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마음을 담은 한 문장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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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마음을 담은 한 문장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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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마음을 담은 한 문장 (3)
2021.11.08.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어제 유진태 실장을 만나고 나서부터 민우는 틈틈이 그런 고민에 휩싸였다.
입원했으니 찾아가 봐야 하는 건 지인으로서의 도리였지만, 정작 당사자가 원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으니 선뜻 내키지 않았던 것.
민우는 노트북에서 눈을 떼고 의자에 등을 비스듬히 기댔다.
‘유 실장님이 학교까지 와서 부탁을 했다는 건 그만큼 큰일이라는 말이긴 한데. 역시 가 보는 게 좋겠지?’
올해 여름에 입원했을 때를 떠올려보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뜻하지 않은 연주의 방문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아마 연주도 똑같이 느끼지 않을까. 민우는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괜히 갔다가 역효과만 나면 큰일인데.’
거식증은 마음의 병이다. 보통의 질병과는 전혀 다르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고민이 쳇바퀴 돌듯 반복되었다.
그때 열린 문으로 한진섭이 슬쩍 들어왔다.
기척을 느끼지 못한 민우는 여전히 생각에 잠긴 채 천장을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다.
“천장 뚫어지겠다.”
그제야 민우는 시선을 돌렸다.
“어, 왔냐?”
“뭔 놈의 생각을 그렇게 해? 사람 오는 것도 모르고. 논문 막혔어?”
“아니.”
진섭이 캔커피를 던졌다. 방심하고 있던 민우가 깜짝 놀라며 받았다. 갓 뽑아온 것인지 따뜻했다. 마침 커피를 사러 나가려던 참이었는데 잘됐다.
“그냥 좀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서 그래.”
“헤어져.”
“밑도 끝도 없이 뭔 소리야. 대낮부터 술 마셨냐?”
날씨가 추워지니 옆구리가 더욱 시린 모양이었다. 요즘 부쩍 진섭의 투정이 늘었다. 민우가 게임을 결제하지 않은 게 좀 컸다.
뒤늦게 남동생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중이다.
민우가 캔을 따며 물었다.
“섭이 너 크리스마스이브에 약속 없지?”
“왜 없다고 단정하는 건데. 왜. 왜!”
반응이 재미있었다. 민우가 실실 웃었다. 놀릴 기회다 싶었다.
“예린이한테 물어보니 약속 없다고 하더라고. 그 말은 즉, 네가 약속을 못 땄다는 얘기니까 집에 콕 박혀서 게임이나 할 운명이라는 말 아니겠냐.”
“큭.”
민우의 논리는 완벽했다. 한진섭이 인상을 쓰며 자리에 엉거주춤 앉았다. 캔을 따고 커피를 맥주처럼 쭉 들이켰다.
“오늘따라 커피가 쓰네.”
“안 뜨겁냐?”
“……아, 뜨거.”
진섭의 입술이 벌게져 있었다. 그것을 보며 민우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진섭이 캔을 우그러뜨리며 짜증을 냈다.
“친구란 놈이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놀리기나 하고. 괜히 왔네. 괜히 왔어. 카페인 떨어질 것 같아서 셔틀 좀 해줬더니 글러 먹었네. 도서관이나 가야겠다.”
진섭이 가방을 들고 일어서려 하자 민우가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안 도와준다고는 안 했다.”
“설레발 사절요.”
진섭이 손을 뿌리치며 일어났다. 씨익 웃은 민우가 그의 등을 향해 한마디 던졌다.
“크리스마스이브에 파티할 거야.”
효과는 굉장했다. 파티라는 한마디에 진섭의 발이 땅에 묶였다.
“파티?”
“호텔 파티룸 빌렸어. 밤새도록 먹고 마시면서 신나게 놀 예정이야. 당연히 예린이도 낀다고 했고. 어때? 작업하기 좋은 기회 아니냐.”
진섭이 의심의 눈길을 보내자, 민우는 톡을 켜고 주예린과 나눈 대화 내역을 보여주었다. 진섭이 움찔 놀랐다.
“저녁 7시에 입실이니까 시간 알아서 비워 놔. 내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니 제발 이번에는 좀 어떻게든 해 봐. 어? 형이 언제까지 뒤치다꺼리해 줘야 하냐?”
“어휴.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더니.”
말은 그렇게 해도 자신이 없어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루카치의 만년필이라도 쥐여주고 싶었다. 그렇다면 현란한 화술로 마음을 사로잡을 텐데.
진섭이 물었다.
“여기에 계속 있을 거냐?”
“나갈지 말지 고민 중이야. 넌 도서관?”
진섭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말 과제 제출도 얼마 안 남았으니 달려봐야지. 넌 좋으시겠어 아주. 과제도 면제받고. 나도 그냥 학회에서 발표나 할 걸 그랬어.”
