― 참, 세상 참 편하게 사시네요. 근데 요새 왜 이렇게 자주 술타령을 해요?”

“반주라니까? 그게 왜 술타령이야.”

전화기 너머에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서지훈 교수는 웃으며 목적지로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대답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 좀 기다려요 그럼.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연말에 출판사 바쁜 거 뻔히 알면서 이러시네.

“그게 내 일인가 뭐. 당신 일이지. 아무튼 우리 늘 가던 거기서 기다린다.”

― 마음대로 해요.

서지훈 교수는 지음사 근방에 있는 이자카야에 들어갔다. 인조 벚나무가 홀에 심어 있는, 제법 운치가 있는 술집이었다.

서지훈 교수는 따뜻한 요리와 정종을 시켜 먼저 술을 홀짝이기 시작했다. 송승현 실장이 온 건 그로부터 한 시간 뒤였다.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숨도 약간 가뿐 것 같다.

“뛰어왔구나?”

“아, 뭐. 추워서요.”

“우리 실장님 솔직하지 못하시네.”

서지훈 교수가 껄껄거리며 웃었다. 송승현 실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서울엔 또 웬일이래요? 이태준 전집 작업은 거의 마무리 단계라고 보고를 받았는데. 미팅 때문에 온 건 아닌 거 같고. 또 명인대 다녀왔어요?”

“뭐,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

“그렇게 뭉뚱그려서 말할 거면 사람을 왜 오라 가라 해요. 영양가 없게.”

송승현은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룸식으로 되어 있는 곳이라 사방이 가려져 있었다.

“왜 그렇게 툴툴대? 회사에서 뭔 일 있었어?”

“뭔 일 있었죠.”

자리에 앉은 송승현이 술잔을 들었다. 서지훈이 기다렸다는 듯 정종을 채웠다. 또르륵. 좋은 소리가 나며 술잔이 출렁였다.

“최무진 전무님 알죠? 예전에 한 번 봤었잖아요.”

“알지. 독사 같은 양반.”

“대뜸 불러다 놓고 한 달 내로 민우 씨 스카우트하라고 하더라고요. 다방면으로 써먹을 데가 많다고.”

“축하해. 시말서 써야겠네.”

서지훈은 불가능하다는 걸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송승현도 딱히 반론을 꺼내지 못했다.

“안 그래도 지음사 일 관련해서 너한테 할 말이 있었는데 잘됐다.”

“뭔데요.”

“민우 박사연구원 신청했다며. 얼핏 얘기 들었는데.”

송승현 실장은 그렇다고 답했다. 얼마 전 인문사회팀의 윤정민 팀장이 보고해 왔다. 석사연구원 계약이 끝나면 박사연구원 계약을 하고 싶다고.

“그거 컨펌하지 마. 석사연구원으로 끝내.”

의외였다. 자신의 수제자니 잘 봐달라고 하는 게 정상일 텐데. 그만큼 지음사 연구원직은 꿀직장 중 하나였다.

“이유는요? 본인이 희망해서 해주는 건데요.”

“이제 출판사에서 허비할 시간 없다. 공부에 집중해야지. 대학원에서도 자리 잡았으니까 연구지원사업에도 참여할 수 있을 거야. 그쪽에서 커리어를 쌓는 게 더 나아.”

“대학원에서 자리를 잡다뇨? 타대생이라 서자 취급받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 지음사에 온 것도 그거 때문이었잖아요.”

“인정받았어. 것도 민 선생한테. 우리가 스터디했던 그 노트 있잖아. 그거 물려주셨다고 하더라. 민식이와 예진이가 버티고 있는데도 말이다.”

송승현 실장이 깜짝 놀랐다. 명인대 국문과 출신으로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작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뿐만 아니야. 얼마 전 학회에서 발표한 거, 건수 제대로 잡았어. 영상까지 찍어서 KERIS에 넘긴 모양이더군. 한창 날개를 펴고 날아가려고 하고 있는데 일개 기업에서 발목 붙잡는 건 좀 아니지 않아? 국가적인 낭비라고.”

