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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수확의 계절 (1) (131/500)


131. 수확의 계절 (1)
2021.12.02.


서지훈 교수는 학회 3부가 시작되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민우가 따라 일어섰다.

“가시게요?”

“가야지. 잠깐 시간 내서 들른 거야. 나 그렇게 한가한 사람 아니다.”

“왠지 요즘 서울에 자주 오시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요.”

서지훈 교수는 씨익 웃었다. 명인대로 옮긴다는 사실을 슬슬 알려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회가 끝났으니까.

하지만 장소가 적당하지 않았다. 눈과 귀가 너무 많았다. 무엇보다도 민영환 교수가 옆에 있었다.

“다음 주에 또 올라올 일이 있을 거다. 할 얘기가 있으니 그때 보자꾸나.”

“할 얘기요?”

민우가 의문을 표했지만, 서지훈 교수는 말없이 그의 어깨를 다독이곤 옆에 앉아 있는 민영환 교수에게 꾸벅 인사했다.

“민 선생님.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래. 조심히 가게.”

서지훈 교수는 외투를 휘날리며 발표장을 나섰다. 민우가 따라나서려고 하자, 그가 손을 들어서 나오지 말라고 신호했다.

“벌써 가시는 거?”

어느새 진섭이 다가왔다. 진섭은 이재환과 뒤쪽에 같이 있었는데, 이재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선약이 있으시대. 근데 재환이 형은?”

“아까 너 발표 끝나고 바로 가셨지. 인사 대신 전해주라고 하셨어. 오늘 학회가 좀 많은 모양이야. 다른 학회 간다고 하시던데.”

“그래?”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임 교수인 만큼 여기저기서 부르는 곳이 많을 것이다. 교수 사회도 일종의 비즈니스이기 때문에 얼굴을 자주 비추는 것이 좋다.

진섭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근데 강일이는 집에 갔냐? 탈탈 털리고 멘탈 나갔나 보네. 하긴, 내가 봐도 좀 무리수를 던지더라고. 토론할 때 억지가 좀 있었어.”

“그 정도로 멘탈 나갈 애 아니야. 어디서 바람이라도 쐬고 있겠지.”

“이 추운 겨울에?”

그때 백발의 점잖은 사내가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한일대 국문과 장소필 교수였다. 그를 알아본 민영환 교수가 일어섰다.

민우와 진섭은 자연스레 뒤로 물러났다. 거물과 거물의 만남이었다.

“오, 민 선생! 이거 오랜만이군요. 강녕하시지요?”

장소필 교수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청했다. 연배는 그가 위였지만 예의가 있었다. 민영환 교수가 양손으로 악수했다.

“저야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강의하고 논문 쓰고, 늘 마찬가지지요. 선생님은요?”

“같은 처지에 뭘 또 묻습니까. 하하하. 아무튼 이렇게 자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한번 만나 진득하니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마침 오늘 기회가 닿았군요. 이따 저녁 뒤풀이는 참여하십니까?”

장소필 교수가 친근히 물었고, 민영환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에. 일단 그럴 생각으로 앉아 있습니다.”

“그거 잘됐습니다! 하하하.”

내용만 들으면 화기애애했다. 하지만 민우는 미묘한 불협화음을 느꼈다. 학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알력 같은 것을.

장소필 교수가 민우를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제자를 잘 키우셨더군요. 민우 군의 발표는 정말 감명 깊었습니다. 아, 정말로요. 나이에 어울리지 않은 통찰력이 돋보이더군요.”

“특별할 게 있겠습니까? 이제 석사 2학기인데요. 그나저나 서강일 선생도 제법이더군요.”

서강일 선생. 그 표현 하나에 기류가 확 바뀌었다.

“아아, 뭐 그렇긴 하지요…….”

장소필 교수가 어색하게 웃었다. 민영환 교수가 일부러 서강일을 ‘선생’이라 칭했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졸지에 격 없는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잠깐이었다. 민영환 교수가 분위기를 환기시킬 겸 하나를 제안했다.

“다음에는 롤을 바꿔서 무대에 세워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이번엔 우리 박 선생이 발표를 했으니 다음엔 토론자로 나서보는 것도 좋겠군요.”

