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4. 허를 찌르다 (2) (124/500)


124. 허를 찌르다 (2)
2021.11.15.


‘박민우. 대체 무슨 마술을 부린 거냐?’

목차와 초록 모두 예상했던 것보다 수준이 높았다. 아니, 조금이 아니라 많이 높았다.

목차를 보면 논문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는데, 직관적인 목차는 주로 석박사 과정들이, 은유적인 목차는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 주로 썼다.

학식이 쌓일수록 다양한 용어를 적재적소에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민우의 논문은 못 해도 박사과정급의 수준을 자랑했다. 석사과정생이 쓴 첫 발표용 논문이라는 말을 듣는다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마치 학술지에 실린 논문을 보는 느낌이다.’

잠시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던 서강일은 정신을 차리고 인쇄 버튼을 클릭했다.

그 모습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던 강민희가 흥미롭게 웃었다.

“제대로 걸렸나 보네. 생각보다 수준이 높은가 봐요?”

“그건 끝까지 읽어 봐야 아는 거지.”

“안 봐도 비디온데요 뭐. 오빠가 논문 인쇄할 때 프린터기 앞에서 기다리는 거 처음이에요. 그만큼 급하다는 거 아닌감?”

서강일은 입을 꾹 다물었다. 강민희는 쓸데없는 곳에서 촉이 좋았다.

뭐라고 한마디 쏘아주고 싶었지만, 지금 급한 건 논문을 읽어 보는 것이었다. 서강일은 일어선 채로 인쇄본을 읽기 시작했다.

강민희가 앉으라고 권했지만 그는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그렇게 30여 분이 흘렀다.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의 참고문헌 부분이 나오자 서강일은 걸음을 멈추고 짧게 탄식을 내뱉었다.

“안타깝군.”

서강일은 민우의 논문을 보며 씨익 웃었다. 강민희는 역시나 하는 표정이다. 자신이 선망하던 사람이 그렇게 쉽게 당할 리가 없다.

“방향을 완전 잘못 짚었어.”

“그 논문이요? 잘 쓴 줄 알았더니 아니었나 보네.”

“아니. 내가.”

신나게 웹툰을 보던 강민희가 움찔 놀랐다. 그녀가 홱 고개를 돌렸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새로운 이론을 가지고 작품을 분석할 줄 알았는데 철학적인 접근을 시도했어. 분야의 경계가 애매한, 일종의 시론이 되어버린 거지. 재조명이라는 키워드를 다르게 활용한 거야. 시론이라는 형식적 특수성을 이용해 요리조리 피해갈 수 있게끔 써놨어. 영악하게도.”

“세상에…… 그게 가능해요? 석사 나부랭이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적어도 자신은 이렇게 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손에 들린 논문은 진짜였다. 꿈이 아니었다. 맨 첫 페이지에는 박민우라는 이름 세 글자가 오롯이 박혀 있었다.

침묵을 깨고 강민희가 한마디 중얼거렸다.

“역시 명인대 클래스는 다르다는 건가.”

“하하하핫!”

서강일이 시원하게 웃었다. 곁에 있던 강민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강일을 바라보았다. 그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녀가 조심스레 추측했다.

“혹시 지도교수 찬스 쓴 거 아닐까요?”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곧 이런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뭐? 어쩔 건데?”

잠시 말을 끊은 서강일은 손에 든 민우의 논문을 흔들었다.

“그래 봐야 이 논문에 박혀 있는 이름이 박민우라는 건 변하지 않아. 설령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다고 논문의 가치를 깎아내릴 수는 없는 거지. 그리고 민우 걔, 타대생이라 지도교수한테 미움받는 처지기도 하고.”

“엥? 타대생이었어요? 어디 출신인데요?”

“학부는 상아대 출신이야.”

“말도 안 돼! 상아대면 완전 3류대잖아요. 어떻게 명인대에 입학했지?”

그게 중요하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던 서강일은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곧 그가 가방을 어깨에 멨다.

“어디 가려고요?”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갔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해. 자료 모으러 가야지.”

“도와줄게요.”

“됐어. 이번 건 좀 빡세다. 메로나 하나로 끝날 일이 아니야.”

서강일이 강민희를 지나쳐 석사연구실을 나섰다. 홀로 남겨진 강민희는 어쩔까 고민하다가 가방을 들었다. 그녀도 뒤를 따라갔다.

지금은 아이스크림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역시나 서강일은 중앙도서관 인문사회열람실에 있었다. 검색대 앞에서 턱을 괴고 고민에 잠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뭐 찾으면 돼요?”

“왜 따라왔어? 그 시간에 과제나 한 글자 더 쓰지. 곧 기말 과제 제출기일 아니냐.”

