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두 영국인의 선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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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두 영국인의 선택 (2)
2021.10.22.
그것은 민우가 번역한 원고였다.
고두열 과장은 물론, 김윤식 사원은 적잖게 충격을 받았다.
당연히 김태현의 번역물이 선택될 줄 알았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민우가 번역한 샘플에 대한 칭찬이 대단했다.
“한마디로 이 번역가는 영국 영어에 대한 이해가 깊습니다. 관용어구나 어휘를 보면 약간 차이가 있는데, 철저히 우리의 문화를 이해하고 번역한 느낌이 듭니다.”
앨런 교수가 미소를 지으며 평했다. 못 알아들은 클로에가 무슨 이야기를 한 건지 물었고, 앨런 교수는 영어로 다시 풀어주었다.
고개를 끄덕인 클로에가 덧붙였다. 영어로.
「감성이 잘 녹아났어요. 이건 번역이 아니라 영국인이 쓴 한국인에 대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훌륭하네요. 한국에 이런 번역가가 있었나요? 꼭 영국에서도 출판이 되어야 한다고 보네요.」
앨런 교수가 클로에의 말을 통역해 주었고, 김윤식이 그것을 받아 적었다. 이들이 하는 모든 평가가 보고서에 기록될 것이다.
앨런 교수가 원고를 뒤적이며 물었다.
“끝까지 더 읽고 싶은데 아쉽습니다. 샘플은 이게 끝입니까?”
“예에. 그렇습니다.”
“누가 번역을 한 것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한국에서 좀 이름 있는 분들이라면 한효주 씨나 김태현 씨 정도가 있겠는데요.”
“아, 그건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 대외비라서요.”
“그렇군요.”
한편 클로에는 연신 감탄사를 내고 있었다.
「몇 번 한국의 번역물을 본 일이 있는데, 아, 이런 경험은 처음이네요. 읽다 보면 나라면 이렇게 썼을 텐데 하는 부분이 수십 개는 나오는데 이 번역본에서는 단 하나도 없었어요. 개인적으로도 대단히 놀라운 경험입니다.」
앨런 스미스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한국인이 멀뚱히 바라보고 있자 그가 친절히 통역을 해 주었다.
김윤식이 클로에의 말을 받아 적었다. 그 사이 고두열 과장이 질문했다.
“번역본에 문제는 없었습니까? 우려할 만한 부분이라든지.”
앨런 교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고, 그 질문을 클로에에게 통역해 주었다. 클로에가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문제가 하나 있다는 뜻이었다.
그녀가 이어 말했다.
「이 번역본이 샘플이라는 게 유일한 문제네요. 완성된 걸 하루빨리 읽고 싶습니다.」
그 한마디로 평가는 모두 끝났다.
양식에 맞게 평가지를 모두 작성한 두 영국인은 지음사를 떠났다. 회의실엔 고두열 과장과 김윤식 두 사람만 남았다.
고두열 과장은 자리에 앉아 그들이 남기고 간 평가서를 읽었다.
“영국인이 쓴 한국인에 대한 소설이라니. 허, 참.”
“완전 극찬 아닙니까? 클로에 씨도 영국에서 꽤 이름 있는 작가잖아요. 그분이 그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 번역을 잘했다는 말인데요.”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고두열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에 페일럿은 영국 내에서 꽤 이름이 알려진 여류 작가였다. 농담 삼아서 그런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두열 과장이 민우의 번역본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과장님.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일은 잘 끝난 거 같은데 왜 한숨을.”
“좋은 번역물이 나온 건 좋은 일인데, 이건 이거대로 큰일이잖아.”
“평가가 좋다면 해피엔딩 아닌가요? 두 분이 모두 극찬을 했지 않습니까. 오히려 의견이 갈렸다면 골치가 아팠을 텐데요.”
고두열 과장이 민우의 번역본을 테이블 위로 던지듯 내려놓았다.
“넌 여전히 생각이 짧아. 김태현 씨에게 이 결과를 어떻게 말씀드릴 생각이냐?”
“아!”
“스물여덟 먹은 새파란 신인의 번역본이 더 좋아서 태현 씨의 번역본으로는 출간이 어렵게 됐습니다라고 말씀드리면 기분이 어떠시겠냐고.”
“윽.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요. 정말 큰일입니다.”
처음 송승현 실장이 제안했을 때 고두열 과장은 자신 있었다. 이미 김태현 번역가와 사전 접촉을 한 상황이었고, 그가 이길 거라고 확신했기에 그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와 버렸다. 전문위원들의 평가였으니 뒤집을 여지도 없었다.
“일단 실장님께 보고를 드려야 하니 준비를 해야겠다. 뒷정리를 부탁한다.”
“알겠습니다.”
