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지원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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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지원군 (2)
2021.11.22.
민우는 맥주를 마시며 선배들의 눈치를 살폈다.
‘이거 딱 합평 받는 느낌인데?’
문득 상아대 시절이 떠올랐다. 상아문학회에서 직접 창작한 작품을 두고 여럿이 모여 각자의 소감을 말하던 때가 있었다.
아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민우도 한때 소설을 썼었다. 그러나 창작에 재능이 없다는 걸 금방 깨닫고는 더는 쓰지 않았다.
오히려 연구나 문예비평 쪽이 적성에 맞았다. 감성을 다듬는 것보다 논리가 좋았던 것이다. 그래서 대학원에 진학한 거다.
그런데 합평을 하는 건 논문도 마찬가지였다. 대개 수업 시간에 진행한다.
과제로 제출한 논문을 돌려보며 논리적 오류나 비약, 잘못된 전제, 지식의 오용 등을 찾아 토론하는 것이 대학원 수업의 일부였다.
뼈아픈 말들을 많이 들었다.
루카치의 유물을 얻기 전까지, 그리고 민식과 공저로 단행본을 내기 전까지는 논문을 제대로 쓸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 그래도 석사 구실은 제대로 할 자신이 있어.’
최민식에게 기본을 배운 민우는 루카치의 안경으로 얻은 지식을 꿰어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됐다. 거기에 민영환 교수의 도움을 받았다.
깨달음과 깨달음이 이어지며, 민우의 머릿속에 하나의 체계가 완성되었다. 그 완성된 체계는 민우에게 자신감과 그만큼의 실력을 선사해 주었다.
‘그렇긴 해도. 역시…….’
민우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논문을 읽는 사람 모두 명인대 국문과, 그것도 현대소설 분야에서 한창 치고 올라오는 사람들이었다.
교수가 된 이재환은 말할 것도 없고, 최민식도 한창 학계에서 빛날 시기였으며, 강예진은 박사과정을 밟으며 자신의 손에 맞는 무기를 벼려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석사과정 수업에서 나올 법한 허술한 질문 같은 건 하지 않으시겠지?’
한마디, 한마디가 무림의 절대고수가 던진 비수처럼 가슴에 틀어박힐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얻어가는 것이 많을 터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렀다.
가장 먼저 논문을 내려놓은 것은 강예진 쪽이었다.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은 건지 어떤 건지 확실치 않았다.
“이런, 맥주가 떨어졌네.”
강예진이 봉지를 뒤적이며 딴청을 피웠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학술답사 때 쟁여놓은 술도 다 떨어져 있었다.
민우가 나섰다.
“제가 사 올게요.”
“아니. 추운데 왔다 갔다 하긴 좀 그렇잖아. 그냥 자리를 옮기는 게 낫지 않나? 오라버니들 어때요? 민우한테 수업료는 받아야죠.”
“그거 좋은 생각이다.”
세 사람은 모두 민우가 최근 번역으로 꽤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때마침 이재환과 최민식이 동시에 검토를 끝냈다.
침묵이 흘렀다. 세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어떤 이야기를 꺼낼지를 고민했다.
“석사 주제에 시론을 썼네.”
최민식이었다. 그 한마디가 너무나도 강렬해서, 눈이 번쩍할 정도의 검기가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최민식이 연격을 날렸다.
“시론은 말 그대로 시험적인 논의라는 건데. 보통은 한 분야에 정통한 사람이 새로운 관점을 보여줄 때 사용하는 방식이지. 그렇지?”
“그렇습니다.”
“문학 이론도 아니고 순수 철학으로 시론을 쓰는 게 가당키나 해? 논문의 완성도를 떠나 너 스스로가 감당할 수 있겠어?”
평소였다면 겸손하게 답했을 것이다. 능력은 부족하지만 해보는 데까지 해보겠다고.
하지만 민우는 민영환 교수의 비전(秘典)을 이어받았다. 게다가 적당히 취기가 오른 상황. 일단 민우는 민식의 질문을 받아 적었다.
펜이 멈춘 순간 민우의 눈빛이 달라졌다. 민식을 빤히 바라보며 답했다.
“반대로 그 분야에 정통하기 위해서 시론을 쓸 수도 있다고 봅니다. 시험적인 논의니까, 오히려 여러 가지 가능성을 제시해볼 수 있는 거죠. 그 과정을 통해 얻는 것도 있을 거고요. 공부가 부족한 건 사실이지만 제 논의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는 됐다고 생각합니다.”
최민식이 깜짝 놀랐다. 옆에서 지켜보던 이재환은 웃기만 했다.
최민식이 진지하게 물었다.
“너 취했냐?”
“조금 알딸딸한 게 기분이 좋네요. 아, 제가 이따 술 사야 해서 삐뚤어진 건 절대 아닙니다. 저 그렇게 소심한 놈 아녜요. 아시잖아요.”
