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6. 지원군 (1) (126/500)


126. 지원군 (1)
2021.11.19.


민우가 나가자 고두열 과장은 펜을 집어던졌다.

“어린놈의 자식이!”

이를 아득 깨물었다. 고생하라는 말의 의도를 알아챈 것이다.

고두열 과장은 민우의 일거수일투족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영어로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도 재수가 없었다.

악감정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무엇 하나 좋게 보이는 게 없는 상황.

무엇보다도, 스물여덟이라는 젊은 나이에 이 정도의 커리어를 쌓았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설마 내가 질투하고 있는 거야?’

고두열 과장은 피식 웃었다. 그는 그 감정을 부정하지 않았다. 어느 시인이 말하지 않았나. 질투는 나의 힘이라고.

달칵.

그때 자문위원 배웅을 마친 김윤식이 돌아왔다. 분위기가 살벌해진 것을 깨닫고 몸을 사린다.

“저, 과장님? 여기 정리할까요?”

“됐고. 미팅 내용 정리한 거 가져와 봐.”

미팅 과정과 내용을 정리한 건 고두열 과장만이 아니었다. 그 옆에서 김윤식도 나름대로 리스닝을 해가며 내용을 기록했다.

고두열 과장은 삐딱하니 앉아 김윤식이 정리한 내용을 읽어나갔다.

‘엉망이군.’

예상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체념한 듯 노트를 책상 위로 던졌다. 만족스러운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자신이 기록하지 못한 부분을 채우기엔 무리였다.

“너 입사한 지 얼마나 됐냐?”

“이제 육 개월 됐습니다.”

“육 개월…….”

고두열 과장은 혀를 찼다.

꾸중을 기다리던 김윤식은 멀뚱히 고두열 과장을 바라보았다. 이상했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야, 때려치우고 담배나 피우러 가자. 내가 전에 사준 거 좀 남았지?”

“옙. 가시죠.”

두 사람은 옥상으로 이동했다.

밖은 추웠다. 김윤식은 한번 몸서리를 쳤지만, 고두열 과장은 묵묵히 난간으로 걸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사람들이 몇 명 있었지만 다들 모르는 얼굴들이었다.

“재수 없네.”

“저 말씀입니까?”

뜬금없는 한마디에 고두열 과장이 피식 웃었다.

“넌 재수 없다기보단 좀 불쌍한 놈이고. 박민우 말이다. 어린놈이 잘난 척은 오지게 하잖아. 아까 미팅 때 봐라. 영어로 쏼라쏼라하는 거.”

“6개 국어 가능한 데다가 명인대 출신. 캬. 스펙 보십쇼! 지립니다. 그 정도면 저라도 뻔뻔하게 굴 것 같은데. 그래도 민우 씨 정도면 되게 겸손한 거 아닙니까?”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민우는 늘 겸손했고, 자신에게 부족한 게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회사 내에서의 평판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고두열 과장은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것이 위선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더 위자드> 증쇄 들어갔다더라.”

“허, 대박이네요. 아니 판매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증쇄야.”

“<오멜라스의 마녀>도 증쇄각이야.”

“역시 그렇겠죠?”

한심한 표정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은 고두열 과장이 김윤식의 뒤통수를 살살 밀었다.

“야 인마. 넌 존심도 없냐? 눈앞에서 작품 계약 뺏겼는데 아무렇지도 않냐고.”

“억울합니다. 저도.”

김윤식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뻔질나게 일본 쪽 출판사 들락날락한 거 아시잖아요. 그래도 뭐 별수 있습니까. 원작자의 선택을 존중해야지.”

“이야, 자식 세상 편하게 하네. 존중하면 회사생활 끝나냐?”

“이례적인 일이잖습니까. 작가가 누가 번역할지를 선택한다는 거. 저는 말입니다. 뭔가 이번 일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갑자기 뭔 헛소리야.”

김윤식은 고두열 과장의 구박에도 굴하지 않고 해맑게 웃었다.

“업체 사람들만 만날 게 아니라 원작자도 더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다음 계약 건부터는 그렇게 해보려고 합니다. 돈보다 마음을 얻는 게 중요할 때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할까요?”

담배를 물고 있던 고두열 과장이 물끄러미 김윤식을 바라보았다. 곧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묵묵히 연기를 빨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이나 옥상에서 시간을 보내다 사무실로 돌아왔다.

자리에 앉은 고두열 과장은 회의실에서 정리한 미팅 자료를 다시 훑어보기 시작했다.

‘잠시 손 놨다고 이렇게 안 들릴 줄이야. 나이 먹은 탓인가? 어학 공부 좀 더 해야겠어.’

그가 익힌 것은 비즈니스 영어였다. 미팅에서 전체적인 맥락은 이해했지만, 디테일한 면에서 알아듣지 못했다. 문학 용어가 너무 많이 쓰였던 것이다.

