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지도교수의 의무
(12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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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지도교수의 의무
2021.11.11.
그날 저녁, 민우는 원 없이 한우를 먹었다. 포만감을 만끽하며 한일대 정문 앞에서 박진영 교수와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자리를 파하는 분위기였다. 박진영 교수도 민우의 발표를 걱정하고 있었다.
“한가하면 2차 가겠는데 이거 아쉽게 됐네. 오늘 같은 날엔 따뜻하게 데운 정종 한잔이 그렇게 기가 막힐 수가 없는데.”
“저도 딱 그 생각 했는데요. 다음에 학회 끝나고 제가 한번 모시겠습니다.”
“사양하진 않으마. <더 위자드>가 대박이 났으니 돈 좀 만졌겠어. 하하하. 뉴스 보니 3쇄는 그냥 들어가겠던데? 그 정도로 영어를 잘하면 국문과 말고 영문과를 오지 그랬나.”
영문과. 그 당시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민우는 부끄럽게 웃었다.
“출판사에서 서포트를 많이 해줘서 좋은 결과물이 나온 거 같아요.”
“맞아. 시너지가 중요하지. 논문을 쓰는 것도 출판을 하는 것도 비슷한 일이니까. 아무튼 다음엔 학회장에서 보겠어. 박 선생. 멋진 발표 기대하지.”
박진영 교수는 민우의 어깨를 다독였다. 민우는 꾸벅 인사했다.
“오늘 정말 잘 먹었습니다. 다음에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 조심히 들어가고.”
박진영 교수는 헤어지는 순간까지도 내내 미소를 잃지 않았다. 랑느 박사의 강연은 그에게도 뜻밖의 선물이었다. 고기를 먹으며 민우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대신 한 거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정문에 홀로 남은 민우는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8시 반.
그냥 돌아갈까 하다가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그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서강일에게 거는 전화였다. 왠지 이 친구라면 지금 연구실에 있을 거 같았다.
곧 착신음이 들렸다.
― 웬일? 이 시간에 전화를 다 하고.
“바쁘냐?”
― 바쁘긴. 한가하지. 토론 그까이꺼 뭐 별거 있나?
“허세는.”
민우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묘한 긴장감도 들었다. 서강일이 어떻게 토론을 준비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걱정도 됐다.
“나 지금 한일대에 와 있어. 박진영 교수님하고 저녁 식사하고 들어가려는 길인데. 시간 되면 좀 볼까?”
― 그래? 나 연구실에 있는데 이리 와. 연구실 구경도 할 겸. 덤이 하나 있긴 한데 신경 쓰지 말고.
그때 옆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누가 덤이냐는 앳된 목소리였다. 이어 메로나라는 단어가 들리는 듯했다.
뭔가 이상했지만 민우는 신경을 끄고 물었다.
“연구실은 어디에 있냐?”
― 문리대 건물 10층 석사 연구실. 찾아올 수 있겠어?
“문리대는 몇 번 가봤어. 그럼 지금 갈게.”
민우는 걸음을 빨리 옮겼다. 명인대보다는 작지만, 한일대도 캠퍼스가 꽤 크기로 유명했다. 빨리 따뜻한 곳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문리대 건물 10층에서 내려 석사 연구실을 찾았다. 불빛이 새어 나오는 걸 확인한 민우는 가볍게 노크를 했다.
“들어와.”
서강일의 목소리였다. 민우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와라.”
“안녕하세요?”
서강일과 강민희가 인사했다. 강민희와 대면하는 건 처음이라 민우는 먼저 그녀에게 가벼이 묵례했다. 그런데 왠지 낯이 익었다.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사람인 것 같은데. 어디였더라?’
곧 기억이 났다. 민우가 반색하며 물었다.
“아! 전에 인문학 공모전에 나오셨었죠? 팀 후마니타스 멤버였던 거 같은데.”
“맞아요. 기억력 좋으시네.”
아이스크림을 물고 있던 강민희가 건성으로 대꾸했다. 호의적인 태도는 아니었다. 민우는 관심을 서강일에게 돌렸다.
그는 책상에 앉아 논문을 손에 쥐고 있었다.
“토론 그까이꺼라고 하더니 공부하고 있냐?”
“심심할 땐 공부가 최고지. 뭐 마실 거 줄까?”
“따뜻한 거 아무거나.”
“미스 강.”
서강일이 강민희에게 눈짓했다. 그녀는 표정으로 불만을 표했지만, 얌전히 자리에서 일어나 전기 포트에 물을 끓였다.
어렵게 메로나를 얻어먹었다. 초겨울에 아이스크림을 찾는다고 구박을 들었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맛있으니까.
강민희가 민우를 돌아보더니 퉁명스럽게 물었다.
“아저씨. 커피 괜찮으시죠?”
“저 아저씨 아닌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요.”
