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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To make the end of battle (1) (128/500)


128. To make the end of battle (1)
2021.11.25.


드라마에서나 보던 고급 레스토랑에 처음 온 민우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착석했다.

집기와 벽에 걸린 장식이 마치 궁전에서나 쓰일 법하게 고급스러웠고, 여유로운 걸음으로 오가는 직원들의 미소도 그만큼의 격이 있었다.

주문은 연주가 직접 했다.

메뉴판에 없는 몇 가지 요리를 언급했는데 중년의 직원은 바로 준비해 드리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상부에 VIP가 방문했다고 보고했다.

연주가 언급한 건 대한그룹 로열패밀리들이 주로 먹는 오찬 메뉴였다.

세 사람은 음식을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눴다.

민우가 프랑스어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화는 영어로 진행되었다. 연주는 본토에서 오래 살다 온 사람처럼 능숙하게 영어를 구사했다.

「아, 그렇군. 그럼 미스 정은 프로젝트를 하며 미스터 박을 만난 거로군.」

「맞아요. 지금도 같이 번역 프로젝트를 하나 하고 있고요.」

「어떤?」

연주는 생긋 웃으며 두 손으로 랑느 박사 본인을 가리켰다. 뒤늦게 자신의 저서가 명인대에서 번역되고 있다는 걸 깨달은 랑느 박사가 박수를 치며 껄껄 웃었다.

「맞아, 맞아. 그랬지. 하하하! 닥터 리에게 번역팀이 꾸려졌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그 멤버 중 하나였군. 이거 실례가 많았소.」

랑느 박사는 한국식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연주도 묵례로 받았다.

「그런데 어떻게 내 저서를 읽게 됐소? 아직 한국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텐데.」

「여기 박 선생님 통해서 추천을 받았어요. 최근에 일이 좀 있어서 학교를 떠나 있었는데, 박 선생님 덕분에 박사님 책을 접할 수 있었지요.」

「그랬군. 아, 혹시 미스터 박이 예전에 말하던 여자친구가 미스 정이오?」

두 사람이 깜짝 놀랐다. 연주는 얼굴이 빨개졌고, 민우는 웃으며 아니라고 답했다.

「실례했군. 워낙 잘 어울려 보여서 말이오. 아무튼 그건 그렇고…….」

랑느 박사는 계속 연주에게 질문을 던졌다. 궁금한 게 굉장히 많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음식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민우는 조금 실망했다. 음식의 양보다 그릇의 빈 공간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점 집어먹은 민우는 생각을 바꿔야 했다. 구수한 풍미를 가득 담은 육즙이 싱싱한 야채가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던 것.

혀가 포근해지는 것은 물론, 속까지 든든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제야 민우는 음식을 양이 아니라 맛으로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맛이 어떠세요?」

「훌륭해!」

그 한마디가 끝이었다. 랑느 박사도 민우처럼 음식을 집어 먹기에 바빴다.

연주가 물었다.

「그런데 가족분들은 어디 계셔요? 같이 오셨다고 들었는데요.」

「오전에 아이들과 같이 서울 나들이를 나갔소. 아내의 친구가 마침 서울에 있다고 하더군. 이따 점심을 먹고 인사동에서 합류하기로 했지. 예전에 미스터 박과 갔던 찻집이 있는데 다시 한번 가볼 생각이오.」

「서울에는 디저트 카페가 많습니다. 제가 몇 군데 찾아왔는데 기회가 되면 한번 가보시죠.」

민우는 가방에서 인쇄물을 꺼냈다. 지도와 교통편을 보기 좋게 정리한 자료였다. 그것을 받아 든 랑느 박사는 환하게 웃었다.

「오오, 고맙소. 무척 유용하게 쓰일 것 같군.」

랑느 박사는 한동안 인쇄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민우의 꼼꼼한 성격이 잘 나타나 있었다. 동선을 형광펜으로 표시하고, 헷갈릴 수 있는 구역은 로드뷰 사진을 인쇄해서 붙여 놓았다.