일반 기업이었다면 적당히 생략해도 되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지음사는 출판사다. 소설 번역과 관련된 미팅이었다. 적당히 생략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오늘 내로 송승현 실장에게 보고서를 올려야 한다. 그녀를 납득시키려면 이 자료로는 어림없다.

꾸며서 쓸까 싶기도 했지만, 그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나이 처먹고 쓸데없이 자존심만 늘었나?’

고개를 홰홰 저은 고두열 과장은 보고서에 솔직히 기록하기 시작했다.

띠링!

그때 메일 수신음이 울렸다.

잠시 타이핑을 멈춘 고두열 과장은 메일창을 띄웠다. 맨 위에 굵은 글씨 처리된 새 메일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뭐야?’

그것은 민우가 보낸 메일이었다. 갑자기 무슨 의도로 메일을 보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불쾌한 느낌에 읽지 않으려 했지만, 고두열 과장은 마우스를 클릭했다. 비즈니스는 비즈니스라는 최면을 걸면서.

― 과장님. 오늘 두 자문위원님들과 나눈 대화 내용을 정리했습니다.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문학 용어가 많이 나왔네요.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고두열 과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동정을 받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마우스 포인터는 첨부파일을 클릭하고 있었다. 페이지가 꽤 많았다. 맨 뒤로 가보니 A4 열두 페이지였다.

그는 다시 맨 앞장으로 돌아왔다.

‘이상한데?’

일반적인 보고서 양식이 아니었다. 마치 시나리오 대본을 보는 것처럼 누가 어떤 말을 했는지 순서대로 정확히 기록되어 있었다.

‘이건 정리가 아니라 녹취록 수준이야.’

자신도 모르게 감탄이 나왔다. 잠시 원고를 훑어보던 고두열 과장은 다시 한번 탄성을 내뱉었다.

‘아, 혹시 녹음을?’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고두열 과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핸드폰을 조작하거나 녹음을 하겠다는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으니까.

‘뭐가 됐든 보기보다 치밀한 놈이군.’

고두열 과장은 그렇게 판단을 내렸다. 일이 어찌 되었든 민우가 보내준 이 자료는 보고서 작성에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그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길게 끌지 않았다. 곧 마우스가 움직였고, 인쇄 버튼을 클릭했다.

고두열 과장은 인쇄한 자료를 바탕으로 보고서 작성을 다시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손가락이 우뚝 멈췄다.

그가 단축키를 눌러 창을 전환시켰다. 메일 화면이 떴다. 상단에 민우의 이름이 보였다.

‘그래. 뭐, 비즈니스니까.’

고두열 과장은 답장 버튼을 눌러 민우에게 감사의 인사를 적었다.

보내준 자료는 고맙게 쓰겠습니다. 이 한마디를 쓰는 데 10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어쨌든 그 메일은 민우에게 전송되었다.

* * *

크리스마스에 가까워질수록 찬바람이 더욱 거세졌다. 두꺼운 점퍼를 걸쳤지만, 민우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벌벌 떨었다.

오후 5시.

해가 거의 저물어 하늘이 어둑했다. 가로등이 하나둘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민우는 거의 뛰다시피 인문관 안으로 들어갔다.

훈기가 몸을 확 녹였다. 그제야 민우의 표정이 편안해졌다. 작년까지는 겨울이 죽도록 싫었는데 커플이 되니 참을 만했다.

아니 오히려 설레고 좋았다. 추우면 안에 있는 날이 많아지고, 또…….

“뭘 그리 히히덕대고 있냐?”

계단을 올라가려던 민우가 멈칫했다.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깜짝 놀랐다. 자신을 부른 건 다름 아닌 이재환이었다.

복장이 평소와 좀 달랐다. 근사한 외투에 정장을 입고 있다. 그가 연구실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에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이제 그도 진짜 교수가 된 것이다.

“형! 여긴 어쩐 일이세요?”

“오늘 종강했다. 이제야 여유가 좀 생겼어.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서 들렀다.”

“연락 좀 미리 주시지 그랬어요.”

“연락 미리 하고 오면 괜히 부담되잖아.”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다. 시간을 어떻게 빼야 하나 고민을 했을 것이다. 반가운 마음보다는 걱정이 앞섰을 터다.

민우가 물었다.

“첫 학기는 어떠셨어요?”

“특별할 건 없었다. 강의를 처음 하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이제야 내 보금자리가 생겼구나 하는 마음은 들었지. 보따리장수 노릇 더는 안 해도 되니까 말이다.”

흔히들 시간강사를 ‘보따리장수’로 비유하곤 한다. 정처 없이 대학과 대학을 오가며 강의로 생계를 이어가니까.

