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뜻밖의 변수들 (2)
(116/500)
116. 뜻밖의 변수들 (2)
(116/500)
116. 뜻밖의 변수들 (2)
2021.10.28.
서지훈 교수가 물었다.
“집에 가는 길이냐?”
“아뇨. 오늘 누나랑 저녁 약속이 있어서 그쪽으로 가려고요.”
“일단 타.”
그제야 민우가 엘리베이터에 탔다. 서지훈 교수가 닫힘 버튼을 눌렀다. 문이 닫히고 나니 분위기가 급격히 어색해졌다.
왠지 껴서는 안 되는 자리에 낀 듯한 분위기.
“근데 선생님. 요즘 서울에 자주 오시네요? 며칠 전에도 명인대에 오셨잖아요.”
“일이 좀 있어서.”
이번에도 서지훈 교수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민우는 무슨 일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송승현 실장이 있어서 그만두었다.
내려가던 엘리베이터가 10층에서 멈췄다. 직원 두 명이 탔고, 문이 닫혔다.
서지훈 교수가 조용히 물었다.
“논문은 잘돼 가냐? 이상하게 도와달라는 말을 안 해서 불안하단 말이지.”
“민 선생님이 도와주고 계세요. 서론 끝내고 본론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서지훈 교수가 흥미로운 미소를 지었다. 옆에 있던 송승현 실장은 다소 의외라는 표정이다. 내막을 모르고 있는 민우는 뭔가 싶었다.
서지훈 교수가 말했다.
“12월 중순에 발표라고 했지? 시간 빠듯하네. 열심히 마무리 잘해라.”
“네.”
딩동―
어느새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밖으로 나왔다. 민우와 서지훈 교수, 송승현 실장은 건물 밖까지 함께 걸었다.
민우가 물었다.
“같이 식사하러 가시는 거예요?”
“아마도?”
“아마도는 뭐예요?”
까칠하게 한마디 던진 송승현 실장이 입을 꾹 다물며 모른 척했다. 옆에 민우가 있다는 것을 잠시 잊었던 것이다.
왠지 새로운 모습이었다. 사이가 좋아 보였다. 민우는 웃으며 꾸벅 인사했다.
“그럼 식사 맛있게 하시고요.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잘 가라.”
마침 저 멀리서 선우기획으로 가는 버스가 오고 있었다. 민우는 서둘러 정류장으로 뛰어가 버스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두 사람은 방향을 바꿔 근처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입구에서 송승현이 머뭇거렸다.
“선배. 파스타 싫어했잖아요?”
“늙으니 입맛이 바뀌었어. 꾸덕꾸덕한 크림 파스타가 요즘은 얼마나 맛있던지.”
너무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었다. 피식 웃은 송승현 실장이 그 뒤를 따라갔다.
서지훈 교수가 종업원과 이야기를 나누더니 자리로 안내를 받았다.
때마침 창가에 좋은 자리가 있었다. 아니, 때마침이 아니었다. 종업원이 예약석 패널을 치웠다.
“예약해 뒀어요?”
“이 자리가 좋을 거 같아서. 밖도 훤히 보이고.”
“약속 있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그럼 민우랑 오면 되지.”
“아까 못 들었어요? 민우 씨도 약속 있다고 갔잖아요.”
머리를 한번 쓸어 넘긴 서지훈 교수가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아, 거참. 저녁 한번 같이 먹자는데 왜 그렇게 말이 많아? 그러면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갈 줄도 알아야지. 그렇게 꽉 막혀서 좋은 책이 나오겠어? 엉? 한국 출판계가 불황인 이유가 여기에 있었구만.”
서지훈 교수가 독설을 날렸다. 송승현 실장은 얼굴이 붉어졌지만, 화를 내진 않았다. 옛날에도 가끔 이랬으니까.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남규 차장한테 스케줄 미리 물어본 거예요?”
“하하하하! 진짜 우리 여왕님 뒤끝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그래. 물어봤다. 이제 속이 좀 후련해?”
“별로.”
곧 종업원이 다가왔다. 서지훈 교수는 메뉴판을 열지도 않고 술술 메뉴를 읊었다. 하나같이 송승현 실장이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그 모습에 송승현 실장은 가슴이 저릿했다.
한때 행복했던 추억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득히 먼 옛날, 풋풋했던 그때의 감정들이 마음의 틈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송승현 실장은 손을 뻗어 그 틈을 틀어막았다.
“뭔가 사고 친 거죠?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서울에 자주 올 리는 없고.”