강민희는 대답하지 않고 옆자리에 앉아 펜과 노트를 꺼냈다. 빨리 말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서강일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감이 안 잡혀. 실존주의 자체의 공부가 필요해.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하나…….”

서강일의 전공은 문학이다. 철학이 아니었기 때문에 명확하게 방향을 잡기가 어려웠다. 결국 그는 밖으로 나가 전화를 걸었다.

철학과 친구에게 도움을 청하는 전화였다. 평소라면 자존심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진 않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곧 그가 다시 열람실 안으로 들어왔다. 검색대에 ‘세계 철학사’를 입력하고 원하는 도서를 찾았다.

도서 위치표가 출력되자 강민희가 잽싸게 뺏어 들고 뛰었다. 목표를 찾는데 일 분도 안 걸렸다.

“러셀의 <서양철학사>가 더 낫지 않아요?”

“나도 그렇게 물어봤는데, 직관적으로 보기에는 이게 더 편하다고 하더라.”

강민희가 찾아온 건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의 <세계 철학사>였다. 1200페이지나 되는 굉장히 두꺼운 책이었다.

“뒤쯤에 실존철학 섹션이 있을 거야. 여기서 지목되는 철학자들을 추려서 개별 레퍼런스를 봐야지. 원류가 누구고, 어떤 변화양상을 보였고, 또 어떻게 분파가 나뉘었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우리나라 실존주의 문학이라면 사르트르 정도만 보면 되지 않을까요?”

“그걸론 택도 없어.”

서강일은 실존주의 철학을 깊게 알지 못했다. 하지만 민우는 달랐다. 그의 논문에는 실존주의 철학이 자연스레 스며들어 있었다.

그것은, 그가 실존주의라는 철학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일등공신은 다름 아닌 민영환 교수의 노트였다.

하지만 한일대에는 그런 노트를 물려줄 사람이 없었다.

처음부터 다시 실존주의 철학에 대해 짚어 나가야 했다. 그래야 민우의 논문에서 반박 거리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

서강일과 강민희는 빈 세미나실로 이동했다. 마침 4인용 세미나실 하나가 비어 있었다.

자리에 앉은 서강일은 실존철학 부분을 살펴보며 이름을 하나씩 부르기 시작했다.

“쇠렌 키르케고르, 카를 야스퍼스, 장 폴 사르트르, 가브리엘 마르셀, 마르틴 하이데거.”

“너무 많아요.”

받아 적는 게 힘들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한 철학자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십 일, 혹은 수개월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벌써 서강일이 언급한 철학자의 이름만 해도 다섯 개였다.

“그래도 해봐야지. 언제 우리가 널널하게 공부해봤어?”

강민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까지 코너에 몰릴 줄은 몰랐다.

“실존이라는 개념의 시작점은 키르케고르다. 그 이후 야스퍼스와 사르트르의 철학을 살펴야겠지. 니체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여기까진 못 읽겠다. 시간이 부족해. 하이데거는…… 난감하네.”

벌여 놓은 일을 냉정히 바라보니 한 학기 분량의 세미나에서도 소화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서강일은 평범한 대학원생이 아니었다. 그는 펜을 굴리며 필사적으로 해결책을 모색했다.

“핵심은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

아이디어를 얻은 그가 엄지와 검지를 딱 튕겼다.

“그렇다면 사르트르를 시작으로 가지를 뻗어 나가면서 레퍼런스를 찾아보는 게 좋겠군. 일단 프랑스 실존주의에 대한 자료를 모으자. 민희 너, 할 수 있겠어?”

강민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강일은 그녀의 머리를 한 번 헝클어뜨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자. 낭비할 시간이 없다.”

* * *

논문을 학회에 보낸 다음 날, 민우는 지음사로 출근했다. 직원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연구실에 들어와 <오멜라스의 마녀>를 꺼냈다.

안경을 끼고 책을 열었다.

한마디로 취향에 딱 맞는 책이었다. 장르적 트렌드를 그대로 살리고 있으면서도, 미스터리 소설이라는 본질을 놓치지 않은 수작이었다.

‘이것도 베스트셀러가 될 가능성이 농후해. 애초에 네임밸류가 있는 작가기도 하고.’

부담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별걱정은 없었다. 지금 쓰고 있는 안경이 있는 한 멋지게 번역해 낼 자신이 있었으니까.

민우는 <오멜라스의 마녀>를 가방에 집어넣고 <태엽시계>를 꺼냈다. 이 작업을 하기 위해 출근한 것이었다. 샘플 번역한 부분 이후부터 이어나가면 됐다.

작업을 막 시작하려던 그때 노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윤정민 팀장이었다.

“박 선생. 바빠?”

“아뇨. 무슨 일이세요?”

