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마음을 담은 한 문장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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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마음을 담은 한 문장 (1)
2021.11.04.
민우는 직감적으로 그녀가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알 것 같았다.
“가방에 금괴라도 들었어요? 아까부터 자꾸 신경 쓰시네.”
“아, 아녜요. 금괴라도 들었으면 좋겠다.”
“네?”
“농담이에요.”
당황한 이유리가 어색하게 웃었다. 민우는 좀 더 놀리고 싶었지만,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이제 대강 정리를 하고 반포로 넘어가서 수빈을 만나야 했다.
민우가 넉살 좋게 말했다.
“할 말 있으면 편하게 하세요. 우리 친구잖아요.”
“친구요?”
“네. 친구. 동갑이잖아요. 여긴 회사도 아니고.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잖아요.”
이유리는 꽤 놀란 기색이었다. 대하기 좀 어려운 부분이 있었는데 민우가 선뜻 친구라는 표현을 써준 것이다. 동갑이기도 해서 친근감이 확 들었다.
“민우 씨랑 친구 해도 돼요?”
“안 될 거 뭐 있나요. 같은 회사 사람도 아니고. 제가 라온북스에 취직을 할 것도 아닌데요. 밖에서는 친구죠. 현기혁 팀장님이 계신다면 좀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겠지만.”
그래서 지음사에 있는 장철호 주임과도 친구를 먹었다. 서울에 친구가 많지 않았던 탓이 커서 그런지 일적인 관계로만 만나기는 싫었다.
민우는 사람과 사물이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했다.
사물의 모양을 정확하게 보려면 어느 정도 거리를 둬야 하지만, 사람은 그 반대다. 더 가깝고 친밀해져야 숨겨진 면모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친구면 반말해도 되요?”
“당연히. 그 전에 가방에 있는 거나 얼른 꺼내 봐.”
민우는 보지 않아도 뭐가 나올지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유리가 꺼낸 것은 책이었다.
한국 책은 아니었다. 한자와 히라가나가 섞인, 적당한 두께의 일본 원서였다.
이유리는 조심스럽게 민우의 앞자리에 내려놓았다.
“일본 책이네.”
“응. 이번에 우리 출판사에서 판권을 따낸 소설이야.”
민우는 잠시 책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뭔가가 허전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본어인 건 알겠는데 읽을 수가 없었다.
“잠깐만.”
민우는 가방에서 루카치의 안경을 꺼내 제목을 읽었다. <오멜라스의 마녀>라는 제목이었다.
민우가 잠시 시선을 이유리에게 옮겼다.
“오멜라스의 마녀? 제목이 왠지 판타지 같은데. 이것도 그쪽 장르야?”
“아니. 미스테리. 현대 배경이야. 서스펜스와 SF적인 느낌이 가미된 퓨전 소설인데. 저자분이 워낙 유명하신 분이라 일본에서 인기가 많아.”
저자 이름을 확인한 민우는 깜짝 놀랐다. 미야와키 류타(宮脇龍太). 일본에서 주목받고 있는 미스테리 작가 중 한 명이다.
일본 소설을 거의 읽지 않은 민우이지만, 요네자와 호노부와 미야와키 류타 두 사람의 소설만큼은 빠짐없이 챙겨보고 있다.
“미야와키 류타면 꽤 유명한 분인데 이것도 라온북스에서 판권을 따낸 거야? 대단하네.”
“실은 일이 좀 어렵게 되고 있었는데…… 민우 덕분에 막판에 뒤집혔어.”
“나 때문에?”
이유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됐다. 민우는 잠시 책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어질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사실 지음사랑 경쟁이 붙었어. 판권 따려고.”
“아.”
지음사라는 이름이 나오자 민우는 골이 지끈거렸다. 윤정민 팀장을 시작으로, 송승현 실장까지 잔소리할 것 같았다.
그건 뭐 중요한 건 아니었다. 민우는 이어지는 말에 집중했다.
“지음사에서 굉장히 공격적으로 나서서 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민우 네가 번역한 <사각 살인> 있지? 이게 국내 시장에서 베스트셀러 1위로 올라가는 순간 상황이 좀 바뀌었어.”
“그건 좀 이상하잖아.”
“뭐가?”
“아니, 고작 한 작품 베스트셀러에 올랐다고 해서 대기업 물량 공세를 중소출판사가 이겨냈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거잖아.”
이유리가 소리 내어 웃었다. 이렇게 적나라하게 이야기할 줄은 몰랐다.
“아. 미안. 라온북스를 깎아내리려는 건 아니고…….”
“괜찮아. 아무튼 사정이 좀 있었어.”
“어떤?”
“미야와키 류타 작가님이 리차드 와일즈 작가 팬이거든.”
리차드 와일즈는 민우가 번역한 <사각 살인>을 쓴 작가였다.
<사각 살인>은 일본에도 비슷한 시기에 출판이 됐는데, 쟁쟁한 작품을 밀어내고 외서 미스터리 분야 1위를 차지했다.
