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대박의 조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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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대박의 조짐 (2)
2021.11.01.
다음 날, 연구실에서 논문 작업을 하던 민우는 늦지 않게 307호를 나섰다. 오후 한 시. 약속 시간인 세 시까지는 여유가 있었지만 민우는 조금 서둘렀다.
‘춥다.’
입에서 입김이 나올 정도였다.
오늘은 낮에도 영하 2도까지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추위 탓인지 사람들의 옷이 무척 두꺼워졌다.
민우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인문관을 나섰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학교 안은 비교적 한산했다. 곧 기말고사 시즌이라 도서관만 복작거렸다.
우우우웅―
진동이 한 번 울렸다.
버스정류장으로 걸으며 핸드폰을 꺼내 알림을 확인했다. 메일이 한 통 와 있었는데, 소르본대의 랑느 박사가 보낸 메일이었다.
‘오랜만에 메일을 보내셨네. 웬일이시지?’
민우는 가벼운 기대감으로 메일을 열었다.
내용이 꽤 길었다. 프랑스어로 쓰였지만, 민우는 읽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 내가 보내 준 논문은 유용했는지 모르겠소. 추가로 볼만한 게 두 편 더 있어서 첨부하니 참고해 주시오. 덧붙여 12월 초에 가족들과 함께 한국에 방문할 예정이오. 전에 했던 약속이 아직까지도 유효하다면 즐거운 여행이 될 것 같소.
대강 간추리면 이런 내용이었다.
현대문학연구학회에 참여했던 랑느 박사는 가족들과 한국에 여행을 오겠다고 했었다. 민우는 가이드를 자청했고, 그날이 다가온 것이다.
메일에 따르면 입국 날짜는 12월 9일. 약 2주간 한국에 체류할 계획이라고 한다.
날짜를 확인하던 민우의 머릿속에 그럴듯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가만. 12월 9일부터 2주간이면 학회 발표 일자랑 겹치잖아? 16일이니까. 학회에 랑느 박사님을 초대해 볼까?’
민우는 학회의 일개 회원이지만, 한일대의 박진영 교수에게 부탁한다면 안 될 것도 없는 일이다. 오히려 국제비교문학회에서 감사해할 일이다.
랑느 박사가 보내준 논문이 없었더라면 발표는 꿈도 꾸지 못했을 터. 발표하는 장면을 보여준다면 보람 이상의 큰 선물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한번 진행해 보자. 일단 답장을 하고.’
민우는 답장 버튼을 터치해 영어로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던 도중 손가락이 멈췄다. 한 가지 문제가 떠올랐다.
‘맞다. 연주가 해외 출장 중이었지. 랑느 박사님이 오실 때 합석할 수 있으려나?’
예전에 연주는 랑느 박사를 만나고 싶다고 한 적이 있다. 그리고 민우는 자리를 만들어 보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일단 민우는 답장을 마무리하고 연주의 톡방을 열었다.
‘아직도 안 읽었네.’
얼마 전 선우기획에 책을 전해주러 가기 전 보낸 메시지가 최근 것이었다. 끝에 숫자 1이 아직까지도 지워지지 않았다.
‘대체 어디로 나갔기에 톡을 못 읽는 거야?’
미국으로 출장을 갔다고 들었는데, 이상했다. 연주 정도라면 돈 걱정 없이 데이터 로밍을 마음껏 쓸 수 있을 텐데.
일단 민우는 연주에게 랑느 박사가 한국에 온다는 톡을 남겼다. 조만간 그녀가 읽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버스가 도착했다.
민우는 지하철역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빈자리가 많아 아무 데나 골라 앉았다. 그리고 박진영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민우입니다. 통화 괜찮으세요?”
― 그래. 안 그래도 한번 전화를 하려고 했었는데. 발표 준비는 잘되어 가나?
“순항 중입니다. 괜찮은 물건이 나올 거 같아요.”
― 오. 다행이구나. 못해도 다음 달 9일 전까지는 논문을 줬으면 좋겠다. 토론자에게 전달해야 하니까. 규정은 알고 있지?
“예. 최대한 맞춰보겠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잠시 발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박진영 교수는 자신의 지도 제자가 아님에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민우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교수님. 혹시 소르본대에 계시는 랑느 박사님을 아시나요? 피에르 랑느요.”
― 이름은 몇 번 들어봤지. 예전에 박 선생이 친분이 있다고 한 사람 아닌가? 그분은 왜?
“다음 달 9일에 한국에 여행을 오신다고 해서요. 기회가 되면 국제비교문학회 학술대회에 초대를 하고 싶은데, 선생님께서 좀 도와주실 수 없나 싶어서 말입니다.”