곁에서 지켜보던 진섭은 혀를 내둘렀다. 까다롭기로 소문난 민영환 교수의 입에서 ‘우리 박 선생’이라는 표현이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물론 민우를 인정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치적인 이유도 있다. 제자를 추어올리는 것이 자신을 빛내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한편 민우는 그 장면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여기가 적지 한가운데이긴 한가 보네. 기 싸움이 치열하다.’

명인대와 한일대는 역사적으로 경쟁 관계였다. 사회적 인식은 명인대가 위였지만, 실속으로는 한일대도 만만치 않았다.

민족문화의 요체인 국문과도 그 경쟁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아직은 명인대가 약간 앞서고 있지만, 현재까지의 이야기일 뿐이다. 미래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랐다.

‘오늘부로 학계에 데뷔했어. 이제는 명인대 안에서가 아니라 더 큰 무대에서 활약할 때야.’

그렇게 결론을 내린 민우가 고개를 돌렸다. 민영환 교수와 눈이 마주쳤다. 민우는 토론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의지를 보였다.

한편 장소필은 눈을 굴리며 자신의 제자를 찾고 있었다.

‘강일이 이놈은 대체 어디를 간 거야?’

사방을 둘러봐도 서강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찾는 것을 포기하곤 혀를 찼다.

“어떻습니까?”

민영환 교수의 목소리였다. 살짝 놀란 장소필 교수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 예. 그거 좋은 생각이군요. 봄에는 신학기라 바쁠 때니, 에…… 내년 하계 학술대회에서 한번 무대를 만들어 보는 건 어떻습니까? 그 무렵이면 두 사람 모두 석사 논문을 쓸 때니까 말입니다.”

“그때는 제가 현대문학연구학회로 초대를 하겠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장소필 교수는 미소를 지었지만 이면으론 불쾌했다.

자신이 의도한 무대는 당연히 국제비교문학회였다. 하지만 민영환 교수는 현대문학연구학회로 초대하겠다고 선수를 쳤다.

‘하지만.’

이미 외통수에 걸린 상황이었다. 청을 거절하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해졌다.

‘민 선생에게까지 한 방 먹은 기분이로군. 최악이야. 최악!’

믿고 있던 애제자가 참패를 당했다. 이번 토론은 민우의, 아니 명인대 진영의 완벽한 승리였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소필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초청을 기다리고 있지요. 내년 여름이라……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그때쯤이면 많은 것들이 바뀌어 있겠군요.”

많은 것들이 바뀐다.

그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남긴 장소필 교수가 민우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박민우 선생.”

민우를 칭하는 호칭이 군에서 선생으로 바뀌었다. 민영환 교수는 사각에서 피식 웃었다.

“오늘 발표 잘 들었네. 앞으로가 기대되는군. 수고 많았네. 피에르 랑느 박사의 강연 유치에 큰 공을 세웠다고 들었는데, 그건 나중에 따로 인사를 하지.”

“좋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겸손한 친구로군. 자,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 보니.”

장소필 교수는 적당히 인사를 하고 발표장을 빠져나갔다. 걸음걸이가 썩 유쾌해 보이진 않았다. 반면 민영환 교수는 여유가 있었다.

“내년 여름에도 학회 준비를 해야겠구나.”

“봄에도 할 겁니다.”

의외의 발언에 민영환 교수가 살짝 놀랐다. 민우가 이어 말했다.

“여름까지 기다리려면 좀 지루할 것 같아서요. 한 학기에 한두 번 정도는 학회에서 발표를 할까 합니다.”

“무리하지는 마라. 대학원 수업도 중요하니까.”

“옙.”

민영환 교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발표를 보지 못했더라면 말렸을 것이다. 하지만 민우에겐 그럴 능력이 있었다.

그때 문득 걸리는 게 하나 떠올랐다.

서지훈 교수의 귀환.

‘내년부터는 논문 지도를 지훈이에게 맡겨야 하나?’

민영환 교수는 턱을 쓸어 만졌다. 생각이 깊어졌다. 욕심이 생기자마자 갈등이 생긴 것.

민우와 서지훈 교수는 두껍고 질긴 끈으로 이어져 있었다. 만약 서지훈 교수가 명인대로 돌아온다면, 민우는 그에게 지도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

여차하면 석사 논문 지도교수를 서지훈 교수로 바꿀 수도 있다. 막을 명분은 없다. 모교의 지도교수가 왔는데 바꾸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박민우.”

“예?”