민우는 설예라 교수와 박창민 교수의 수업에서 과제를 면제받았다.
전국규모의 학술대회에서 발표한다는 소식을 들은 두 교수는 흔쾌히 발표용 논문을 기말고사 과제로 제출하라고 말했다.
명인대 교수들은 민우의 발표에 주목하고 있었다. 석사과정생이 전국규모 학술대회에서 발표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
민우는 하나는 알고 둘을 모르는 친구를 위해 조언했다.
“너도 언젠간 알게 될 거다. 과제하는 게 더 속이 편하다는 걸.”
“한참 나중 일이지. 그럼 수고하셔.”
진섭이 손을 슥 들어 보이고 밖으로 나갔다.
때마침 민우의 노트북에서 알람이 울렸다. 메일이 도착하면 나는 소리였기에 민우는 시선을 노트북으로 옮겼다.
‘랑느 박사님 메일?’
드디어 회신이 온 모양이었다.
딸칵.
민우는 마우스를 움직여 메일을 확인했다. 두 눈이 빠르게 행간을 읽어 나갔다.
― 좋은 제안을 줘서 몹시 기쁘군. 하지만 기조연설은 한국 학계에 몸담고 있는 분이 해야 옳은 것 같소. 나에겐 부담스러운 제안이야. 대신 학회 관계자에게 발표 시간을 줄 수 없나 물어봐 주시오. 마침 쓰던 논문이 있었는데, 프랑스 비교문학의 동향에 대해 짤막하게 강연을 하지.
강연이라는 말에 민우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말 그대로 월척이었다.
국문학 관련 학회의 기조연설은 으레 형식적으로 이루어진다. 외국 학회나 의회의 기조연설처럼 큰 의미가 있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주제발표를 하는 게 학회 입장에서는 더 도움이 되지. 실속이 있으니까.’
민우가 두 손을 꽉 쥐었다.
뜻밖의 행운이었다.
세계적인 석학의 강연을 유치한 것이다. 짜릿한 쾌감. 과연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박진영 교수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했다.
참을 수 없어 민우는 즉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교수님. 통화 괜찮으세요? 좋은 소식을 하나 전해 드리려고 전화했습니다.”
― 그런 건 시간이 없어도 들어야지. 대강 예상은 가는데. 랑느 박사님께서 기조연설 해주시기로 한 건가?
“기조연설 말고 발표 시간을 좀 얻을 수 없냐고 하시는데요? 프랑스 비교문학의 동향에 대해 강연을 해주신다고 합니다.”
― 뭐? 그게 사실이야?
목소리 톤이 확 올라갔다. 박진영 교수도 흥분한 것이다. 민우는 웃으며 그렇다고 대꾸했다.
“방금 메일 받았습니다. 학회 측에 문의해 달라고 하셨어요.”
― 아아, 이것 참 잘됐군! 안 그래도 박 선생 연락받고 그분이 어떤 분인지 조사를 해봤지. 대단한 석학이던데. 보도자료로 내보내도 될 정도야.
“그건 나중에 상의하시고요. 일단 발표 시간을 배정해주실 수 있는지 좀 알아봐 주세요.”
― 그건 문제없어. 내 선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야. 아직 학회 안내문 인쇄 전이기도 하고. 일정 추가하는 건 상관없다.
“잘됐네요.”
휴대폰 너머로 박진영 교수의 웃음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 오늘 저녁에 시간 내서 한일대로 넘어와라! 논문 때문에 바쁜 건 알지만 영양도 잘 챙겨야지. 한우 좋아한다고 했지? 오늘 질리도록 먹게 해주마.
얼마 전 지음사 회식을 놓친 게 생각나 민우는 꼭 가겠다고 답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진짜 이렇게 일이 풀릴 줄은 몰랐네.’
민우는 메일 답장 버튼을 누르려다가 말았다. 시간을 확인했다. 파리는 오전 10시 무렵. 민우는 즉시 국제전화를 걸었다.
「박사님. 명인대의 박민우입니다. 잘 지내셨죠? 보내 주신 메일 잘 받았습니다.」
「오, 미스터 박. 아침부터 해외전화가 걸려오기에 누군가 싶었는데 당신이었군.」
「바쁘신가요?」
「소르본의 아침은 늘 한가하다네.」
확실히 말투에서부터 여유가 느껴졌다. 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커피를 즐기고 있을 것 같았다.
부러움도 잠시, 민우는 용건을 꺼냈다.
