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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허를 찌르다 (3) (125/500)


125. 허를 찌르다 (3)
2021.11.18.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말만큼 이 상황에 어울리는 표현이 또 있을까. 민우의 입에서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완전히 미운털 박혔겠는데요.”

“하하하. 뭐, 엄밀히 말하면 그게 민우 씨 탓은 아니잖습니까. 계약을 따내지 못한 지음사의 책임이지. 원작자인 미야와키 류타 씨가 업체를 지목했다는데 뭐 어쩔 수 있겠습니까. 송 실장님께서 직접 나서셨어도 어쩌지 못했을 겁니다.”

전남규 차장은 간혹 있는 일이라며 민우를 다독였다.

민우는 직장 생활도 쉽지 않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그나마 연구원이라서 이 정도로 끝난 거지, 사원이었다면 더 심한 일을 겪었을 것이다.

“말씀이라도 그렇게 해주시니 좀 마음이 놓이네요.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가.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좀 힘드네요.”

“사람 사는 곳이야 어디든 마찬가지겠지요. 대학원도 만만치 않잖습니까? 파벌도 심하다고 들었고. 요즘은 명문대에서도 각종 사건 사고들이 많이 터지지 않습니까. 명인대도 최근 시끄럽던데.”

“그런 일이 좀 있긴 했죠.”

얼마 전 명인대에서도 논문 표절 및 성추행 사건이 연이어 터졌다.

인문대에서 벌어진 사건은 아니었지만 다행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대학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피해자는 대개 학생들이니까.

그나마 학풍이 엄격한 명인대 국문과에서는 그런 일이 잘 일어나지 않았다. 지난 10년간 명인대 국문과에서 논란이 된 사건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방심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당사자끼리 암암리에 일을 덮을 수도 있고, 앞으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까.

“말이 좀 다른 데로 샜네. 아무튼 자문위원 미팅은 별거 없습니다. 저도 과장 시절에 많이 해봤는데, 그냥 인사하는 자리 정도라고 생각하면 편해요.”

“생각했던 것보다는 별거 아닌가 봐요?”

“그렇죠. 간혹 자문위원이 번역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주긴 하는데, 음. 이번에는 그러지 않을 거 같기도 한데요.”

“왜요?”

전남규 차장은 담배를 잠시 입에서 떼고 큰소리로 웃었다.

“왜긴요. 워낙 민우 씨 번역본 퀄리티가 좋아서 그렇지. 소문으로는 자문위원 두 분 모두 극찬을 했다고 하던데요. 못 들으셨습니까? 영국인이 쓴 한국인에 대한 소설이라는 말까지 나왔다고 들었는데.”

민우는 살짝 놀랐다. 안경을 끼고 한 거라 자신은 있었는데, 그 정도 찬사가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특히 민우가 걱정하던 것은 영국 영어에 대한 감수성이었다.

과연 안경이 미국 영어와 영국 영어의 변별점을 감지할 수 있을까 의문이었는데, 이로써 그 의문이 모두 해소되었다.

‘같은 언어라도 내 생각에 따라 미세한 조정이 가능한 거구나. 나머지 작업도 샘플 번역할 때처럼 하면 되겠어. 영국 영어를 떠올리면서.’

말 그대로 만능 안경이었다. 새로운 기능을 발견한 것 같은 쾌감이 들었다.

민우가 질문을 던졌다.

“제가 특별히 준비할 건 없을까요? 인사하는 자리라고는 해도 기획서 같은 게 필요하지 않나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메모지와 펜만 준비하시면 됩니다. 아, 명함도 챙기시고. 이 기회에 자문위원분들 연락처도 주고받으세요. 인맥이 재산입니다. 얼핏 들어보니 이 방면으로는 꽤 이름 있는 분들이라고 들었습니다.”

“명함이요. 감사합니다.”

확실히 경험자의 조언은 달랐다. 특히 연락처를 주고받으라는 말은 정말 도움이 되었다. 명함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전화하길 잘했네. 전 차장님께는 죄송하지만 종종 이렇게 이야기 나누는 것도 도움이 되겠어.’

어느새 담배를 다 피운 전남규 차장이 재떨이에 담배를 던졌다.

“그나저나 요즘 블로그 잘되시는 거 같던데. 어떻습니까? 네이비에서 베스트 블로그로 안 올려 주던가요?”

