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3. 허를 찌르다 (1) (123/500)


123. 허를 찌르다 (1)
2021.11.12.


307호로 돌아오자 기다리고 있던 세 사람이 동시에 민우를 주목했다. 세 사람은 진섭, 수빈, 예린이었다.

진섭이 물었다.

“왜 이렇게 일찍 끝났어? 한두 시간은 걸릴 줄 알았는데.”

민우가 민영환 교수 연구실로 들어간 지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돌아왔다. 팀원들이 걱정할 만도 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좀 자세히 말해 봐.”

민우는 팀원들이 모여 있는 소파를 지나쳐 노트북을 켜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마우스를 쥐고 메일을 보낼 준비를 했다.

“자세히 말할 내용은 없고. 그냥 말 그대로 발표 허가 받았어. 그래서 온 거야.”

진섭의 입이 쩍 벌어졌다.

“말도 안 돼. 한 번에 허가를 받았다고?”

“논문이 완벽했대요? 민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리가 없는데…….”

이수빈이 한소리 거들었다. 옆에 있던 주예린도 고개를 끄덕였다.

민영환 교수뿐만이 아니라 다른 교수들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잘 써온 논문이라고 해도, 꼬투리를 찾아서 지적하는 게 이 바닥 생리다.

민우가 천천히 키보드를 두드리며 말했다.

“부족한 부분은 여전히 있어. 멋 부린 부분도, 논리적인 비약이 있는 부분도 있다고 하시더라. 그래서 그 부분이 어딘지 여쭤봤지.”

“그래서요?”

“그런데 학회에 가서 직접 배우고 오라고 하시더라고.”

“그게 말이야 방구야? 최대한 잘 준비를 해서 발표를 해도 모자랄 판국에 가서 개쪽당하고 오라는 거 아냐?”

진섭이 머리를 긁으며 짜증을 냈다. 그도 민영환 교수에게 적지 않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아닌 거 같아.”

세 사람은 각자 서로를 쳐다보며 저게 뭔 소린가 서로 눈빛으로 묻기 시작했다.

네이비 메일 창이 열렸다. 민우는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입력해서 로그인했다.

“나도 처음에 그 말씀을 들었을 때 너처럼 생각했어. 아, 내가 괜히 믿고 있었구나. 사람이 쉽게 변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고. 하지만 선생님의 의도는 좀 달랐던 거 같다.”

민우는 연구실에서 있었던 일들을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그제야 세 친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의외네요. 민 선생님.”

“그러게. 저기압 주의보 떨어져서 한바탕 쏟아붓는 게 아닌가 싶었드만.”

수빈과 진섭이 각각 소감을 한마디씩 말했다.

한편 메일 화면을 띄운 민우는 안유진 간사의 메일 주소를 입력했다. 간단히 제목을 적으며 민우가 다시 말했다.

“아무튼, 공격을 당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발표장에서 최선을 다해 방어할 생각이야. 그것도 나름대로 큰 경험치가 되겠지. 더 큰 무대에서의 경험. 민 선생님이 의도하신 바는 거기에 있어.”

민영환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새파랗게 젊은 놈이 무슨 걱정이냐고.

얼핏 사족인 것처럼 들리는 말이다. 하지만 민우는 영리하게도 힌트를 찾았다. 아직 젊은 만큼 경험을 쌓을 기회가 많다는 의미로 한 말일 것이다.

연구실에 앉아서 논문만 쓰면 언젠가 한계에 부딪힌다. 큰 무대에서 발표도 하고, 토론자로 참여도 하면서 경험을 쌓는 게 중요하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그리고 그 해석은 정확했다.

민영환 교수가 에둘러 표현하긴 했지만, 그도 자신의 경험을 살려 충고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공격을 당할 수밖에 없다면 대범하게 생각하라고.

메일의 내용을 채워 나가던 민우가 잠시 손을 멈췄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천장을 올려보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 학회에 나가서 한바탕 싸우고 돌아오면 더 절치부심해서 공부하지 않을까 하는. 그러니까 이제 미련 없이 논문을 보내고 디펜스를 준비하면 된다는 말씀.”

“논문을 보낸다고?”

“그래.”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내린 민우가 마우스를 쥐었다. 깜짝 놀란 한진섭이 벌떡 일어섰다.

“야, 잠깐! 9일까지 보내면 되는 거잖아. 아직 나흘이나 남았는데 왜 벌써 보내려고 그래? 우리끼리 돌려보고 토론 한번 해봐도 되잖아.”

“너희들도 기말 과제 준비해야 하는데 그러긴 미안하지. 이건 내 일이기도 하고.”

“그래도!”

딸칵.

진섭이 말렸지만, 이미 민우는 논문 파일을 첨부하고 메일 발송 버튼을 클릭한 후였다. 메일이 발송되었다는 메시지가 떴다.

“끝.”

민우가 손을 털었다. 순간 307호에 정적이 감돌았다.

“……보냈냐?”

“보냈어요?”

“저질렀어요?”