말을 꺼내려던 민영환 교수가 단념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까 서지훈 교수가 돌아가기 전에 했던 말을 떠올린 것이다.

그는 민우에게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말했다.

애써 자신을 배려해 이 자리에서 이직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아니다. 앉아라. 곧 3부가 시작하겠어.”

“커피 좀 갖다 드릴까요?”

“좋지.”

민우와 진섭이 다과 테이블로 이동했다. 그 뒷모습을 보며 민영환 교수는 침음을 흘렸다.

* * *

“더럽게 춥네.”

“더럽게 추운데 왜 나와요. 안에나 있지.”

“답답해서.”

서강일이 컨벤션홀 난간에 기댔다. 돌아서니 몸을 웅크리며 벌벌 떠는 강민희의 모습이 보였다. 추위에 볼이 빨갛게 익었다.

“춥냐? 나도 춥다.”

뭔 개소리야.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강민희는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언제 적 유행어야. 뭐라 한마디 하려던 찰나, 그녀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서강일이 외투를 벗어 자신의 몸에 둘러주었다.

여전히 추웠지만, 마음은 좀 따뜻해졌다. 강민희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인마. 뭘 그리 풀이 죽어 있어?”

“졌잖아요.”

서강일의 입에서 뽀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한숨이었다.

“그게 네 탓이냐?”

“인문학 공모전에서도 지고.”

“지난 얘기는 또 왜 꺼내?”

“루카치의 저서는 그렇다 쳐도…… 최유찬과 전기철의 논문을 찾지 못한 건 제 실책이잖아요. 국내 저술이라 찾기 어렵지 않았을 텐데.”

아까 서강일이 마지막으로 공격한 대목을 말하는 것이었다. 민우는 그가 미처 읽지 못한 저술이 있다고 지적했다. 자료 싸움에서 진 것이다.

“열심히 찾았는데. 열심히…….”

어느새 강민희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어깨가 떨리고 있다. 울고 있는 걸까. 서강일은 난처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강민희 선생님?”

“…….”

“민희 씨?”

“…….”

“민희 누나?”

“그건 좀 아닌 거 같은데요.”

그제야 강민희가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가 물기를 흠뻑 머금어 반짝였지만, 쏟아내진 않은 모양이다. 다행이었다.

서강일이 강민희의 어깨를 꽉 쥐었다. 그리고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잘 들어. 자료가 충분하다고 판단한 건 나다. 내 탓이지 네 탓이 아냐. 응? 넌 최선을 다했고. 물론 네가 잘못한 게 없다는 건 아냐. 큰 잘못을 하나 하긴 했지.”

“큰 잘못이요? 그게…… 뭔데요?”

“부탁인데 메로나 타령 좀 그만해. 한겨울에. 짜증 나니까.”

“뭐래.”

인상을 찌푸린 강민희가 서강일의 손을 툭 쳤다. 그리고 홱 돌아서 컨벤션홀로 걸어갔다. 혼자 낄낄거리며 웃은 서강일도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때마침 장소필 교수가 컨벤션홀 입구로 나오고 있었다. 서강일이 흠칫 놀라며 꾸벅 인사했다. 강민희도 마찬가지였다.

서강일이 물었다.

“선생님. 벌써 가십니까?”

“벌써?”

장소필 교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나가야지.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질 못하겠더군.”

힐난조였다. 장소필 교수의 눈에는 자비심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서강일도 그의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명인대 출신도 아닌 일개 서자한테 박살 난 기분이 어떤가?”

서강일은 고개를 들어 장소필 교수를 응시했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그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춥습니다.”

“그래. 춥겠지. 다음 무대는 내년 여름이다. 민영환 선생과 약속을 하나 했는데, 그때는 네가 발표를 하고 민우 군이 토론을 하기로 했다. 오늘 같은 실수는 범하지 않겠지?”

“물론이죠.”

“교수가 될 자격이 있다는 걸 보여줄 때가 되었지. 너도.”

그 말을 끝으로 장소필 교수가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서강일은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꾸벅 인사했다.

그때 어깨에 뭔가가 걸렸다. 자신의 외투였다.

“뭐야?”

“춥다면서요.”

그 한마디가 끝이었다. 뚱한 표정을 지은 강민희가 컨벤션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내년 여름.’

외투를 만지작거리던 서강일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그래. 아직 끝난 건 아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지.’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외투를 제대로 걸친 그는 강민희를 따라 학회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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