팔짱을 낀 윤정민 팀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라온북스에서 <오멜라스의 마녀> 번역 맡게 됐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영양가 있는 건 다 혼자 골라 먹는 느낌이구만. 계약 못 따서 출판기획실은 초상집 분위기던데. 몸조심해야겠어.”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 미리 예상했기에 민우가 너스레를 떨며 대답했다.

“다른 건 몰라도 지금은 <태엽시계>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것만큼은 꼭 계약을 성사시켜야죠. 그래야 팀장님도 절 뽑은 덕을 보시잖아요.”

“오, 그건 좀 마음에 드는데! 부디 열심히 해서 보너스 탈 수 있게 해 줘. 알았지?”

“맡겨만 주십쇼.”

윤정민 팀장이 나가자마자 내선전화가 울렸다. 디스플레이를 확인하니 출판기획실의 고두열 과장의 번호였다.

“네, 과장님. 안녕하세요.”

― 안녕하십니까. 조금 갑작스럽지만 한 시간 뒤에 미팅이 가능할까요? 자문위원과 함께 작업 방향에 대해 논의를 해보려고 합니다.

예전의 민우였다면 예, 하면서 바로 미팅 준비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민우는 난처했다. 갑작스레 미팅을 잡는 거라면 먼저 양해를 구하고 상황을 설명해도 모자랄 판국인데.

“잠시만 스케줄 확인하겠습니다.”

민우는 수화기를 귀에서 뗐다. 사실 아무런 스케줄도 없었다. 시간은 충분했지만 흔쾌히 제안에 응하고 싶지 않았다.

자문위원이 참가하는 미팅이라면 사전 스케줄 파악이 가능했을 터다. 그런데 고두열 과장은 한 시간 전에 연락을 해왔다.

누가 봐도 무시하는 처사였다. 민우는 다시 수화기를 가까이 댔다.

“가능할 거 같습니다.”

― 그럼 이따 뵙지요.

“잠시만요. 과장님.”

민우는 이대로 넘어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할 말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문위원 미팅은 꽤 중요한 일인 것 같은데 메인 번역가인 제가 미리 알지 못했다는 건 좀 이해할 수가 없네요. 한 시간 전에 연락을 주신 것도 난감합니다. 제가 미팅 준비를 할 수가 없으니까요. 일정이 미리 나와 있었을 거 같은데 다음부터는 적어도 하루 전에 연락 부탁드립니다.”

민우의 거침없는 발언에 잠시 침묵이 돌았다. 곧 고두열 과장이 목소리를 낮췄다.

― 다음부터는 신경을 쓰지요. 그럼 참여하시는 걸로 알고 이따 뵙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민우는 수화기를 멀뚱히 바라보다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았다.

‘후우. 끝까지 사과를 안 하네. 확 그냥 번역 건 엎어버려?’

민우는 신음을 내며 이마를 짚었다. 직장인 코스프레도 쉽지 않음을 깨달았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았지만 누나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잡념을 떨쳤다. 사소한 거에 신경 쓸 바에 한 글자라도 더 번역하는 게 나았다.

‘그래. 참자. 참는 사람이 이기는 거니까. 그런데 자문위원 미팅이라면 뭘 하는 거야?’

왠지 그냥 가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이드라인이 필요했다. 민우는 고두열 과장에게 전화하려고 했지만 그만두었다.

대신 전남규 차장의 내선 번호를 눌렀다.

“네, 차장님. 오랜만입니다. 뭐 좀 여쭤볼 게 있는데 잠시 뵐 수 있을까요? 예. 아뇨. 사무실은 좀 그렇고 옥상 공원은 어떠실까요.”

― 좋죠. 마침 담배 피우러 나가려던 참인데. 그럼 거기서 만나요.

민우가 먼저 옥상에 올라가 기다렸다. 곧 문이 열리고 전남규 차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밖이 추워 몸을 한차례 떨었다.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날씨도 추운데.”

“아닙니다. 겸사겸사인데요 뭘.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오늘 <태엽시계> 자문위원 미팅이 잡혔다고 들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들이 오가는지 알고 싶어서요.”

“그거라면 고두열 과장하고 얘기를 하시면 될 터인데…… 아, 그런 거였군요. 하하하. 무슨 상황인지 알 거 같네요. 음, 고 과장은 좀 사교성이 부족한 친구긴 하죠.”

전남규 차장이 웃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바람 때문에 불이 잘 붙지 않았다. 민우는 손으로 라이터를 가려 주었다.

“아, 감사합니다. 민우 씨는 담배 안 하죠?”

“예.”

전남규 차장은 흡연하지 않는 민우를 배려하기 위해 거리를 조금 벌렸다.

“안 그래도 <오멜라스의 마녀>를 라온북스에 뺏겨서 언짢아 보이더군요. 고 과장이 진행하던 계약 건이었거든요. 거기에 민우 씨가 그 소설 번역하게 되었다는 소문도 들려오고. 그러니 그럴 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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