팀원들이 각각 조심스레 물었다. 싱긋 웃은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궁금했다. 예정일보다 나흘 먼저 논문을 받아 든 서강일의 표정이.

‘까불지 말고 너도 긴장 좀 해라. 응? 사람이 완벽하면 밥맛이니까.’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린 민우는 앞쪽에 잔뜩 쌓여 있는 참고자료 중 맨 위에 있는 것을 집었다.

“너희들도 과제 준비하고 와. 내 걱정은 그만하고. 도와주는 건 고맙지만 이 이상 너희들 시간을 뺏는 건 나도 부담돼.”

세 친구들은 더 이상 민우에게 뭐라 참견하지 못했다. 레퍼런스를 읽기 시작한 민우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도 즐거워 보였기 때문에.

민우는 집중력을 끌어 올려 논문을 읽었다. 총명한 눈빛에 자신감이 깃들었다.

* * *

저녁이 되자 멤버들이 307호로 들어왔다. 민우의 배려 덕에 세 사람은 기말 과제를 어느 정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왔어?”

그 한마디가 끝이었다. 민우는 그 자리에 꼼짝 않고 다시 자료를 읽었다. 책상 한옆에 다 읽은 자료들이 하나둘 쌓이기 시작했는데 수가 제법 되었다.

“벌써 다섯 개나 해치운 건가…… 괴물이네.”

진섭이 혀를 내둘렀다. 놀란 것은 수빈도 마찬가지. 명인대 수석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진섭이 예린에게 물었다.

“근데 저놈 상아대에서도 저랬냐?”

“아아뇨. 그때는 음주가무에 도가 튼 사람이었는데요. 그래도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뭐든 열심히 하려고 했다는 거죠. 공부도, 작업도.”

무심결에 작업이라는 말을 꺼내고는 주예린은 황급히 입을 막았다. 하지만 이수빈은 그 단어를 놓치지 않았다.

“작업?”

진섭이 조용히 대꾸했다.

“그러고 보니 짝사랑하던 사람이 있었다고 했었지. 보험사 FSR.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효진? 요즘도 연락하려나?”

“아,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 학기 초에 우리 학교에 한 번 왔었죠.”

“이수빈. 톡 검사 좀 정기적으로 해. 양어장 운영할 줄 누가 알겠어. 쟤 은근히 인기 많잖아.”

진섭이 학기 초의 기억을 떠올리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주예린은 서둘러 이곳을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요즘 일 많아서 바쁜데 뭐 연락할 시간이라도 있겠어요?”

수빈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민우의 톡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보여 달라는 말을 한 적은 없다.

프라이버시니까.

수빈은 예린과 눈을 마주쳤다. 찌릿. 이따 면담 좀 하자고 눈짓했고, 예린은 어깨를 움찔했다.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친구니까.

이수빈이 표정을 바꾸며 민우에게 다가갔다. 그는 여전히 자료에 집중하고 있었다.

“오빠? 저녁 먹어야죠. 여섯 시 넘었어요.”

“그럴까.”

민우는 무심결에 창밖을 확인했다. 해가 져 완전히 컴컴해져 있었다. 기지개를 켠 민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일행에 합류했다.

저녁이라는 말에 문득 연주가 생각났다. 다른 의미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거식증이라 그런지 뭘 먹을 때마다 그녀가 생각났다.

‘아직도 아무것도 못 먹고 있으려나.’

인문관을 나서면서도 저 멀리 보이는 명인대학교 부속병원 본관 건물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마침 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액정을 보니 유진태 비서실장의 이름이 떴다. 민우는 무리에서 살짝 뒤처진 다음 전화를 받았다.

― 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 가신 겁니까?

평소라면 정중히 인사부터 했을 텐데, 유진태 비서실장은 인사도 생략하고 뜬금없이 물었다. 화가 난 건 아니고, 좀 들뜬 목소리였다.

“네? 갑자기 그게 무슨…….”

― 오늘 아가씨가 처음으로 식사를 하셨습니다! 미음 몇 숟갈이 전부였지만, 주치의 말로는 기적이라고 하더군요. 마치 마법 같은 일이라고.

“그래요? 다행이네요.”

메모가 통했구나. 민우는 보람찬 미소를 지었다. 크리스마스트리를 보고 떠올린 아이디어가 적중한 것이다. 물론 만년필의 힘을 빌리긴 했지만.

‘만년필을 잘 이용하면 심리치료도 할 수 있겠는데?’

재미있는 상상을 하며 민우는 핸드폰을 귀에 대고 집중했다.

― 수행비서에게 듣기로는 메모를 전달하셨다고 하던데요. 외국어로 쓰였다고 하더군요.

“비서가 볼까 봐 일부러 프랑스어로 적은 겁니다. 별 뜻은 없었어요. 크리스마스 파티하자고 적었을 뿐입니다. 예전부터 파티하고 싶다고 종종 말하곤 했거든요.”

― 아, 그랬었군요.

그제야 납득한 기색이었다. 한숨 소리가 들렸다. 안도하는 것이리라.

민우가 물었다.

“그전까지 회복이 되겠죠?”

