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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수확의 계절 (2) (132/500)


132. 수확의 계절 (2)
2021.12.03.


겨울 학술대회 뒤풀이는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한일대 근처에 위치한 고깃집의 한 층을 다 차지할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다.

비록 이번 흥행에 일조한 랑느 박사는 뒤풀이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회원들이 자리를 빛내고 있었다.

“고기 더 시켜도 되나? 냉면은?”

“아까 총무간사님한테 여쭤보니 상관없다고 하더라. 마음껏 드쇼.”

민우가 고기를 뒤집으며 말했다. 진섭은 즉시 종업원을 불러 고기 2인분과 물냉면을 시켰다.

오늘 학회에서 인상적인 모습으로 데뷔한 민우는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진섭과 고기를 먹고 있었다. 진섭은 얄밉게도 잘 익은 고기만 날름 집어 먹었다.

민우는 집게로 한 대 때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기분 좋은 날이니까.

“그나저나 저긴 분위기 겁나 좋네.”

“어디?”

“민 선생님 계신 테이블.”

한진섭의 시선은 중앙에 마련된 큰 테이블에 고정되어 있었다. 민우는 슬쩍 그쪽을 바라보곤 다시 불판으로 관심을 돌렸다.

“분위기가 좋을 수밖에. 얼핏 보니 거의 다 명인대 출신들인 것 같은데.”

“그걸 어떻게 알아?”

“아까 얘기 들었어. 인사도 했고.”

상석에 앉은 민영환 교수는 다른 학교 교수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얼굴이 불콰하게 오른 것이 기분이 좋아 보였다.

“어이구, 잔이 비었네. 자, 민 선생님. 한잔 받으시죠!”

“하하하. 고맙습니다.”

동년배 교수들이 모여 있었는데, 민우의 말대로 대부분 명인대 출신들이었다. 혹은 민영환 교수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사람 사는 곳이 모두 똑같듯, 학회라고 해서 다를 건 없다. 친한 사람들끼리 뭉치고 헤어지는 곳이었다.

그때 머리가 반쯤 벗어진 중년이 미소를 지으며 은근히 물었다.

“그나저나 민 형도 참 대단하시오. 새파랗게 어린 제자를 학회에 내보낼 생각도 다 하고. 나였다면 발표할 시간에 잡일을 시켰을 텐데.”

“본인이 하고 싶다는데 내가 뭐라 할 수 있나. 그저 뒤에서 지켜볼 뿐이지.”

“보니까 똘똘한 친구 같더만요.”

민영환 교수는 소주를 넘기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머리가 벗겨진 중년은 청민대 국문과 교수 배철문이었다. 명인대 동문이기도 했다.

그가 무릎을 탁 치며 계속 말을 이었다. 한탄하듯이.

“아무튼 부럽습니다. 요즘은 대학원생도 부쩍 줄었고, 연구를 같이할 친구들이 많이 부족해요. 저희 학교가 지방대라서 그런 거겠지만 말입니다. 허허, 서울도 크게 다르진 않지요?”

“그렇지. 몇몇 대학을 제외하고는 마찬가지 아니던가. 치열하게 공부를 하는 친구들도 예전에 비하면 많이 줄었지. 지식보다는 학위가 필요한 사회가 됐으니.”

“학위도 옛날얘기죠. 먹고 사는 문제만으로도 어려워졌으니 말입니다.”

일부 명문대를 제외한 인문계열 대학원은 입학생이 점점 줄어드는 추세다. 공부해서 먹고살 수 있을 만큼 학술적 인프라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일부 학과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통폐합의 길을 걸게 될 것이다.

민우도 인지하고 있는 문제였다. 그는 고기를 뒤집는 것도 잊고 깊이 생각에 잠겼다.

탁탁!

한진섭이 젓가락으로 불판을 치는 소리였다.

“님아. 고기 타잖아요.”

“이 자식이 보자 보자 하니까. 받아 처먹지만 말고 너도 좀 구워봐. 어?”

민우는 집게를 툭 던졌다. 괜히 찔렀나. 입맛을 다신 진섭이 집게를 들고 고기를 뒤집었다. 민우는 고기를 한 점 집어 상추와 깻잎에 싸서 한입에 넣었다.

그때 옆에 누군가 앉았다.

“박민우. 한잔해야지?”

서강일이었다. 그는 소주병을 들고 있었다. 민우는 잔을 털고 술을 받았다.

“어디 있었냐?”

“잠깐 연구실에. 지도교수님 훈화 말씀 듣고 왔지.”

“초등학교도 아니고 뭔 훈화 말씀이야.”