민우가 말했다.

「혹시 찾기가 어려우시면 언제든 전화하시고요.」

「어떻게든 내가 해 봐야지. 학회 발표 때문에 바쁠 텐데 귀찮게 할 수는 없소.」

「발표 준비는 거의 끝나서요. 괜찮습니다.」

그때 랑느 박사의 핸드폰이 울렸다. 박사가 두 사람에게 양해를 구했다.

「잠시 실례하겠소.」

랑느 박사가 자리를 뜨자 기회다 싶었다.

연주에게 물어볼 말이 정말 많았다. 퇴원 후 통화를 한 번 했었는데, 자세한 건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해서 내막을 모르고 있었다.

“회사는 어떻게 된 거야? 누나한테 얼핏 듣긴 했는데. 다른 이사님이 오셨다면서.”

“선우기획에는 더 이상 안 나갈 거 같아요.”

그렇게 답한 연주가 살짝 웃었다. 인사조정을 당한 사람치고 즐거워 보였다. 맞는 말이다. 일이 좋게 풀리고 있었다.

“할아버지도 건강이 안 좋으시고, 저도 그렇게 되니까 줄초상 치를 일 있냐며 어머니가 반대를 많이 하셨어요. 아버지도 생각이 좀 바뀌신 거 같고. 그래서 일단은 그룹 내에서 대기발령 중이에요.”

“그럼 학교로 돌아올 수 있는 거야?”

연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내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유학을 갈지도 모르고. 시간 날 때 아버지랑 더 이야기를 해 봐야죠.”

연주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 미소를 확인한 민우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공부,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다.”

“저도요.”

그렇게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여운을 즐겼다.

식사가 끝나자 약속대로 연주가 계산을 했다. 뭔가 주문이 잘못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은 금액이 나와 놀랐다.

그런데 그때, 고급스러운 정장을 입은 젊은 남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정연주 이사님.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 본부장님.”

호텔 관계자로 보이는 사내였다. 그가 꾸벅 인사를 했다. 연주도 일면식이 있는지 알은척을 했다.

“식사는 입에 맞으셨습니까? 미리 연락을 주셨더라면 좀 더 신경을 썼을 텐데요.”

“손님 모두에게 최선을 다하는 거 알고 있는데 그럴 필요 있나요.”

“하하하. 과찬이십니다.”

호감 가는 미소를 가진 사내였다.

그는 호텔의 최근 동향을 전하며 특별 이용권이 든 봉투를 연주에게 선물하려고 했다. 하지만 연주는 마음만 받겠다고 말하며 자리를 떴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비를 나서 호텔 입구로 향했다.

「그럼 난 이제 인사동으로 가봐야겠소. 오늘 시간 내줘서 정말 고맙소.」

「오히려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 모쪼록 가족분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민우가 꾸벅 인사했다. 랑느 박사가 택시에 오르며 한마디 남겼다.

「학회에서의 활약, 기대하고 있겠소.」

랑느 박사를 태운 택시가 호텔에서 서서히 멀어졌다. 두 사람은 택시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화를 시작했다.

“발표 준비는 많이 하셨어요?”

대답이 없었다. 이상함을 느낀 연주가 고개를 돌렸다. 민우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 * *

12월 16일 금요일.

아침 일찍 일어난 민우는 오랜만에 정장을 입었다. 넥타이는 매지 않았다. 와이셔츠의 단추 하나를 풀어 스타일리시한 느낌을 살렸다.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다듬을 때 전화가 왔다. 수빈이었다.

― 출발했어요?

“아니. 이제 나가려고. 넌?”

― 아직 비행기 타기 전이에요. 한 시간 연착돼서 좀 기다려야 할 모양이에요. 완전 짜증.

