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5. 뜻밖의 변수들 (1) (115/500)


115. 뜻밖의 변수들 (1)
2021.10.25.


“예, 과장님. 안녕하세요.”

전화를 건 사람은 인문사회연구소 고두열 과장이었다. 이름이 액정에 뜨는 순간, 오늘이 번역 평가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과연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민우는 통화에 집중했다.

― 안녕하십니까. 14층에 안 계신 것 같아서 핸드폰으로 전화 드렸습니다. 제가 방해한 건 아니겠죠?

“괜찮습니다. 지금은 학교에 와 있습니다. 번역 평가는 모두 끝났나요?”

잠시 침묵이 돌았다. 일이 잘못됐나? 아니,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안경의 힘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니까.

― 결과부터 말씀드리면 민우 씨와 작업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아, 다행이네요.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 번역 관련 계약을 해야 하는데요. 혹시 오늘 출근하십니까?

“근처에 볼일이 있으니 일단 회사로 가겠습니다. 도착하는 대로 출판기획실로 올라가겠습니다.”

―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별로 호의적인 태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민우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태엽시계>를 번역하게 됐다. 기쁠 수밖에 없었다.

‘첫 단추를 끼운 셈인가?’

첫 단추치고는 꽤 크고 단단했다. 지음사 정도의 영업력을 갖춘 곳이라면 폴라베어 북스와의 계약이 성사될 가능성이 컸다.

민우는 수빈에게 먼저 지음사로 가겠다고 연락을 남기고 학교를 나섰다.

버스에 오른 민우는 연주에게 보낸 톡을 확인했다. 숫자 1이 사라지지 않았다. 아직 읽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전화를 해볼까?’

민우는 엄지손가락으로 연락처를 뒤적이다 그만두었다. 출장에서 돌아오지 않았을 수도 있고, 회의 중일 수도 있었으니까.

곧 민우는 인문관을 나섰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강남역에서 내려 지음사 건물로 들어갔다.

인문사회팀으로 올라온 민우는 공기가 살짝 달라졌음을 느꼈다. 한곳에 모여 웅성거리던 팀원들이 일제히 자신을 돌아보았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아무래도 호랑이는 자신을 일컫는 말인 것 같았다. 민우가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윤정민 팀장은 여전히 한쪽에서 졸고 있었다.

“박 쌤, 이번에 <태엽시계> 번역하기로 결정됐다면서요?”

“옙. 그렇게 됐습니다.”

“대박! 한영번역도 할 줄 알았어요? 예전에 <사각 살인> 때는 그냥 취미로 하는 줄 알았는데. 완전 능력자였네!”

정은아 대리가 유난을 떨었다. 다른 팀원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려 김영화 소설의 영문 번역이다. 게다가 폴라베어 북스와 계약도 걸려 있었다. 민우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민우는 겸손을 잃지 않았다. 온전히 자신의 실력으로 번역을 한 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시간문제일 뿐이야. 한영번역도 영한번역 때처럼 열심히 하다 보면 늘겠지.’

민우는 영한번역 때의 경험을 살려 한영번역을 연마했다.

먼저 안경을 쓰지 않고 초고를 번역한다. 그리고 안경을 써서 완성본을 만든다. 마지막으로 두 판본을 비교한다.

한영번역 때도 그 차이점이 분명히 드러났다. 그러다 보니 어디가 부족한지 확실히 보였고, 그 부분을 보완하는 방향으로 공부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번역 실력이 늘었다.

한마디로 차이점을 공부한다는 것이 민우의 전략인 것이다.

‘언제까지 안경에 의지할 수는 없지. 내일 당장 떨어뜨려 깨질 수도 있는 노릇이고. 하루빨리 실력을 키워야 해.’

물론 중요한 순간에는 안경을 쓸 생각이었다. 이번처럼 좋은 기회가 온다면 유감없이 안경의 능력을 발휘할 것이다.

상념을 치우고 민우가 물었다.

“근데 소문이 벌써 다 났어요? 저 연락 받은 지 한 시간도 안 됐는데.”

“건수가 큰 거다 보니까요. 해외 진출 사업은 우리뿐만 아니라 모든 출판사에서 사활을 걸고 있는 부분이잖아요.”

“그렇긴 하죠.”

그 말을 들으니 얼마 전 이유리와 함께 한 술자리에서 현기혁 팀장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라온북스도 최근 해외 진출 사업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국내 독서 인구는 꾸준히 감소하고 있고, 시장을 개척할 여지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출판업계는 정부 지원을 받아 전자책과 앱북 등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지만 영 신통치 않은 상황.