고두열 과장이 자리로 돌아와 워드를 열었다. 보고서 양식을 불러왔지만, 머리가 지끈거려 그는 쉽게 키보드를 누르지 못했다.
* * *
고두열 과장이 완성된 보고서를 들고 송승현 실장을 찾았다. 그녀는 기대하고 있었는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았다.
보고서를 읽기도 전에 그녀가 물었다.
“어떻게 됐나요?”
“박민우 씨의 번역에 대한 평가가 더 좋았습니다. 두 위원 모두 박민우 씨의 작업물을 택했습니다.”
“그렇군요.”
송승현 실장은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래도 그녀는 보고서를 열어 꼼꼼히 살폈다. 호평 일색인 것을 보고는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민우는 생각한 것 이상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녀가 보고서를 닫고 책상 한쪽에 내려놓았다.
“수고했어요. 앨런 교수와 클로에 씨에게는 나중에 완성본이 나왔을 때 추가로 감수를 의뢰하도록 하죠. 미리 연락해 놓도록 해요.”
“알겠습니다.”
고두열 과장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송승현 실장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걱정되나요? 김태현 씨에게 어떻게 설명을 할지.”
“솔직히 말씀드리면 좀 걱정입니다. 우리 출판사와도 관계가 있지 않습니까.”
“다시 말해, 김태현 씨와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걸 걱정하시는 거지요?”
“자존심이 강하신 분이니까요. 차기 번역부터는 계약하기가 어려워질 겁니다.”
송승현 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는 눈치였다.
“번역은 전문성이 필요한 분야죠. 굳이 실력이 떨어지는 분과 옛정 때문에 계속 계약을 이어갈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자선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니까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김태현 번역가보다 몸값이 싸고 실력이 좋은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잡아야 하는 게 어느 쪽인지는 이제 명백해지지 않았나요?”
송승현 실장의 일침에 고두열 과장이 움찔했다. 냉정하게 쳐내는구나. 송승현 실장은 누가 우위에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김태현 씨와 거래가 끊기는 일은 없을 겁니다. 우리는 지음사예요. 불만이 있어도 크게 내색은 하지 못하겠지요.”
물론 그건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체면은 꺾이게 될 게 분명했다. 그래도 어쩌랴. 고두열 과장은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영국 평가위원들의 평가 내용은 대외비입니다. 박민우 씨에게도 알려주지 마세요. 바로 연락해서 번역 계약하시고.”
“예, 알겠습니다.”
고두열 과장이 허리 굽혀 인사를 하고 실장실을 나갔다. 그가 나가자 송승현 실장은 평가지를 다시 들고 읽었다.
문득 언젠가 민우가 했던 한마디가 떠올랐다.
― 한국 문학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 싶습니다.
한때 자신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전공자라면 한 번쯤은 품는 포부. 하지만 그것이 허상임을 깨닫는 것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학계는 경직되어 있었고, 정부의 지원은 미미했으며, 자신의 능력은 일천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이 자그마한 평가서는 민우의 그 한마디가 꿈으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를 주었다.
‘흥미롭네요. 어디까지 성장하나 한번 지켜보겠어요.’
송승현 실장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밖이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외투를 걸치고 퇴근 준비를 하는데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깜짝 놀라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노기를 띤 눈이 서서히 풀어졌다. 그곳엔 서지훈 교수가 손을 들며 서 있었다.
“귀신 본 것처럼 그러지 마. 귀신 아니니까.”
“깜짝 놀랐잖아요. 서울엔 웬일이에요? 그렇게 차려입고. 누구 결혼식이라도 있었어요?”
“차라리 결혼식이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어. 완전 가시방석에 앉아 있다가 왔다.”
서지훈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이야기하진 않았다. 그는 민첩했다. 송승현 실장이 질문을 던지기 전에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저녁 전이지? 밥이나 먹자.”
“약속이 있는지 먼저 확인하는 게 예의 아닌가요? 미리 연락해서 물어봐야죠. 가방끈도 긴 분이 왜 그렇게 생각이 짧은지.”
“뭐 안 되면 할 수 없고. 그럼 민우나 불러서 먹어볼까나.”
능청스러운 모습에 송승현 실장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나오면 어떻게 이길 방법이 없다.
“알았어요. 가요. 가.”
송승현 실장은 서지훈 교수의 등을 툭 밀었다.
* * *
“오랜만입니다. 선생님. 잘 지내셨죠?”
민우가 정중히 인사했다. 강철훈 교수는 인자한 미소로 그를 맞았다. 연구실엔 주인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오래된 책 냄새가 좋았다. 못 온 사이에 장서가 더 늘어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자네 소식은 간간이 들었지. 상도 타고 책도 냈다던데. 아주 바쁜 나날을 보냈겠어.”
