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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수확의 계절 (3) (133/500)


133. 수확의 계절 (3)
2021.12.06.


‘충분히 고민하고 세운 계획은 아니지만. 뭐, 가끔은 얻어걸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

사실 오래전부터 세워 놓은 계획은 아니었다. 며칠 전 학회 발표를 준비하면서 우연히 떠올렸다.

민우는 소파에 편하게 앉아 그때를 회상했다.

‘그 시작은 강일이를 깜짝 놀래킬 만한 무기를 준비할 때였지, 아마?’

민우가 선택한 무기는 강연식 발표였다. 발표자는 물론 토론자도 부담을 느끼는 방식 중 하나다. 웬만한 내공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것이니까.

강연식 발표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그것을 준비하기 위해 학과사무실에서 캠코더를 빌렸다. 그리고 발표 장면을 빠짐없이 영상으로 남겼다.

처음에는 어설프고 버벅거렸지만, 점점 감을 찾아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게 됐다.

만년필은 사용하지 않았다. 온전히 자신의 실력만으로. 민우는 논문을 통째로 머릿속에 넣고 필요한 것을 꺼낸다는 느낌으로 연습을 반복했다.

그렇게 녹화한 영상을 돌려보다 문득 발표 장면을 찍는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거 생각보다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잘 편집해서 인터넷에 공개하면…….’

지금은 좀 시들했지만, 한때 민우는 무투브에서 인문학 강의로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좋은 영상을 공유할 때 어떤 파급력이 있는지 몸소 경험한 것이다.

그래서 바로 박진영 교수에게 문의했다. 학회 동영상을 촬영하여 개인적인 용도로 쓸 수 있냐고.

― 영상 촬영을? 글쎄다…… 그건 우리 학회에서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라서 말이야.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이거 나도 좀 난감하네.

평소에 호의적이었던 박진영 교수도 난색을 보였다. 손이 많이 가는 일이고, 장비도 필요했다. 학회 자체에서 해결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민우는 포기하지 않았다.

“말씀드리지 않은 게 하나 있는데, 실은 내년 초부터 KERIS에서 오픈코스웨어용 강의 영상을 촬영하기로 했습니다. 인문학을 테마로 해서요.”

― 뭐? 박 선생이 직접?

“예. 그래서 이번 학회 발표 장면을 영상으로 만들어 공개하면 여러모로 좋지 않을까 싶어서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 잠깐. 잠깐만. 공개한다면 채널은 어디야? KOC 말하는 건가?

“맞습니다. KOC에 올라가면 RISS는 물론 각급 기관에도 연계가 되니까 파급력이 제법 있어요. 이미 도유진 원장님과도 이야기가 끝난 일입니다. 그쪽에 얘기하면 적극적으로 도와줄 겁니다.

― 아아, 그래서 영상 촬영 얘기를 꺼낸 거구나. 그럼 진즉 그렇게 얘기를 했어야지.

“개인적인 용도로도 쓸 거지만, 아무튼 KERIS에 영상을 제공하면 학회 차원에서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학회 이름이 남으니까요.”

― 확실히 그런 이점이 있긴 하지.

지음사에서 일을 한 덕분일까. 민우는 협업의 본질을 이해하고 움직였다. 상대방이 어떤 이익을 취할 수 있는지 인지시키고 카드를 제시했다.

다행히 효과는 충분했다.

박진영 교수는 한번 알아보겠다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정확히 한 시간 뒤에 영상 촬영이 가능하다고 전했다.

물론 발표를 공개하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이 하나 필요했다.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학회에서 발표하는 것.

한일대 신문방송학과에서 영상 촬영 협조를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민우는 더욱 필사적으로 발표 준비에 임했다.

그리고 성공을 거뒀다.

비록 실전에서 만년필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민우는 최상의 결과를 얻는 데 성공했다.

짧은 회상을 끝낸 민우가 다시 모니터에 집중했다. 발표는 어느덧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학계는 물론 대중에 공개해도 문제는 없겠어.’

민우는 마우스를 클릭해 동영상을 종료했다. 이어폰을 빼고 명함 케이스를 가방에서 꺼냈다. 이젠 KERIS와 접촉할 시간이다.

‘원장님께 직접 연락을 드리는 것보다 실무자에게 전화를 하는 게 낫겠지?’

민우는 도유진 원장과 직접 이야기를 할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실무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난색을 보일 일이다. 부담감을 느낄 수도 있고 건방지다는 편견을 갖게 만들 수도 있다.

그래서 민우는 지음사에서 일을 할 때도 송승현 실장을 배제하고 전남규 차장이나 고두열 과장 등 실무자와 직접 커뮤니케이션을 했다. 정 안되면 윤정민 팀장에게 도움을 청했다.