이유리가 계속 설명했다.
“그래서 <사각 살인>을 멋지게 번역해 준 우리 라온북스를 파트너로 하고 싶다고 류타 작가님이 일본 쪽 출판사에 요청하셨대. 오히려 대기업은 미덥지 못하고 하시더라. 이게 내가 현 팀장님께 들은 뒷이야기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작가가 특이한 생물이라는 농담은 오래전부터 듣고 있었지만, 그런 걸로 판권 계약이 결정될 줄은 몰랐다.
이유리가 눈웃음을 지으며 민우를 바라보았다.
“생각한 것 이상으로 네 활약이 컸어. 내년 큰산번역문학상 있지. 기대해 봐도 좋지 않을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 별로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있는데.”
“난 엄청 기대되는데? 네가 신인상을 수상하고 어엿한 번역가로 데뷔하는 그 모습. 꼭 보고 싶어.”
“네 일도 아닌데?”
민우가 농담으로 던졌지만 이유리는 진지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일이 아니라고 해도 내 친구의 일이니까.”
“오, 멋있다.”
이타적인 사람이라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동갑내기인데도 배울 점이 많아 보였다. 친구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우가 책장을 펼쳤다. 안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책 안은 모두 한국어로 바뀌어 있었다.
“그런데 뭔가 기본적인 부분에서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지 않냐. 팀장님도 착각을 하신 거 같고.”
이유리가 눈을 깜박이며 민우를 바라보기만 했다. 민우가 책을 손에 쥐고 흔들었다.
“나 일본어 번역해 본 적 없어. 그런데 밑도 끝도 없이 책 들고 와서 맡기려고 하면 어떡해.”
“계약을 당장 하겠다는 건 아니고, 민우가 할 수 있는지 확인해 보려고 가져온 거야. 6개 국어 할 줄 안다고 했잖아?”
“하는 거랑 번역 일은 완전 다른데.”
민우는 일부러 약한 척을 했다. 거절을 완곡하게 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일정이 빠듯하다면 제안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유리도 보통은 아니었다. 민우의 표정을 간파했는지 빙긋 웃었다.
“친구니까 그냥 솔직하게 이야기할게. 납기는 내년 1월 말까지 연장 가능해. 어때?”
1월 말. 솔깃하다.
어차피 단권이다. 물리적으로 15일 정도의 여유가 있지만 마음만 먹으면 일주일, 아니 사흘이면 해치울 수 있다.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그리고 다음은 일본어인가?’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언어의 번역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결정을 끝낸 민우가 말했다.
“가방에 든 거 마저 꺼내 봐.”
“응?”
“계약서 가져온 거 다 알아.”
당황한 이유리가 가방에서 더듬더듬 서류를 꺼냈다. 민우의 예상대로 출판번역계약서였다. 민우가 하나 더 요구했다.
“펜도 좀.”
펜까지 넘긴 이유리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크게 두근거렸다.
편집자 생활 처음으로 계약을 따내기 직전이었다. 왠지 오늘이 지나면 편집자로서 한 발 내디딜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편집자는 발전 가능성이 적어. 계약을 따고, 기획도 하면서 저변을 넓혀가는 게 유리 씨에게 좋을 거야. 그러니까 이번 계약은 유리 씨가 해봐.
현기혁 팀장의 말이 떠올랐다.
어렵지 않을까, 불가능하다. 그렇게 반문해 보았지만 현기혁 팀장은 웃으며 자신의 능력을 믿어주었다.
이유리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편집자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멋진 기획자가 되는 것이 그녀의 꿈이었다. 데스크에 앉아 여러 작가들과 호흡하며 좋은 책을 만들고 싶었다.
그러는 사이 민우는 계약서를 훑고 바로 서명했다. 계약서 한 부를 이유리에게 건넸다.
“아…….”
너무 갑작스럽게 계약이 진행됐다. 이유리는 멍한 표정으로 민우를 바라보았다.
“나 좀 무리한 거야. 그러니까 다음에 밥 한번 사라고. 먼저 갈게. 또 보자.”
“정말 고마워. 조심히 가!”
작별 인사를 건넨 민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유리가 준 선물까지 있어 손이 묵직했다. 민우는 큰맘 먹고 택시를 잡았다.
* * *
반포동에 위치한 고급 아파트단지에 내린 민우는 바로 수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때마침 그녀는 과외에서 돌아와 있었다.
“으으. 춥다.”
― 오늘 정말 춥더라. 두껍게 잘 입었지?
“알잖아. 두껍게 입어도 의미 없는 거.”
― 여름에도 보일러 트는 사람 흔치 않지.
수빈의 말에 민우는 피식 웃었다. 고개를 들어 아파트를 훑었다. 수빈의 집에 불이 켜져 있었다.
“잠깐 나와. 나 지금 너희 아파트 앞이야.”
― 응? 농담하지 마.