― 초대를?
잠시 전화기가 조용해졌다. 소르본대는 인문학 분야로는 세계적인 명문이다. 계산을 끝낸 박진영 교수가 다시 말했다.
―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학회 회원이 아니라도 학술대회에 참가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한국어를 할 줄 아시나?
“모릅니다. 그래서 통역이 필요할 거예요. 제가 하면 되긴 하는데 전 발표 때문에 정신이 없을 거 같아서 선생님께 전화 드린 겁니다.”
― 그렇군. 불문과 교수 중에서 섭외를 해야겠는데.
“랑느 박사님은 영어도 잘하십니다.”
― 아, 그래? 그럼 내가 하지. 우리 학회가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다 보니 외국인 교수를 초빙한 적은 거의 없었는데, 이거 아주 특별한 경험이 되겠어.
전화기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렸다. 박진영 교수는 학술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를 뜻밖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추가로 제안했다.
― 혹시 말이다. 랑느 박사님께 기조연설을 부탁드려도 괜찮을까?
“아마 가능할 겁니다.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셔서요. 제가 여쭤보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 고마워, 박 선생. 다음에 내가 거하게 한턱 쏘지.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민우는 전화를 끊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석사 2학기일 뿐인데, 학회에서 한 10년은 구른 것 같은 관록이 스스로에게 느껴졌다.
그런 생각이 든 것은 잠깐이었다.
민우는 마음을 침착하게 다스렸다. 자칫하다가는 자만심으로 바뀔 수 있었기 때문에.
랑느 박사에게 메일을 보낸 다음 의자에 몸을 기댔다. 학회 말고 다른 생각을 하며 머릿속을 비웠다. 휴식이 필요했다.
‘서점 나가는 김에 살 만한 책이 있나 좀 둘러보자. 요즘 통 서점엘 못 갔더니 머리가 빈 느낌이야.’
지음사에서 지원하는 도서구입비 한도를 연말까지 다 채워야 했다. 오늘은 장르 가리지 않고 양손 무겁게 돌아오기로 결심했다.
인터넷에서 클릭 몇 번만 하면 하루 만에 책이 오는 편리한 세상이긴 하다. 그래도 민우는 책을 직접 넘겨보며 고르는 게 좋았다.
뜻하지 않게 좋은 책을 발견했을 때의 그 쾌감은 아는 사람만 아는 것이다.
‘참, 가는 길에 수빈이 것도 좀 사 올까?’
민우는 핸드폰을 꺼내 수빈에게 톡을 보냈다.
― 지금 한성문고 가는데 뭐 보고 싶은 거 없어? 사다 줄게.
때마침 핸드폰을 보고 있었는지 숫자 1이 금방 지워졌다.
애기♡: 보고 싶은 게 하나 있긴 해
― 오늘 잔뜩 사 갈 거니까 말만 해. 부담 갖지 말고.
애기♡: 오빠
민우는 핸드폰을 바라보며 한참을 기다렸다. 이어질 말이 있을 거 같은데, 수빈은 자신을 부르기만 하고 말을 끊었다.
“아.”
뒤늦게 무슨 뜻인지 깨달은 민우가 실없이 웃었다. 부른 게 아니라 필요한 게 자신이라는 말이었다. 이런 식으로 애정표현을 할 줄은 몰랐다.
핸드폰을 바라보는 민우의 입가에 아빠 미소가 걸렸다. 그가 재빨리 손가락을 움직였다.
― 이따 집에 가는 길에 잠깐 들를게
애기♡: 아냐. 오빠 논문 쓰느라 바쁠 텐데 바로 들어가요
― 그래도 괜찮겠어?
애기♡: 나 한두 살 먹은 애기 아니거든~ 대신 크리스마스이브를 기대하지요^^
민우는 아직 골든팰리스 호텔 숙박권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6인까지 입실이 가능한 숙박권이다. 어떻게 쓸지는 좀 더 고민해 보기로 했다.
단둘이 보내도 되고 여럿이 모여 파티를 해도 된다. 어떻게 할지는 수빈과 상의해 보는 게 좋을 거 같았다.
―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인데. 아무튼 곧 과외 하지? 잘하고 와. 끝나면 톡하구
민우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물론 그냥 집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생각이다. 연애를 하다 보니 여자의 언어에 어떤 속뜻이 있는지 깨닫기 시작했던 것이다.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와줬으면 좋겠다는 속뜻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전에 읽고 싶은 책이 있다고 했었지. 뭐였더라…….’