공기업이든 사기업이든 사람이 사는 곳은 다 똑같다는 누나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며 민우는 명함 케이스를 열심히 뒤졌다.

곧 KERIS 로고가 박힌 명함이 하나 나왔다.

‘찾았다.’

명함의 주인공은 고등교육정보부의 박성진이었다. 민우는 사무실 번호로 바로 전화를 걸었다.

― 안녕하십니까. 고등교육정보부 박성진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차분하고 다정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민우는 전에 만나 인사를 나눴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안녕하세요. 명인대 박민우입니다. 전에 KOC 관련해서 말씀 나눈 적이 있는데. 기억나시나요?”

― 아! 박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인사드리네요. 추운데 잘 지내고 계십니까? 전에 말씀하셨던 학회는 어떻게 잘 치르셨나 모르겠네요.

붙임성은 물론 기억력까지 좋은 사람이었다. 민우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덕분에 잘 마치고 쉬고 있습니다.”

― 안 그래도 어제 원장님께서 박 선생님 말씀을 하시더군요. 슬슬 연락 올 때가 됐다고 하시면서. 오늘 전화 안 주셨으면 제가 했을 겁니다.

오랜만의 통화라 그런지 두 사람은 잠시 환담을 나눴다. 길지는 않았다. 이야깃거리가 떨어질 즈음에 민우는 본론을 꺼냈다.

“혹시 국제비교문학회라고 알고 계십니까? 한일대 쪽 학술단체인데요. KCI급 학술지를 발간하는 학회입니다.”

― 국제비교문학회요. 잠시만 좀 보겠습니다.

스피커 너머로 키보드 소리가 났다. 박성진 담당자가 학회 정보를 열람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 확인했습니다. 꽤 활발하게 활동하는 단체네요. 발간한 논문집도 많은 편이고. 좋습니다. 좋네요. 건실한 학회네요.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네요. 제가 그쪽 학회에서 발표를 하나 했습니다. 그걸 촬영한 영상이 있는데, 이걸 오픈코스웨어에 교육용으로 공개를 하고 싶어서 연락을 드렸어요.”

― 반가운 제안이네요. 그런데 동영상 이용 권리에 대해서는 학회에 양해를 구하셨나요?

“물론이죠. 간단히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필요하시면 관련 서류를 보내드릴 수 있습니다.”

― 나중에 스캔해서 메일로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영상은 어떻게 촬영하셨습니까? 저희 쪽에서 서비스를 하려면 영상을 한 번 가공해야 하는데 화질이 좋지 않으면 좀 곤란하거든요.

“한일대 신방과에서 기자재를 빌렸습니다. 화질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거 같네요. 제가 메일로 공유해 드릴 테니 한번 확인 부탁드립니다.”

― 감사합니다. 제가 확인해 보고 바로 기안 올리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원장님과 따로 말씀하신 게 있으신지요?

박성진 담당자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무래도 민우가 윗선과 바로 연결되는 사람이다 보니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민우는 도유진 원장에게 연락하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아닙니다. 처음 연락드린 거예요. 오랜만에 담당자님과 통화도 할 겸 해서요.”

―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이 건은 제가 최대한 빨리 진행을 해보겠습니다. 빠르면 내일 중으로 알려드릴 수 있겠네요.

“잘 부탁드려요.”

전화를 끊은 민우는 국제비교문학회의 안유진 간사가 보낸 메일을 박성진 담당자에게 포워딩했다. 거기에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겼다.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 일을 끝냈다. 잠시 숨을 돌린 민우는 다음 순서를 떠올렸다.

‘명인대학교 인트라넷. 학교 내에서 입지를 더욱 굳힐 필요가 있어. 한창 탄력을 받는 중이니까.’

명인대학교 인트라넷은 다른 대학과는 달리 종합 포털의 성격으로 운영되고 있다. 커뮤니티는 물론 사이트 내에서 교육과 이러닝 등 다양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민우는 파일을 업로드 형식에 맞게 변환한 다음 국문과 조교실에 전달했다. 이미 관련 이야기를 전해 들은 터라 행정조교는 업로드에 협조적으로 나섰다.

그날 오후, 민우의 강연 동영상이 담당자의 승인을 거쳐 교양 이러닝 페이지에 업로드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의외의 사건이 벌어졌다. 박창민 교수가 호출한 것.

무슨 일인가 싶어 민우는 바로 그의 연구실로 뛰어갔다.

“민 선생님께 대강 듣긴 했는데 너 사고 제대로 쳤더라? 응? 적진 한가운데에 대장기 꽂고 왔다며. 나도 구경 갈 걸 그랬어! 하하하.”

박창민 교수는 한차례 웃었다. 하지만 곧 그의 표정이 놀랍게도 진지해졌다.