“게다가 요즘 회사에서 박 쌤 주가가 오르고 있어요. 저번에는 최무진 전무님이 박 쌤 이야기를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아, 미리 주식 잔뜩 사 놓을 걸 그랬다니까.”

“지금도 충분히 지분을 많이 가지고 계신 거 같은데요.”

“어머, 그래요? 그거 기분 좋은 소리네.”

농담은 거기까지였다. 민우는 궁금했다. 최무진 전무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그런데 전무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대요?”

“최근에 박 쌤이 여러 일을 해냈잖아요. 오픈 라이브러리 프로젝트가 다시 살아난 것도 민우 쌤 덕이고, 출판기념회도 그렇고 인문학 강의도 그렇고. 여러모로 인상 깊었죠.”

왠지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마치 인사팀 직원이 된 것처럼 정은아 대리가 민우의 업적을 나열했다.

“아무튼 지음사에 아주 잘 어울리는 인재가 아니냐는 말씀을 하셨다지 뭐예요. 사람 욕심 있는 분이라 곧 연락이 갈지도 몰라요.”

“그냥 소문이 좀 과장되게 흘러나온 것 같은데요.”

민우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장철호 주임이 끼어들었다.

“과장은 아니죠. 지금 박 선생님 정도라면 지음사 공채는 프리패스일 것 같습니다만.”

“전 직장생활은 잘 안 맞습니다. 그냥 공부나 열심히 할래요.”

“생각 잘 해봐요. 좋은 조건으로 제안을 받으면 혹할지 누가 알아.”

민우는 팀원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연구실로 돌아왔다. 일단 짐을 정리한 다음 바로 15층 출판기획실로 올라갔다.

‘최 전무님이 나를 주목하고 계시다고?’

언젠가 그런 날이 올 거라는 예상은 했다. 공적이 쌓이다 보면 높은 곳까지 닿는 법이니까.

하지만 민우에게는 관심이 없는 일이었다.

지음사는 국내 최고의 출판그룹이다. 국문과 출신이라면 누구나 입사하고 싶은 그런 곳이지만, 민우의 목표는 더 높은 곳에 있었다.

“어서 오세요. 민우 씨.”

출판기획실 앞쪽을 지키고 있던 여직원이 알은척을 했다. 민우가 이름을 한 번씩 떨칠수록 그녀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예전엔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보지도 못했는데, 요즘은 먼저 인사를 건네곤 했다.

“고두열 과장님 만나러 오셨죠? 자리에 계시니 들어가 보세요.”

“감사합니다.”

민우는 형식적으로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고두열 과장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과장님. 박민우입니다.”

민우는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고두열 과장을 직접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주로 전화와 메일로 커뮤니케이션을 해왔다.

‘인상이 생각보다 좋지는 않네.’

과묵해 보였고, 어딘가 불만이 있는 것 같았다. 한때 일을 같이한 전남규 차장과는 정반대의 느낌이었다.

“반갑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고두열 과장이 계약서를 준비하고 앞장을 섰다. 민우는 그를 따라 소회의실로 들어갔다. 곧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자리를 잡았다.

“상당히 뜻밖의 결과였습니다.”

고두열 과장이 의미심장하게 한마디 던졌다. 민우는 웃으며 물었다.

“제가 신인이라서요?”

“그렇습니다.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꽤 유명한 분의 번역본을 받아 왔었는데 자문위원들이 모두 민우 씨의 번역본을 선택했으니까요. 꽤 충격적인 일이죠.”

“그럴 수도 있겠네요.”

민우는 고두열 과장의 태도가 왜 호의적이지 않은지 알 것 같았다. ‘충격적인 일’이라는 표현에 그 단서가 있었다.

“그럼 제 실력에 의문을 품고 계시겠네요.”

“그런 건 아닙니다.”

“솔직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전 신인이니까요. 걱정되시는 걸 말씀해 주시는 것도 저에게는 큰 도움이 됩니다. 배워야 하는 입장이니까요.”

여유로운 민우의 태도에 고두열 과장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배워야 하는 입장이라고 하긴 했지만, 표정이 신인답지 않았다. 실력에 자신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고두열 과장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다. 경력은 말할 것도 없고, 지음사에서 프로젝트를 숱하게 성공시켜 온 사람이었다.

그가 두툼한 입술로 미소를 지었다.