“알면서 그러냐.”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초등학교가 더 나을 수도 있지. 그렇게 생각하며 병을 빼앗아 서강일의 잔도 가득 채워 주었다.

“아저씨. 저도 한 잔 주세요.”

“아저씨 아니라니까 그러네.”

어느새 강민희까지 와 있었다. 마땅히 앉을 자리가 없어 그녀는 한진섭의 옆에 앉아 잔을 내밀었다. 적을 맞이한 진섭이 긴장했다.

그렇게 잔을 채운 네 사람이 잔을 부딪쳤다.

서강일은 한 번에 잔을 비웠다. 표정을 보니 한 잔으로는 부족한 느낌이었다. 그가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까 지도교수님한테 들었다. 내년 여름학회 때 자리 하나 마련됐다고 하던데. 할 거야?”

“까라면 까야지 별수 있냐.”

“하하하. 너무 당연한 걸 물었나?”

체스판의 말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든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제 석사 2학기. 무대에 오르는 기회를 잡는 것조차 쉽지 않은 시기다.

다시 말해 실력과 경험을 쌓기에 아주 좋은 기회인 것이다.

민우가 말했다.

“난 봄에 발표 하나 더 할 거야. 한 학기에 두 편 정도 논문을 쓰는 게 좋을 거 같아서 말이다.”

“두 편이나?”

서강일의 반응을 살핀 민우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처지이기 때문에,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민우는 서강일의 빈 잔을 채웠다. 진섭이와 민희의 잔은 아직 반쯤 남아 있었다.

이번엔 서강일이 술을 따랐다. 술을 받으며 민우가 말했다.

“나도 알아. 미리 연구물 발표해봐야 좋을 거 없다는 거. 하지만 손이 근질거린 걸 어떡하냐. 써야지.”

“수료 상태면 모를까. 학기 중에 논문 쓰는 거 쉽지 않을 텐데? 너희도 수업 과제 논문 식으로 써서 내야 하는 거 많지 않나?”

“이번에 발표 준비하면서 느낀 건데.”

민우가 술잔을 바라보며 잠시 말을 끊었다. 의미심장한 표정. 강일은 물론 고기를 집어 먹던 진섭과 민희도 민우에게 집중했다.

민우는 이번 발표과정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일들을 하나씩 되짚어 보았다.

그리고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다.

“스스로를 한계까지 몰아붙이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겠더라고. 이건 공부뿐만이 아니겠지. 다른 일도 마찬가지일 거야. 사는 것에 정답은 없다고들 하지만…… 뭘 하든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게 정답인 거 같아.”

민우의 한마디에 자리가 조용해졌다. 지글거리는 고기 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한계까지 몰아붙여 보려고. 한 학기에 발표 두 번, 쉽지 않지. 불가능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해보기도 전에 포기해 버리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

민우는 묵묵히 고기를 구우며 그렇게 말했다. 서강일은 피식 웃으며 술을 들이켰다.

왜 민우에게 질 수밖에 없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있었고, 자신은 그렇지 않았다. 명백한 차이가 있었다.

분위기가 너무 처진 것 같아 민우가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참, 물어본다는 걸 깜빡했네. 강일이 너 크리스마스이브 저녁에 시간 되냐? 대학원 동기들이랑 파티할 계획인데. 별 약속 없으면 너도 껴라.”

“명인대 사람들한테 둘러싸여 무슨 좋은 꼴 보겠다고 거길 가.”

사실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서강일은 말없이 고기를 집어 먹고 있는 강민희를 바라보았다. 아까 컨벤션홀 밖에서 풀 죽어 있던 녀석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날은 약속이 있을 예정이라서. 너희들끼리 재미있게 놀아. 다음에 초대해 주면 가마.”

“약속이 있을 예정은 또 뭐냐.”

“아무튼 그런 게 있단다.”

“마음대로 해. 가는 사람 안 잡아.”

그때 박진영 교수가 테이블을 찾았다. 학생들 테이블에 교수가 온 것은 처음이라 그런지 다들 일어나서 인사했다.

“오늘 다들 고생 많았다. 박 선생도 그렇고 서 선생도 그렇고 멋있었어. 열정이 확 느껴지더라. 하하하. 한잔들 받지?”

“앗, 옙.”

민우와 서강일이 차례대로 한 잔 받았다. 박진영 교수의 잔은 민우가 채웠다.

“특히 서강일 선생이 고생이 많았어.”

“네?”

“일단 짠부터 하자고. 응?”

박진영 교수가 먼저 잔을 들었다. 소주잔 다섯 개가 동시에 부딪쳤다.