“농담이고. 다음 학기에 말이다. 내가 학부 2학년 전선 과목으로 전후문학론 강의를 하게 됐는데, 네 발표 영상을 수업자료로 좀 써야겠다. 보니까 꽤 쓸 만한 부분이 많더라고.”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수업자료로 쓰기에는 좀 부족하지 않을까요?”

“뭐 조금 부족한 건 사실이지.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좋은 면도 있다. 학부 애들이 실존주의 문학론에 입문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테니까.”

쉽게 말해 눈높이가 맞다는 얘기였다. 민우는 오히려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만큼 개념을 쉽게 풀어서 설명했다는 것이니까.

박창민 교수가 계속 말했다.

“네가 직접 강단에 서서 특강을 하는 게 좋겠지만, 박사과정도 아니고 석사과정이라 그건 좀 무리일 것 같아서 영상으로 대체하려는 거야.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고.”

“저야 감사한 일이죠.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민우는 박창민 교수 연구실을 나섰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나른한 느낌이 들었다.

‘내 발표 영상이 학부 애들 수업 교재로 쓰인단 말이지?’

민우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유명세를 치르는 것 이상의 보람이 느껴졌다. 자신의 발표가 교재가 된다는 것은, 말 그대로 후학 양성에 일조했다는 것이니까.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어. 운이 좋은 건지 아니면 노력의 결과인지는 모르겠지만. 뭐,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겠지.’

민우는 웃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때 진동이 느껴졌다. 핸드폰을 꺼내니 이유리에게 톡이 하나 와 있었다. 말을 놓은 이후로 전화보다는 톡으로 이야기를 많이 나누게 됐다.

몇 번 터치하고 톡 내용을 확인한 민우가 활짝 웃었다.

‘오늘 무슨 날인가?’

<더 위자드> 증쇄 소식이었다. 이것으로 5쇄째. 이유리는 추가 인세는 물론 대표이사가 직접 준비한 특별 선물이 갈 거라고 귀띔했다.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을 당겨 받는 듯한 느낌이었다.

민우는 자랑할 겸 이 소식을 수빈에게 톡으로 남겼다. 그녀는 아직 동남아 여행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확인은 이따 밤에나 할 것이다.

민우는 설렘과 기쁨을 충분히 즐기며 인문관 입구를 나섰다. 그런데 마침 계단 아래에서 익숙한 누군가가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처음 민우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한 번 비벼보았는데, 환영은 아니었다.

“정연주?”

“아, 오빠.”

연주는 생긋 웃으며 걸음을 빨리 옮겼다.

허리춤에 두꺼운 원서가 들렸고, 상체만 한 커다란 숄더백을 메고 있었다. 수수한 복장. 마치 학기 초에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때가 떠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기업의 이사처럼 보이지 않았다. 완전히 학생 차림이었다.

민우가 물었다.

“학교엔 무슨 일이야? 수행비서도 없이. 버스 타고 왔어?”

연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뽀얀 입김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일단 민우는 인문관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안이 훨씬 따뜻했다.

“오빤 도서관에 가시려고요?”

“아니. 오늘은 일찍 집에 가려고. 수빈이도 외국에 나가 있어서 밀린 잠이나 자게. 그동안 논문 준비하느라 거의 못 잤거든.”

“그럼 바쁜 일은 없으신 거네요.”

“그렇지.”

“저…… 커피 마시고 싶은데.”

웬일일까? 생각해보니 연주가 ‘무엇을 하고 싶다’ 꼴로 이야기하는 건 거의 처음인 것 같았다.

뭔가 변했구나.

아니, 변하려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에 민우는 그녀와 함께 인문관 지하 카페로 내려왔다. 날도 춥고 한창 방학이라 학생들은 거의 없었다.

민우가 카운터에 서자 연주가 살짝 그를 밀었다.

“오늘은 제가 살게요. 뭐 드실래요?”

“난 따뜻한 아메리카노.”

각자 음료를 하나씩 들고 자리에 앉았다. 연주는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인지 눈을 빛내고 있었다.

“학회는 어떠셨어요?”

“멋진 데뷔전이었지.”

민우는 명인대 앱을 실행시켜 인트라넷에 올라온 발표 동영상을 재생시켰다.

“학회에서 발표한 거 동영상으로 올려놨으니 한번 봐. 전공이 달라서 재미는 없겠지만. 링크는 톡으로 보내줄게.”

“꼭 볼게요.”

민우가 핸드폰을 도로 집어넣으며 물었다.

“그런데 학교엔 무슨 일이야?”

“그게요.”

연주는 테이크아웃 잔을 만지작거리며 뜸을 들였다. 민우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지금 웃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곧 그녀의 작은 입술이 열렸다.

“저, 공부 다시 할 수 있게 됐어요. 이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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