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4. 양자택일 (1) (134/500)


134. 양자택일 (1)
2021.12.09.


“다시 할 수 있게 됐다고?”

이미 답이 나온 질문이었다. 잠시 말을 멈춘 민우가 질문을 바꿨다.

“그럼 복학하는 거야? 불문과로?”

“예.”

연주가 환하게 웃었다.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 같은 느낌은 착각일까. 그녀는 이제야 기쁨을 솔직히 표현했다.

그것은 민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복귀를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이야, 잘됐다 정말. 전에 호텔에서 잠깐 얘기했었잖아. 그때 유학 얘기 나와서 난 또 해외에 나가게 되는 건 아닌가 싶었어.”

“아…… 박사는 프랑스에서 하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역시 그런가?”

연주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잠시 아쉬운 기색이 보였지만, 이내 그녀는 웃음을 되찾았다.

“하지만 아직 확정된 건 아니니까, 당분간은 한국에 있을 거예요. 석사 논문은 명인대에서 써야 하니까요.”

“그럼 다음 학기부터 바로 석사 논문 쓰겠네?”

“그래야죠.”

민우는 이제 3학기에 들어가고, 연주는 4학기에 들어간다. 통상적으로 석사 4학기는 논문 학기로 정규수업을 듣지 않고 논문을 쓴다.

그래서 민우는 수업을 들어야 하지만 연주는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이미 이수학점을 모두 채웠기에 졸업요건을 달성한 것이다.

민우가 물었다.

“공부 그만두기 전에 논문 준비는 좀 해놨어? 집안일 때문에 이래저래 정신없었을 거 같은데.”

“개요는 이미 세워 놨어요. 그대로 살만 붙이면 돼요. 한 학기 정도면…… 빠르면 두 달. 그 정도면 충분할 거 같아요.”

“부럽다. 나도 빨리 석사 논문 쓰고 싶은데. 언제 수업 다 듣고 논문 쓰고 박사과정 들어가나…….”

민우는 시선을 저편으로 던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봐도 엄살이었다. 그 능청스러운 모습에 연주는 입을 가리며 소소하게 웃었다.

“오빤 벌써 KCI급 학술지에 논문 게재했잖아요. 석사 2학기 치곤 되게 빠른 건데…… 전 아직 학회 활동도 못 해봤다구요.”

“그게 정상이지. 내가 철없이 빨랐던 거고.”

“철이 없는 거였어요?”

“돌이켜 보면 성과를 올린답시고 무작정 뛰어든 감이 없잖아 있거든. 연구 성과 없다고 한 소리 들어서. 뭐, 결과적으로 일이 잘 풀리긴 했지만 말이야.”

민우가 국제비교문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은 수정을 거쳐 학회지에 실릴 예정이다. 민우의 공식적인 첫 연구실적이었다.

연구 성과 없다고 한 소리 들었던 건 지음사에서였다. 출판기획서를 들고 송승현 실장을 찾아갔다가 박살이 난 그때.

‘엄청 몰아붙이셨지. SCI급은 물론 KCI급. 심지어 등급 외 학술지에 논문을 실은 적이 있냐고. 거기에 인문학이 뭐냐는 콤보도 맞고.’

그때는 대답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다. KCI급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한 바 있다고.

아직은 단 한 편에 불과하지만 수가 늘어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민우의 목표는 한 학기에 두 번 논문을 발표하는 것. 모두 성공한다면 석사학위를 따기도 전에 논문실적만 다섯 개를 쌓게 된다. 그것도 KCI급으로.

다섯 개.

숫자로 보면 별것 없어 보이지만 이는 실로 어마어마한 실적이었다.

논문 공저가 거의 없는 인문대 석사가 단독 저술로 국내 A급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한다는 것은 정말 보기 드문 일이니까.

전무후무(前無後無).

말 그대로 학계의 기린아(麒麟兒)가 되는 것이다.

“그럼 방학 때도 학교에 계속 나와야겠네? 논문 써야 하니까. 오늘도 그래서 나온 것일 테고.”

“예. 맞아요. 그래서…….”

연주가 잠시 머뭇거렸다. 민우는 집중했다. 경험적으로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일 때는 중요한 이야기가 나오곤 했으니까.

“실은 저 있죠. 학교 근처로 이사했어요.”

“이사?”

민우는 그 이사가 직급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이사라니. 재벌 3세인 그녀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이야기였다.

“갑자기 이사를? 본가가 이사했다는 거야?”

“아뇨. 정문 근처 오피스텔로 혼자 나왔어요. 이제 논문 써야 하니까 오가기 번거로워서요. 시간도 아깝고…….”

전용 차량과 기사도 있는데 번거롭다는 건 이해가 안 갔다.

그래도 시간이 아깝다는 말엔 납득했다. 대학원생들이 한 시간 정도 거리에 본가가 있음에도 학교 근처의 고시텔이나 원룸에서 자취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어마어마한 일인데 그거. 집에서 허락해 줬어? 아, 허락해 줬으니 이사를 했겠지. 어떻게 허락받은 거야?”

