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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마음을 담은 한 문장 (2) (120/500)


120. 마음을 담은 한 문장 (2)
2021.11.05.


통화는 금방 끝났다. 곧 민우는 전화를 끊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어느새 냄비에 담긴 부대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오, 맛있겠는데?”

“여기 엄마랑 자주 오는 데야. 맛있어.”

그녀의 어머니가 미식가라는 이야기는 자주 들었다.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맛은 보증된 것이리라.

“그런데 누구 전화?”

“회사. 별일 아냐. 신경 쓰지 마.”

민우는 에둘러 표현했다. 수빈은 유진태 실장과의 접점이 없었다. 굳이 이야기를 길게 할 필요는 없었다.

정말 별 이야기도 없었다. 유진태 실장은 오늘 밤에 잠깐 만나기를 청했고, 민우는 그러자고 답했다.

대신 멀리 갈 수는 없으니 유진태 실장에게 명인대로 와주기를 부탁했다. 그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보여줄 게 하나 있는데.”

민우는 화제를 돌릴 겸, 가방에서 호텔 숙박권을 꺼냈다. 봉투가 너무 예뻐 이수빈이 한참이나 앞뒤로 돌려보았다.

“이게 뭐야?”

“직접 확인해 봐.”

봉투에서 숙박권을 꺼낸 이수빈이 깜짝 놀랐다. 최근 파티룸이 유행하고 있었다. 거기에 골든팰리스 호텔의 로고가 달려 있으니 놀랄 만도 했다.

“세상에…… 이거 어떻게 구했어? 크리스마스이브 파티룸은 정말 구하기 어렵다고 들었거든. 게다가 골든팰리스라니. 예약해서 산 거야?”

“누나가 줬어. 크리스마스 때 재미있게 놀라고 하더라.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응응!”

수빈은 딱 마음에 든 모양이다. 민우는 안도했다. 이제야 누나의 참교육이 무엇이었는지 피부에 와 닿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수빈의 얼굴에 수심이 깔렸다. 민우가 물었다.

“뭐 문제라도 있어?”

“생각해보니 크리스마스이브에 외박은 좀 어려울 거 같아서. 아무래도 오빠 만나는 거 부모님이 아시니까 핑계 대기가 좀 그러네.”

“하긴.”

민우도 함께 고민했다. 예전에 그녀의 아버지를 만난 이후로 가끔 확인 전화가 걸려올 정도로 감시망이 두꺼워진 것은 사실이었다.

“적당한 거 없나?”

“지금까지 많이 써먹었잖아요. 이젠 바닥이라구.”

곧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고개를 끄덕인 민우가 제안했다.

“그럼 그날은 저녁까지만 둘이 놀다가 애들 불러서 같이 놀까? 친구들하고 논다는데 뭐라고 하진 않으실 거 아냐. 마침 여섯 명까지 들어갈 수 있는 파티룸이니까 딱 좋을 거 같은데.”

“아! 그것도 좋겠다. 그건 될 거 같아요. 다 같이 노는 거니까.”

“잘 얘기해 봐. 안 되면 너 빼고 우리끼리 놀 거다.”

“그건 안 돼.”

수빈이 무서운 표정을 지었지만, 민우는 실실 웃으며 다 익은 부대찌개를 수빈의 앞접시에 덜어 주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민우는 바로 명인대로 돌아왔다.

307호엔 아무도 없었다. 누가 창문을 열어놓고 가서 그런지 안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전기난로를 끌어와 자리에 앉았다.

‘좋아. 열 시까지 빡세게 써보자!’

민우는 노트북을 켜고 논문 작업에 착수했다.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자료를 찾고, 메모하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잠시 손가락을 멈춘 민우는 컴퓨터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9시 34분. 약속 시간까지는 26분이 남았다.

민우의 시선이 다시 논문을 향했다. 그러나 그의 머리는 논문이 아니라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근데 대체 무슨 일일까?’

민우는 유진태 비서실장과의 통화를 되짚어 보았다.

특별한 이야기는 없었다. 통화가 가능한지 먼저 물었고, 그렇다고 대답을 하자 그는 대뜸 만나기를 청했다.

유진태 비서실장이 먼저 연락을 해 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당연히 만나자고 제안한 것도 처음 있는 일.

‘아무래도 연주 일인 것 같은데. 그게 아니면 유진태 실장님이 전화할 일도 없겠지. 확실해.’

민우는 한숨을 내쉬며 한번 기지개를 켰다. 벌써부터 고민하는 것은 시간 낭비였다.

