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대박의 조짐 (1)
(117/500)
117. 대박의 조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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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대박의 조짐 (1)
2021.10.29.
선우기획 1층 로비로 내려가니 박민아가 먼저 내려와 기다리고 있었다. 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서로 바쁘다 보니 만날 기회가 없었다.
민우는 살짝 놀랐다.
못 보던 사이에 분위기가 많이 바뀌어 있었다. 화장을 진하게 한 것 같진 않은데, 어딘가 예뻐 보였다.
“뭘 그렇게 뚫어져라 보니?”
“요즘 뭐 좋은 일 있어? 얼굴이 활짝 폈네.”
민아는 무의식적으로 볼을 어루만졌다. 그러더니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직딩한테 좋은 일이 있으면 뭐가 있겠어. 토요일이나 왔으면 좋겠다 그냥.”
“내 입으로 이런 말하기 정말 짜증 나는데 좀 예뻐진 거 같다? 연애라도 해?”
“무슨 개수작이야 또.”
민아는 정색했지만 평소답지 않게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걸 민우가 놓칠 리가 없었다. 수상했다.
“누구야.”
“뭐가.”
“누구냐고.”
“작작 해라. 안 그래도 배고파서 짜증 나니까.”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민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두 남매는 건물 밖으로 나서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눴다.
“근데 크리스마스에 뭘 대단할 걸 하려고 이 바쁜 누님을 불러내고 그러니?”
“대단한 거 하려는 게 아니라 뭘 해야 할지 감이 안 서. 크리스마스에 여친이랑 뭘 해본 적이 있어야지.”
“학문을 한다는 놈이 그렇게 창의력이 부족해서야.”
뭔가 화는 나는데 반박할 수 없는 일침이었다.
아무튼 오늘 민우가 민아를 만난 것은 크리스마스 계획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얼굴을 보자는 것은 허울 좋은 핑계였다.
박민아가 사악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오늘 상담비는 저녁으로 받아 볼까나. 후후후.”
마침 옆쪽에 떡볶이집이 있었다. 민우가 해맑게 웃으며 간판을 가리켰다.
“누나. 오랜만에 떡볶이 어때? 옛날 생각 나고 좋다. 응?”
“떡볶이? 떡볶기이이? 하, 오랜만에 누님을 만났는데 생각한다는 게 고작 떡볶이라니. 요즘 젊은것들은 비전이 없어요. 비전이.”
“댁이랑 나랑 한 살 차이밖에 안 나거든요.”
“앗차. 아침에 가스불을 안 끄고 나온 거 같네. 만나서 반가웠다 동생아. 잘 지내고 또 보자.”
“인덕션 쓰잖아!”
박민아가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누나가 몸을 돌리려 하자 민우가 팔목을 붙들었다. 잡지 않는다면 진짜 갈 사람이다.
“사람 말은 끝까지 들으셔야죠. 까르보나라 떡볶이 말입니다.”
“거기에 고르곤졸라 피자도.”
“알았어.”
언제쯤이면 누나를 이길 수 있을까. 이길 수 있긴 한 걸까. 그런 번뇌에 빠진 민우는 근처에 있는 퓨전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달콤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전체적으로 어두웠는데, 곳곳에 촛불이 켜져 있어 은은한 느낌이 들었다.
저녁 시간이라 창가 쪽 자리는 모두 차 있었고 구석진 자리만 하나 남았다.
자리를 잡자 종업원이 테이블을 세팅했다. 민우는 약속대로 주문했다.
“까르보나라 떡볶이하고 고르곤졸라 피자 주세요.”
“거기에 레몬드레싱 치킨 샐러드도. 오렌지에이드도 주시고요.”
“살쪄.”
민우의 한마디에 종업원이 웃음을 터트렸다. 사이가 좋아 보인다는 덕담을 듣긴 했지만 결국 주문을 취소하진 못했다.
식전빵을 손으로 뜯으며 민아가 물었다.
“맞다. 너 오늘 번역 계약한다고 하지 않았어? 잘됐니?”
“그냥 그래. 조건이 그렇게 좋진 않았어.”
“되게 유명한 작가 꺼 번역한다고 했잖아. 김영화였지? 돈 많이 줄 거 같았는데 아니었나 보네.”
“번역하는 사람이 챙겨봐야 얼마나 챙기겠어. 대중적으로 유명한 작가는 있어도 그런 번역가는 없잖아. 같은 이치지. 뭐 페이가 중요해서 하는 일은 아니지만.”
민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빵을 입으로 밀어 넣었다.
반면 민우는 턱을 어루만지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계약 이야기를 하다 보니 마음에 걸리는 일 하나가 떠올랐다.
‘고두열 과장님.’
그는 계약하는 내내 간접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때로는 비꼬기도 했다. 민우는 왜 그런지 곰곰이 생각했다.