“좀 좋은 쪽으로 생각해 줄 수는 없는 거야?”
서지훈 교수는 웃으며 와인을 잔에 따르기 시작했다.
곧 그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꺼냈다. 하지만 내용은 제법 충격적이었다.
“명인대로 옮기기로 했어. 내년에.”
“……뭐라고요?”
송승현 실장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너무나도 의외의 말이라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렇게 사양하던 명인대행이었는데.
“아니, 잠깐만. 그게 정말이에요? 나 놀리는 거 아니죠?”
“뭐 좋을 일 있다고 놀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서지훈 교수는 팔짱을 끼고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서울에 왔다 갔다 한 거, 그거 때문이었어. 지도교수님도 뵙고 인문대학장님도 만나고 왔지. 그러다 보니 이야기가 꽤 구체적으로 나왔어.”
서지훈 교수는 송현우 교수를 지도교수라고 에둘러 표현했다. 송승현 실장이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그가 명인대로 옮기는 것에 불만을 품은 게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결국 그렇게 할 거면서 왜 고집을 부렸어요? 처음부터 명인대에 자리를 잡았으면 더 좋았잖아요.”
“처음부터라…….”
자신의 잔까지 채우고 와인병을 내려놓은 서지훈 교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꺼낸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
머리를 아무리 굴려 봐도 결론은 딱 하나뿐이었다.
“뭐, 그때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민 교수 때문에?”
정답은 ‘너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서지훈 교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꺼낼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헤어진 것도, 만나는 것도 아닌 애매한 사이.
정리해야 하지만 선뜻 말을 꺼내기가 쉽지가 않은 그런 사이.
“이제 와서 누구를 탓하겠어. 그냥 젊음의 치기라고 해두자고.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나도 지나친 면이 있었어. 학회에서 민 형한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싶기도 해.”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 거예요?”
“나도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보지. 대학에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잖아. 선생의 모습보다 교수의 모습에 더 가까워지는.”
“선배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 되지는 않을걸요.”
“죽었다 깨어나도?”
서지훈 교수가 피식 웃었다.
“민 형이 그렇게 될 줄 누가 알았나? 너 매번 입버릇처럼 민 형한테 말했잖아. 민 선배는 좋은 선생이 될 거라고. 그래서 결과는?”
사실이었다. 송승현 실장은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피식 웃은 서지훈 교수가 잔을 들었다. 송승현 실장도 잔을 들었고, 두 사람이 가볍게 건배를 했다.
“오늘 민 형 만나고 왔는데 뜻밖의 얘길 들었어. 우리가 옛날에 스터디 했던 노트 민우한테 줬다더라. 실존주의 공부한 거 말이야. 기억나?”
“들었어요.”
“누구한테?”
“누구겠어요. 민우 씨한테 직접 들었지.”
서지훈 교수는 민영환 교수와 나눴던 이야기를 되짚어 보았다. 특별한 이야기는 없었지만, 분위기가 예전과는 사뭇 달랐다.
그는 뭔가를 후회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반성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민 형도 뭔가 깨닫는 바가 있었던 모양이었어. 사람이 쉽게 바뀌는 건 아니지. 하지만 반대로 바뀔 여지가 없는 것도 아니지.”
“그런다고 지난 과오가 사라지는 건 아니죠.”
“물론. 용서하란 말이 아니다. 그럴 필요도 없고. 민 형도 용서를 바라지는 않을 거야. 적어도 양심이 남아 있다면 그러지 못하겠지. 그러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까.”
평소라면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을 와인잔이었지만, 송승현 실장은 세 모금이나 마셨다. 민 교수 이야기가 나오자 술이 당겼던 것이다.
송승현 실장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아니, 그래야 했다.
“그런데 선배가 명인대로 오면 지금 지도하고 있는 제자들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원망이 하늘을 찌르겠네. 분명 선배 때문에 대학원 온 친구들 많을 것 같은데 말예요.”
“모두가 공부에 뜻이 있어서 온 건 아니야. 공부에 뜻이 있는 애들은 따로 명인대로 불러야지. 그리고 상아대 대학원엔 외부지도교수제도가 있으니 자대에 남기를 원하면 졸업 때까지 내가 봐줄 수 있어.”
“그건 그렇다 치고, 민우 씨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지도교수를 바꿀 건가요?”
“이미 지도교수 제청 끝났잖아.”
“석사 말고 박사 올라갈 때요.”
아직 거취에 대한 이야기는 민우에게 하지 않았다. 말하게 되면 적잖게 놀랄 것이다.