“아무거나 주세요. 근데 추운데 아이스크림을 다 드시네.”
대답은 없었다. 호의적이지 않은 태도가 이해는 갔다. 아마도 공모전 본선 때문일 것이다. 자기 때문에 대상을 놓쳤으니까.
그래도 민우는 신경 쓰지 않았다. 모두에게 잘 보일 필요 없다는 누나의 충고를 떠올리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누나의 참교육이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중이다.
그 사이 서강일은 계속 논문을 읽고 있었다. 민우는 궁금했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게 무엇인지.
곧 커피가 준비되었다.
“고맙습니다.”
강민희는 커피잔을 툭 내려놓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논문을 보는가 싶었는데, 열심히 웹툰을 보기 시작했다. 의외였다.
민우는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책상에 쌓여 있는 논문을 훑어보았다. 제일 가까이에 있는 걸 하나 집었다.
제목을 확인한 민우는 깜짝 놀랐다. 이상했다. 이어 그는 다른 논문을 집었다. 커진 눈이 또다시 커졌다.
‘뭐야 이거. 토론 주제랑은 전혀 다른 논문이잖아? 왜 이런 걸 보고 있는 거지?’
예상 밖의 일이었다. 지금쯤 한창 실존주의 문학에 관한 자료를 읽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는 엉뚱하게도 애국 계몽기 신소설에 대한 논문을 보고 있었다.
잠시 눈을 뗀 서강일이 재미있는 걸 본 사람처럼 웃었다.
“왜. 내가 다른 페이퍼 읽고 있어서 놀랐냐?”
표정을 정확히 읽었다. 민우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뜬금없이 신소설 논문은 왜 보고 있어? 토론을 포기한 건 아닐 거고. 뭔 수작이냐.”
“포기는 무슨. 저기 메로나 물고 있는 애가 실존주의 문학에 관한 레퍼런스 잔뜩 찾아줬는데, 그 정도야 이미 다 여기에 넣어 뒀지.”
서강일은 검지로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머릿속에 다 넣었다는 의미였다. 때마침 강민희는 웃음을 터트렸는데, 서강일의 말 때문인지 웹툰 때문인지 구별이 잘 가지 않았다.
민우는 생각했다.
‘허세가 아니라 진짜 여유였던 건가.’
확실히 그는 보여주려는 게 아니라 진짜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노력해도 그것을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이 떠올랐다.
‘천재.’
민우는 그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보다 더 힘든 싸움이 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민우는 웃을 수 있었다. 이 산을 넘으면, 이전보다 더욱 강해질 테니까.
간단한 변증법이다. 정반합(正反合). 하나의 주장이 다른 주장에 부딪혀 더 높은 수준에 이르는 것.
서강일이 말했다.
“이제 네가 보내는 발표문을 보고 빈틈만 찾으면 끝이지. 뭐 읽고 있나 염탐하러 온 거라면 헛걸음한 셈이야.”
“이거 한 대 맞은 느낌인데.”
“발표장에서는 총으로 한 발 맞은 기분이겠지? 아마.”
실없는 농담에 두 사람이 웃었다. 그 와중에 서강일은 다시 논문을 집었다. 한숨을 내쉬며 손에 쥔 논문을 흔들었다.
“실은 이거 과제 때문에 읽고 있는 거야. 지도교수님이 짜증 날 정도로 깐깐하셔서 말이다. 이거 다 읽어도 해결이 되려나 모르겠네. 트집 잡는 데 도가 튼 양반이라.”
“그 정도야?”
“명인대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한일대도 나름 빡빡하다고. 선생님들 기대치가 너무 높아서 문제라고 할까.”
“좋은 선생님들 만난 거네.”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서강일은 바로 이해했다. 예전 술자리에서 민우에게 들었다. 민영환 교수에게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악플보다 무플이 무섭다는 말이 있다. 민우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민영환 교수의 무관심 속에서 자랐다. 그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서강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요즘도 지도교수님이 안 챙겨 주냐? 뭐 하러 그런 데서 썩고 있어? 전공을 바꾸든지 우리 학교로 넘어오든지 해. 재능 썩히지 말고.”
“자세한 건 다음에 술 한잔하면서 이야기하자고.”
민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벌써 가게?”
“할 일이 태산이다.”
책상에 가득한 논문을 보고 있으니 좀이 쑤셔서 견딜 수 없었다. 일종의 직업병이었다. 어서 307호로 돌아가 논문을 쓰고 싶었다.
“누가 널 말리겠냐. 조심히 가라.”
“다음에 또 봐요. 아저씨.”
“아저씨 아니라니까요.”
그렇게 민우는 한일대를 나섰다. 서강일에게 연락을 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 * *
12월 5일 월요일 오전. 민우는 약속한 대로 논문을 들고 민영환 교수 연구실을 찾았다.
“안녕하십니까.”
“그래.”