“아직은 소식이 없네요. 방문자수가 그렇게 많지는 않아서 별 기대는 안 합니다. 무엇보다도 지식 전달 면에서 좀 대중적이지 않은 게 문제인 것 같기도 하고요. 아는 사람만 알아보는 느낌이랄까요.”

턱을 괴며 생각에 잠기던 전남규 차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의 블로그는 가공되지 않은 지식을 모아놓은 창고에 불과했다.

그나마 특이하다고 할 수 있는 건 최근에 발표된 세계 각국의 인문학 저널들이 모여 있다는 것 정도.

민우가 이것을 쉽게 풀어서 포스팅하기엔 아직 역량이 부족했다.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지혜의 문제였다. 지식은 책을 통해서 얻을 수 있지만 지혜는 다르다.

그가 생각하는 지혜란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통찰력.

‘아직은 경험이 부족해. 머리에 든 건 많은데, 그걸 하나로 꿰어내는 게 어려워.’

하지만 민우는 멀리 내다보았다. 조급할 필요 없었다. 꾸준히 공부하며 시간을 보낸다면 해결될 문제라고 결론지었다.

민우는 상념을 치우고 다시 전남규 차장과의 대화에 집중했다.

“확실히 그런 면이 있긴 하죠. 고급지식을 좀 더 쉽게 풀어서 전달한다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저것 바쁘셔서 어려우시겠네요.”

“시간보다는 능력의 문제죠. 그런데 아직도 제 블로그에 오시나요?”

“무슨 그런 섭섭한 질문을. 민우 씨 덕분에 오픈 라이브러리 사업권도 따내고 일도 착착 잘 진행되고 있는데. 자주 들어가서 구경해야지요. 방명록은 안 남겼지만 매일 출근 도장 찍고 있습니다.”

민우는 미소를 지었다. 말이라도 이렇게 해 주니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전남규 차장은 그 이상으로 민우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오픈 라이브러리 프로젝트가 송두리째 날아가 버릴 뻔했으니까.

전남규 차장이 제안했다.

“다음에 소주 한잔 어떻습니까. 이렇게 추운 날엔 알탕에 소주가 제격이죠. 제가 사겠습니다. 민우 씨 스케줄에 맞추죠.”

“16일 이후면 좋을 거 같습니다. 학회가 그때 끝나거든요.”

“히야, 그때면 간이 피곤할 시즌이군요. 예. 그럼 제가 날짜 잡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옥상에서 내려왔다.

민우는 핸드폰으로 밀린 톡을 처리하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자문위원 미팅이 열릴 때까지 <태엽시계> 초벌 번역을 진행했다. 작품을 외우다시피 읽었기 때문에 번역에 문제는 없었다.

곧 약속 시간이 다 되었다.

민우는 명함 두 장을 챙기고 15층으로 올라갔다. 회의실 앞에 선 민우는 가볍게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회의실에는 이미 자문위원 두 명이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전에 민우의 번역물을 평가했던 영국인 앨런 스미스와 클로에 페일럿이었다.

고두열 과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막내 김윤식이 회의실을 지키고 있었다.

앨런 교수가 일어서 민우를 맞았다.

“반갑습니다. 당신이 박민우 씨입니까?”

“맞습니다. 제가 박민우입니다.”

민우는 앨런 교수가 청하는 악수를 엉겁결에 받았다. 그가 이렇게 유창하게 한국어를 할 줄은 몰라 조금 놀랐다.

민우를 내려다보는 앨런 교수의 푸른 눈엔 호기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키가 정말 커서 민우는 좀 부담을 느꼈다.

“샘플은 정말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이런, 소개가 늦었군요. 내 이름은 앨런 스미스. 한국을 좋아하는 평범한 영국인이지요.”

앨런 스미스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하지 않았다. 옆에 있던 김윤식이 귀띔을 하고 나서야 민우는 그가 교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직함을 들은 민우가 다시 꾸벅 인사했다.

“외대 교수님이셨군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교수님.”

“편하게 앨런이라고 불러 주시지요.”

궁금한 게 많았다. 대학원생이었기에 할 수 있는 질문들이 특히 많았다.

“영문과에 계십니까?”

“소속은 영문과지만 한국 문학에 관심이 많습니다. 관련 논문도 몇 개 쓰기도 했고 말입니다.”

“저도 영국 문학 이론에 관심이 많습니다. 저번 학기에 팀 프로젝트로 옥스퍼드대 교재 하나를 번역하기도 했어요.”

“오, 제목이?”

“< The Oxford Introduction to Narrative >입니다.”