“내가 그런 걸로 농담하는 사람입니까?”
곧 전화가 끊기고 수빈이 밖으로 뛰어나왔다. 외투를 걸치고 있었는데, 못 보던 것이었다. 굉장히 예쁘게 잘 어울렸다.
‘하긴, 작년 겨울에는 얘가 누군지 모르고 살았으니까. 이런 옷이 있다는 것도 몰랐겠지.’
늘 돌아오는 겨울이지만 왠지 이번 겨울은 특별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바쁜데 왜 왔어? 논문 쓸 때까지는 참아주려고 했는데. 이렇게 말도 없이 오면 어떡해.”
말은 그렇게 해도 수빈은 좋은지 배시시 웃는다. 민우는 손에 든 쇼핑백을 건넸다. 안에는 책이 가득 들어 있었다.
“선물.”
“우와. 무슨 책을 이렇게 많이 샀어?”
“연말까지 지원금 다 써야 해서. 전에 보고 싶다고 한 것들 위주로 골라봤어.”
책을 좋아하는 사람답게 수빈의 표정이 활짝 폈다. 그녀는 백을 열어 책을 보려고 했는데, 그만두고 민우의 팔을 붙들었다.
“오빠 춥지? 어디 들어가 있자. 저녁은?”
“아직 안 먹었지. 한성문고에서 바로 온 거야.”
“그럼 먹으러 가요. 이런 날엔 따뜻한 국물이 최고지.”
“너도 나이를 먹어 가는구나.”
인상을 찡그린 수빈은 민우의 팔뚝을 살짝 꼬집었다.
두 사람은 근처에 있는 부대찌개 집에 들렀다. 2인분에 라면 사리를 추가했다.
민우는 수빈에게 앞치마를 챙겨 주었다. 옷이 하얀색이라 튀면 안 될 것 같았다. 수빈은 그런 민우의 자상한 모습이 좋았다.
“매장 분위기는 어땠어?”
“완전 끝내줬지. 1쇄는 금방 소진될 거 같아. 얘기 들어보니 2쇄 준비하고 있는 거 같더라고.”
“많이 팔리면 팔릴수록 오빠한테 좋은 거지?”
“그렇지. 매절이 아니라 인세로 계약을 했으니까. 판매 부수대로 돈을 받아.”
물론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판매량이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민우가 기대하고 있는 게 하나 있었다.
소설의 영화화.
작품의 스케일로 미루어 볼 때 한두 편에서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개봉 전후로 원작 소설이 불티나게 팔릴 것이다.
말 그대로 <더 위자드>는 민우의 연금이 될 수도 있는 작품이었다.
게다가 내년에는 <더 위자드> 2부 번역이 예정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좋은 성적을 얻었으니 2부 판권 계약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러다 오빠 금방 부자 되겠다.”
“부자되는 게 쉬운 줄 아냐. 그래도 돈이 좀 필요하긴 해. 앞으로 좀 더 열심히 해 보려고.”
“돈은 왜?”
“어머니를 서울로 모셔오는 게 좋을 거 같아. 지금 어머니도 그렇고 누나도 그렇고 나도 다 떨어져서 살고 있잖아. 누나도 이제 시집갈 나이 다됐고, 어머니도 나이가 드셨으니 다 같이 모여 사는 게 좋지 않나 싶어서.”
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가 가끔 하던 말이라 새롭지는 않았지만, 들을 때마다 그가 새롭게 보였다. 가정적이고 자상했다.
“공부하면서 돈을 모으는 게 쉽지는 않지만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번역 일 중심으로 이것저것 해 보려고 생각하고 있어.”
“역시 오빠는 계획이 잘 잡혀 있구나. 멋있어.”
“멋있는 거 이제 알았습니까?”
민우의 농담에 수빈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때 뭔가 생각났는지 질문을 던졌다.
“아직도 연주하고 연락 안 돼?”
“며칠 전에 보낸 톡도 안 읽더라고. 회사에선 출장 갔다고 하고. 난감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연주는 이경훈 교수가 추진하고 있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녀를 추천한 것은 민우였다.
프로젝트 진척 상황을 공유해야 하는데 전혀 연락되지 않고 있으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바쁜가 보다. 이렇게 연락이 안 되는 경우는 없었잖아. 그럼 프로젝트는 어떻게 되는 거야?”
“시간이 넉넉해서 아직 걱정은 없어. 내가 소개한 사람이라 입장이 좀 난처해지긴 했지만…… 정 안되면 다른 사람 구해봐야지.”
“별일 없으면 좋을 텐데.”
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한 번이 아니었다. 계속 울리는 걸 보니 전화였다.
민우는 잠시 대화를 멈추고 핸드폰을 꺼냈다.
뜻밖의 사람의 이름이 액정에 떴다. 대한그룹의 유진태 비서실장이었다.
“잠깐만. 나 전화 좀 받고 올게.”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선 민우가 조용한 곳으로 가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