민우가 너스레를 부리는 여유까지 보였다.
민식은, 아니 세 선배는 그 미소에서 이질감을 느꼈다. 평소라면 숙이고 들어갔을 텐데 지금의 모습은 너무나 당당하지 않은가.
이유는 간단했다. 민우가 쥔 만년필에서 푸른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만약 술이 없었더라면 민우는 루카치의 만년필을 손에 쥐지 않았을 것이다. 논박을 벌일 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취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까마득한 후배의 논박도 용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피와 살이 되어 발표에 도움이 되겠지.’
명인대 국문과는 술에 관대했다.
엄격한 학풍 때문에 맨정신으로는 선후배 간 솔직한 이야기를 하기 어렵다. 술자리에서 언성이 높아져도, 다음 날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으로 돌아온다.
민우는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는 여유를 보였다. 그때 이재환이 말했다.
“확실히 실존주의에 대한 개념은 잡혀있는 거 같은데. 인간의 불안과 고독, 그리고 극복이 불가능한 비극성에 관한 고찰이 손창섭과 장용학의 소설을 돋보이게 하고 있어. 분석이라기보다는 해석에 가까운 느낌.”
그의 말대로 분석과 해석은 비슷한 느낌이지만 실상은 엄연히 다르다. 작품 분석이 일차원적인 재료를 준비하는 거라면, 해석은 요리를 만드는 것과 같다.
최민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강예진은 뚱한 표정이다. 그녀는 실존주의 철학에 대해 그리 지식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표정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이재환이 논문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좀 놀랐다. 뭔가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시론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극찬이었다.
민우는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꾹 참아냈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필기를 시작했다.
“왜 그런 거 있잖아? 시론은 태생적으로 논리가 약하지. 그러면서도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맛이 있어. 그래서 평론에 가까운 거기도 한데.”
이재환이 잠시 말을 끊고 다시 민우의 논문을 바라보았다. 잔뼈가 굵은 본인도 잘 표현하기 어려운 그런 매력이 느껴졌다.
정성과 애정이 느껴지는 한 편의 논문이었다.
“어떻게 이런 논문을 쓴 거지? 솔직히 믿기지가 않아. 음, 오늘따라 솔직히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 느낌인데. 아무튼.”
“민 선생님이 방향을 잘 잡아 주셨습니다.”
“민 선생님이 봐주셨다고?”
“네.”
민우는 루카치의 유물에 대한 이야기 대신 민 교수를 지목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대답을 피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민 교수가 없었더라면 이 논문은 나오지 않았을 테니까.
이재환은 깜짝 놀랐다.
얼마 전 교수임용이 확정되고 나서 민영환 교수를 만났을 때 살짝 그를 떠본 일이 있었다. 앞으로 민우를 키워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지만 그때 민영환 교수는 민우를 키우는 것에 부정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타대생이라는 이유로. 그런데 그의 논문을 봐줬다니?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이재환이 다시 물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지도를 해 주셨어?”
“서론 부분을 꽉 잡아 주셨죠. 빨간 체크가 수두룩했어요. 이후 본론을 어떻게 전개해야 하는지 가이드도 해 주셨고. 그런데…… 정작 본론은 지도를 못 받았습니다.”
“왜?”
“멋 부린 곳도, 논리적인 비약이 있는 곳도 있지만 학회에서 직접 배우고 오라고 하셨어요. 세상에 완벽한 논문은 없다. 고치고 고쳐도 공격은 계속 들어오니, 결과를 생각하지 말고 그 과정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고민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정말 그러셨단 말이지?”
이재환은 팔짱을 끼며 생각에 잠겼다.
익숙한 말이었다.
‘나도 박사과정 때 들었던 이야기였지. 처음 학회에서 발표할 때.’
이재환이 최민식을 바라보았다. 그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웃었다. 타다생인 민우의 위상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알게 됐다.
이어 입을 연 건 최민식 쪽이었다. 그는 민우의 논문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럼 더 이상의 논의는 무의미하겠네요.”
“그렇지. 우리가 나서서 이래라저래라 떠드는 건 민 선생님의 가르침에 역행하는 거니까.”
“저도 동감이요.”
세 선배가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논문에 대한 합평이 시시하게 끝나 버렸다. 다소 허탈한 마음에 민우가 맥주를 마저 비우며 불평했다.
“선배님들. 수업료가 지나치게 비싼 거 아닙니까? 딱 한마디씩만 하시고. 아니지. 예진 누나는 한마디도 안 했네요.”
“짜샤. 원래 세상은 불공평한 거야.”
예진이 도도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다른 선배들과는 다르게 민우의 논문을 가방에 넣었다. 집에 가서 더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재환이 자리에서 먼저 일어섰다.
“그럼 슬슬 나가볼까? 오늘은 파전에 동동주로 달려 보자고.”