‘역시 내가 미덥지 못하기 때문이겠지?’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보니 답이 금방 나왔다. 스물여덟이라는 어린 나이. 그리고 국문학 전공. 마지막으로 영국 영어로 번역한 경험이 전무하다는 것.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냥 인정할 건 인정하고 서로 좋게 넘어갈 수는 없는 건가?’
직장 경험이 부족한 민우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모두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이따금 생겼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누나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행동할까?’
민우가 고개를 들어 민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식전빵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누나는 대입을 포기하고 바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직장 생활만 9년 가까이 했다. 아마 별의별 경우를 다 겪었을 것이다.
민우는 한번 물어보기로 했다.
“누나. 회사 다니다 보면 서로 안 맞는 사람들도 많지?”
“겁나 많지. 네이비에 직장동료로 검색해봐. 별의별 썰이 다 나온다. 직장인들의 퇴사 이유 중 가장 큰 부분이기도 하고. 같은 급끼리 꼬이면 그냥 머리털 좀 빠지는 걸로 넘어가는데 상사랑 꼬이면 작살이지.”
전 직장의 추억이 떠올랐는지 민아가 몸을 떨었다. 그러더니 민우를 바라보았다.
“근데 그건 왜 물어? 상아탑에 앉아 고고하게 학문을 하는 분께서.”
“이번에 해외번역 담당하는 분하고 좀 안 맞는 거 같아. 라온북스 쪽하고 일할 때는 잘 해주셔서 즐거웠는데 이번엔 좀 걱정이 되네. 시너지가 별로 안 날 거 같고 뭔가 방해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고. 어떻게 잘해볼 방법이 없을까?”
“삐빅. 정상입니다 고갱님!”
장난스레 한마디 던진 민아는 턱을 괴었다. 민우를 바라보는 눈빛이 측은했다.
“버릇을 아직 못 고쳤구나. 하긴, 넌 옛날부터 모든 사람들한테 잘 보이려고 노력했었지. 그거 안 좋은 거야. 특히 사회생활에서는.”
“그게 왜 안 좋아?”
“다른 사람이 널 평가할 때 네 노력은 별로 의미가 없거든. 살다 보면 이유 없이 싫은 사람도 있잖아. 성격이 안 맞는 사람도 있고. 오해를 사는 경우도 있고. 안 그래?”
곰곰이 생각하던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그런 사람들이 몇 명 있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한테 잘 보이려고 하는 시간에 너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한테 더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게 낫다는 거지. 특히 이 누님께.”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지기는.”
말은 그렇게 해도 민우는 깨닫는 바가 있었다. 반박할 여지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누나의 말은 그럴싸하게 들렸다.
민아가 진지하게 말했다. 이쪽이 진짜였다.
“그냥 실력으로 밀어붙여. 어차피 비즈니스 관계잖아. 밖에 나가서 볼 것도 아니고. 번역 작업만 끝나면 별로 볼일 없을 거 같은데.”
“역시 그게 낫겠지?”
민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회에서는 굳이 착한 거 내세울 거 없어. 순식간에 호구 된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실력을 발휘해 봐. 머리가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언젠간 인정을 해주지 않을까? 너 민식 선배한테 그렇게 인정받았다며.”
“그렇지.”
고개를 끄덕거리던 민우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잠깐. 누나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나 민식이 형 일에 대해서는 얘기한 적 없는 거 같은데.”
“어?”
민아가 어깨를 움찔했다. 그러더니 아무 일도 아니라며 손사래 쳤다.
“하하하. 얘가 참, 기억을 못 하네. 예전에 말했었어. 너 입원했을 때.”
“그래?”
민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이야기한 기억이 없었다. 특히나 학교에서 있었던 안 좋은 일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뭔가 있는 거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민우가 식전빵을 집으려 손을 뻗었다. 그런데 네 조각이나 있던 접시가 텅 비어 있었다. 어느새 민아의 입으로 다 들어간 모양이었다.
짜증이 났다.
“메뉴 세 개나 시켜놓고선 빵으로 배를 채우면 어쩌자는 거야.”
“빵이 들어가는 배랑 음식이 들어가는 배는 따로 있단다.”
“디저트 들어가는 배도 따로 있고?”
“잘 아네. 역시 사람은 배워야 한다니까.”
민우는 입맛을 다시며 물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곧 요리가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민아는 왕성한 식욕으로 자신이 한 말을 입증했다. 음식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해치웠다. 그런데도 가냘픈 몸매를 유지하는 걸 보면 신기하다.
“잘 먹었다 동생아!”
계산하는 민우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밖으로 나왔다. 곧 민우가 따라나섰다.
“카페 갈까?”
“집에 갈래. 피곤하다. 내일 출근해야지.”
“크리스마스 얘기는 아직 꺼내지도 않았는데요.”