“걱정은 불필요한 감정입니다. 비즈니스 아닙니까? 민우 씨의 번역이 본인은 물론 우리 회사에도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지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참고로 감수를 맡은 현지인들은 문학적 감수성이 매우 뛰어난 분들입니다. 앞으로의 작업에서 피드백이 많을 수 있으니 그 점은 미리 헤아려 주시길.”

고두열 과장이 은근히 겁을 줬지만, 민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두열 과장은 그런 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제 김태현 번역가와의 통화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호통을 들었다. 고두열 과장으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자신 있게 그를 설득했으니까. 결과가 이러니 어쩔 수 없었다.

계약서를 쥔 그의 손끝이 잠깐 떨렸다.

“이건 계약서입니다. 검토해 보시죠.”

민우는 계약서를 받아들고 정독을 시작했다. 제일 먼저 확인한 부분은 번역본 납기일이었다.

‘내년 1월 15일. 이 정도면 충분해.’

송승현 실장에게 학회가 끝난 이후 보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한 달이라는 시간을 준 것이다.

그 사이 고두열 과장이 엄중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건 1단계 계약입니다. 쉽게 말해 번역 작업 자체에 대한 계약이지요. 번역비는 페이지수로 계산하고 단가는 계약서에 적혀 있습니다.”

민우가 단가가 적힌 부분을 확인했다. 영한번역보다는 높은 수준이었지만, 평범했다.

민우가 물었다.

“2단계 계약도 있습니까? 계약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감을 잘 잡지 못하겠는데요.”

“뭐 경험이 없으시니 그러시겠지요. 이해합니다.”

불쾌했다. 비꼬는 듯한 느낌. 하지만 민우는 살짝 웃는 걸로 넘어갔다. 싸우는 게 아니라 그의 말대로 비즈니스라고 생각했다.

“샘플을 보내긴 하겠지만, 간혹 번역본 전체를 원하는 출판사도 있습니다. 폴라베어 북스도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요. 그래서 완성본을 만드는 작업을 1단계로 상정하고 계약을 체결하는 겁니다. 폴라베어 북스가 아닌 다른 출판사와 컨택을 할 경우도 대비를 해야 해서 말입니다.”

그제야 이해가 갔다. 민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폴라베어 북스와 계약이 체결된 이후에 해외 출판이 확정되면 다시 계약을 하는 거겠네요? 그게 2단계고.”

“맞습니다.”

“희한하네요. 그런 방식은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대부분은 매절 계약으로 끝내지만 우리 회사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회장님이 제일 싫어하는 게 불공정 계약이라서 말입니다. 특히 해외 수출 건은 더 신경을 쓰죠.”

해외에서 반응이 좋은 경우는 흔하지 않겠지만, 혹시나 폭발적인 반응이 나왔을 때 번역조건에 대한 말이 나온다면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을 것이다. 그 부분을 염두에 둔 것 같았다.

민우는 신중히 계약서를 검토했다.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하나도 없었다.

“특별한 내용은 없는 거 같네요. 계약 진행하겠습니다.”

“그러시죠.”

민우가 도장을 꺼내 계약서에 날인했다. 그리고 한 부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민우는 또 연락을 드리겠다고 말하고 자리를 떴다.

‘생각보다 쉽지 않은 작업이 되겠어.’

고두열 과장의 마지막 표정이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 * *

인문사회연구실로 돌아온 민우는 민영환 교수의 노트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정리가 잘되어 있어 빠르게 지식을 습득했다.

무엇보다도 개념을 공부하는 방법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됐다.

서지훈, 송승현 등 명망 있는 선배들이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나눴는지 기록되어 있어 마치 수업을 듣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 페이스라면 내일이면 다 읽을 수 있겠다.’

민우는 내일 다 읽고 바로 작품해석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게 본문의 주축이 될 것이다.

‘그다음 랑느 박사님이 보내 준 논문을 소스처럼 살짝 끼얹어야지. 그럼 확실히 완성도가 올라갈 거야. 풍미가 가득한 요리처럼.’

민우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마음만은 5성급 호텔의 셰프가 된 것 같았다.

시간이 조금 촉박하긴 했지만 이미지가 선명하게 그려지다 보니 오히려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한마디로 논문 작업은 순항 중.

민우는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5시 반. 슬슬 선우기획으로 가야 할 시간이다.

가방을 챙긴 민우는 밖으로 나갔다. 14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문이 열리고 나서 깜짝 놀랐다.

“선생님?”

엘리베이터 안에는 서지훈 교수와 송승현 실장이 있었다. 놀란 것은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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