“병원에 누워 있어서 그런지 아버지가 많이 양보해 주셨어요.”

“아, 하긴.”

연주는 논문을 쓸 때까지만이라는 조건이 붙었다고 설명했다. 24평 오피스텔이고, 가사도우미가 출퇴근한다고 덧붙였다.

그때 뭔가를 떠올린 연주가 반색하며 말했다.

“저…… 수빈 언니 귀국하면 다 같이 집들이할까요? 혼자 살게 되면 꼭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소원일 정도로.”

“소원 한번 참 소박하다.”

피식 웃은 민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애들한테 얘기해 볼게. 다들 좋아할 거야. 무엇보다도 네가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기뻐하겠지.”

민우는 그렇게 말하고는 ‘기뻐하겠다’는 표현을 곱씹어 보았다.

커피를 한 모금 빨아들인 민우가 연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살짝 놀란 연주가 얼굴을 붉히며 빨대를 입에 물었다.

“정연주.”

“……예?”

민우가 테이블에 몸을 가까이 붙였다. 분위기가 조금 진지해졌다. 연주는 두 눈을 깜빡이며 민우를 조심스레 바라보고 있다.

민우가 말했다.

“기억나? 예전에 삼겹살집에서 술 마시면서 그 얘기 했잖아.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방법을 연구하는 게 인문학인데, 어떻게 하면 인간답게 살 수 있을까 하고.”

잠시 생각한 연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술에 취해 필름이 끊겼지만, 그 장면만큼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민우가 재차 물었다.

“이제 좀 인간답게 산다는 느낌이 들어?”

“그게……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연주는 고개를 숙였다.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린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민우는 차분히 그녀의 말을 기다려 주었다.

잠시 뜸을 들이다 연주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기다리면 좋은 날이 올 거다. 그렇게 대답했던 것을 떠올리면서.

좋은 날.

그 좋은 날의 풍경엔 민우의 모습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을 떠올린 연주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곧 알게 될 거 같아요. 인간답게 산다는 느낌이 어떤 느낌일지. 어떤 모양으로, 어떤 색으로 다가올지.”

연주는 나머지 한 문장을 말하려고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대신 민우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티 없이 맑다.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그때 짧게 진동이 울렸다.

“잠깐만.”

민우는 핸드폰을 꺼냈다. 톡이 하나 와 있었다. 보낸 사람은 서지훈 교수였다.

― 내일 오전에 명인대에서 좀 보자. 늘 보던 그 카페에서.

* * *

다음 날, 민우는 아침부터 서둘렀다. 좀 더 늦잠을 자고 싶지만 서지훈 교수가 일찍 서울에 도착하는 바람에 허겁지겁 준비했다.

다행히 버스는 한산했다. 민우는 이어폰을 꽂은 채 자리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응시했다.

‘아 참, 연주 집들이 얘기를 안 했네.’

민우는 핸드폰을 꺼내 307호 단체 톡방을 열었다. 구성원은 민우를 포함해 수빈과 진섭, 그리고 주예린 총 네 명이었다.

집에서 나올 때까지만 해도 대화가 없었는데 잠깐 안 본 사이에 톡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아침부터 쓸데없이 뭔 이야기들을 이렇게 하는 거야.’

그래도 사람 마음이 뭐 다를 게 있던가. 민우는 스크롤을 천천히 내리며 지나간 대화를 읽었다. 어제의 이슈는 연주의 복학이었고, 오늘의 이슈는 파티룸이었다.

다들 크리스마스 파티에 꽂혀 있었다. 아니, 미쳐 있었다고 하는 게 정확한 표현이리라.

애기♡: 근데 서강일 씨 못 온다면서요? 자리 하나 비네~ 어쩐다

섭섭: 기왕이면 성비 맞춰서 노는 게 좋은데. 여자는 셋이고 남자는 둘. 박민우. 또 데려올 사람 없냐?

애기♡: 울 오빠 톡 안 보는 거 같은데요.

주님: 민 선생님은 어때요?

애기♡: ―_―

섭섭: 히이익!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민영환 교수의 참여. 상상도 하기 싫은 장면이었다.

민우가 빠르게 자판을 터치하기 시작했다.

― 초대할 만한 사람 두 명 정도 있어. 두 명 다 출판사 직원인데 나랑 동갑이고. 한 명은 훈녀, 다른 한 명은 훈남

여자는 라온북스 편집자 이유리였고, 남자는 지음사 인문사회팀의 장철호 주임이었다. 사교적이면서 분위기를 잘 맞추는 사람들이었다.

민우는 뚫어져라 액정을 내려다보았다. 내심 이수빈이 어떤 선택을 하나 기대했다.

‘당연히 훈녀를 선택하겠지?’

애기♡: 훈남

주님: 222222222

애기♡: 다른 한 명

주님: 후자

하지만 그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장철호를 지목하는 톡이 무섭게 올라왔다.