이번엔 이재환이 물었다.

“그런데 너 어디 가는 길이냐? 307호?”

“네. 이따가 진섭이랑 같이 저녁 먹으러 가려고요.”

이재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말을 덧붙이지 않는 걸 보니 방해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지금 민식이도 학교로 오는 길이다.”

“민식이 형도요?”

“예전에 한 약속은 지켜야지. 너 논문 다 써서 학회에 보냈다는 얘긴 들었다. 두 부 인쇄해서 준비해 놔. 저녁 먹고 시간 괜찮으면 같이 보자고.”

까맣게 잊고 있었던 약속이었다.

민우는 환하게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헤어졌다. 이재환은 박사연구실로, 민우는 307호로 들어갔다.

마침 진섭은 이어폰을 꽂고 핸드폰을 쥐고 있었다. 게임을 하는 게 분명했다. 학기가 끝나 그도 당분간은 여유로웠다.

원래라면 이수빈과 주예린의 모습도 보여야 했지만, 둘은 가끔 여자끼리 뭉쳐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래서 오늘은 칙칙하게 둘이 저녁을 먹기로 했다.

“웬일로 일찍 왔네?”

“배고파서. 바로 가자. 나 이따 일 있어.”

이어 민우는 이재환이 학교에 왔다고 말했다. 깜짝 놀란 한진섭은 박사연구실로 쪼르르 달려가 그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왔다.

“벌써부터 강사 자리 확보하려는 거냐? 징한 놈.”

“재환 선배, 아니지. 흠흠. 이재환 교수님께 잘 보여서 나쁠 거 없잖아. 머리가 안 되면 처세술이라도 좋아야 하는 법이라고.”

“말로는 뭘 못하냐. 가자.”

두 친구는 학생식당에서 저녁을 때웠다. 카페에 들러 뜨거운 커피를 들고 인문관으로 돌아왔는데, 진섭은 도중에 집으로 돌아갔다.

민우는 국제비교문학회에 보낸 논문을 두 부 인쇄해 박사연구실을 찾았다. 맨손으로 가기 뭐해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두 개 뽑았다.

‘박사연구실은 오랜만이네.’

최근에 논문 때문에 바빴던 탓도 있지만, 최민식이 학교에 자주 나오지 않아 올 일이 별로 없었다. 강예진은 학회 준비 때문에 정신이 없었고.

민우는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

좀 이상했다.

기름진 양념 냄새가 훅 느껴졌다.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원년 멤버인 이재환, 최민식, 강예진이 치킨에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누나도 있었네요? 언제 오셨어요?”

“집에 있다가 연락받고 나왔어.”

“두 개만 뽑아왔는데.”

“나 안 마셔. 커피 끊었어.”

“아뇨. 커피 말고 발표용 논문이요.”

민우가 여유롭게 웃자 강예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요즘 들어 능글맞아진 느낌이었다. 일단 민우는 다시 307호로 돌아가 논문 한 부를 더 뽑아왔다.

하지만 선뜻 나설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모였는지 박사 셋은 이야기꽃을 피워 나갔다.

“그런데 민식이 너 요즘 뭐 좋은 일 있냐? 얼굴이 좀 폈네.”

이재환이 지나가듯 묻자 최민식이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강의 끝났으니 살맛 나서요. 이번 학기는 유독 힘들었습니다. 이런저런 일도 많았고. 민우 저놈 때문에 일거리도 꽤 늘었죠.”

“KERIS에 다녀왔다는 얘긴 들었다. 일은 잘 풀린 거냐?”

“아직 시작도 안 했어요. 잘 풀리도록 노력해 봐야죠. 근데 박민우. 넌 안 마시냐?”

“그 말씀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민우가 잽싸게 맥주 캔을 집었다. 오랜만에 네 명이 건배했다.

‘이렇게 연구실에 다 같이 모여서 마시는 건 또 처음이네.’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선배들을 바라보며 민우는 맥주를 홀짝였다. 훈훈하니 좋았다. 이 순간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빈 맥주 캔이 테이블 위에 잔뜩 쌓였다. 다들 얼굴이 불콰했다. 두툼한 치킨도 뼈만 앙상히 남았다.

“자, 배도 적당히 채웠겠다. 이제 슬슬 시작해야지? 술 깨기 전에.”

이재환이 손을 내밀었다.

‘술 깨기 전이라는 말이 원래 이렇게 무서웠나?’

민우는 논문 인쇄본을 한 부씩 돌렸다. 그리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노트를 펼쳤다. 왼손으로는 맥주 캔을, 오른손에는 루카치의 만년필을 들었다.

선배들이 이미 논문을 읽기 시작했다. 눈매가 매섭다. 시곗바늘 소리만 조용히 들릴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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