“좋죠!”
연구실을 정리한 네 사람은 찬바람을 헤치며 명인대입구역으로 나갔다.
* * *
다음 날, 민우는 숙취를 이겨내며 버스에 올랐다.
자리에 앉아 어젯밤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곰곰이 떠올려본다.
아직도 뇌리에서 떠나가지 않은 한마디.
― 이제 민 선생님도 너를 진짜 제자로 생각하고 계신 거다.
이재환이 그렇게 말했다. 최민식도 고개를 끄덕였으니,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러면서 이재환과 최민식은 그들이 처음 발표를 준비할 때 민영환 교수에게 어떻게 지도를 받았는지를 이야기해 주었다.
놀랍게도 두 사람도 민우와 똑같은 지도를 받았다.
다시 말해, 민우는 그들과 같은 위상에 서게 된 것이다.
‘이제야 뭔가 제자리로 돌아온 느낌이야.’
‘진짜 제자’라는 표현 때문에 마음이 기쁜 것은 아니었다.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기분을 들뜨게 했다. 그래서 어젯밤엔 술잔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번 학회에서 어떤 성과를 내느냐에 따라 대우는 더 달라질 거야.’
민우는 다시 한번 결의를 다졌다.
그때 진동이 울렸다. 전화였다. 민우는 즉시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응. 난 지금 가는 길인데. 어디쯤 왔어?”
― 저도 가는 길이에요. 이제 거의 다 와 가요. 10분 정도 뒤면…… 도착할 거 같아요.
느릿느릿, 조심스러운 말투는 여전했다. 그래도 통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니 다행이다.
민우는 정류장을 확인했다. 골든팰리스 호텔에 도착하려면 아직 30분 정도는 더 가야 했다.
민우가 물었다.
“난 아직 좀 더 가야 해. 그런데 너 무리하는 건 아니지?”
― 이제 괜찮아요. 회사도 계속 쉬게 됐으니까 걱정 없고요.
전화를 건 사람은 정연주였다.
얼마 전 퇴원을 했고, 지금은 순조롭게 회복 중이다. 예전에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랑느 박사를 만나러 가는 중이다.
랑느 박사는 어젯밤에 입국했다. 그리고 오늘 호텔에서 오찬을 함께 하자는 제안을 받은 것이다.
“알았어. 그럼 이따 호텔에서 보자.”
전화를 끊었다.
곧 버스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민우는 걸음을 빨리 움직여 호텔로 이동했다.
저편에서 익숙한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연주와 랑느 박사였다. 어떻게 만난 것인지 두 사람은 즐겁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네.’
아무래도 프랑스어 회화는 아직 무리였다. 글자를 보는 것과 귀로 듣는 것은 천양지차였다.
때마침 랑느 박사가 웃음을 터트리자 연주가 따라 웃었다. 궁금한 나머지 민우가 끼어들었다.
“무슨 얘기야? 못 알아듣겠다.”
민우가 다가오자 연주가 살짝 놀랐다. 하지만 랑느 박사가 조금 더 빨랐다. 그는 반가운 얼굴로 두 팔을 벌렸다.
「미스터 박!」
두 사람이 가볍게 포옹했다. 민우가 영어로 대화를 시작했다.
「그간 잘 지내신 모양입니다. 안색이 훨씬 좋아지셨네요.」
「좋은 곳으로 휴가를 왔는데 안 좋을 리가 없지.」
「다행이네요. 그런데 이 친구와 무슨 이야기를 하신 겁니까? 아직 프랑스어는 잘 안 들려서 말입니다.」
「한식과 양식 중 어떤 걸 좋아하냐고 묻더군. 그래서 한식이 좋다고 하니 자기가 산다고 해서 좋아하던 참이었소.」
「그럼 저도 얻어먹도록 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또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그제야 민우는 연주를 제대로 바라보았다.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느낌. 평소와는 달리 수수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아름다움을 숨길 수는 없었다.
“늦었지만 퇴원 축하해. 그런데 조금 더 잘 먹어야겠는데? 얼굴이 완전히 반쪽이 됐어.”
“그런가요? 이 정도가 딱 적당한 거 같은데…….”
연주는 부끄러운 표정으로 뺨을 매만졌다. 이것도 많이 좋아진 것이었다. 거식증이 한창이었을 때는 거의 뼈밖에 없었으니까.
민우가 랑느 박사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연주는 어떻게 만나신 겁니까? 초면이었을 텐데요.」
「미스 정이 먼저 나를 알아봐 주더군.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수 있었소.」
랑느 박사는 워낙 학계에서 유명한 사람이라 인터넷에서 검색만 해도 여러 사진을 볼 수 있다. 그렇게 찾은 것이었다.
「그렇군요. 일단 식사하시면서 이야기 나누실까요?」
「그러지.」
민우와 나머지 두 사람은 호텔 내부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