씨익 웃은 민아가 핸드백을 열었다. 한참을 뒤적이더니 뭔가를 꺼냈다. 화려한 장식이 들어간 봉투였다. 민아는 그 봉투를 흔들었다.
“뭐야? 그건.”
“호텔 파티룸 숙박권. 최대 여섯 명까지 1박 할 수 있어. 12월 24일부터 25일까지고. 흐음, 별로 흥미가 없는 표정인데. 어느 호텔인지 궁금하지도 않아?”
“보나 마나 허름한 모텔 같은 호텔이겠지.”
“골든팰리스.”
민우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민아의 손이 조금 더 빨랐다. 간발의 차로 민우의 손이 숙박권에서 빗겨나갔다.
“호호호. 동생아. 은인에겐 정중히 감사의 뜻을 표해야지. 그러면 쓰니? 자 따라 해봐. 누나를 평생 하늘처럼 모시겠습니다.”
“누나를 평생 하늘처럼 모시겠습니다.”
“한 번 더.”
“누나를 평생 하늘처럼 모시겠습니다.”
“수식어 넣고.”
“천사같이 아름다운 누나를 평생 하늘처럼 모시겠습니다.”
“우쭈쭈쭈. 착하다. 우리 동생.”
민아가 봉투를 건넸다. 잽싸게 낚아챈 민우가 봉투 안쪽을 확인했다. 골든팰리스 호텔의 로고가 선명한 진짜 숙박권이 나왔다.
골든팰리스 호텔은 예전에 한번 가본 적이 있었다. 랑느 박사를 모시러.
그때 한번 숙박을 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찾아올 줄은 몰랐다.
“근데 대체 이건 어디서 났어? 한두 푼 하는 게 아니잖아. 크리스마스이브면 완전 피크인데.”
“비밀.”
때마침 민아의 집으로 향하는 버스가 왔다. 싱긋 웃은 민아가 손을 흔들고 버스에 올라탔다. 오늘따라 비밀이 많은 누나였다.
* * *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적어도 민우에게는 그랬다. 너무 빨리 지나가 부족함을 느낄 정도였다.
11월 말, 민우는 한창 논문의 본론 부분을 쓰고 있었다. 큰 그림을 선명하게 그려두었기 때문에 막힘이 없이 술술 써나갔다.
‘논문 완성에는 문제가 없는데, 토론 준비가 좀 힘들겠네.’
잠시 키보드에서 손을 뗀 민우는 한옆에 쌓아둔 참고문헌을 바라보았다. 족히 1미터는 쌓여 있었다. 팀 307호 멤버들이 고생해 주었다.
‘이걸 다 보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해. 선별해서 보는 수밖에 없겠어.’
잠시 한숨을 돌리며 민우는 캔커피를 쥐었다. 그런데 안이 텅 비어 있었다. 카페인을 보충해야 했기에 민우는 열람실에서 내려와 자판기 앞에 섰다.
그때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액정을 확인한 민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기다리고 있던 전화였다.
“유리 씨. 안 그래도 언제 연락 주시나 기다리고 있었네요.”
― 죄송해요. 일정이 조금 미뤄지는 바람에 이제야 연락을 드렸네요. 많이 기다리셨죠?
“아닙니다. 다들 고생하신 거 뻔히 아는데요 뭐. 거의 일주일 동안 집에 못 들어가셨다면서요.”
― 야근을 안 하면 이상한 기분이 들 정도였어요. 그래도 이렇게 끝이 나니 정말 보람찬 거 있죠! 아무튼 민우 씨. 내일 <더 위자드> 1부 전권이 판매됩니다.
“이번에도 한성문고 추천 매대에 깔리나요?”
― 물론이죠. 현장에서 이벤트도 할 거예요. 마케팅팀에서 정말 신경을 많이 썼어요. 한성문고 분들도 많이 도와주셨구요. SNS 반응도 아주 좋아요.
확실히 그랬다. 미국에서는 이미 <반지의 대왕>을 잇는 명작이라는 평가가 자자했다. 그 입김이 국내에 들어와 있었다.
민우는 문득 기대됐다.
<사각 살인> 번역으로 주목을 끌었다. <더 위자드>까지 성공한다면 이쪽으로 입지를 더욱 쉽게 굳힐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도 인세 계약을 했으니까. 일이 잘 풀리면 통장 잔고가 확 늘어나겠네.’
민우는 행복한 상상을 하며 말했다.
“내일 한성문고에 오실 거죠?”
― 물론이죠.
“저번엔 우연히 만났지만 내일은 약속 잡고 만나요. 그때처럼 커피 한잔 살게요.
― 아, 좋아요!
민우는 오후 세 시에 한성문고 매대 앞에서 보기로 약속을 잡고 전화를 끊었다.
왠지 느낌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