이미 민우는 지도교수 문제로 비교문학과로 전공을 바꿀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만약 서지훈 교수가 명인대로 옮기게 된다면, 민 교수를 떠날 명분이 사라지기 때문에 기존의 계획이 다시 바뀔 수 있다.
“고민 중이야.”
일단 서지훈 교수는 12월 학회가 끝난 다음 민우에게 이야기하기로 했다.
“민우한테 이야기는 하지 마. 소문이 나서 귀에 들어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지금 열심히 공부하는 애 마음 심란하게 하면 안 되니까.”
“그게 왜 심란한 일이에요? 잘된 일이지. 박사 들어갈 때 지도교수를 선배로 선택하면 완벽한 스토리잖아요.”
“글쎄.”
말을 끊은 서지훈 교수는 잔을 들고 잠시 창밖을 응시했다. 빌딩 숲에서 찬란히 뿜어져 나오는 주홍빛 불빛이 황홀했다.
서지훈 교수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송승현 실장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완벽한 스토리가 있던가? 모든 건 가봐야 아는 일이지.”
“그게 무슨 소리예요?”
“슬슬 민우도 느끼고 있을 거야. 내 그림자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고. 못 본 사이에 실력이 너무 늘었어. 최근 페이퍼를 못 봐서 모르겠는데, 아마 석사급은 넘어섰을 거야.”
“설마요.”
부정하면서도 내심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출간한 <신화와 인간 : 소설의 신화적 상상력>은 그녀도 끝까지 읽었다.
민식이 옆에서 많이 도와줬겠지만, 그걸 고려하고서라도 잘 썼다고 평가했다.
“괜히 하는 말 아냐. 나도 그랬거든. 하루빨리 지도교수님의 그림자에서 빠져나와 홀로 서고 싶었지.”
잠시 말을 끊은 서지훈 교수가 잔을 들고 송승현 실장을 겨냥했다.
“네가 전에 전화로 그랬잖아. 민우한테 나와 닮은 부분이 있다고. 나랑 닮았다면 비슷한 선택을 하지 않을까?”
송승현 실장은 애꿎은 잔만 흔들며 침묵을 지켰다.
서지훈 교수가 손을 뻗었다. 곧 청아한 소리가 나며 잔이 부딪쳤다.
주문한 요리가 나오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 * *
선우기획에 도착한 민우는 우선 이사실로 향했다. 책을 먼저 전하고 밖에 나가서 누나와 저녁을 먹기로 했다.
올라가면서 마지막으로 핸드폰을 확인했다. 톡 어플을 실행시키고 연주의 대화방을 터치했다.
보낸 메시지 옆에 있는 숫자 1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역시 외국에 나가 있는 건가? 어쩔 수 없지. 이사실 직원한테 맡겨야겠다.’
민우가 문을 열고 이사실 안으로 들어갔다. 데스크에 앉아 있던 여직원이 반갑게 웃으며 일어섰다.
“오랜만에 뵙네요. 박민우 님.”
“안녕하세요.”
“이사님은 지금 해외 출장 중이셔서 자리에 안 계십니다. 혹시 약속을 하고 오신 건지요?”
“아닙니다. 전해줄 책이 있는데, 대신 좀 받아 주시겠어요?”
“물론이죠.”
민우가 가방에서 책을 꺼내 여직원에게 건넸다. 여직원은 각대 봉투에 책을 담고 겉면에 민우의 이름과 날짜를 적었다. 일 처리가 확실해 믿음직했다.
“그런데 이사님은 어디로 출장을 가신 거죠?”
“미국으로 가셨습니다.”
“언제쯤 돌아오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그건 저도 잘…….”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서가 모시는 분의 스케줄을 모른다는 게 정상인가? 하지만 나름의 사정이 있다고 생각하고 묵례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고생하세요.”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민우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그와 동시에 옆쪽 엘리베이터가 열리며 유진태 비서실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간발의 차이였다. 그가 다가와 여직원에게 물었다.
“별일 없었나?”
“방금 박민우 님이 왔다 가셨어요.”
“왜?”
“정연주 이사님께 책을 맡기셨어요.”
“줘봐.”
여직원이 책을 넣은 봉투를 유진태에게 건넸다. 내용을 확인한 유진태가 잠시 고민하더니, 결국 품으로 챙겼다.
“내가 직접 전해드리지. 수고해.”
“저, 비서실장님.”
걸어가던 유진태가 몸을 돌렸다. 여직원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이사님은 좀 어떠세요?”
유진태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조심하라는 의미에서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