잠시 쉴 겸 책상에 놓인 달력을 집었다. 12월 9일에 붉은색으로 동그라미가 처져 있다.

‘이날까지 안유진 간사님께 논문 파일을 보내야 해. 완성된 원고로.’

원고를 미리 수급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학회장에서 배부할 논문집을 인쇄해야 하고, 토론자가 논문을 읽고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고 수급이 늦어지는 일은 생각보다 자주 일어난다. 글을 쓰는 직업이 대부분 그렇듯, 마감에 쫓기다 보니 기일을 넘기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렇게 되면 행사를 준비하는 총무간사들은 물론, 토론자도 난처해지게 된다. 심지어 쪽대본처럼 학술대회 당일에 발표문이 도착하는 경우도 가끔 있다.

민우는 현대문학연구학회 학술대회를 준비하며 그런 행태가 얼마나 민폐인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절대로 기일을 넘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오늘은 11월 30일이니까 내일부터 9일 정도 시간이 있는 거네.’

민우는 펜을 들고 달력에 체크를 시작했다. 12월 5일 월요일에 파란색 동그라미가 쳐졌다.

‘이날 민 선생님께 논문 지도를 한 번 받고, 남은 4일 동안 수정하면서 결론 작업을 하면 되겠다. 그럼 딱 맞겠어.’

12월 10일부터는 디펜스 준비에 들어간다. 친구들이 모아준 자료를 선별해서 학회 시작 전까지 머릿속에 모조리 집어넣을 계획이었다.

모든 계획이 알차게 정리되었다. 개운함을 느낀 민우는 달력을 내려놓고 다시 모니터에 집중했다.

타닥타닥―

경쾌한 자판 소리가 울렸다.

‘이 정도면 됐다.’

약속 시간이 되기 직전, 민우는 본론 두 번째 챕터를 마무리했다. 이제 내일부터 세 번째 챕터 작업에 들어갈 수 있게 됐다.

민우는 나가기 전에 앞 페이지로 돌아와 논문 개요를 다시 훑었다.

본론의 첫 번째 부분은 전후문학과 실존주의에 대한 일반론을 담고 있었다. 두 번째 부분은 손창섭의 작품을, 내일부터 쓸 세 번째 부분은 장용학의 작품을 분석하게 됐다.

‘만년필이 뽑아준 목차라 그런지 밸런스가 아주 좋아. 내가 잘 소화시켜야 할 텐데.’

확실히 민 교수도 본문 목차에 대해 지적을 하지는 않았다. 그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대로 진행해도 된다는 의미였다.

국문과 대학원생들이 논문 지도를 받을 때 가장 많이 지적을 당하는 부분이 바로 목차다. 표현 문제도 있지만, 서론과 본론, 그리고 결론을 아우르는 밸런스를 갖추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쪽으로 잔뼈가 굵은 학자들은 목차만 보고도 논문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이는 독자들이 책을 고르는 이치와 비슷하다.

제목과 줄거리에서 흥미를 느끼듯, 연구자들은 논문의 초록과 목차, 키워드에서 흥미를 느낀다. 특히 목차는 자신이 필요한 내용이 담겨 있는지 알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지표다.

‘그릇은 좋은 걸로 준비되었어. 음식을 어떻게 잘 만들고 담느냐가 문제야. 후우, 정신 바짝 차리고 나머지 챕터도 잘 써보자.’

민우가 책상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느새 시침이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307호의 불을 끄고 인문관 밖으로 나왔다. 이제는 익숙한 검은색 고급 세단이 건물 앞에 서 있었다.

위이잉―

민우가 계단을 내려오자 차창이 내려갔다.

조금은 수척한 모습의 유진태 실장이 민우를 보고 꾸벅 묵례했다. 민우도 고개를 숙였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네요.”

“아닙니다. 뜬금없이 연락드려 뵙자고 청한 제 불찰이지요. 그나저나 오랜만에 뵙습니다. 날이 춥네요. 일단 타시죠.”

민우는 조수석에 올랐다. 히터가 미리 틀어져 있어서 따뜻하고 좋았다. 민우는 가방을 앞으로 놓고 편하게 시트에 몸을 기댔다.

차가 조심스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문관 앞은 차를 대기가 애매한 곳이었다. 곧 유진태는 근처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주변이 쥐죽은 듯 고요했다. 그 와중에 민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연주한테 무슨 일이 있는 거죠?”

“역시 눈치채고 계셨군요.”

“출장을 갔다는데 비서실 직원이 일정을 잘 모르고 있는 게 좀 이상했어요. 무엇보다도 유 실장님이 제게 직접 연락을 하신 게 컸죠.”