― 경과가 좋으니 곧 퇴원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든 드시려고 하고 있어요. 다른 사람이 되신 것 같기도 합니다.

“실장님이 옆에서 잘 챙겨 주세요. 저도 중순까지는 좀 정신이 없어서 문병은 좀 어려울 거 같고요. 연주에게 안부 전해주세요.”

― 알겠습니다.

잠시 사이를 두고 유진태 실장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 정말 감사드립니다. 박 선생님.

“큰일을 한 것도 아닌데요 뭐.”

― 사실 박 선생님께 병문안 말씀을 드리고 나서 후회했습니다. 아가씨께서 원하지 않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멋지게 해결을 해 주셨네요. 병문안을 하지 않으면서도 그 이상의 효과를 내셨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지혜에 탄복했고, 많이 배웠습니다.

진심이 느껴졌다.

민우는 미소를 지었다. 오히려 배울 점이 있는 건 민우 쪽이었다.

대한그룹 비서실장이라는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음에도 솔직하게 인정하는 그가 멋지게 보였다. 진짜 어른은 이런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닙니다. 인사를 받기는 아직 이른 거 같아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 하는데. 전 그게 걱정입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따로 있었다. 연주가 회사 일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과 공부를 계속하고 싶은 문제.

민우는 이 두 문제가 하루빨리 해결되기를 바랐다.

― 다행히 회장님께서도 이번 일로 생각을 조금 달리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만큼 심각했으니까요. 어쩌면 좋은 소식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일이 잘 풀렸으면 좋겠네요.”

― 꼭 그렇게 되도록 하겠습니다. 박 선생님. 또 일이 있으면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좋은 밤 보내십시오.

전화를 끊고 앞을 보니 일행이 저만치 떨어져 있었다. 민우는 힘껏 달려 일행에 합류했다.

마침 세 사람은 크리스마스 파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민우는 연주의 입원 사실을 알리고 그녀를 파티에 초대하는 게 어떨까 물었다.

세 사람은 모두 동의했다. 다들 연주가 처한 상황을 안쓰럽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진섭이 물었다.

“그럼 나머지 한자리는?”

“글쎄. 딱 맞게 채우지 않아도 되긴 하는데. 초대할 사람이 있으면 껴도 좋긴 하지.”

그때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민우가 조심스레 제안했다.

“한일대의 서강일 어때?”

“좋은 생각인데요? 오늘의 적이 내일의 아군이 된다는 컨셉인가.”

“애들 싸움도 아니고 편 가르기 할 건 또 뭐야.”

진섭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예린이 누구냐고 묻자 수빈은 아주 잘생긴 오빠라고 설명해줬다. 주예린이 반색하는 모습을 보니 진섭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그럼 딱 여섯 명이네. 좋아. 어서 학회 끝내고 신나게 놀아보자.”

그렇게 네 사람은 파티 계획을 세우며 학생회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겨울바람이 불어왔지만 들뜬 마음에 조금도 춥지 않았다.

* * *

우우우웅―

테이블 위에서 진동이 울렸다. 웹툰을 보고 있던 강민희가 확 짜증을 냈다.

“아, 오빠! 전화 오잖아. 좀 받으라니까요!”

하지만 소파에 드러누워 낮잠을 자던 서강일은 일어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강민희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응? 국제비교문학회?”

모르는 번호면 그냥 끊으려고 했는데 학회에서 온 전화였다. 강민희는 소파로 다가갔다. 그리고 서강일의 뺨을 툭툭 건드렸다.

“전화 좀 받으라고. 학회에서 전화 왔어요.”

“음?”

눈을 뜬 서강일이 몸을 일으켰다. 전화를 받아들고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네, 서강일입니다.”

― 안녕하세요. 선생님. 국제비교문학회 총무간사 안유진입니다. 통화 괜찮으셔요?

“물론이죠. 무슨 일이십니까.”

― 박민우 선생님의 논문이 도착해서 지금 메일로 보내드렸어요. 확인 부탁드리고, 토론 준비도 잘 부탁드려요.

그 말에 서강일의 눈매가 좁혀졌다.

“벌써 논문이 왔다고요?”

― 예. 오늘 오후에 들어온 거 확인하고 바로 보내드리는 거예요. 뭐 문제라도 있으신지요?

“아뇨, 아닙니다. 아무튼 알겠습니다. 확인해 보죠.”

벌써 논문이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마감일에 맞추거나 살짝 기일을 넘길 줄 알았는데.

‘방심한 틈을 노린 거냐? 정찰 한번 제대로 하고 갔네.’

서강일은 공용 컴퓨터에 앉아 이메일을 열었다. 첨부 파일이 두 개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민우의 논문이었다.

논문을 열었다.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목차였다. 행간을 따라 눈이 움직일 때마다 미간이 점점 일그러졌다.

‘뭐야 이거. 어떻게 이런 목차를 뽑은 거지?’

서강일은 바로 초록으로 넘어갔다. 초록을 읽어 나갈수록 마우스를 쥔 손가락 끝이 살짝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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