서지훈이 농담조로 말했다. 두 사람이 건배했고, 술을 천천히 음미했다.

“더 놀라웠던 건…….”

“아니, 잠깐. 민 교수 일 말고 더 놀랄 게 남았어요?”

“어허. 하늘 같은 선배님이 말씀하시는데 말 좀 끊지 마.”

송승현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능글맞게 웃은 서지훈이 말을 계속 이었다.

“민 선생이 얼마 전에 전화로 얘길 했거든. 내가 명인대로 자리를 옮기니까, 민우의 석사 논문 지도교수를 나로 바꾸는 게 좋지 않겠냐고.”

“그 인간이요?”

“그래서 오늘 오전에 민우 만나서 물어봤어. 어떻게 할 거냐고. 그랬더니, 민 선생 밑에서 계속 배우겠다고 하더라.”

“대체 왜?”

워낙 어이가 없어서 반말이 나가고야 말았다. 답답함과 한심함이 섞인 묘한 표정을 지으며.

“민우는 그만큼 배짱이 있는 거야. 우리들처럼 속이 좁은 게 아니고. 그렇게 시달리고 당했으면서도 그걸 헤치고 배울 게 있다는 걸 깨달은 거지. 우리들처럼 과거에 얽매어있는 게 아니라.”

“그건…….”

송승현은 뭔가를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반박할 거리는 충분하다. 하지만 서지훈 교수가 무엇을 의도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아무튼, 그러니까 민우 박사연구원으로 받아주지 마. 알겠어?”

“알았어요. 대신 그건 선배가 민우 씨한테 따로 얘기해요. 괜히 악역 맡기 싫으니까,”

“그러지.”

잠시 말이 끊겼다. 송승현은 배가 고팠는지 어묵을 몇 개 건졌다. 식히기 위해 호호 부는 모습에서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집 구했어. 서울에.”

“벌써요?”

“미리 구해놔야지. 곧 성수기니까.”

“그렇긴 하네요.”

“별로 안 궁금한가 보네.”

“알아서 잘하셨겠죠.”

송승현은 어묵을 간장에 적셔 입에 넣었다. 맛있었다. 하지만 왠지 표정을 펼 수가 없었다. 먼 옛날 서지훈과 나눴던 한 토막의 이야기 때문에.

그래서 송승현이 질문을 던졌다.

“근데 왜 서울에 집 얻었어요? 경기도에 살고 싶어 했으면서.”

“뭐…… 그건 옛날얘기니까.”

옛날이야기라는 단 한마디로 과거를 정리할 수 있는 그가 미웠다. 마음이 씁쓸해 송승현 실장은 다시 술잔을 잡았다.

* * *

― 박민우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박성진입니다.

“안녕하세요. 안 그래도 전화 기다리고 있던 참인데.”

― 하하하. 제가 타이밍을 잘 맞췄군요.

민우는 재빨리 307호에서 나갔다. 다른 석사들이 있어 방해될 것 같았다.

―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선생님의 동영상 강연을 KOC에 게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작업에 이틀 정도 걸리니까, 늦어도 이번 주 중으로는 게시가 되겠네요.

“잘됐네요. 좋은 소식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민우는 가벼이 웃었다. 당연히 될 거라고 생각했기에 특별한 감흥은 없었다.

― 저희야말로 감사드리죠. 아무튼 이번에 RISS 사이트가 개편되면서 해시태그와 유사한 기능이 생기는데요. 논문을 검색하면 관련 동영상 클립이 뜨는 서비스인데, 실존주의 관련 논문 옆에 박 선생님의 영상이 같이 뜰 겁니다.

“그래요? 한번 확인해봐야겠네요. 아, 그리고 조만간 원장님 뵈러 한번 가야 할 거 같은데 그때 찾아뵙고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 그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십쇼!

그렇게 이틀 후, 민우의 발표 영상이 KOC 홈페이지에 게시되었다. KERIS의 유관 기관은 물론 각급 협력 기관에도 발표 영상이 제공되었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질 만한 내용은 아니지만 몇몇 학자들의 관심을 끌기엔 충분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온 것도 바로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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