“선생님 덕에 첫 단추를 잘 끼워서 그런가 봅니다. 저번 학기에 프로젝트를 하면서 정말 많이 배웠거든요. 제대로 인사도 못 드리고 죄송합니다.”
“허허허. 바쁘다는 건 자네가 그만큼 열심히 공부에 매진했다는 말이겠지. 그나저나 이경훈 선생이 자네 이야기를 많이 하던데. 소르본의 랑느 박사와도 교류를 한다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민우는 겸손을 떨며 말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잠시 밀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와중에 비교문학 전공에 대한 이야기도 살짝 나왔다.
민우는 좀 놀랐다. 이경훈 교수가 그쪽으로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역시 빨리 결정하지 않길 잘했다.’
만약 그때 결정을 내렸다면 민영환 교수의 귀에도 들어갔을지도 몰랐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강철훈 교수가 물었다.
“그래서, 전공을 바꾸기로 마음을 굳힌 건가?”
“아뇨. 아직 결정된 건 없습니다. 지도교수님과 상의를 해봐야 하는 부분이라서요. 민감한 문제지 않습니까.”
이미 마음은 굳혔지만 속마음을 드러내진 않았다. 교수들 사이에서 괜히 소문이 돌면 좋을 게 없었다. 석사 논문을 쓰고 나서 말해도 늦지 않다.
아무튼 이번 대화로 민우는 앞으로 더욱 입을 조심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연구논문을 쓰고 강연을 하고 번역을 하다 보면 내 이름이 계속 알려질 거야. 그렇게 되면 뜬소문들이 퍼질 가능성이 있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조심해서 나쁠 것이 없다는 것은 대학원에서도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말이었다.
민우가 다른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강철훈 교수는 그에게 덕담했다.
“국문과 전공자들도 간혹 비교문학으로 전공을 바꾸니 큰 문제는 없을 거야. 오히려 학문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자네의 신념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민 선생도 이해해 줄 걸세. 자네는 외국어에 대한 감각도 훌륭하니 좋은 연구자가 될 게야.”
“말씀이라도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흠, 서론이 길었군.”
잠시 말을 끊은 강철훈 교수는 옆에 쌓아 놓은 책 중 민우의 것을 찾아 꺼냈다.
“자네의 노고가 담긴 책이네. 표지에 이름을 올리진 못했지만 소중한 경험으로 남았으면 해.”
“감사합니다.”
책의 제목은 <서사학개론>으로 번역되었다. 앞면을 펴니 강철훈 교수의 서명이 들어갔는데, 그 밑에 ‘학문적 여정의 큰 빛이 되기를’이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서문을 펼쳐 맨 아래쪽을 확인했다. 강철훈 교수가 직접 서문을 썼는데, 번역 프로젝트에 참여한 학생들의 이름을 하나씩 열거하며 감사의 뜻을 밝혔다.
민우는 그것으로도 만족했다.
새로운 경험을 얻게 해 준 고마운 책이었다. 이 책이 아니었다면 지음사에 들어가지도, 연주라는 사람을 알게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더 욕심을 부린다면 과욕이었다.
“그런데 다른 분들은요?”
“프로젝트에 참여한 학생들을 말하는 거라면 연주 양을 빼고 모두 받아갔네. 참, 연주 양하고는 요즘 연락이 되나? 내 쪽에서 하기는 좀 그래서 자네에게 부탁을 할까 하는데.”
“요즘 많이 바쁜 모양이더라고요. 저도 본 지는 좀 됐습니다.”
보름 전까지만 해도 자주 연락을 주고받았다. 통화는 가끔, 주로 톡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대개 연주가 먼저 연락을 해 왔는데, 요즘은 뜸했다. 민우는 누나에게 간접적으로 물었고 회사가 최근 성장하며 일이 많아졌다는 대답을 들었다.
최근에는 해외 출장 때문에 오래 자리를 비운 상태라고 했다.
“괜찮으시면 제가 전해주겠습니다. 연주가 일하는 회사가 지음사하고 꽤 가깝거든요.”
“그렇게 해주면 고맙겠군.”
민우는 연주의 책을 받아들고 연구실을 나섰다. 때마침 오늘 저녁에 누나를 만나기로 했으니, 퇴근 직전에 선우기획에 가기로 했다.
307호로 돌아온 민우는 연주에게 톡을 보냈다.
그녀가 자리에 없다고 해도 상관은 없었다. 이사실 직원에게 맡기면 그만이니까. 정 안되면 누나를 통해 전달하는 것도 방법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노을이 창문을 두드릴 무렵, 민우는 짐을 챙기고 307호를 나섰다.
우우우웅―
그때 진동이 울렸다.
답장이 왔나 싶었는데 전화였다. 전화를 받으니 굵직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