「국제비교문학회에서 박사님의 강연을 승인해 주었습니다. 그걸 알려드리려고 전화했습니다. 오랜만에 박사님과 통화도 할 겸 해서 말입니다.」
「그렇군. 그럼 논문을 미스터 박에게 보내 줄 테니 한국어로 번역해서 논문집에 실어줄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제 메일로 보내 주세요.」
두 사람은 잠시 환담을 나눴다. 갑작스럽게 추워진 날씨와 학기 종료를 앞두고 드는 소회 같은 것들을 주로 이야기했다.
「그런데 미스터 박.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말씀하시죠.」
「왜 학회에 나를 초대하려고 하는 건지 문득 궁금하더군. 나는 한국에 여행을 가려고 했는데 또 공부를 하게 됐지 뭐야.」
랑느 박사는 웃으며 반쯤은 농담이라는 뉘앙스를 풍겼다. 민우가 대답했다.
「제가 이번 학회에서 발표를 하게 됐습니다. 그 모습을 박사님께 꼭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나에게? 왜지?」
민우는 잠시 말을 줄였다. 한여름 밤 인사동 찻집에서 그와 나눴던 이야기와 현대문학연구학회에서 경험한 것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정리가 끝났다.
곧 민우가 정리한 것을 차분히 말했다.
「잠깐이었지만 박사님께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습니다. 조금 주제넘을 수도 있겠지만 전 박사님을 제 스승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과를 보여드리고 싶었고요.」
「스승이라. 그렇군. 그런데 한국어로 스승은 어떻게 발음하지?」
민우는 천천히, 또박또박 ‘스승’이라고 말했다. 랑느 박사는 프랑스 어투로 어렵게 발음했다. 우스꽝스러운 발음이 나왔고, 두 사람이 동시에 웃었다.
「한국어는 어려워. 아무튼, 그럼 한국에서 만나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잠시 그 여운을 만끽한 민우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노트북을 끄고 307호를 나섰다.
겨울의 초입. 바람이 차가웠지만 민우는 코트의 깃을 여미며 의과대학 쪽으로 향했다.
마음을 정했다.
명인대학교 부속병원이 점점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 * *
연주가 입원해 있는 병실은 VIP실로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다. 경비가 철저해서가 아니라 약간 외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민우가 복도에 들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디를 봐도 호수 안내가 보이지 않았다.
특수한 병동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결국 민우는 너스 스테이션으로 가 간호사에게 물었다.
“정연주 이사님 면회 왔는데요. 12호실이 어디죠?”
“어디서 오셨죠?”
“대한그룹 유진태 비서실장님께 안내받고 왔습니다. 명인대에서 같은 프로젝트 하는 사람입니다.”
이럴 땐 최대한 아는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는 게 좋았다. 민우는 마지막으로 지갑에서 학생증을 꺼내 간호사에게 보여주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간호사가 너스 스테이션에서 나와 민우를 안내했다. 복도를 지나 기역자로 꺾어 들어가니 12호실이 나타났다.
“여기예요.”
문 앞에 수행비서가 지키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그와 안면이 있었다. 기억하지 못하면 어쩌나 했는데 비서가 꾸벅 인사를 했다.
민우는 병실 문 앞에 섰다. 문을 열려고 했는데, 또다시 갈등이 생겼다.
‘이게 최선일까?’
뭔가 다른 방법이 있지는 않을까. 민우는 문고리를 잡은 채 생각에 잠겼다.
― 진리는 하나지만, 도달하는 길은 여러 가지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 건지는 민우도 알지 못했다.
무심결에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복도 한구석에 화려하게 장식된 크리스마스트리가 세워져 있었다. 민우는 한참이나 그것을 바라보았다.
‘크리스마스…….’
순간 민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언젠가 연주와 나눈 톡 대화를 떠올리면서.
민우는 문고리에서 손을 뗐다. 들어가지 않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는 다시 너스 스테이션으로 돌아와 간호사를 불렀다.
“죄송한데 메모지 한 장만 빌릴 수 있을까요?”
“잠시만요. 자, 이거면 괜찮으시겠어요?”
“충분합니다.”
민우는 흰색 메모지를 받아들고 가방에서 루카치의 만년필을 꺼냈다.
뚜껑을 여니 은은한 푸른빛이 맴돌았다.
하지만 간호사는 의식하지 못했다. 그 푸른빛은 민우에게만 보이는 것이었다.
‘마음을 담아서 신중하게.’
민우가 집중하자 푸른빛이 점점 짙어졌다.
번쩍!
곧 펜이 움직이더니 프랑스어 문장 하나를 적었다. 민우는 다시 연주의 병실로 돌아와 수행비서에게 메모지를 건넸다.
“이것 좀 정연주 이사님께 전해 주세요. 명인대의 박민우가 왔었다고 하면 알 겁니다.”
“알겠습니다.”
민우는 미련 없이 병원을 나섰다. 한일대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 창밖의 풍경을 감상했다.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