“하하하. 짜증 내지 말고 재미있게 놀다 와. 올 때 선물 잊지 말고. 응?”

수빈은 동남아로 가족여행을 떠난다. 그래서 오늘 학회엔 참석하지 못하게 됐다. 누가 더 올지는 모르겠지만, 민우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지금 민우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발표 생각뿐이었다.

전화를 끊고 다시 옷매무새를 다듬기 시작했다. 춥긴 하지만 코트를 걸쳐야 했다. 구두를 한번 털고 민우는 밖으로 나갔다.

현관을 열고 나가려다 깜짝 놀랐다. 익숙한 고급 세단이 문 앞에 세워져 있던 것이다.

곧 창문이 내려가고 유진태 비서실장의 얼굴이 보였다.

“실장님? 여긴 무슨 일로…….”

“타시죠. 날이 춥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민우는 보조석에 올랐다. 뜨거운 히터 바람이 몸을 따뜻이 녹였다. 곧 차가 엔진음을 내며 달리기 시작했다.

유진태가 쾌활하게 말했다.

“오늘 학회는 한일대에서 열리지요? 거기까지 안전히 모시겠습니다.”

“잠깐만요. 연주가 보낸 겁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아닙니다.”

그는 한차례 웃었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가씨가 걱정을 많이 하시더군요. 오늘 중요한 학회가 있는데 추워서 컨디션이 안 좋아지면 어떻게 하냐고. 전에 박 선생님께 개인적으로 진 빚도 있고 해서 개인적으로 온 겁니다.”

“이러실 필요까진 없는데.”

그러면서도 민우는 슬쩍 보조석의 열선 시트 버튼을 눌렀다.

평일 오전 늦은 시간이라 차가 막히지 않아 한일대까지는 금방이었다. 학회가 열리는 컨벤션홀 앞에 차가 서자 민우는 안전 벨트를 풀었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제가 밥 한번 살게요.”

“제가 오늘 태워다 드린 건 아가씨께 비밀입니다. 잘하고 오십시오.”

차에서 내린 민우는 꾸벅 인사를 하고 컨벤션홀로 들어갔다. 국제비교문학회 관련 입간판이 서 있었고, 안내선을 따라 움직였다.

C홀 앞에서 한창 학회 접수가 진행되고 있었다. 젊은 여성 두 명이 민우를 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접수 도와드리겠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박민우입니다.”

“박민우…… 아? 혹시 오후에 발표하시는 박 선생님이신가요?”

“맞습니다.”

“반갑습니다. 처음 뵙네요.”

국제비교문학회 총무간사 안유진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메일만 주고받던 사이라 이렇게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보통 발표 시간에 맞춰들 오시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듣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전 학회에 참석하러 온 거지 행사에 온 게 아니니까요.”

예전에 학회에 참석한 랑느 박사가 했던 말이기도 했다. 만약 랑느 박사가 아니었다면, 민우는 다른 발표자들처럼 시간에 맞춰 왔을 것이다.

그 말에 총무간사 안유진의 눈빛이 변했다. 반짝반짝.

“자, 이거 받으시고요. 다과는 저 뒤쪽에 준비되어 있으니 부담 갖지 마시고 드세요. 그리고 더 필요하신 거 있으면 말씀하시고요.”

“감사합니다.”

민우는 명찰과 학회지 복사본, 그리고 안내지를 받아들고 강당으로 들어섰다.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어림잡아 스무 명도 채 안 됐다.

‘이야. 명색이 KCI급 학술지를 내는 학회인데…… 이렇게 사람이 없을 줄은 몰랐네.’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체감되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실망감도 잠시, 민우는 뜨거운 녹차를 홀짝이며 오늘 오전의 발표내용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대부분 교수 혹은 강사들의 논문이 실렸다. 대학원생, 특히 석사과정인 사람은 민우 한 명뿐이었다.