“논문에서 빈틈 찾기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라서 한 말이야. 쓴 사람보다 더 많이, 더 넓게 알고 있어야 틈이 보이는 법이니까. 오늘 토론에 대해서 신경 쓰고 있을 거 같은데 훌훌 털어버려. 아직 기회는 얼마든지 있잖아.”

강일은 진지하게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박진영 교수는 술잔을 비우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 너희들 발표 보면서 옛날 생각 났던 교수들 꽤 있었을 거야. 요즘은 이렇게 열정적인 친구들 찾기가 어려우니까.”

그때 다른 테이블에서 박진영 교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예,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설은 이 정도로 할까. 많이들 먹고 가라.”

박진영 교수가 오늘의 두 주인공의 어깨를 다독이며 자리를 떴다. 그때 민우가 따라 일어서 그에게 말을 걸었다.

“교수님. 잠깐만요.”

“어?”

“저번에 제가 부탁드린 거. 잘됐죠?”

민우가 묻자 박진영 교수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하지. 신방과 쪽에서 이번에 새로 구입한 장비 빌려와서 찍었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파일로 만들어서 메일로 쏴 줄게. 금방 될 거야.”

“정말 감사합니다.”

“이 정도면 랑느 박사님 초빙한 건에 대해서는 충분히 보답이 됐지?”

“물론이죠.”

씨익 웃어 보인 박진영 교수가 자리를 떴다. 곧 한진섭이 심각한 표정으로 민우를 추궁했다.

“너 또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는 거냐? 신방과 장비는 뭐고?”

“잠자코 있어 봐. 곧 알게 될 거니까.”

민우는 웃으며 고기를 한 점 집어 입에 넣었다.

* * *

월요일 아침. 민우는 307호에 느긋하게 앉아 <태엽시계>를 읽었다. 번역은 후반부만 남아 있었는데 먼저 읽고 느낌을 잡으려는 것이다.

‘이것도 연말쯤이면 다 끝나겠다.’

납기일은 내년 1월 15일. 민우는 미리 작업을 끝내놓고 <오멜라스의 마녀> 번역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때 메일 수신음이 들렸다.

민우는 잠시 책을 내려놓고 노트북에 돌아앉았다. 고두열 과장이 보낸 메일이었다.

― 금일 폴라베어 북스에 샘플 번역본을 전달했습니다. 소개서와 기타 서류를 준비하느라 예상보다 조금 늦어졌네요. 통상적으로 검토에는 보름 정도 걸립니다. 완성본 작업도 끝까지 잘 마무리해 주시길 바랍니다.

‘드디어 샘플이 넘어간 건가.’

민우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추가 샘플을 요구할 수도 있고, 계약이 결렬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계약이 성사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는 한 이 두근거림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이 양반은 메일에서도 고압적인 느낌이 풍기네. 다른 사람들한테도 이러나?’

예전에 애써 회의록을 정리해 준 일이 있는데, 괜한 일을 했나 싶었다. 혀를 찬 민우는 메일 창을 끄려다 생각을 바꿨다.

‘비즈니스.’

답장 버튼을 눌러 타이핑을 시작했다. 서류 준비에 고생 많으셨고 납기일에 맞춰 원고를 보내드리겠다는 상투적인 인사말을 보냈다.

발송 버튼을 누른 민우는 다시 비스듬히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계약. 잘됐으면 좋겠는데…….’

띠링!

그때 다시 메일 수신음이 들렸다. 그새 고두열 과장이 다시 답장을 보낸 걸까? 민우는 다시 노트북을 잡고 메일을 확인했다.

그런데 고두열 과장이 아니었다.

‘왔다!’

민우의 눈이 반짝였다. 국제비교문학회 안유진 간사의 메일이었다. 학회에 참가해 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웹하드 주소와 패스워드를 메일로 보냈다.

민우는 바로 주소를 클릭해 웹하드에 접속했다. 1기가가 넘는 용량의 동영상이 들어 있었다.

‘일단 파일 저장하고.’

민우는 미디어 플레이어로 동영상을 재생했다. 총 20분 길이였는데, 그것은 민우의 발표를 영상으로 담은 파일이었다.

제일 먼저 동영상의 끝부분을 확인했다. 미리 부탁한 대로 토론 부분은 편집되어 있었다. 민우의 강의만 들어갔다.

토론 장면은 애초에 편집해달라고 말했다. 서강일을 배려한 것이다. 만년필을 쓴 이상 반드시 이길 거라고 생각했기에.

민우는 이어폰을 꽂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동영상을 재생했다.

‘생각보다 화질이 좋네. 음성 상태도 고르고. 좋은 자료가 되겠어.’

민우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동영상을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해서는 이미 머릿속에 계획이 잡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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