간신히 제목을 떠올린 민우는 그 책과 함께 수빈이 읽을 만한 시집을 몇 권 사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명인대입구역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지하철로 갈아탔다. 한성문고가 있는 광화문역까지는 금방이었다.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들로 북적였다.
민우는 잠시 시간을 확인했다.
약속 시간인 오후 세 시까지는 충분했다. 우선 수빈이에게 선물할 책을 골랐고, 문학 코너를 돌아다니며 눈에 띄는 책들을 몇 개 집었다.
성과가 제법 좋았다. 논문만 아니었다면 오늘 밤새 읽었을 만한 책들이었다.
‘최근엔 사회과학 쪽 책도 재미가 있단 말이지.’
처음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는 학문적 대상을 문학에 한정했다. 하지만 지식이 쌓이면 쌓일수록 시야가 더욱 넓어졌다.
자연스레 민우는 다른 분야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남들은 한눈을 판다고 잔소리를 하겠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엔 좋은 현상이었다.
역사적으로 명성을 날린 석학들은 대개 두 가지 이상의 전문분야를 가지고 있었다.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사람도 있었고, 물리학자이자 신학자인 사람도 있었다.
민우는 생각했다.
‘적어도 루카치의 유고를 이어서 쓰려면 분야를 넘나드는 방대한 지식이 필요해. 결국 인간에 대한 고찰이니까.’
학문을 융합하는 일. 말 그대로 꿈같은 일이었지만, 민우는 언젠가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안경과 만년필만 있었지만, 지금은 동료들과 선생들까지 있으니까.
곧 약속 시간이 다됐다. 민우는 바로 약속 장소로 향했는데, 그곳에서 민우는 화들짝 놀랐다.
‘대박!’
<더 위자드> 전용 매대에 사람들이 들끓었다. 저자 사인본 증정 이벤트에 참가하러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매대에 놓인 <더 위자드> 세트가 착실하게 하나둘 사라지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돌아보니 생긋 웃고 있는 이유리의 모습이 보였다. 목도리에 코트를 걸치니 대학생 같아 보였다.
그녀가 꾸벅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민우 씨. 잘 지내셨어요? 팀장님께 듣기로는 요즘 엄청 바쁘다고 하시던데.”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있어요. 12월 중순까지는 정신이 없을 거 같아요.”
“그런데 여기에서 이렇게 시간 보내셔도 되는 거예요?”
“쉬엄쉬엄해야죠. 바람도 쐬고 책도 살 겸 나왔어요.”
민우는 다시 매대를 바라보았다. 벌써 세트가 절반 이상 팔려나갔고, 한성문고 직원이 책을 다시 채워 넣고 있었다.
이유리도 그 모습을 보며 해맑게 웃고 있었다.
“반응이 좋네요. 2쇄는 문제도 아니겠어요.”
“정말 다행입니다. 이 책도 대박이 나야 라온북스도 지음사처럼 커질 텐데. 그쵸?”
“그랬으면 정말 좋겠는데.”
이유리가 입을 가리며 부끄럽게 웃었다 그때 뭔가를 떠올린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선물백을 민우에게 건넸다.
“깜박 잊고 있었네요. 받으세요. 민우 씨를 위해 준비한 특별한 선물이에요!”
책이었다. 꺼내 보니 <더 위자드> 1부 세트였다. 앞장을 펴본 민우는 이유리가 왜 특별한 선물이라고 말했는지 알았다.
원작자의 서명이 들어가 있었다. 민우의 이름을 거론하며 한국어 번역에 도움을 줘서 고맙다는 메시지가 들어 있었다.
민우가 웃었다. 오늘따라 뜻하지 않은 선물이 많이 들어왔다. 이건 분명 소장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잘 간직할게요.”
“저도 감사드려요. 납기일도 당겨 주시고. 지금까지 많은 분들하고 작업했는데 좋은 원고를 날짜에 잘 맞춰 주시는 분은 처음이에요.”
“좋게 봐 주신 덕이죠.”
그렇게 두 사람은 매대에서 벗어나 근처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이번에는 이유리가 커피를 샀다. 법인카드를 들고 왔단다.
두 사람은 바로 헤어지지 않고 잠시 카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근데 자리에 앉고 나서부터 이상하게 이유리가 긴장했다. 말수도 줄었다. 생소한 모습에 민우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유리 씨? 무슨 일 있어요? 바쁘시면 먼저 가보셔도 되는데.”
“아아뇨. 아무것도.”
이유리는 어색하게 웃으며 커피를 홀짝였다. 그러면서 시선을 자꾸 자신의 가방으로 옮겼다. 뭔가를 고민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