민우가 깊은 실망감에 잠겨있을 때 휴대폰이 한 차례 진동했다. 진섭에게 개인 톡이 왔다. 민우는 내용을 확인했다.

― 훈녀 예쁘냐? 내타입?

민우는 혀를 찼다.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할 시기인데 남성의 본능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개 버릇 남 못 준다더니. 오랜만에 정의구현이나 해볼까?’

민우는 진섭이 보낸 개인 톡 화면을 스크린샷한 뒤 307호 단체 톡방에 올렸다.

그렇게 톡방은 조용해졌다.

버스에서 내린 민우는 바로 카페 미엘로 향했다. 날이 추운데도 서지훈 교수는 안쪽이 아니라 테라스에 앉아 있었다.

“추운데 안 들어가세요?”

“담배 좀 피우려고. 먼저 들어가 있어라.”

민우는 카드를 받아들고 카운터로 향했다. 주문한 음료가 나올 때쯤 서지훈 교수가 안쪽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민우가 커피를 홀짝이며 서지훈 교수의 분위기를 살폈다. 대학원에서 는 건 지식만이 아니었다. 눈치도 거의 9단에 근접할 정도로 늘었다.

‘오늘은 뭔가 좀 차분하시네.’

확실히 말수가 적었다. 평소라면 개그 욕심을 부렸을 텐데 서지훈 교수는 침착하게 커피를 마시기만 했다.

민우가 나섰다.

“저, 선생님. 하실 말씀이 뭡니까? 신경 쓰여서 잠도 못 잤어요.”

“뭐 별일은 아니야. 다음 학기부터 명인대에서 강의하기로 했다.”

“네?”

민우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강의하기로 한다는 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와 닿지 않았던 것이다.

“명인대에서 외부 강의하시는 거예요? 이상하네요. 명인대 국문과에 강사 자리가 빌 리가 없는데…….”

“아니. 내가 말을 좀 잘못했네. 학교를 옮긴다고. 상아대에서 명인대로.”

“네?”

두 눈을 깜빡거리던 민우가 다시 물었다.

“진짜요? 농담하시는 게 아니고?”

“내가 아침부터 너 불러다 놓고 농담하게 생겼냐. 임용 절차 마무리 중이다. 상아대 쪽에도 사직서 던져 놓은 상태고.”

민우는 놀랐지만, 서지훈 교수가 생각한 것만큼 크게 놀라진 않았다. 민우도 언젠가 그렇게 되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었다.

서지훈 교수가 씁쓸히 웃었다.

“생각보다 반응이 미적지근하네. 벙 찐 얼굴 보고 싶었는데. 예상하고 있었던 거냐? 이거 이러면 재미가 없는데.”

“언젠간 오시지 않을까 생각은 했어요. 조금 빠른 느낌이긴 하지만.”

“곧 송현우 선생님도 정년퇴임을 하시니까. 그 뒤를 이어받는 느낌으로 온 거지.”

“내년 2학기에 퇴임하시죠?”

“그래. 1년 남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민우는 아직 서지훈 교수에게 할 말이 남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잠자코 기다렸다.

“실은 말이다. 내가 진짜 하려는 말은 이게 아니고, 따로 있어.”

드디어 본론이 나왔다. 민우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이어질 말에 집중했다.

“학회 끝나고 민 선생님이 전화를 하셨다. 그리고 물으시더군. 내가 명인대로 돌아왔을 때 너를 지도할 거냐고.”

“지도라 하시면…… 지도교수 변경 말씀인가요?”

“그렇지. 학부 지도교수니까 이어서 맡지 않겠냐고 물어보신 거야. 민 선생님은 지도교수를 바꿔도 딱히 문제 삼지 않겠다고 하시더라.”

민영환 교수의 말이 맞다. 모교의 지도교수가 왔으니 행정상으로 가능하다면 변경하는 쪽이 서로 좋다. 소위 말하는 케미가 맞으니까.

“네 생각은 어떠냐? 일단 너한테 물어본다고 둘러대긴 했는데. 지도교수를 바꿔서 생기는 패널티 같은 건 걱정할 필요 없다. 내가 알아서 잘 수습할 테니까.”

민우는 생각에 잠겼다.

지도교수를 변경하여 생기는 행정상의 패널티는 없다. 지도교수에게 최소 한 학기 이상만 지도를 받아도 논문을 쓸 자격이 주어지니까.

문제는 보이지 않는 패널티다.

지도교수를 바꿔서 민영환 교수가 악감정을 품지는 않을까?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민영환 교수가 먼저 꺼낸 이야기였다.

‘어떻게 한다.’

고민이 길어졌다. 어느덧 민우는 대학원 생활을 처음부터 지금까지 돌이켜보고 있었다.

“천천히 생각해도 된다. 어차피 다음 학기 시작하려면 멀었으니까.”

“아뇨. 결정했습니다.”

“벌써?”

고개를 끄덕인 민우가 말했다. 당당하고 분명한 어조로.

“바꾸지 않겠습니다. 민 선생님 밑에서 계속 배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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