앨런 교수의 표정이 더욱 밝아졌다. 그도 알고 있던 책이었다.

그때 옆에 있던 클로에가 헛기침을 살짝 했다. 멋쩍은 미소를 지은 앨런 교수가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소개했다.

“아, 소개가 늦었군요. 이쪽은 클로에 페일럿. 내 오랜 친구입니다.”

“안녕하세요.”

민우가 꾸벅 인사하자 클로에가 영어로 응수했다. 민우도 영어로 받았다. 앨런 교수는 민우의 영어 실력을 확인하고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고개를 돌린 민우가 김윤식에게 사무적으로 물었다.

“고두열 과장님은 안 오십니까?”

“곧 오실 겁니다. 전무님 호출이 있어서. 지금 급히 올라가 계십니다.”

때마침 회의실 문이 열리고 고두열 과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는 앨런 교수와 클로에에게 미소를 보였지만 민우에겐 그저 묵례할 뿐이다.

유치하다. 그런 생각에 민우는 한숨이 나왔지만, 주문을 외우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비즈니스는 비즈니스로.’

모두 자리에 착석했다. 민우는 준비한 명함을 두 영국인에게 건넸다. 두 사람은 딱히 명함을 준비하지 않은 거 같았다.

민우는 지음사 명함을 쓰지 않고 개인 번역용 명함을 건넸다. 그리고 영어로 설명했다.

「메일은 수시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용무가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앨런 교수가 민우의 명함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런데 번역을 전문적으로 하시는 겁니까? 대학원에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문학도로서 한국 문학의 세계화에 일조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번역일입니다. 앞으로는 더 전문적으로 일할 계획입니다.」

「세계화라. 멋진 목표로군요. 확실히 좋은 작품이 알려지지 않아서 개인적으로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사 가능한 언어가 영어 말고 또 있습니까?」

「번역 가능한 수준으로는 프랑스어, 독일어, 일본어, 중국어 정도를 합니다.」

「멋지군요!」

그는 물론 클로에의 표정에도 흥미가 돌았다. 앨런 교수가 명함을 안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내 연락처는 따로 연락을 드릴 때 알려 드리지요. 조만간 대화할 일이 있을 겁니다.」

앨런 교수의 한마디는 의미심장했다.

한편 고두열 과장과 김윤식은 난감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민우와 두 위원의 대화가 철저히 영어로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표정을 읽은 민우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고 과장님? 미팅은 영어로 진행하겠습니다. 클로에 씨가 한국어에 익숙하지 않으시니까요. 그쪽이 더 효율적인 것 같은데 문제없겠죠?”

“예. 편하신 대로 하시죠.”

고두열 과장이 애써 미소를 지었다.

문제가 없진 않았다. 영어를 하긴 하는데, 한국어로 미팅하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듣는 것에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한편 클로에는 이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조용히 앨런 교수에게 물었다. 앨런 교수는 즉시 통역해 주었다.

「세심한 청년이네요.」

「그렇지?」

클로에는 ‘한국어에 익숙하지 않다’는 민우의 표현에 감명을 받았다. ‘하지 못한다’는 표현과는 의미가 전혀 달랐으니까. 세심한 배려를 느꼈다.

물론 그것은 민우가 의도한 것이었다. 클로에가 작가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사소한 말이라도 조심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하나 더.

민우는 고두열 과장에게 소소한 복수를 하기 위해 영어로 대화를 제의했다. 가끔은 문학 용어 같은 고급어휘를 써서 그들을 당혹스럽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 두 계획은 완벽한 성공을 거뒀다.

미팅이 끝날 무렵 앨런 교수는 물론 클로에도 민우에게 큰 호감을 느꼈다. 세 사람은 근시일 내에 따로 자리를 마련하자는 합의에 이르렀다.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습니다.」

「다음 만남을 기대하겠습니다. 돌아가는 대로 앨런 씨의 논문과 클로에 씨의 소설 꼭 찾아 읽겠습니다.」

「감상평이 기대되는걸요?」

한국인 독자가 생겼다는 것에 흥미를 느끼는 클로에였다. 그렇게 두 자문위원이 회의실을 나서자 막내 김윤식이 배웅을 나갔다.

회의실에는 민우와 고두열 과장만 남았다. 그는 회의록 정리에 애를 먹는 듯했다. 영어 탓이었다.

민우는 웃으며 그에게 인사했다.

“먼저 내려가 보겠습니다. 고생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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