이번 학회의 테마는 ‘한국의 근대성과 번역’이었다. 민우의 논문과는 거리가 먼 테마였다. 그래서 민우의 발표는 특별 기고로 실리게 됐다. 랑느 박사의 논문도 마찬가지였다.

「미스터 박!」

익숙한 목소리. 랑느 박사가 강당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민우는 일어서 그와 악수했다.

「역시 일찍 오셨군요.」

「일찍은 무슨. 늦잠을 잔 탓에 한일대 캠퍼스를 둘러보지 못한 게 유감이지.」

「이따 학회 끝나고 한번 도시지요. 마침 잘 아는 친구가 여기에 있습니다.」

서강일이 영어를 잘할지는 모르겠지만, 캠퍼스 안내는 그에게 맡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자대생이라 학교에 오래 있었으니까.

그때 영문과의 박진영 교수가 홀 안으로 급히 뛰어왔다.

민우가 그에게 묵례했다. 랑느 박사가 박진영 교수와 악수를 나누자 그를 간단히 소개했다.

「이쪽은 한일대 영문과의 박진영 교수님입니다. 박사님 발표 건으로 힘을 써주신 분이기도 하고요.」

「어려운 부탁이었을 텐데 들어주셔서 고맙소.」

「아닙니다. 저희 학회에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어 랑느 박사의 이름을 듣고 몇몇 불문과 교수들이 합세했다. 그 틈을 타 민우는 살짝 자리를 옮겨 오늘 발표될 논문들을 미리 읽었다.

그렇게 학회가 시작되었다.

학회장의 연설을 시작으로 두 건의 발표가 이어졌다. 점심은 한일대 교직원식당에서 해결했다.

점심을 먹고 민우는 발표문을 처음부터 다시 검토했다. 307호 멤버들과 이재환, 최민식, 강예진 선배의 피드백을 적은 노트도 함께 읽었다.

그때 옆에서 인기척이 났다.

“박 선생님?”

총무간사 안유진이었다. 그녀가 웃으며 단상 앞을 가리켰다.

“곧 발표니까 앞으로 자리를 이동해 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민우가 짐을 챙겨 앞으로 가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서강일이었다. 그 옆에는 강민희가 못마땅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민우는 애써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물었다.

“언제 왔어?”

“아까.”

“피곤해 보인다 너.”

“누구 덕분에 철야 좀 했죠.”

강민희가 대신 대답했고, 두 사람은 실실 웃었다.

그리고 곧 무대가 열렸다.

발표가 끝나고 사회자가 마이크를 들었다.

“5분 휴식 후 다음 순서를 진행하겠습니다. 명인대의 박민우 선생님께서 ‘1950년대 실존주의 문학의 재조명’이라는 테마로 발표를 해 주시겠습니다. 토론자는 한일대의 서강일 선생님입니다.”

서강일이 먼저 연단으로 나섰다. 그의 손에 들린 자료가 눈에 들어왔다. 어떤 것을 준비해 왔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민우도 발표자료를 챙겼다.

무심코 청중석을 바라본 민우는 깜짝 놀랐다.

이재환이 팔짱을 끼며 웃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한진섭이 손을 흔들며 입을 뻐끔거렸다. 파이팅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시선이 옮겨졌다. 믿을 수 없게도 민영환 교수가 근엄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한쪽 구석에서 서지훈 교수가 자신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어디 한번 끝까지 해보라는 그런 미소였다.

그리고 랑느 박사까지.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기고 지는 게 문제는 아니라지만.’

가방을 열었다. 나무 상자를 여니 루카치의 만년필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민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만년필을 쓸까 말까 끝까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찾아온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오늘은 꼭 이겨야겠다!’

만년필을 꺼냈다. 민우의 손에서 만년필이 한 바퀴 회전했다.

번쩍!

푸른빛이 잠에서 깨어났다.

민우는 만년필을 안주머니에 꽂고 연단에 올랐다. 조명 아래에서 서강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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