민영환 교수는 쌀쌀맞았다. 강예진이 오전에 발령한 저기압 주의보를 떠올렸다. 그래도 괘념치 않고 소파에 가 앉았다.
여전히 민영환 교수는 컴퓨터 앞에 앉아 뭔가를 고민하기만 했다. 현대문학연구학회 겨울 학술대회 준비 때문이었다.
“선생님?”
“재촉하지 마라.”
“아, 죄송합니다.”
민영환 교수가 일어선 것은 그로부터 30분 뒤였다. 그런데 빈손으로 자리에 앉았다.
지도를 받기 위해 그의 메일로 논문을 보내놓은 상황이었다. 붉은색으로 체크된 논문이 있어야 했다. 민우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민영환 교수가 귀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보내준 것 그대로 발표를 해라.”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민우는 허탈한 기분에 휩싸였다. 민영환 교수가 논문을 제대로 봐줄 거라고 믿었는데, 이건 너무 무책임한 말이었다.
‘아니. 속단할 일이 아니다. 이야기는 끝까지 들어봐야지.’
민우는 민영환 교수를 똑바로 바라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네 논문은 다 읽었다. 멋 부린 부분이 몇 군데 있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았다. 내가 준 노트로 제대로 공부한 모양이더군.”
석사 수준을 넘어섰다는 게 민영환 교수의 솔직한 평가였다.
하지만 굳이 그 사실을 이야기하진 않았다.
한창 성장하고 있는 민우에게 독이 될 수 있는 말이었으니까.
“노트를 열심히 보긴 했는데 어려운 부분이 좀 있어서 참고문헌을 많이 찾아봤습니다. 그래도 어떤 책을 봐야 하는지 적혀 있어서 수월했어요.”
“그래. 공부는 그렇게 해야지. 가지를 뻗어 나가듯이. 그래서 공부엔 끝이 없다고들 이야기하는 거고.”
민영환 교수는 진지한 표정으로 계속 말을 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네 논문엔 문제점이 꽤 있다. 위험한 부분도 있고, 논리적인 비약이 보이는 부분도 있지.”
“구체적으로 어느 부분이 문제입니까?”
민영환 교수는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차갑게 웃으며 민우를 바라보기만 했다.
“공격당하는 게 두렵나?”
허를 찌르는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공격을 당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수정을 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민우는 그렇게 생각하고 반론했다.
“그런 이유도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더 좋은 논문을 쓰고 싶은 욕심도 있고요. 그래서 지도를 받으려는 겁니다.”
“그런 이유라면 나머지는 학회에 가서 배우고 와도 되겠군.”
민영환 교수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다시 책상으로 돌아가 앉았다.
민우가 선뜻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본 그가 말했다.
“세상에 완벽한 논문은 없다. 고치고 고쳐도 공격은 계속 들어오기 마련이지. 그렇다면 결과를 생각하지 말고 그 과정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잠깐 고민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과정이요?”
“논문을 쓰면서 느낀 바가 있었을 거다. 그걸 생각해보라는 말이야. 뭐가 걱정이냐? 쯧, 새파랗게 젊은 놈이.”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것도 논문 지도의 일부가 아닐까 하는.
‘내가 쏟아부은 시간과 노력을 믿어보라는 말씀인가?’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소파에서 일어선 민우는 민영환 교수에게 다가갔다. ‘실존주의 연구’라 적힌 노트를 책상에 올렸다. 두 손으로. 공손하게.
“이건 돌려드리겠습니다.”
민영환 교수는 노트를 손에 들었다. 물끄러미 표지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던 그가 노트를 다시 민우 쪽으로 내밀었다.
“선생님?”
“나중에 운이 좋으면 너도 교수 자리에 앉을 수 있겠지. 가봐야 아는 일이긴 하다만. 뭐, 그때 너 같은 놈이 보이거든 물려주도록 해라.”
한 시대를 기록한 노트가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그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적어도 민우에게 있어서는.
“저는 명인대 출신이 아닙니다. 이 노트는 예진 선배나 민식 선배가 받는 게…….”
“명인대 출신이 아니긴 하지. 그래도 넌 이렇게 이 자리에 두 다리로 버티고 서 있잖나. 제자로서 말이야.”
그 의미는 명백했다. 민영환 교수에게 인정을 받은 것이다.
이로써 논문 지도는 모두 끝났다.
벅차오르는 가슴을 누르며 민우는 노트를 두 손으로 받았다. 그렇게나 가볍던 노트였는데, 이제는 너무나 무거워졌다.
손끝이 떨렸다.
하지만 민우는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잘하고 오겠습니다.”
“나가봐.”
연구실을 나선 민우는 선뜻 발을 떼지 못했다.
고개를 돌렸다.
‘민영환 교수 연구실’이라고 적힌 명패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까지 무섭게만 느껴졌던 명패였는데, 이제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