유진태는 고개를 끄덕여 인정했다. 서두를 어떻게 열어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민우가 시작을 잘해줬다.

세련된 미소가 나올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그는 웃지 않았다. 여전히 경직된, 조금은 슬픈 표정을 짓고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아가씨께서 좀 편찮으십니다. 2주 전쯤 자택에서 쓰러지셨지요.”

“쓰러졌다고요?”

아플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긴 했는데, 쓰러질 정도일 줄은 몰랐다. 민우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무슨 큰 병이 있는 겁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큰 병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주치의의 말로는 신경성 식욕부진증이라고 하더군요. 흔히들 말하는 거식증입니다.”

민우는 낮은 신음을 흘렸다. 가끔 톡으로 이야기를 할 때 식사를 잘 못 한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흘려들었던 자신을 책망했다.

처음엔 식사를 잘하지 못하다가 이제는 아예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다 영양실조로 쓰러진 것이다.

“거식증은 생각 이상으로 무서운 병이더군요. 치사율이 10퍼센트를 오갈 정도로. 마음의 병이기 때문에 약도, 수술도 소용이 없다고 합니다.”

유진태 비서실장이 주치의의 말을 옮겼다. 민우가 물었다.

“그럼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습니까?”

“예. 지금은 명인대 부속병원에 계십니다.”

“입원했다면 기사가 났을 것 같은데. 언론에서는 조용한 것 같네요.”

“대한그룹 정도면 언론 통제하는 건 식은 죽 먹기입니다. 게다가 숨긴다고 해서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는 일은 아니잖습니까.”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와병 사실이 알려지면 선우기획은 물론 그룹에 득이 될 게 없었다. 호사가들이나 좋아할 소식이니까.

“회사 일이 많이 힘들었나 보네요. 잘 견뎌내고 있다고 얘길 듣긴 했는데. 겉치레였나…….”

“아가씨 성격상 회사 일하고는 거리가 좀 있지 않습니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박 선생님도 잘 알고 계시니 중언부언하진 않겠습니다.”

연주는 내성적이고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다. 그런데 직장 생활, 그것도 임원직을 수행하려면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했다.

그것 자체만으로도 큰 스트레스가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연주는 학업마저 포기해야 했다. 암담한 상황에서 스트레스를 견디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대학원을 그만두게 된 것도 원인이 된 거겠죠?”

“저는 의사가 아닙니다.”

유진태는 즉답을 회피했지만, 민우는 긍정하는 뉘앙스를 받았다. 하지만 더 이상 그 부분에 대해 묻지는 않았다.

민우는 차창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캠퍼스 저편에 거대한 건물 하나가 우뚝 서 있었다. 명인대 부속병원 본관이었다.

“병문안은 가능합니까? 예전에 저도 병원 신세를 진 적이 있는데, 그때 연주가 와 줬었거든요.”

“허가된 분들만 가능합니다.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한 상황이라서 말입니다. 물론 박 선생님이 와주신다면 도움이 되겠지요.”

그런데 좀 이상했다. 만약 자신을 필요로 하는 거라면, 유진태 실장이 아니라 연주가 먼저 연락을 하지 않았을까.

“혹시 연주가 보내서 오신 겁니까?”

“그 반대입니다.”

“반대요?”

의외의 대답에 민우는 유진태 실장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가씨는 박 선생님의 병문안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몇 번 말씀을 드려보긴 했지만, 단호히 거절하셨지요.”

“이유는요?”

“용태가 좋지 않으셔서 그런 것 같습니다. 몰라볼 정도로 많이 마르셨습니다. 생각하시는 것 이상으로.”

“그럼 좀 회복이 된 다음에 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글쎄요.”

유진태는 며칠 전 일을 떠올렸다. <서사학개론>을 받아든 연주는 입원한 이후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는 거기에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깨달았다. 그래서 민우에게 연락했다.

연주가 <서사학개론>을 받아들고 좋아한 것은 노력의 결과를 눈으로 확인해서가 아니다. 그 속에 민우와의 추억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저는 아가씨께서 빨리 예전의 모습을 되찾으시길 바랄 뿐입니다. 그렇게 되는 게 제 일이기도 하고요.”

유진태는 결심했다. 도박을 하자. 그래서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곧 반으로 접힌 종이쪽지가 민우에게 넘어갔다.

“시간 날 때 한번 들러 주십시오. 분명 좋아하실 겁니다.”

민우는 종이를 펼쳤다. 그 안에는 병실 호수와 면회 가능 시간이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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